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36화 (36/342)
  • 36

    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 36화

    11. 지켜야 하는 사람들(3)

    일촉즉발의 대치상황.

    그때였다.

    “단장님!”

    저택 바깥에 대기 중이었던 젊은 기사.

    이안을 가장 먼저 알아봤던 그가 저택 안으로 헐레벌떡 들어왔다.

    “요리사들이 요청한 식재료가 지금 밖에…….”

    더 이상 말문을 이어가지 못하는 기사였다.

    “도착했는…… 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탓이다.

    “요리사? 식재료? 무슨 소리죠?”

    이안은 기사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다짜고짜 무슨 요리사고 식재료란 말인가?

    “어, 황태자 전하께서 황실의 요리사들을 호출하셨습니다. 한데 저택의 식재료가 부족하다 하여 지금 황궁으로부터…….”

    연신 눈치를 살피며 설명하는 기사.

    그 설명에 이안이 마나를 거두었다.

    불안감이 피워낸 살기 또한 사그라졌다.

    “드, 들여보내도 괜찮겠습니까?”

    무려 황태자가 직접 명령한 식재료다.

    한데도 기사는 이안에게 허락을 구했다.

    그만큼 아까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으니까.

    “……그렇게 하세요.”

    이안의 기세가 완전히 누그러지자 올리버 역시 검으로부터 오른손을 뗐다. 막아섰던 길목도 비켜줬다.

    “죄송합니다. 오해가 있었군요.”

    사과의 말과 함께 올리버를 지나친 이안.

    그 뒷모습을 우두커니 바라보는 올리버였다.

    ‘오해라.’

    어떤 오해를 한 건지는 예상이 된다만.

    방금 보여줬던 살기, 기세.

    그것은 결코 어린아이의 것이 아니었다.

    ‘벨 수 있었을까.’

    이안과 대치했던 일 분 남짓의 시간.

    올리버가 떠올린 생각은 오직 그뿐이었다.

    만약 내기를 건다면 어느 쪽에 걸었을까?

    제국 제일이라는 올리버 자신의 검?

    4클래스 고위마법사 이안의 마법?

    ‘마법에 거는 쪽이 좋겠군.’

    올리버가 씁쓸하게 웃었다.

    지독할 정도로 현실적인 판단.

    꼬마에게조차 승리를 장담키 어렵다니.

    ‘더 강해져야 한다.’

    현 황제와의 하나뿐인 약속.

    끝까지 황태자를 지켜달라는 약속.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다짐을 굳힌 올리버가 이안의 뒤를 따랐다.

    황태자의 곁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그게 정말이오? 페이지 부인?”

    이안의 목적지는 저택의 식당.

    그곳으로부터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로 이런 걸 좋아한단 말이오? 이안이?”

    “틈만 나면 찾는 음식이온데…….”

    가장 먼저 들려오는 황태자의 목소리.

    뒤이어 베네사의 목소리도 들렸다.

    커다란 식탁을 홀로 차지하고 앉은 황태자.

    앞에 놓인 그릇에 팥 파이가 담겨 있었다.

    딱 한입만 잘라먹은 모양새였다.

    “허! 이해할 수가 없군. 구워진 진흙 맛이 나거늘, 어째서 이런 파이에…… 어렵게 자라서 그런 건가?”

    팥 파이를 향한 황태자의 혹평이 펼쳐졌다.

    이안의 입맛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까지 흔든다.

    “내 페이지 부인의 정성을 봐서 맛보기는 했소만…….”

    끝내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은 황태자.

    그가 조리실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요리는 아직 멀었는가?”

    황태자의 외침에 젊은 황실요리사가 땀을 뻘뻘 흘리며 달려 나왔다. 누가 봐도 곤혹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저, 전하! 방금 추가적인 식자재가 도착했사옵니다. 이제 정말 금방이면 되오니 조금만 더 시간을…….”

    “아직도?”

    “그, 금방 만찬을 대령하겠사옵니다!”

    “흐으음…….”

