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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99화 (99/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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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 99화

    36. 조공(1)

    “휴우……!”

    어딘가 지쳐 보이는 골드 드래곤, 혹은 갈색 머리칼의 남자가 부유의 땅 한구석 낭떠러지에 걸터앉았다. 환술 속에서 이안을 맞이했을 때와 똑같은 자리, 똑같은 자세였다.

    “목표를 잃고 안주해 버리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그의 가벼운 손짓에 황금빛 마나가 허공으로 뿜어졌다. 그 마나는 곧 사람의 형상을 이루어냈는데, 놀랍게도 이안의 모습과 똑같았다. 단순한 형상이 아니었다. 계속 움직였고, 입술도 뻐끔거렸다. 마치 실제 행동을 실시간으로 전송받는 것 같았다.

    “내 성격을 빼닮아서 다행이란 말이지.”

    이안을 향한 남자의 눈빛이 미묘해졌다. 딱히 호의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는데, 적대적인 눈빛도 아니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특이하게 생긴 돌을 관찰하는 눈빛과 흡사했다.

    “하지만 부족해.”

    그가 돌연 낮아진 어조로 속닥거렸다.

    결코 이안에게는 들리지 않을 소리.

    한데도 혼잣말을 멈추지 않았다.

    “계속, 조금만 더 빨리 성장해 다오.”

    혼잣말을 하면 할수록 이안의 황금빛 형상이 희미해져 갔다. 뿐일까? 남자의 몸뚱이 역시 형상과 함께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분신이 사라질 때와 비슷한 모양새였다.

    “너는 아직 할일이 많으니까.”

    남자 또한 자신의 소멸을 느꼈다.

    눈으로 확인해볼 필요조차 없었다.

    이미 익숙했으니까.

    “이거야 원, 불편해서 살 수가 없네.”

    푸념 섞인 한마디와 함께 지상을 내려다봤다. 잘 보이지 조차 않을 정도로 높다란 상공이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지상의 만물을 하나하나 눈 속에 담았다.

    “다시 보려면, 또 얼마나 기다려야…….”

    그 마지막 말에 마침표를 찍지 못한 채.

    남자의 모습이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더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 * *

    드래고니안 에반투스의 추적.

    시간의 보고에서의 백여 일.

    콜드우드 제국과의 긴장 해소.

    현 황제의 건강 악화와 회복.

    패륜아, 라그나르의 죽음까지.

    실로 숨 막혔던 시간들을 넘어서.

    모든 것이 하나둘 정리되어 갔다.

    특히 5황자 라그나르의 사망에 대한 후처리는 의외일 정도로 철저히 진행되었다. 세상 그 누구보다 5황자의 죽음을 슬퍼했던 황제였으나, 세상 그 누구보다 냉정하게 5황자의 죽음을 처리했다.

    오직 황제 시해범이란 죄목으로 다스렸고, 어떠한 혐의도 지워주지 않았다. 황족의 죽음을 애도하는 국가적 장례조차 없었다.

    이후, 5황자를 부추긴 정황이 드러난 제1 황실기사단장 덤필 모릿과 황성 귀족 오번 파커는 극형을 면치 못했다. 뿐만 아니라 가문과 식솔 또한 모든 재산과 특권을 몰수당하고 말았다. 그들은 끝까지 억울하다며, 모든 건 용의 자손이란 괴물이 시킨 짓이라며 울부짖었지만, 헛소리로 치부될 뿐이었다.

    또한 레디오와 더글라스는 그 공로를 인정받았다. 의문의 독으로부터 황제의 목숨을 구해내지 않았던가? 물론 이안의 공로가 누구보다 컸으나, 표면적으로는 이 연금술 부자의 활약이 가장 큼지막하게 부각되었다. 못마땅하게 여겼던 황실 연금술사들조차 이제는 레디오의 이름을 칭송할 지경에 이르렀다.

    황제는 그런 레디오와 더글라스에게 걸맞은 대우와 상을 내리고자 했지만, 그보다 중요한 문제로 하여금 논공행상은 미루어졌다. 레디오 자신을 마나 중독으로부터 구해낼 치료제, 바로 그 ‘꽃잎’의 연구에 돌입해야만 했으니까. 그러한 자초지종을 이안이 황제에게 설명해 줬고, 황제 역시 흔쾌히 받아들였다.

