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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38화 (38/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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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 38화

12. 가끔은, 매가 약일 때도 있다(2)

두 사람을 중심으로 둥글게 포진된 젊은 마법사들.

구경꾼을 자처한 그들로 하여금 대결의 무대가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갑자기 무슨 대결이래?”

“헬레느 님이랑?”

“꼬맹…… 아니 이안 님이?”

새내기 마법사들은 의외로 애 같은 구석이 있다.

12명의 고위마법사 중 누가 가장 강할까.

차기 탑주는 누구의 차지가 될 것인가.

원초적 이슈에 관심 갖는 자들이 태반이다.

“아무리 그래도 헬레느 님은 좀…….”

“다른 분들도 헬레느 님은 피하시던데.”

물론 대부분이 헬레느의 승리를 점쳤다.

그만큼 독보적인 존재감을 가진 그녀다.

특유의 성질머리, 전투마법사로서의 실력.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 인물이니까.

“저 정도면 뭐, 구경꾼은 충분한 것 같고.”

몰려든 구경꾼에 만족한 듯 으쓱거리는 헬레느.

그녀가 이안을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준비할 거라든가? 있으면 어서 해. 어서.”

“그런 건 없고요.”

이안이 마법사들 사이에 섞인 파본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통신구가 달린 지팡이를 맡기며 말했다.

“여기서 소리 같은 게 들리면 바로 얘기하세요.”

“예? 지팡이에서 무슨 소리가…….”

“나면 알겁니다. 꼭 알려주세요.”

“아,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지팡이를 받아 든 파본. 상대는 직속 고위마법사다. 당최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겠다만, 하라면 해야지. 보조마법사가 무슨 토를 달겠는가? 설령 지팡이가 말을 한다 해도 믿어야 할 판국이다.

“들고 싸우는 줄 알았더니?”

“비싼 지팡이거든요.”

“마법사가 돈 걱정은.”

“이제 하루차라.”

“걱정 마렴. 연구지원비 빵빵하게 나올 거니까.”

그 연구지원비로도 언감생심이거늘. 하긴, 저 지팡이에 달린 큼직한 수정구가 통신구란 사실을 눈치챌 리 없다. 세상만사 일절 관심이 없는 헬레느라면 더더욱.

“슬슬 시작해 볼까?”

전생보다 십 년은 더 어린 헬레느의 얼굴.

그럼에도 세월의 차이가 느껴지지 않았다.

‘전의를 완전히 상실시켜야 해.’

그녀는 본인에 대한 자부심이 굉장하다.

그럴만한 재능을 가지고도 있다.

비단 마법적 역량뿐만이 아니다.

‘기사가 되었어도 대성했을 재능.’

여인의 몸인지라 근력적인 한계는 있을 터.

하나 그 단점을 메꾸고도 남을 요소가 많았다.

민첩성, 반응속도, 동체시력 등.

그 모든 면이 우월한 싸움꾼이었다.

‘다른 마법사들과는 방식 자체가 달라.’

그래서일까. 헬레느의 전투방식은 여타 마법사들과 정반대라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방어막을 기본삼아 수비적인 운영에 치중하는 대다수의 마법사들과는 근본적으로 달랐으니까.

‘피하면서 공격하는 방식.’

방어막보다는 회피하는 쪽을 선호한다.

타고난 재능과 보조마법이 가미된 회피력.

한층 자유로워진 술식은 살상마법에 투입시킨다.

특히나 좋아하는 화염계열의 마법으로.

‘평범한 승리는 오히려 독이다.’

정말이지 다양하게 이겨봤다.

마법사 본연의 정공법으로.

한수 위의 전투 운영으로.

좀 더 강력한 화력으로.

‘그때마다 별의별 핑계를 다 가져왔지.’

끈질긴 재도전 끝에 이안은 깨달았다.

헬레느에게는 ‘여지’란 놈을 남기면 안 된다.

이렇게 하면 이기지 않았을까?

저렇게 하면 더 좋았을 것 같은데?

그러한 후회 자체를 떠올리지 못하도록.

“먼저 시작하렴. 그래도 내가 선생이니까.”

“괜찮으시겠어요?”

“하!”

이안의 당돌한 대꾸에 코웃음을 치는 헬레느.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한다니?”

“그럼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그래그래. 제발 좀 그래줘. 응?”

여유가 철철 넘치는 헬레느의 태도.

언제까지 저 여유를 유지할 수 있을까?

“후우.”

이안이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평소와는 달리 마나를 끌어 모으지 않았다.

대신 체내 밖 사방으로 방출시켰다.

보호막을 펼칠 때와 매우 흡사한 기류.

“흥! 어디서 본 건 있어가지고.”