    황태자의 심기가 또다시 불편해졌다.

    두 눈을 감고 고민하기에 이르렀다.

    계속 봐주는 것도 위엄이 빠지지 않을까?

    ‘아니지, 아니야.’

    귀족이나 상아탑 놈이었다면 불호령을 내렸을 터. 그러나 상대는 한낱 요리사일 뿐이다. 무릇 미천한 자에게 베푸는 자비로움이야말로 군왕의 도리가 아니겠는가? 분명 그러한 문구를 읽은 기억이 난다. 어디서 읽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알겠다. 대신 최고의 식사를 준비해야 할 것이야. 내 의형제나 다름없는 이안과 그 어머니에게 일생일대의 만찬을 대접할 수 있도록. 내 말 명심하겠지?”

    “모, 모든 것을 바쳐 준비하겠습니다!”

    “좋아. 믿어보겠어. 가봐.”

    요리사를 돌려보낸 황태자가 다시금 팥 파이를 바라봤다.

    어떻게 이런 걸 먹고 살 수 있을까?

    지금까지 이런 파이를 먹고 자랐다고?

    눈빛만 봐도 읽혀지는 황태자의 속마음.

    “황태자 전하.”

    잠시 기다렸던 이안이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더 기다렸다간 팥 파이 금지령이라도 내릴 기세였으니까.

    “오! 이게 누구야? 상아탑의 고위마법사 이안 페이지 공이 아니신가?”

    정말이지 격하게도 반겨주는 황태자.

    이안은 새삼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잠깐이나마 살심을 품었던 것이 미안해질 정도로.

    ‘뭐, 적대적인 것보다야 낫겠지.’

    좋게 마음을 먹은 이안이 고개부터 숙였다.

    “소인을 오래 기다리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좀 기다리긴 했지.”

    “송구하옵니다.”

    “송구할 것까지는 없고, 설마 식사를 하고 왔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그렇다면 조금 송구해야 할 것도 같은데…….”

    급기야 농담까지 건넨다.

    어디서 뭘 잘못 먹기라도 한 건가?

    설마 어머니의 팥 파이를 먹어서?

    별의별 생각이 다 떠오르는 이안이었다.

    “계속 서 있지 말고 거기 앉지. 페이지 부인도 앉으시고. 곧 만찬이 준비될 예정이니까. 아마 깜짝 놀랄 걸? 세상천지에 이런 음식이 있었나! 하면서 말이지. 하하!”

    그리 말하며 팥 파이 그릇을 톡톡 치는 황태자.

    이제 치워도 된다는 무언의 명령이었다.

    “잠시 실례하겠사옵니다.”

    “음.”

    재빨리 팥 파이 그릇을 치워 버린 하녀.

    그 모습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는 이안.

    저 파이 하나 먹겠답시고 하늘까지 날았거늘.

    한참 넋을 뺐던 이안이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황태자의 옆으로 올리버가 다가와 있었다.

    “전하, 하사하실 물건이 있으시지 않습니까?”

    올리버가 황태자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무래도 방문의 목적이 따로 있는 모양.

    “아아! 이거 내 정신 좀 보게.”

    황태자 역시 생각난 듯 손뼉을 탁 쳤다.

    목청까지 가다듬고는 이안을 바라본다.

    “크흠! 내 이렇듯 갑작스레 방문한 이유는 간단하다. 고위마법사로 등극했다는 소식을 들었지. 해서 친히 축하의 말을 건네주고자 온 것이야. 미리 기별을 주지 못해 기다렸다만, 그 정도야 뭐, 우리가 어디 보통 사이더냐?”

    “성은이 망극…….”

    “어허, 아직 망극하기는 일러. 황태자 체면이 있지, 설마 빈말 따위로 축하를 건네겠느냐? 나라는 존재를 너무 모르는군.”

    황태자의 손짓과 함께 하녀들이 움직였다. 그들은 곧 비단으로 포장된 함을 하나 대령해 왔는데, 그 크기나 소리로 미루어봐서 단순한 재물은 아니었다.

