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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37화 (37/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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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 37화

    12. 가끔은, 매가 약일 때도 있다(1)

    [솔직히 얘기해 봐. 비싼 거지?]

    통신구로부터 들려오는 베네사의 목소리.

    뜨끔했으나 태연하게 대답하는 이안이었다.

    “그럴 리가요. 못미더우시면 황제폐하께서 내려주신 금화 한번 확인해 보세요. 몇 푼 쓴 거 빼고는 다 그대로 있지.”

    통신구는 보석으로 샀으면서.

    당연한 얘기를 뻔뻔하게도 늘어놓는다.

    [신기해서 그래. 신기해서. 이 저택에 있는 통신구도 그렇고, 영주성에서 봤던 통신구도 그렇고. 엄마가 봤던 통신구들은 길어봐야 근처였거든? 근데 이건 어떻게…….]

    베네사가 놀랄 만했다.

    지금 이안은 상아탑을 향하고 있었으니까.

    거리가 제법 떨어졌음에도 통신이 가능하다.

    그녀의 상식으로는 결코 불가능한 일.

    “제가 손 좀 봤죠.”

    [그, 그런 것도 가능하니?]

    “그럼요. 마법산데.”

    [아무리 마법사여도…….]

    “마법사가 최곱니다.”

    이 말을 누군가에게도 했던 것 같은데.

    대충 얼버무린 이안이 주제부터 돌렸다.

    “어쨌든, 그거 항상 지니고 다니셔야 해요.”

    [크기가…… 좀 부담스럽다, 얘.]

    “조만간 갖고 다니기 편하게 개조해 드릴게요.”

    [이렇게 커서야 되겠니?)

    “고민해 봐야죠. 뭐.”

    이안은 아직 어머니가 사용할 통신구의 형태를 정하지 못했다. 외관이야 크게 상관없다. 어차피 치장용 장신구로 사용되는 수정구들과 크기만 다를 뿐, 전혀 차이점이 없었으니까. 고로 지니고 다니기에 용이한 형태면 그만이란 얘기다.

    ‘아무리 생각해도 없단 말이지.’

    바로 그게 문제다. 없다.

    그 ‘지니고 다니기기에 용이한 형태’가.

    조만간 공방을 한 번 더 방문해야 할 것 같다.

    이 문제의 해답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어디 나가시면 근위병들이랑 같이 가세요. 혼자 나가거나 하녀들하고만 나가지 마시고. 꼭이요. 이거 제 당부가 아니라 황태자 전하 명령인 거 알죠?”

    황태자는 보면 볼수록 생각보다 쓸모가 많은 자였다. 처음에는 그저 베네사의 아름다운 미모를 칭찬했다. 이놈도 쓸데없는 생각을 품는 건가 싶었으나, 아니었다. 다음 날 베네사의 경호원으로 근위병 몇을 보내왔으니까.

    “페이지 부인을 보니 돌아가신 어마마마가 떠오르는구먼. 그분께서도 아주 아름다운 분이셨지. 내 얼굴을 보면 알겠지만 말이야. 하하! 음, 한데 너는 좀…… 아비를 빼닮았나 보구나.”

    아직도 황태자의 말이 가슴에 남았다.

    이안이 아주 어렸을 때 시달렸던 생각.

    나는 왜 어머니를 닮지 못했을까?

    그 아련하고도 아픈 기억을 쿡쿡 찌르는 한마디.

    “아아, 그렇다고 못났다는 건 아니니라. 이다음에 자라면 쾌남자로 소문이 자자해질 상이지. 하하하!”

    연이은 농담에 어머니조차 웃어버렸다.

    나이 값을 하지 못하고 욱할 뻔했지만, 경호원을 붙여준 것으로 꾸역꾸역 넘어갔다. 황실의 근위병은 무예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훈련된 자들. 용병을 사서 경호를 붙이는 것보다야 훨씬 믿음직스럽지 않겠는가?

    [예예. 알겠어요. 마법사나리. 얘는 마법사 한번 되더니 왜 이렇게 잔소리가 많아졌을까? 누굴 닮아서 이래? 황태자님 말씀으로는 아비를 닮은 것 같다 하시던데. 그이도 이랬나?]

    “어머니…….”

    더 이상 베네사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방에 통신구를 두고 도망쳐 버린 모양이다.

    “후우…….”

    통신구의 마나를 끊어버린 이안.

    한숨을 쉬면서도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다.

    부엌데기 시절, 혹은 그 직후와 차원이 다를 정도로 변하셨다. 이제 그녀는 우울하지도, 위축되지도 않았다. 한결 여유로워졌으며, 많이 밝아졌다.