그 빤한 모습에 헬레느는 확신을 가졌다.

다른 마법사들처럼 보호막부터 펼칠 거라고.

“어떤 방어막이 되었든.”

헬레느 또한 술식을 발동시켰다.

그녀의 사방으로 피어오르는 불꽃들.

한 구 한 구가 ‘파이로 블레스트’에 버금갔다.

“단번에 박살 내줄게. 꼬마야.”

그 어떤 방어막이라 한들 자신이 있었다.

쉴드는 물론 마나 배리어, 앱솔루트 배리어까지.

이미 수백 번도 넘게 박살 내봤으니까.

“힘드실 텐데.”

“뭐?”

의미심장한 말소리를 내뱉은 이안.

그 주변으로 몰려드는 것은 ‘냉기’였다.

‘아이스 블록.’

이안을 중심삼아 사방으로 퍼진 마나.

그 마나 자체를 통째로 얼려 버리기 시작한 거다.

콰드득, 콰득, 콰드드득!

이안을 순식간에 가둬버린 큼직한 얼음덩이.

그 정체는 헬레느의 예상대로 방어막이었다.

다만 그 예상을 빗겨나간 방어막이기도 했다.

“……장난해?”

아무 짝에도 소용없는 헛짓거리.

말 그대로 예상‘만’ 빗겨나갔을 뿐.

“지금 뭐하자는 거야?”

어이가 없는 듯 불꽃을 거둬 버린 헬레느.

구경하던 마법사들 역시 비슷한 반응이었다.

대련의 본질과 한참 벗어난 행위였으니까.

“왜 하필 저걸…….”

“아무것도 못할 텐데?”

“마나만 다 떨어지면 끝이라고.”

지극히 당연한 반응들.

‘아이스 블록’은 여타 방어막과 본질부터 다르다.

거의 완벽한 강도를 지닌 만큼 단점 또한 많다.

먼저 술자는 ‘가수면 상태’에 빠져 버린다.

인즉 보호막 역시 임의로 해제할 수 없다.

마나가 몽땅 소비되는 순간까지 지속된다.

그야말로 마법사 최후의 ‘생존수단’.

“저기요. 이안 페이지 씨? 제 말 들려요?”

헬레느가 얼음 속 이안에게 다가가 말했다.

마치 노크하듯 얼음의 방패를 톡톡 치면서.

잠이라도 들어버린 듯 꼭 감아버린 눈.

앙 다문 입술, 미동조차 없는 몸뚱이.

아이스 블록을 펼친 이상 당연한 모습들.

“나 참,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네.”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눈빛.

그보다 더 실망스러운 목소리.

“이딴 꼬맹이한테 기대한 내가 미친년…….”

툭!

그때, 헬레느의 뒤통수를 툭 치는 무언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툭’이었다.

아주 미약한 수준의 세기.

“뭐야?”

그 정체는 자그마한 마나 구체.

체내 밖으로 뽑아낸 마나의 구체였다.

술식이 가미되지 않아 살상력조차 없었다.

마치 눈덩이를 뭉쳐 던진 것과 비슷한 수준.

마법사 중 누군가 장난을 쳤으리라.

‘아니, 잠깐만.’

그녀가 멈칫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생각해 보니 조금 이상하다.

‘나한테 장난질을 쳐?’

다른 마법사도 아닌, 헬레느 자신한테?

그 정도로 배짱 두둑한 놈이 존재했다고?

상아탑 찌꺼기들 중에?

‘그럴 리가.’

무심코 얼음 속 이안을 바라본 헬레느.

곧 그녀의 안색이 급속도로 새파래졌다.

“어……?”

얼음 속 이안은 분명 눈을 감고 있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그랬다. 분명하다.

한데.

‘눈을…… 뜨고 있어?’

순간 소름이 돋아나는 헬레느였다.

저 안에서 눈을 뜰 수 있다?

하물며 눈동자가 움직이기까지 한다고?

그런 일이 가능할 리 없다.

눈은커녕 정신조차 희미할 텐데.

‘무슨 말도 안 되는…….’

눈을 떴다는 자체만으로도 믿기 어려운 일.

하나 믿을 수 없는 일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구구구구구……!

이내 사방에서 들려오기 시작한 굉음.

기분 나쁜 소리가 상아탑 아래로부터 들려왔다.

“뭐, 뭐야?”

“무슨 소리지?”

“저 아래인 것 같은데…….”

젊은 마법사들이 서둘러 주변을 둘러봤다.

모두가 소리의 근원지부터 찾고자 했다.

그 행방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난간 아래만 내려다봐도 보였다.

“……덩굴?”