    “열어봐라. 어렵사리 가져온 선물이니까.”

    어렵사리 가져왔다? 대체 무엇이기에?

    비단부터 풀어낸 뒤 내용물을 살펴본 이안.

    목함 안에 담긴 것은 자그마한 크기의 호리병이었다.

    ‘액체?’

    호리병 안에는 명백한 액체가 담겨 있었다.

    황실 비전의 엘릭서라도 가져온 걸까?

    그렇다면 두 팔 벌려 환영할 일이다.

    애당초 이안의 목적이 아니었던가.

    “이게 무엇이옵니까?”

    이안이 모르는 척 황태자를 바라봤다.

    “엘릭서라고, 들어는 봤겠지?”

    “예. 알고 있습니다.”

    “그럼 얘기가 빠르겠군. 황실 대대로 내려오는 귀한 엘릭서다.”

    이안의 예상이 정확하게 적중했다.

    “특히 이놈은 나도 일 년에 한번 꼴이나 마셔볼 수 있는 놈이지.”

    황실의 비전 엘릭서라면 아무리 최하품이라도 큰 도움이 된다. 역대 황제들의 장수 비결이나 마찬가지니까. 꼭 마나의 증진의 효과를 누리지 못하더라도 손해 볼 게 전혀 없다는 얘기다.

    하물며 황태자조차 일 년에 한번 꼴로 접하는 엘릭서? 그 정도면 필시 상품 이상의 비전 엘릭서일 터.

    “내 너의 그 빠른 성장세에 도움이 될까하여 냉큼 챙겨왔느니라. 아바마마가 아닌, 내가 직접 내리는 첫 하사품이니만큼 사양치 말고 마시도록.”

    그래,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사양하지 않을 참이다.

    생각을 갈무리한 이안이 호리병의 뚜껑부터 열었다.

    붉은색 액체가 몽롱한 향을 유혹하듯 풍겼다.

    당장 입 속으로 털어넣고 싶은 욕구가 밀려왔다.

    “자, 어서.”

    기대감으로 잔뜩 부푼 황태자의 재촉과 함께.

    호리병 주둥이에 입술을 가져가는 이안.

    “…….”

    그가 멈칫하며 입술을 떼버렸다.

    영 좋지 않은 기억이 떠오른 탓이었다.

    황제 라그나르에게 독살을 당했던 순간.

    그때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황족, 황족의 방문, 황족이 권하는 액체.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래. 알고 있다. 경우가 전혀 다름을.

    황태자는 이렇듯 대범하게 독살을 시도할 그릇이 못된다. 평범한 독으로는 마법사를 죽일 수도 없다. 30년 후 라그나르가 준비했던 독약 또한 지금 존재할 리 만무하다.

    ‘엘릭서도 정상이야.’

    엘릭서의 상태가 결정적인 증거다.

    아주 민감한 조제 과정을 거치는 엘릭서다. 조금이라도 불순물이 섞일 시 그 특유의 빛깔과 향을 잃는다. 색은 탁해지며, 냄새는 역해진다.

    “후우.”

    이안이 상황을 차곡차곡 정리해 봤다.

    처음 향을 맡았을 때 느껴진 욕망.

    불현듯 떠오른 지난 생의 마지막 기억.

    두 가지를 지우자 판단력도 곧 제자리를 찾았다.

    ‘어머니께 드려도 좋을 텐데.’

    역대 황제들의 무병장수.

    그 바탕이 되는 황실의 비전 엘릭서.

    굵직한 마나증진의 효과도 기대할 수 있겠으나, 무병장수라는 요소를 생각하자니 어머니가 마음에 걸렸다.

    ‘지금은 좀.’

    자신의 첫 선물을 어서 복용해 주길 바라는 황태자의 눈빛. 저 부담스러운 눈빛에 더해져 어머니까지 바라고 계셨다. 잘은 몰라도 아들이 대단한 선물을 받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힘들겠군.’

