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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97화 (97/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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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 97화

    35. 이번에야말로(3)

    “아, 아, 아, 아바…… 마마……?”

    라그나르가 황급히 물러났다.

    들고 있던 약병마저 떨어뜨렸다.

    머물 곳을 잃고 흔들리는 눈빛.

    새파랗게 질려 들썩이는 입술.

    제 기능을 잃어버린 목구멍까지.

    “지금 내 귓가에 속삭인 얘기가.”

    황제가 몸뚱이를 완전히 일으켰다.

    뿐인가? 아예 침상에서 일어나 버렸다.

    그린리버 제국 역사상 최장신으로 기록될 황제, 테리 그린리버의 태산과도 같은 육신이 라그나르를 내려다봤다.

    “정녕 라그나르, 너의 진심이더냐?”

    잡티 하나 없이 정제된 분노.

    그 속에 얽힌 통탄스러움.

    황제의 목소리는 그러했다.

    “대답해다오.”

    “…….”

    라그나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무의식적인 뒷걸음질만 쳐댈 뿐.

    하나 그 뒷걸음질도 한계란 존재했다.

    툭!

    등으로부터 전해지는 감촉에 라그나르가 뒤를 돌아봤다.

    “……!”

    그곳에는 사라진 줄만 알았던 눈엣가시.

    마법사 이안 페이지가 손을 뻗고 있었다.

    침소에는 황제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투명화 마법 탓에 보이지가 않았을 뿐.

    “네, 네, 네놈……?”

    다 죽은 줄만 알았던 황제의 쾌차.

    사라졌다고 확신했던 이안의 등장.

    수상함을 느꼈음에도 걸려든 자신.

    라그나르의 머리가 깨질듯 아파왔다.

    “이, 이게……, 이게 무슨…….”

    그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 조금도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상황이, 전세가 너무 급격하게 변해 버렸다.

    “끝이다. 라그나르.”

    “끝…… 이라고?”

    이안이 싸늘한 어조로 읊조렸다.

    황제의 쾌차도, 교단의 전폭적인 지원도.

    신중치 못했던 라그나르의 마지막 판단도.

    모든 배후에는 이안 페이지가 존재했다.

    “그, 그래! 네놈이 마법으로 나를, 나를 조종한……!”

    “마법은 쓴 건 맞아.”

    “역시! 역시 그랬…….”

    “그래서 끝이라는 거다.”

    “뭐……?”

    라그나르가 황제의 침소로 들어섰을 때, 이안은 한 가지 마법을 부렸다. 그리 특별한 마법은 아니었다. 당장의 욕망에 강한 이끌림을 느끼는 정신조작 마법, 조금이라도 건강한 정신 상태를 가졌더라면 쉬이 저항해 낼 수 있는 초급 마법에 불과했다.

    “네 상태를 증명한 꼴이니까.”

    하지만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져 버린 라그나르의 정신으로는 일말 저항조차 할 수 없었다. 바로 그 결과가 눈앞에 펼쳐졌다. 수상함을 느꼈으면서도 결국 저질러 버렸다. 아비의 눈앞에서 독을 탔고, 저주와 같은 말까지 속삭였다.

    “아, 아바마마! 억울하옵니다! 소, 소자, 분명 저놈의 간악한 마법에 당한 것이 틀림없사옵니다. 제가 어찌, 제가 어찌 하나뿐인 아바마마를 해할 수가 있겠사옵니까?”

    “…….”

    황제에게 달려가 무릎을 꿇은 라그나르.

    그가 부들부들 떨며 변명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은 이안 페이지가 꾸민 거다.

    놈의 간악한 마법에 당했을 뿐이다.

    자신은 추호도 잘못한 것이 없다.

    씨알조차 먹히지 않을 변명들.

    “아바마마! 부디 소자의 진심을……!”

    아비의 발까지 부여잡으며 울부짖는 아들, 그런 아들을 착잡한 눈으로 바라보는 황제. 그 부자간의 신파극이 얼마나 지났을까? 극은 결말을 향해 치닫기 시작했다.

    “다 끝났다. 아들아.”

    “아, 아바마마……?”

    라그나르는 인정할 수 없었다. 도대체 무엇이 끝이란 말인가? 화가 솟았다. 신경질이 났다. 끝까지 자신의 손을 잡아주지 않는 아비에게도, 기세등등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저 마법사 나부랭이 놈에게도.

    “……마음에 안 들어.”

    라그나르의 눈매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눈물로 글썽거렸던 눈은 온데간데없었다. 감정의 기복이 가면을 쓰고 벗는 경지에 이르렀다.

    “이래서 그런 거야.”

    “라, 라그나르……?”

    “이래서, 죽이고 싶었다고.”

    감정이 지워진 라그나르의 목소리.

    그간의 모든 혐의를 인정하는 한마디였다.

    “끝까지, 마지막까지 자식 취급도 안 해주는군.”

    그가 창가로 휘청휘청 걸어갔다.

    그리고는 품속에서 수정구를 꺼냈다.

    교주, 에반투스로부터 받은 통신구였다.