    “완성된 겁니까?”

    “……일단 이론상으로는 완벽합니다.”

    이안의 물음에 레디오가 침을 꿀꺽 삼키며 대답했다. 란데오르의 꽃잎에 관한 연구는 그 줄기와 잎사귀를 연구할 때보다 며칠 더 빠르게 끝났다. 물론 성공적이었다. 적어도 레디오와 더글라스의 지식으로는 완벽한 해독제였다.

    “왜 그렇게 망설이세요?”

    옆에서 지켜보던 이안의 어머니.

    베네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그것이…….”

    “편하게 말씀해 보셔요.”

    “거, 겁이 조금…… 납니다.”

    “겁이라니요?”

    레디오가 잠시 말문을 멈췄다. 대신 저택 내 모든 사람들의 눈을 바라봤다. 한 지붕에서 살아 온지 어느덧 6년하고도 절반, 이제는 한 가족이나 마찬가지인 사람들. 그들을 확인하고 나니 복잡했던 마음도 조금 진정되었다.

    “만약 이 치료제마저 실패로 끝난다면……, 영영 고칠 수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듭니다. 그런 불길한 생각이 자꾸만…….”

    가히 완벽에 가까운 치료제.

    그 완벽함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이 완벽한 치료제조차 실패한다면?

    여전히 중독을 치료해 낼 수 없다면?

    과연 이 이상의 치료제가 존재할까?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낼 수 있을까?

    “걱정하지 마세요.”

    부들부들 떠는 레디오의 손을 베네사가 잡아주었다. 그 조막만한 손으로부터 따스한 체온이 레디오에게 전해졌다.

    “다 잘될 거예요.”

    그리 말하며 이안을 쏘아보는 베네사였다. 말하지 않아도 눈빛에서부터 의미가 느껴졌다. 빨리 무슨 말이라도 꺼내보라는 ‘엄명’이 여실 없이 느껴진다는 얘기다.

    “……맞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안이 어머니의 명을 충실히 이행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뭐라고 말해야 하지?

    잠시 고민했던 이안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제가 더 오래 살 테니까요.”

    이안은 나름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좋은 뜻까지 내포된 말이었다. 레디오보다 이안 자신이 더 오래 산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만약 실패하더라도 죽을 때까지 마나 중독의 부작용을 다스려 주겠다는 얘기였다. 참으로 감동적인 약속이리라.

    “…….”

    하나 그것은 이안의 착각에 불과했다.

    어머니 베네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더글라스의 표정도 다를 바 없었다.

    “……그렇긴 하겠네요.”

    한데 정작 레디오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걱정으로 가득했던 표정이 한결 풀어졌다.

    “평생 이안 님께 붙어먹는 것도 나쁘진 않겠습니다. 아니, 오히려 좋겠네. 제국 최고의 실세가 내 인생을 끝까지 책임져준다니!”

    아무래도 이안의 위로 아닌 위로가 통해 버린 모양이었다.

    “그럼 실패하든 성공하든.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대륙 최고의 실세, 상아탑의 주인, 제 평생의 보호자. 이안 페이지님.”

    “좋은 약만 계속 만들어주신다면, 얼마든지요.”

    “하하, 이를 말씀이십니까?”

    이안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어머니를 바라봤다. 그녀는 두 남자의 살짝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대화를 바라보다가, 이내 화사한 미소부터 되찾았다.

    “자, 그럼…….”

    레디오가 천천히 약그릇을 잡았다.

    치료제는 약병이 아닌 그릇에 담겼다.

    희미한 자줏빛으로 맴도는 액체였다.

    “마, 마셔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윽고 자줏빛 액체가 레디오의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제법 많은 양이었기에 목젖이 네 번은 벌컥거려야 했다.

    벌컥 벌컥, 벌컥 벌컥.

    가득했던 약그릇이 바닥을 내보였다.

    더불어 레디오의 몸뚱이가 휘청거렸다.

    뜨거운 땀방울이 비 내리듯 쏟아졌다.