    한 번쯤 기대에 부응하는 편이 좋을 터.

    이번에야말로 단숨에 들이켜는 이안이었다.

    벌컥!

    엘릭서 특유의 끈적한 목넘김.

    솔직히 맛은 없다. 쓰기만 하고.

    어느 엘릭서든, 어느 약이든 그렇다.

    다만 전생의 느낌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온몸으로 약효를 누릴 수 있는 나이.

    지금 이안의 나이란 그 정도로 어렸다.

    두근! 두근! 두근!

    마나하트, 아니 심장 자체가 크게 요동쳤다.

    평소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순환되는 피.

    그 피를 타고 도는 대량의 마나.

    후끈 달아오르기 시작한 체온.

    그럼에도 기이하리만큼 또렷해진 정신.

    “후욱!”

    이안이 뜨거운 숨을 힘껏 몰아냈다.

    근본적인 엘릭서의 효능도.

    약효를 받아들이는 몸뚱이의 상태도.

    양쪽 모두 한 치의 양보조차 없었다.

    “이, 이안?”

    이안의 모습에 걱정을 하기 시작한 베네사.

    반면 황태자의 눈빛은 기대감으로 가득했다.

    저 반응, 자신도 마셔봐서 잘 안다.

    약효는 분명 순항 중이다.

    “후욱……!”

    조금씩 안정되어가는 이안의 몸 상태.

    요동치는 심장, 피와 마나.

    불타버릴 것만 같았던 체온까지.

    “후우욱……!”

    마지막으로 토해낸 고열의 날숨.

    온몸을 적신 땀이 질척하게 느껴졌다.

    “어떠냐? 효과가 좀 있는 것 같더냐?”

    속내를 조금도 숨기지 못하는 황태자의 어조.

    효과가 좀 있는 것 같으냐고?

    ‘확실히.’

    마나의 보유량이 늘어났다거나 하는 식의 증진은 아니었다. 엘릭서에도 종류가 있고 각각의 성격이 다르다. 다만 뚜렷하게 느껴지는 변화 한 가지. 그것은 소비된 마나의 ‘자연 회복력 상승.’

    ‘모그리안 링과 비슷해.’

    마나하트의 활동을 증진시켜 주는 하급 아티펙트.

    바로 그 모그리안 링과 비슷한 성질.

    아니, 동일한 성질의 변화였다.

    ‘정확히는 모그리안 링의 절반 정도?’

    예상보다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특히 체질 자체가 변화되었다는 점에 합격점을 주고 싶었다. 어린 나이와 좋은 엘릭서의 합작이 아니겠는가.

    “벼, 별로인 게냐?”

    이안이 반응을 보이지 않자 안절부절 못하는 황태자.

    그런 황태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이안이었다.

    ‘쓸모없는 놈이라고만 생각했는데.’

    황제와의 관계에 물꼬를 틀 도구.

    이후로는 하등 쓸모없는 존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여겼다.

    망나니, 얼간이, 열등감덩어리, 인격파탄자.

    황태자 하이든을 둘러싼 수많은 인식들.

    이안 또한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아주 틀린 얘기도 아니긴 하지.’

    알고보니 착하고 성실한 놈이더라.

    그런 흔해빠진 반전은 아니었다.

    다만 생각보다는.

    ‘조금 쓸 만한 것 같기도.’

    다시 한 번 말하건대, 생각보다는 말이다.

    * * *

    “하하하!”

    황태자의 웃음소리가 거리를 떠나가라 울려 퍼졌다.

    이안의 저택에서 치러진 만찬은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

    첫 하사품의 반응도 좋았고, 식사 역시 훌륭했다.

    그밖에 많은 대화를 나눈 뒤 기분 좋게 헤어졌다.

    완벽하다. 완벽해.

    “좋구나. 기분이 아주 좋아!”

    황궁으로 돌아가는 밤길.

    유독 황태자의 기분이 좋아 보인다.