    “당신도, 그 멍청한 황태자 놈도, 다들 저 잘나신 대마법사 이안 페이지 나리만 믿고 있는 모양인데, 알아? 그 줄, 잘못 잡았어. 잘못 잡아도 아주 한참 잘못 잡았지.”

    라그나르가 통신구를 발동시켰다.

    통신구 특유의 푸른빛이 뿜어졌다.

    “용의 자손이시여! 그 인간마법사, 이안 페이지가 제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부디 저를 도와주소서. 당신의 미천한 종을 구원해 주시옵소서!”

    라그나르가 통신구를 향해 중얼거렸다. 황제의 발목을 부여잡고 믿어달라며, 모든 것은 이안 페이지가 꾸민 간악한 흉계라며 애원하던 순간보다도 절박한 목소리였다.

    […….]

    그러나 라그나르의 바람과는 달랐다.

    통신구로부터 아무런 반응도 오지 않았다.

    예상대로라면 교주의 목소리가 들려야 했다.

    이 통신구를 받은 이래 쭉 그래왔으니까.

    “요, 용의 자손이시여……?”

    라그나르가 통신구를 빤히 바라봤다.

    두 손으로 잡고 흔들기까지 했다.

    “요, 용의…… 당신의 미천한…….”

    교주, 그 괴물이 반응해줘야만 한다.

    흉측한 날개와 함께 와줘야만 한다.

    하여 저놈, 이안을 죽여줘야만 한다.

    저놈보다 더 강력한 마법으로 말이다.

    “왜……?”

    “그래서.”

    당혹감으로 물든 라그나르에게 이안이 속삭거렸다.

    서로한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끝이라고 했잖아.”

    “……!”

    이안의 손짓 한 번에 통신구를 빼앗겨 버린 라그나르, 다시 낚아채려고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통신구는 이미 이안에게 넘어갔고, 파쇄의 주문과 함께 산산이 조각나버렸다.

    “으…… 으으, 으으으……!”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상황.

    라그나르의 다리에 힘이 풀려 버렸다.

    힘없이 주저앉아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백금발의 가닥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럴 리가, 이럴 리가 없는데…….”

    불과 방금 전까지만 해도.

    침실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모든 상황은 만족스럽게 흘러갔다.

    철저히 라그나르의 의지대로였다.

    흐르라면 흘렀고, 멈추라면 멈췄다.

    그런데 왜? 갑자기 왜?

    “도대체…… 왜?”

    이윽고 침실 안으로 근위병들이 들이닥쳤다. 이 상황을 미리 전해 들었던 황태자와 공주도 함께 들어왔다. 근위병들은 주저앉은 5황자 라그나르를 포위했으며, 황태자 하이든과 공주 하이리는 서둘러 황제를 부축했다.

    “아바마마! 괜찮으시옵니까?”

    “……나는 괜찮다. 괜찮아.”

    그러나 황제는 황태자와 공주의 부축을 뿌리쳤다. 대신 포위된 라그나르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병사들 역시 한발씩 물러났다. 길을 만들어준 거다.

    “라그나르.”

    황제가 라그나르를 불렀다.

    처음 떠올렸던 분노는 지워진 지 오래였다.

    오직 슬픔만이 남아 빈자리를 가득 채웠다.

    “내가 너를 이렇게 만들었구나.”

    “…….”

    “미안하다. 진심으로 미안하다.”

    “…….”

    황제의 사과는 진심이었다.

    라그나르가 태어난 이후 모든 일들.

    지금까지 해줬던, 해주지 못했던 일들.

    그리고 지금부터 집행해야 할 모든 일들.

    그 모든 것에 대한, 진심어린 사과였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아바마마.”

    아비의 사과를 들은 라그나르.

    그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저를 용서하지 마시라고.”

    “라그나르…….”

    “그럴 필요도, 바라지도 않는다고.”

    라그나르의 목소리 또한 초연해졌다. 불과 방금 전까지 보여줬던 광기, 분노, 집착, 절박함, 당혹스러움. 그러한 기름기들이 깔끔하게 빠져버린, 아주 담백한 어조였다.

    “그 말들, 정녕 진심이냐고 물으셨지요? 네. 진심입니다. 진심이고말고요. 다 죽어가는 아바마마의 귓가에 그리 속삭이는 것, 아주 오래 전부터 꿈꿔왔던 순간이었습니다.”

    라그나르가 힘이 풀렸던 다리를 움켜잡고 일어났다. 창문 밖 어둑어둑해진 하늘을 바라보며 말문을 이어갔다.

    “즐거우시겠습니다? 그토록 의심하고 경계하셨던 저의 본성, 그 본모습을 만천하에 끄집어냈으니, 아끼고 아끼는 장남, 황태자를 위협하는 마지막 방해꾼이 자멸해줬으니.”

    “라그나르, 나는 한 번도 너를…….”

    “집어치우시지요. 받잡기 역겹습니다.”

    라그나르가 황제의 말문을 끊어버렸다. 본디 조롱과 조소로 가득해야 할 반응이었으나, 그 어떤 감정의 조각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무감정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었다.

    “하오시면, 폐하.”