    피가 빠르게 돌며 후끈 달아올랐다.

    “후욱……!”

    뜨거운 숨을 뿜어낸 레디오.

    마나 중독의 핵심은 바로 혈관이다. 그 혈관에 마나 찌꺼기가 남아 평생토록 ‘마나 브레인’을 괴롭히는 증상, 그게 바로 마나 중독이니까. 이안의 마법으로도 지워낼 수 없는 그 희미한 찌꺼기를 치료제가 씻어주느냐 마느냐, 그것이 관건이리라.

    “후우욱……! 후욱……!”

    레디오의 거친 숨은 한동안 계속 이어졌다. 열기가 오르는 이상 참아낼 수 없는 숨소리였다. 저택의 모두가 그 변화를 숨죽이고 지켜봤다.

    “크으으……!”

    레디오가 마지막 숨을 내뱉었다.

    들끓었던 가래침도 함께 뱉어냈다.

    피 섞인 침이 약그릇 위로 떨어졌다.

    “…….”

    이제 몸 상태를 확인해 볼 차례였다. 과연 혈관 속 마나의 찌꺼기가 지워졌을까? 아니면 그대로 달라붙어 있을까.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일단 조용히 기다려보면 된다.

    “두통이…….”

    마나 중독의 가장 기초적이자 만성적인 증상은 두통, 마나 브레인으로부터 느껴지는 특이한 두통을 죽을 때까지 달고 살아야한다. 레디오야 워낙 적응이 되어버린 탓에 바로 느끼기가 어려웠지만, 그것도 아주 잠깐일 뿐이었다.

    “……사라졌습니다.”

    레디오를 평생토록 괴롭혔던, 나아가 적응까지 할 정도였던 고질적인 두통, 그 마나 중독의 증상이 깨끗하게 사라져 버렸다. 혹시나 해서 조금 더 기다려봤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야말로 완벽했다.

    “아…… 아빠!”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더글라스였다.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한 평생 아비의 고통을 봐왔던 아들이다.

    어찌 기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더글라스…….”

    두 부자가 눈물의 기쁨을 나눴다. 자신이, 혹은 아비가 병마로부터 벗어났다는 기쁨. 병에 걸린 자부터 그를 지켜보는 이들까지, 더 이상 고통 받지 않아도 된다는 해방의 눈물이었다.

    “흐윽……!”

    심지어 베네사조차 눈물을 흘렸다.

    저택은 그야말로 울음바다가 되었다.

    ‘나도 울어야 하는 분위긴가?’

    잠시 그러한 고민에 휩싸였던 이안.

    그가 피식 웃으며 자리를 비켜줬다.

    “음?”

    조용히 서재로 들어가려는 찰나, 울음바다 멀찍이 분홍색 고양이 한 마리가 보였다. 그 고양이는 전혀 관심이 없는 척하면서도, 힐끔힐끔 울음바다의 현장을 바라봤다.

    “여왕님.”

    (…….)

    이안이 가까이 다가오자 무려 ‘잠든 척’을 시도하는 그녀였다. 저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이, 정확히 표현하자면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이 영 창피한 모양이었다.

    “왜 여기서 주무시고 계십니까?”

    (흠흠! 누가 잤다는 게냐?)

    이안의 한마디에 곧바로 일어나는 그녀였다. 계속 잠든 척 해봐야 본전도 건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 버린 탓이다.

    (이제 저 인간 연금술사도 하찮은 병을 이겨낸 것 같으니, 슬슬 그분이 계신 곳으로 갈 수 있는 비약, 그 붉은 용의…… 그거나 얼른 만들어 대령하라고 전해라. 어서!)

    “금방입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이안은 그리 말하며 울음바다의 현장을 슬쩍 가리켰다. 저렇게까지 좋아하고 있는데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는 뜻이었다. 페어리 퀸도 딱히 독촉할 생각은 없었던 모양인지, 이안을 향해 콧방귀나 한번 흥 뀌고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흐음.”

    이안 역시 그길로 서재에 들어갔다.

    의자에 앉자마자 상념 속으로 빠졌다.

    ‘드래곤이라…….’