    즐거운 자리인 만큼 포도주가 빠지지 않았고, 대부분 황태자의 뱃속으로 들어갔다. 이안은 어렸고 베네사는 마시지 않았으니까. 유독 기분이 좋아진 원인이었다.

    “황태자 전하.”

    묵묵히 황태자의 옆을 지키던 단장 올리버.

    그가 작은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음? 뭐가?”

    “황실의 전유물입니다. 그것을 하사품으로 내렸다는 소식이 폐하께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황실의 비전 엘릭서. 그 완성품도, 조제법도 외부로의 유출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다. 특히 이안에게 하사한 엘릭서는 황족 중에도 황제와 황태자만이 복용할 수 있는 상품의 엘릭서. 실로 수백 년간 지켜진 법도를 깨버린 거나 마찬가지였다.

    “아아, 난 또 뭐라고. 괜찮아. 애초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 사람으로 만들라, 그렇게 명하신 분이 아바마마니까. 죄가 있다면 말 잘 들은 죄밖에는 없다~ 이 얘기지.”

    그 ‘무슨 수’에도 한계라는 것이 있을 텐데. 통상적인 의미와는 달리, 황태자는 정말로 동원 가능한 모든 수를 몽땅 투입할 요량이었다.

    “아니면 설마, 단장한테 하사하지 않았다고…….”

    황태자가 장난스러운 눈으로 올리버를 쳐다본다.

    “그런 것이 아니옵고.”

    “섭섭했다면 진즉에 얘기할 것이지.”

    “전하.”

    “하하! 농담이야. 나는 뭐 농담도 못 하나?”

    취기의 힘이 강하기는 강한 모양이다. 황태자의 이런 모습, 12년을 섬긴 올리버조차 쉬이 접해볼 수 없었으니까. 이러한 성정의 존재는 알고 있었으나, 아주 어릴 때의 경우였다. 어느 순간부터 자취를 감춰 버렸던 색다른 모습이다.

    “단장한테는 좀 미안한 얘기지만, 지금은 그 녀석부터 내 수족으로 만들어야겠어. 자네랑 기사단이 그 오만방자한 상아탑 놈들 콧대를 박살 내준다면 모를까, 불가능하잖아?”

    황태자는 결코 기사단을 무시하는 게 아니었다.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였을 뿐.

    “근데 말이야. 그녀석이라면 충분하지 않겠어? 상아탑에 들어가자마자 고위마법사부터 해먹은 놈이라고. 그놈이.”

    그 부분은 올리버 또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상식을 넘어서버린 초유의 마법사가 아니던가? 천재에게는 숙명이나 다름없을 견제. 그것만 이겨낸다면 능히 상아탑 최고의 마법사가 되고도 남을 재능이다.

    “두고 봐. 녀석이 상아탑을 내 발 아래로 바치는 그날! 거슬렸던 마법사 놈들부터 싹! 다 물갈이해 버릴 테니까. 특히 라그나르 놈 뒤꽁무니나 졸졸 쫓아다니는 탑주, 그 늙은이부터 당장! 자네도 마음에 안 드는 놈 있으면 미리 말해둬!”

    하나 이어진 황태자의 생각까진 글쎄.

    강력한 의문이 드는 단장 올리버였다.

    저택에서 마주했던 이안의 그 기세.

    필시 황태자의 목숨을 향했을 터.

    오해라 할지라도 위험한 인물이다.

    그런 자를 아군으로 만들 수 있을까?

    “그리고 또…….”

    황태자가 무언가를 더 얘기하려는 순간.

    어느새 황궁의 성문이 육안으로 들어왔다.

    비단 보이는 것은 황궁뿐만이 아니었다.

    황궁으로부터 나오는 소년과 무리들.

    가벼운 차림이었으나

    “라그나르?”

    황태자의 표정이 단박에 굳어버렸다.

    5황자 라그나르와 제5황자 친위대.

    꼴도 보기 싫은 놈들과 마주친 탓이었다.

    “형님?”