    ‘환경이 중요하긴 해.’

    하대로부터 벗어난 신분.

    하나뿐인 아들의 승승장구.

    여유만 있다면 언제나 쾌활한 레디오.

    이안과는 달리 진짜 아이 같은 더글라스.

    그밖에 많은 요소들이 작용했으리라.

    ‘그나저나.’

    이안이 통신구가 달린 지팡이를 휘휘 저었다.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한 어머니의 통신구와는 다르게 지팡이 형태로 개조된 상태였다. 마법사가 지팡이 하나 가지고 다닌다 해서 뭐라 할 사람, 단언컨대 제국에는 아무도 없을 거다.

    ‘상아탑의 개인교육이라.’

    오늘은 마법 아카데미의 입학 날이다.

    물론 이안은 아카데미로 가지 않는다. 곧바로 상아탑에 들어가 고위마법사들의 개인교육을 받게 될 예정이라고 한다. 말이 좋아 교육이지 이안을 구워삶아버릴 계획으로 가득할 터.

    “오. 아카데미.”

    한참 걷던 이안의 눈에 아카데미가 들어왔다.

    오늘만큼은 상아탑의 마차를 거부했다.

    먼발치에서나마 구경하고 싶었으니까.

    ‘전생에는 나도 저기에 있었지.’

    멀찍이 보이는 아카데미의 야외 광장.

    각지에서 검사를 받고 소집된 아이들.

    각지라고 해봐야 고작 여섯 명이다.

    ‘내 아카데미 동기 녀석들.’

    저 녀석들이 바로 이안의 동기였다.

    이번 생이 아닌, 전생에는 그랬다.

    ‘할디스, 칼다람, 제이제이, 로아나.’

    특히 그 넷은 죽마고우라 부를 만큼 각별한 사이였다.

    모두 1차 통일전쟁 당시 전사해버리고 말았지만.

    ‘이번에는 장수 한번 해보자.’

    조만간 녀석들과 인사부터 나눠야겠다. 전생처럼 허물없는 사이가 되기란 여러모로 힘들겠으나, 최선을 다해봐야지. 여러 가지 생각에 기분이 좋아지는 그때였다.

    “이, 이안 페이지 님?”

    상아탑으로부터 웬 로브차림의 청년이 달려왔다.

    처음 상아탑의 초대를 받고 왔던 날.

    이안에게 유독 퉁명스러웠던 젊은 마법사.

    바로 그 녀석이었다.

    “또 뵙네요.”

    “하, 하하. 아, 안녕하십니까.”

    지난 일이 떠올랐는지 어색하게 웃는 마법사.

    그가 어색하고도 공손한 태도로 말문을 이어갔다.

    “아, 앞으로 일 년 간 이안 님의 보조마법사로 임명된 파, 파본 파커라고 합니다. 부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보조마법사. 고위마법사에게 일대일로 붙는 일종의 ‘상아탑 내 만능 심부름꾼’이다. 새내기 정식마법사들 중 지원을 받거나 차출되며, 매년 새내기 마법사가 돌아가며 선정되는 제도다.

    “통보는 받았습니다. 잘 부탁해요.”

    “이, 이쪽으로! 제가 모시겠습니다.”

    파본은 이안의 보조마법사 역할을 직접 지원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난날의 실수, 이안에게 새겨진 인식을 좋은 쪽으로 바꾸기 위함이었다.

    ‘앞으로 내 마법사 인생이 걸린 일이라고!’

    지금까지는 정말이지 탄탄대로였다. 이름 있는 귀족가의 차남으로 태어나 마법적 자질을 인정받았다. 아카데미를 졸업하던 무렵 2클래스의 경지에 올랐으며, 타 영지 파견조차 엄청난 행운과 함께 1년만으로 끝내 버릴 수 있었다.

    ‘어떻게든 돌려놔야 해. 어떻게든!’

    파견 영지에서 한해 배출된 마법생도의 수가 3명 이상일 경우, 파견을 조기에 종결 받는 혜택이 주어진다. 자칫 느슨해질지 모르는 마나반응검사에 전력을 다하도록 유도하는 일종의 동기부여였다. 거의 오륙십 년에 한번 꼴이지만 말이다.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한데 그 수십 년간 발생한 적이 없었던 조건이 올해 ‘소이튼 영지’에서 나타났다. 무려 3명의 마법생도가 나타난 거다. 그곳은 파본의 파견 영지였고, 상아탑의 오랜 법도에 따라 파견일정을 종료, 정식마법사로 인정받았다.