    복수는 틀림없이 성공했다. 그럼에도 썩 시원하지가 않았다. 복수의 끝은 허망하기만 하다, 뭐 그런 부류의 빤한 헛소리는 아니었다. 라그나르를 향한 복수의 성공 자체는 진심으로, 정말 진심으로 짜릿했으니까.

    ‘역시 그 드래곤들이 문제야.’

    목에 걸린 가시, 라그나르 그린리버를 성공적으로 치워냈다. 한데 이번에는 가시가 아닌, 새로운 돌덩이 하나가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바로 ‘드래곤’이라는 이름의 돌덩이였다. 어찌나 염병할 정도로 거대한지, 목구멍이 답답하다 못해 터져 버릴 지경이었다.

    ‘당장이라도 치워 버리고 싶지만.’

    지금의 이안으로서는 턱도 없는 일.

    가루가 나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리라.

    아예 육신이 증발해 버릴 수도 있겠다.

    “하아…….”

    서재가 떠나가라 내쉬어진 한숨, 비단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 무지막지한 드래곤들을 적대시하는 것이 옳은 판단일까? 얼마나 더 강해져야 드래곤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온갖 고민과 생각들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확실한 건.’

    그래도 딱 하나.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존재했다.

    놈들은 이안을 해칠 생각이 없다.

    적어도 지금 당장에는 말이다.

    보호해주는 느낌마저 들었다.

    ‘아직 여유가 있다.’

    이안의 생각이 거기까지 닿았을 무렵.

    굳게 닫힌 문이 똑똑똑 두들겨졌다.

    저택에 얼마 남지 않은 하녀.

    그중 한 명인 에밀리였다.

    “이안 님. 저택 밖에 손님께서 오셨습니다.”

    “손님?”

    이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올만한 사람 중 ‘손님’이라 칭할만한 이는 없었다. 황태자가 왔다면 황태자가 왔다, 상아탑의 마법사들이 왔다면 마법사가 왔다고 정확하게 표현해줬을 테니까.

    “콜드우드 제국에서 오신 분들이라고 하는데…….”

    콜드우드의 방문이라면 이안도 알고 있었다. 황제의 쾌차를 축하하는 의미로 보낸 사절단이라나 뭐라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건강 악화를 빌미삼아 전쟁까지 꾸몄던 놈들 주제에.

    ‘참 낯짝도 두껍단 말이지.’

    문제는 그 사절단 방문이 어째서 이안의 저택까지 이어지냐는 거다. 도착했으면 응당 황궁을 찾아가 황제부터 알현하는 것이 도리일 터.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돌려보낼까요?”

    “제가 나가보죠.”

    에밀리를 멈춰 세운 이안이 직접 저택 바깥으로 나섰다.

    “……?”

    그리고 곧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안의 저택을 찾아온 콜드우드인.

    그들은 고작 한두 명이 아니었으니까.

    “이게 다…….”

    어디 사람만 한두 명이 아닐까?

    무언가가 잔뜩 실린 ‘짐수레’도 많았다.

    대저택 앞 공터를 가득 채울 정도였다.

    “오오! 이안 님 아니십니까!”

    이안이 당혹감에 빠진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낯익은 얼굴도 함께였다. 물론 그는 콜드우드인이 아니었다. 바로 ‘포이언 상단’의 주인이자 용언서 출품을 도와줬던 상인, ‘로베르토 포이언’이 불룩한 뱃살을 출렁이며 다가왔다.

    “그날 이후로 처음이지요? 한동안 소식이 없으셔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신 건가 걱정했는데, 그새 또 대단한 활약상을 남기셨더군요! 역시 이안 님이십니다.”

    로베르토의 아부 섞인 인사에 이안도 대충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인사가 끝났다고 해서 의문이 풀리는 건 아니었다. 다시금 지천에 깔린 짐수레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게 다 무엇입니까?”

    “아! 그것이, 그…… 귀를 좀 빌려주시겠습니까?”

    허락을 구한 로베르토가 이안의 귓가에 속삭였다.

    “간단하게 설명을 올리자면, 콜드우드 제국의 황태자 전하께서 개인적으로,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아주 개인적으로 이안 님께 보내신 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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