마법사들은, 아니 상아탑을 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지금쯤 모두가 경악하고 있을 거다. 상아탑 주변 숲으로부터 튀어나오기 시작한 덩굴, 그 굵고 가는 수백 갈래의 덩굴들이 제각각 흙바닥에서 튀어 나와 상아탑의 외벽을 기어오르고 있었으니까.

“뭔데? 무슨 일이냐고!”

그 경악스러운 광경에 넋이 빠져 버린 마법사들.

누구도 헬레느의 외침에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은커녕 제대로 듣기조차 힘들었다.

“이것들이!”

무려 고위마법사의 물음이다.

한데도 대답할 생각조차 못 할 정도라니?

직접 확인하고자 난간으로 향하는 헬레느.

바로 그 순간이었다.

“……?”

꿈틀꿈틀 기어 올라오는 덩굴들.

저것들이 다 무엇이란 말인가?

그녀가 믿기 힘든 표정으로 이안을 확인했다.

여전히 얼음 속에 갇혀 자신을 응시하는 모습.

‘저 안에서 마법을 쓸 수 있다고?’

사방에서 치솟은 수백 갈래의 덩굴들.

놈들은 마치 눈이라도 달려 있는 것처럼.

살아 있는 뱀처럼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술자로부터 하달 받은 붉은색 목표물.

그 목표물을 찾고자 했고, 오래 걸리지 않았다.

“미, 미친…….”

절로 욕지거리가 튀어나오는 상황.

수백 갈래 덩굴들이 그녀를 노렸다.

화르륵!

오직 헬레느를 향해 뻗어오는 덩굴들.

불꽃으로 모조리 불살라 버린 헬레느였다.

문제가 있다면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

태워도, 태워도, 또 태워도.

‘이게 뭐냐고!’

벌써 수 시간째 계속되는 술래잡기.

마나는 물론 근본적인 체력조차 떨어져간다.

피하고 불태우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 터.

이럴 경우 방법은 오직 하나뿐.

마법의 술자부터 박살을 내버리는 건데.

‘저게 어떻게 가능하지?’

정작 그 술자는 얼음 속에 숨어 있다.

마나를 얼려 만든 강력한 방어막.

본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야 할 마법.

이대로는 죽도 밥도 안 된다.

‘방법을 찾아야…….’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 방법이라는 것이.

“하아…… 하아!”

시간이 지날수록 가빠지는 헬레느의 호흡.

말라죽어간다는 느낌이 이런 걸까?

슬슬 체감이 되기 시작했다.

이 싸움, 이길 수 없다.

“이익!”

빈틈을 보이자 여실 없이 뻗어오는 덩굴들.

헬레느의 오른쪽 발목을 빠르게 휘감는다.

불꽃으로 태워 끊어버려도 소용없었다.

덩굴은 그보다 한발 더 빨랐으니까.

손목부터 발목, 몸뚱이까지 단숨에.

흡사 누에가 고치를 만들 듯.

“꺄아악!”

생전 처음 질러보는 비명.

생전 처음 맛보는 굴욕감.

지금껏 무엇을 했단 말인가?

대련의 상대는 털끝하나 건드려보지 못했다.

이 망할 놈에 덩굴하고만 주구장창 싸웠다.

마나와 체력이 바닥을 보일 때까지.

덩굴이라도 모두 불태워 버렸으면 다행이련만.

결국 잡혀 버렸다. 볼썽사나운 꼴을 한 채.

“도, 도대체…….”

상식이 통하지 않는 재능임은 알고 있었다.

그렇다한들 너무하지 않은가?

아이스 블록 속에서 의식을 가질 수 있다니.

하다못해 마법까지 사용하다니?

놀랄 일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하하.”

헬레느가 실없이 웃어버린 이유.

이안의 행동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해제되는 아이스 블록.

마침 저쪽도 마나가 다 떨어져서?

아니, 그럴 리는 없을 거다.

상황이 너무 절묘하다.

뚜벅. 뚜벅.

얼음에서 빠져나온 이안이 헬레느에게 다가왔다.

역시 아이스 블록은 자의로 풀어낸 것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토록 멀쩡할 리가.

“최초의 마법사, 최초의 마법사 하더니만.”

허탈함이 묻어나는 헬레느의 어조.

이제야 좀 그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직접 붙어보니 확실하게 느껴졌다.

상식 밖의 마법사라는 사실이.

“이번엔 졌어. 그러니까 이 더러운 덩굴부터 좀…….”

“아직.”

낮게 내리깔린 이안의 목소리.

아직은 부족하다. 확실하게 꺾어 놔야 한다.

비단 헬레느만을 특정한 얘기가 아니다.

이 대련을 지켜보는 마법사들에게.

‘내가 누구인지.’

젊은 마법사들은 그저 들었을 뿐이다.

고위마법사들이 펼친 신문을 통과했다고.