    창가에 살며시 걸터앉은 라그나르.

    그가 빙그레 웃으며 읊조렸다.

    “부디 아끼는 이들과, 대대손손 행복을 누리시길.”

    마지막으로 남기는 인사와 함께.

    라그나르의 몸뚱이가 뒤편으로.

    창가 아래를 향해 떨어지기 시작했다.

    “라, 라그나르!”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황제였다.

    그러나 황제의 손은 허공을 잡았다.

    아들의 어떤 부분도 잡을 수 없었다.

    “라그나르-!”

    창 아래를 내려다보며 외치는 황제.

    추락하는 라그나르의 모습이 보였다.

    황제의 침소는 황궁에서 가장 높은 곳.

    이대로 떨어진다면 죽음을 면치 못할 터.

    ‘자살이라.’

    그 광경에 대한 이안의 감상이었다.

    이안은 라그나르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다.

    충분히 그럴만한 능력을 소유했으니까.

    하나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않았다.

    ‘굳이 내 손에 피를 묻힐 이유는 없지.’

    항상 바랐던 순간 아니던가? 그야말로 완벽한 죽음의 시나리오다. 5황자는 자신의 친 아비인 황제를 시해하고자 했으며, 발각되기 무섭게 자살을 선택했다. 오늘의 이야기는 그뿐이다. 아무런 명예도, 아무런 동정의 여론도 없이 역사 속에 기록되리라.

    ‘잘 가라. 라그나르.’

    시간을 되돌린 당시부터 원했던 순간.

    복수의 마침표가 찍어지는 그때였다.

    “……?”

    이안이 흠칫 놀라며 주변을 살폈다.

    실로 기이한 이변들이 감지되었다.

    단언하건데, 처음 겪어보는 현상이었다.

    ‘……뭐지?’

    적어도 눈앞에 펼쳐지기 시작한 현상.

    그 현상만큼은 정확히 말할 수 있었다.

    회색, 세상이 온통 회색으로 물들어갔다.

    황제의 침소에 세워진 모든 가구들도.

    황제, 황태자, 공주와 근위병들도.

    깔린 카펫과 저녁의 하늘까지.

    ‘게다가 멈췄다.’

    어디 그뿐일까?

    회색으로 물든 세상이 멈춰 버렸다.

    아무도, 아무 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마법인가?’

    세상이 회색빛으로 물들었다.

    세상이 그 순간에 멈췄다.

    K22

    마치 시간이라도 정지된 것처럼.

    ‘나만 영향을 받지 않았어.’

    그중 단 한 사람.

    이안만이 색을 가졌다.

    자유롭게 움직일 수도 있었다.

    ‘어째서?’

    오직 이안만 색을 갖고, 이안만 움직인다.

    이안의 시간만 흘러가고 있는 걸까?

    당혹스러움과 고민이 한데 뒤엉켰다.

    만약 이것이 의도된 현상이라면.

    즉, 누군가가 부린 마법이라면.

    ‘드래곤, 혹은.’

    그들과 동급 이상의 존재.

    예컨대 최초의 마법사라 불리는 자.

    분명 그러한 존재가 벌인 소행일 터.

    이안의 추측이 가기까지 닿았을 무렵.

    “……?”

    라그나르가 뛰어내렸던 창밖.

    회색빛으로 물들어버린 저녁 하늘.

    그 멀리서부터 눈에 띠는 ‘색’이 보였다.

    “황금색?”

    멀찍이 보인 색은 황금색과 비슷했다.

    아니, 황금색이라기엔 조금 짙었다.

    갈색이라 부르기도 조금 옅었다.

    마치 이안의 머리칼과 같은 색깔.

    밝은 갈색의 ‘점’이 보였다.

    “저건…….”

    처음에는 분명 점처럼 보였다.

    하늘에 점 하나 찍어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황금색의 점이 가까워졌다.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거대해졌다.

    또한 형체를 이루어내기 시작했다.

    “드래곤?”

    이안의 추측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이 기괴한 현상을 일으킨 존재.

    저 멀리서부터 날아오는 존재.

    그것은 시간의 보고에서 봤던 드래곤.

    그 정신체와 대부분 일치하고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다르다.’

    보고 속 드래곤 로드의 정신체, ‘리시스 라덴쥬’와는 달랐다. 자잘한 차이가 속속들이 눈에 보였다. 하나 그것들을 다 차치하더라도, 가장 큰 차별점이 존재했다.

    ‘색깔.’

    리시스 라덴쥬는 붉은 가죽과 비늘을 지녔다.

    용언서의 설명에 따르자면 ‘붉은 용 일족’.

    하지만 저기 저 드래곤은 달랐다.

    거의 황금색에 가까운 가죽.

    그리고 비늘을 가졌다.

    ‘내가 시간을 되돌릴 수 있었던 계기.’

    용언서의 내용에 따르자면 그랬다.

    모든 시간과 흐름을 관장하는 드래곤.

    하여, 이안이 가장 먼저 연구했던 드래곤.

    ‘황금 용 일족.’

    바로 그 황금색 용이 날아오고 있었다.

    저 머나먼 회색빛의 하늘에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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