    “저, 이안 님.”

    “왜 그러십니까?”

    “마, 말씀 편하게 하십시오!”

    “전 이게 더 편해서요.”

    단 한 번의 삐걱거림도 없었던 인생.

    계속해서 탄탄한 돌다리만 걷게 될 인생.

    그 인생이 단 한 방에 꼬이기 시작했다.

    무려 고위마법사한테 밉보인 상황이 아니겠는가?

    “지, 지난번 있었던 일은 제가…….”

    어떻게든 돌려놔야 한다.

    꼬이기 시작한 마법사로서의 줄타기를.

    설령 이 꼬마 놈의 개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남다른 각오와 함께 지원한 ‘파본 파커’였다.

    “제가 정말 진심으로 사죄를…….”

    “아, 그거요? 괜찮습니다.”

    “저, 정말이십니까?”

    급격히 밝아지는 파본의 안색.

    그 얼굴에 경고 섞인 쐐기를 박는 이안이었다.

    “앞으로 잘하시면 되죠.”

    “무, 물론입니다. 예! 성심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두 사람은 어느덧 상아탑 1층에 진입했다.

    저번과 마찬가지로 황금빛 원반.

    고위마법사 전용 승강기로 다가갔다.

    순간 모든 마법사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아직 갈피를 잡지 못하는 눈빛들.

    “타시지요. 19층 고위마법사의 전당에서 멈출 겁니다.”

    그리 안내한 파본이 후다닥 달려가 상아탑 공용 승강기 위에 섰다. 황금빛이 아닌 보라색 원판이었다.

    우우우우웅-!

    이윽고 떠오르기 시작한 황금빛 승강기.

    동시에 마법사들의 눈빛도 확실해졌다.

    최연소 고위마법사를 향한 존경, 질투, 부러움.

    젊은 마법사라면 가질 수밖에 없는 감정.

    ‘충분히 그럴 때지.’

    어느덧 황금빛 승강기가 19층에 멈췄다.

    보라색 승강기의 파본도 도착했다.

    “이안 님께 배정된 개인 연구실은 이쪽입니다.”

    고위마법사의 전당에는 총 24개의 고위마법사 전용 연구실이 있다. 상아탑이 이전되었을 당시 4클래스 고위마법사가 무려 24명이었다고 한다. 덕분에 지금은 남는 방이 꽤 많았다.

    “제가 얼른 가서 담당 마법사님을 모셔오도록 하겠습니다. 첫 수업을 진행해 주실 분이 아마…….”

    그 말과 함께 열쇠를 건네는 파본.

    작금의 상황에 이안은 새삼 놀라움을 느꼈다.

    ‘전생에도 여기였는데.’

    전생과 같은 위치의 방을 배정받았다.

    하긴, 당시에도 12번째 고위마법사였으니까.

    시기만 앞당겨졌을 뿐, 어차피 밟을 수순이었다.

    따지고 보면 신기할 일도 아니긴 하다.

    ‘그래도 반갑네.’

    무엇이든 익숙한 자리가 좋지 않겠는가.

    가벼운 마음으로 연구실의 문을 연 이안.

    “안녕?”

    날이 바짝 선 여인의 음성.

    따로 모시고 올 필요가 없었다.

    이안의 첫 교육을 담당해 줄 고위마법사.

    그녀는 이미 연구실에 와 있었으니까.

    “오랜만이야. 건방진 꼬맹이.”

    속내가 빤히 보이는 표정의 여인.

    고위마법사 헬레느였다.

    “누구시더라.”

    “뭐?”

    이제는 이안 역시 엄연한 고위마법사.

    건방지니 마니 가만히 듣고 있을 필요가 없다. 선후배간의 차이가 있긴 하나, 그것도 상호존중이 이루어질 때 지켜지는 예법이니까. 게다가.

    ‘하필 이 여자를 보낸 이유.’

    남을 가르치는데 조금의 재능도 없는.

    그렇다고 흥미가 있는 것도 아닌 여자다.

    한데 그런 여자를 이안에게 보내온 까닭.

    복잡하지 않다. 기선제압이다. 더 강하고 거친 자로 하여금 이안의 기세부터 꺾어놓으려는 속셈이 아니겠는가.

    ‘발상들 하고는.’

    이안은 더 이상 탑주와 고위마법사들의 견제에 순응해줄 생각이 없었다. 마나저장기를 깨부수고 고위마법사란 ‘권력’을 얻게 된 지금, 이안이 취해야 할 방식은 오직 하나.

    ‘상아탑 내에 새로운 세력을 만든다.’