    라그나르는 결코 황태자를 ‘황태자 전하’라 부르지 않았다. 민가의 아이들처럼 ‘형님’이라 불렀다. 우애가 돈독한 사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만, 아쉽게도 황태자와 황자들의 사이는 좋고 나쁨을 넘어서 원수나 다름없다. 즉 의도된 무시라는 것.

    “이 밤에 어디를 다녀오십니까?”

    “그러는 네놈은, 밤중에 어딜 기어가느냐?”

    “저야 늘 똑같지요. 백성들 사는 모습이나 살필까 하여. 겸사겸사 바람도 좀 쐬고요. 금방 돌아오니 걱정은 마세요.”

    “흥! 누가 걱정이나 한다고.”

    웃는 얼굴로 조목조목 대꾸하는 라그나르의 화법.

    저 얼굴에 주먹을 날려 버리고 싶은 황태자였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형님.”

    “그러든가 말든가.”

    보기만 해도 기분이 나빠지는 황자 놈들. 좋았던 기분이 잔뜩 상해 버린 황태자가 씩씩거리며 황성으로 걸어갔다. 제2 황실기사단 역시 허겁지겁 그 뒤를 따랐다.

    “황자전하.”

    그중 오로지 한사람.

    단장 올리버가 남아 라그나르에게 말했다.

    “저분께서는 황태자 전하십니다. 황실의 법도에 따라 올바른 호칭을 지켜주시길 청합니다.”

    정중하지만 날카롭게 벼려진 올리버의 요청. 그 기세를 직감한 제5 황실기사단의 기사 하나가 중재하며 나섰다.

    “어허, 이보게 올리버. 형제분들끼리의 애칭가지고 무슨 트집을 잡는 겐가?”

    친위대장이자 황실의 기사 ‘칼레오’.

    올리버와 수련생 동기로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이해하네. 응? 제국을 대표하는 기사가 얼간…… 크험험! 황태자 전하를 억지로 모시려니 고충도 많겠지. 많겠는데.”

    말실수인 척 황태자를 ‘얼간이’라 칭한 칼레오의 발언에 친위대 전원이 피식피식 웃었다. 평소부터 그래왔음을 증명해 주는 바.

    “아무리 그래도 황자전하께 무슨…….”

    “귀족 모독죄는 즉참이나.”

    “……뭐?”

    서걱!

    순식간이라는 표현이 절로 나왔다.

    방금 정확하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그 누구도 알아챌 수 없었으니까.

    단지 올리버가 칼을 뽑았다는 점.

    눈으로 쫓기 어려운 검이라는 점.

    뒤늦게나마 알아챈 정보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황족 모독죄는.”

    서걱! 서걱! 서걱! 서걱!

    “오체분시.”

    올리버의 섬뜩한 목소리.

    의미는 곧 모두에게 전해졌다.

    투둑 툭 투두둑…….

    가장 먼저 떨어진 것은 수염. 유행에 따라 길게 기른 칼레오의 수염이 나풀나풀 허공을 흩뿌렸다. 뿐이랴? 활동성이 강조된 가죽갑옷의 양쪽 견갑과 허벅지 옆 보호대의 일부가 차례대로 잘려나갔다.

    조금만 더 깊었더라면 목과 팔, 다리가 모두 잘려 나갔음을 시사해 주는 바. 표현 그대로 ‘오체분시’였다.

    “허…… 허어억!”

    분명 현실은 수염과 갑옷만이 잘려 나갔을 뿐.

    하나 칼레오의 머릿속에서 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분명히 베였어. 분명히…….’

    목과 팔다리가 잘려 나가는 착각.

    그 허상에 주저앉고 마는 칼레오.

    이는 결코 과한 호들갑이 아니었다.

    실제로 칼레오의 살결을 스쳤으니까.

    피 한 방울 맺히지 않았으나 명백한 사실이다.

    “새기시오. 칼레오경.”

    검을 거둔 올리버의 눈이 라그나르에게 향했다.

    그러고는 정중한 태도로 머리를 조아렸다.

    마치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그럼 조심히 다녀오시길.”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