    이안 페이지라는 이름에 영향력을 만드는 것.

    젊은 마법사들을 필두로 세력을 구축하는 것.

    나아가 상아탑의 절반 이상을 장악하는 것.

    ‘지금부터 6년 내로.’

    라그나르가 상아탑의 비호 아래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시기. 그 전까지 세력을 구축하는 거다. 탑주 허버트를 필두로 한 상아탑의 ‘친 라그나르’ 행보에 사사건건 걸림돌이 될 수 있는 신흥 세력을.

    ‘그쯤이면 나도 탑주를 뛰어넘겠지.’

    현 탑주와 동급, 아니 그 이상의 클래스.

    상아탑을 완벽하게 장악하는 순간이 올 터.

    “아, 그 깨진 저장기 줍던 분이셨네요.”

    그 시작의 제물로 저 여자는 어떨까?

    이안이 짐짓 천진한 어조로 말했다.

    물론 내용까지 천진하지는 않았다.

    거의 도발이나 마찬가지다.

    “……이제 보니까 건방진 수준이 아닌데.”

    책상에 걸터앉아 있었던 헬레느.

    그녀가 두 다리를 딛고 일어났다.

    여인 치고는 상당히 큰 신장.

    굴곡진 몸매에 붉은 로브가 딱 달라붙었다.

    “후우, 좋아! 대충은 들었을 거야. 역사, 이론, 예법, 원래 아카데미에서 배워야 할 것들. 듣자하니 우리가 직접 가르치기로 했다더라. 너 같은 괴물이 아카데미 가봐. 애들이 무서워할 거 아냐? 막 허탈하고. 그치?”

    그녀의 손짓 한 번에 책장 속 서책들이 날아들었다. 상아탑의 역사, 마법의 기초이론, 기타 등등 아카데미의 교과서나 다름없는 서책들.

    “근데 말이야.”

    헬레느가 허공에 뜬 서책 한권을 집어 빠르게 넘겼다.

    “이런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이겠어?”

    그러더니 바닥으로 휙 내동댕이쳐 버린다.

    “내 전공도 아니고. 다른 노인네들이 어련히 잘 가르칠까. 벌써 수십 년째 해먹는 데커드 영감이라든가. 시간 남아 돌면 탑주님이 직접 가르칠 수도 있고.”

    이윽고 모든 책들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자신의 방식대로 하겠다는 의미였다.

    “세실리아, 그 계집애를 이겼다고 했지?”

    어느덧 이안의 코앞까지 다가온 헬레느의 물음.

    허리를 숙여 이안과 눈높이까지 맞춰준다.

    “그년도 제법 가락이 있었거든. 아, 마법전투 얘기야. 말이 나왔으니 가르침 하나 내려볼까? 마법사들도 종류가 있어. 싸움질 잘하는 마법사, 남을 잘 보조하는 마법사, 평생 방구석에서 술식이나 연구하는 마법사…… 뭐 그 외에는 찌꺼기들이고.”

    사실 헬레느가 ‘찌꺼기’라고 표현한 이들이야말로 상아탑의 대부분이다. 각종 문명에 이바지 중인 수많은 마법사들. 그들을 향한 경멸, 전생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는 태도였다.

    “난 어디에 해당할까?”

    “첫 번째 같네요.”

    “정답! 아마 그 분야에서는 따라올 놈이 없을 걸?”

    자신감으로 가득한 헬레느의 발언.

    이안 역시 어느 정도 인정하는 바였다.

    기억을 통틀어 봐도 헬레느만 한 전투요원은 적었으니까.

    “기대가 많았어. 세실리아. 그게 잘만 컸더라면 내 발끝까진 왔을 텐데, 찌뿌둥할 때마다 몸 풀기 상대로 충분했을 텐데~ 하고. 하필이면 첩자였다니. 쩝.”

    그녀에게 제국이나 정치는 다른 세상 이야기일 뿐.

    진심으로 아쉬운 듯 입맛까지 다신다.

    “걸리지나 말든가. 멍청한 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헬레느.

    그녀가 다시금 이안을 바라봤다.

    “근데 그걸 때려잡았단 거야. 요 꼬맹이가.”

    흥미로 반짝이는 눈빛. 마나저장기의 파편들을 주섬주섬 확인할 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솔직히 처음에는 놀랐는데, 지나고 보니까 딱 그것만 남더라. 상대가 생겼다는 거. 다른 놈들은 꽁무니나 슬슬 빼기 바빴거든. 고위마법사의 품위가 어쩌니 헛소리만 해대면서, 뭐 이해는 해. 다 똑같지. 지면 쪽팔리잖아.”

    어리거나 젊은 마법사들에게 고위마법사의 대련이란 실로 박진감 넘치는 구경거리 중 하나다. 특히 헬레느는 항상 공개 대련을 선호하는 만큼 구경꾼이 많을 수밖에 없으며, 상대가 헬레느라면 승리를 거두기도 힘들다.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하느니 피하는 게 상책이라는 얘기다.

    “근데 그거 알아? 너는 이제 빼고 싶어도 못 빼. 같은 고위마법사여도 말이지. 왜? 나는 지금 널 교육하라는 명령으로 왔어. 선생이란 거지. 명색이 선생이라면 제대로 가르칠 수 있는 과목을 가르쳐야 하지 않겠니?”

    헬레느가 가장 잘 가르칠 수 있는 과목.

    지금껏 구구절절 얘기했듯, 마법전투밖에 더 있겠는가.

    “따라오렴. 어차피 거부권은 없으니까.”

    따라오라는 말과 함께 연구실을 빠져나간 헬레느.

    그녀가 바깥에 대기 중이던 파본에게 말했다.

    “애들 올려보내. 대련장으로.”

    “예……?”

    “얘가 왜 말귀를 못 알아먹을까?”

    “대, 대련…… 아! 알겠습니다!”

    선생으로서 가르침을 내려준다더니만.

    그 수업에 구경꾼까지 필요한 모양이다.

    관심과 경외 받기를 즐기는 성정.

    참으로 한결같은 여자다.

    “쟤가 네 보조야? 너나 쟤나 고생 좀 하겠다.”

    헬레느가 향한 곳은 상아탑의 옥상.

    이안 또한 그 뒤를 묵묵히 따랐다.

    옥상까지는 승강기가 연결되지 않는다. 따로 마련된 계단을 통해서만 올라갈 수 있는데, 계단을 밟는 그녀의 발걸음이 유독 경쾌했다. 골반마저 요염한 자태로 튕긴다.

    “목숨 걸고 덤벼봐. 그래야 가르칠 맛도 나지.”

    수도 그린리버디움에서 가장 높은 곳.

    사방이 탁 트인 상아탑의 최정상. 바닥부터 허공까지 모두 보호마법으로 처리된 백색 공터. 수도에서는 마법을 마음껏 뿌려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공간이었다. 그래서일까, 공식적인 명칭은 아니지만 아주 오래 전부터 대련장이라 불렸다.

    “어때. 마음에 들어?”

    헬레느는 자신감이 넘쳤다.

    상대가 아무리 최초의 마법사와 같은 재능을 타고났든, 어린 나이에 4클래스 초입 수준의 마나를 지녔든, 전투센스와 경험만큼은 결코 자신을 따라올 수 없으리라.

    “넓네요.”

    “그치?”

    하지만 헬레느는 알고 있을까?

    이 옥상, 이안은 처음이 아니란 사실을.

    대련을 목적으로 수십 번 이상 와봤음을.

    그중 단 한 번도 패배해 본 바가 없었음을.

    무엇보다 수십 번의 승리 중 대부분은…….

    ‘헬레느가 상대였지.’

    바로 눈앞에 저 붉은 로브차림의 여인.

    헬레느로부터 취한 승리였음을.

    ‘어째 전생이랑 다를 게 하나도 없군.’

    나이만 어려졌다 뿐이지 똑같은 것 같다.

    열두 번째 최연소 고위마법사 등극.

    동일한 위치의 개인 연구실.

    득달같이 덤벼드는 헬레느까지.

    ‘그때도 귀찮아 죽는 줄 알았었는데.’

    전생의 헬레느는 집요하기 짝이 없었다.

    갖가지 변명과 함께 재도전을 해왔다.

    아무리 이안에게 져도, 져도, 또 져도.

    그 반복의 고리를 끊어버릴 방법.

    이안은 알고 있었다.

    ‘아주 굴욕적인 패배.’

    감히 변명조차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할 정도로.

    전생에도 그랬다. 마지막 도전, 그리고 결과.

    참담하다 못해 굴욕적인 패배를 안겨줬다.

    ‘이번에는.’

    마침 젊은 마법사들도 하나 둘 몰려들기 시작했다.

    구경꾼이 많으면 많을수록 굴욕감 또한 커지는 법.

    그 사실을 헬레느가 모를 리 없다. 오히려 노림수였겠지.

    시작부터 이안의 기세를 꺾어놓으라는 고위마법사회의 언질, 즐기는 김에 겸사겸사 진행할 심산이었을 터.

    ‘시작부터 끊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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