4클래스의 경지를 인정받았노라고.

하나 듣는 것과 보는 것은 다르다.

큰 차이가 있다.

“뭐, 뭘 하려고……?”

심상찮음을 느낀 헬레느가 물었다.

물론 이안의 입에서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묵묵히 오른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릴 뿐.

쭉 뻗어진 손바닥으로 마나를 끌어모았다.

“자, 잠깐만! 꼬맹아? 이안?”

급기야 호칭마저 정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만큼 절박했다. 이 상태로 고위급 살상마법을 맞았다가는 꼼짝없이 죽는다.

“이건 대련이라고! 대련! 멈추라니까!”

상아탑의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직감할 수 있었다.

쿠구구구궁……!

지금 이안이 불러내고 있는 마법.

지극히 복잡하고 기다란 술식.

불러오는 시간조차 한세월. 하나 위력만큼은 4클래스 최강의 주문.

“콜 라이트닝.”

한줄기 두터운 낙뢰.

그 강력한 번개가 상아탑의 옥상을.

포박된 헬레느의 위치를 단호하게 내리쳤다.

콰과광-!

두 눈을 질끈 감아버린 헬레느.

지켜보던 마법사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바닥을 이룬 백색 파편이 허공에 튀었다.

상아탑의 보호마법조차 흡수하기 힘든 위력.

저 번개를 맞고도 살아남았을 리가 없었다.

직격으로 맞았다면 말이다.

“……!”

헬레느가 천천히 두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바닥.

자신의 앞쪽 바닥이 훼손되어 있었다.

뿐이랴? 주변으로 검게 그을린 자국까지.

번개는 헬레느의 바로 앞에 떨어졌던 거다.

“허, 허어억! 허억!”

이제야 참았던 숨을 토해내는 그녀였다.

살았다. 어찌 되었든 살아남았다.

한데 왜 이렇게 심장이 뜨겁지?

아니, 뜨거워진 건 심장이 아니었다.

새까맣게 그을린 덩굴로부터 전해져 오는 열기.

덩굴이 아니었다면 큰 화상을 면치 못했을 터.

“그만.”

콜 라이트닝의 여파 밖에 서 있었던 이안.

작게 손짓하자 덩굴들이 헬레느를 풀어줬다.

그럼에도 주저 앉아버리는 그녀였다.

도저히 서 있을 수가 없었으니까.

“헬레느 님.”

이안이 주저앉은 헬레느에게 접근했다.

작게 속삭여도 들릴 만큼 가까이.

“오, 오지 마……!”

헬레느 자신도 모르게 내뱉은 외침.

그야말로 본능에 기이한 거부감.

“더 가르쳐 주실 것이…….”

하나 이안은 헬레느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쭈그리고 앉아 똑바로 바라봤다.

“남았습니까?”

격렬하게 고개를 저어 보이는 헬레느.

가르칠 것이 더 남아 있냐고?

대체 어떤 의미로 물어보는 걸까?

이해할 수도, 이해하기도 싫은 물음이다.

그저 한시라도 빨리 사라졌으면 좋겠다.

그래야 조금은 진정이 될 것 같다.

정체 모를 공포가, 쿵쾅거리는 심장이.

“그럼 먼저 내려가겠습니다.”

인사말과 함께 발걸음을 옮긴 이안.

그가 가까워지자 마법사들도 물러났다.

뒷걸음질이 모여 통로가 만들어진 상황.

그 통로의 뒤편으로 또 다른 이들이 보였다.

대선배라 할 수 있는 중장년의 마법사들.

몇몇 고위마법사와 탑주 허버트까지.

덩굴을 보고 뒤늦게 올라온 거다.

“죄송한데…….”

이안이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비켜주시겠어요? 제가 좀 피곤해서.”

얼떨결에 지나갈 길을 열어주는 그들이었다.

* * *

새로운 고위마법사가 헬레느를 꺾었다.

조용하기만 했던 상아탑에 새바람이 들이닥친 거다.

특히 젊은 마법사들에게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아이스 블록에서 마법이라니…….”

“그 정도면 거의 창조하는 영역 아니야?”

어딜 가나 이안, 이안, 이안 페이지.

그 마법사를 논하는 얘기들이 전부일 정도로.

하나 상아탑 전체가 시끄러워진 것은 아니었다.

“아직도 나오지 않는 건가?”

“예. 며칠째 식사도 거르시고…….”

“으음.”

고위마법사들의 개인연구실이 존재하는 19층.

그중 한곳만큼은 유독 조용하기 이를 데 없었다

조용함을 넘어서 침울함에 가까울 정도였다.

“이보게 헬레느. 내 말 들리는가?”

바로 헬레느의 개인 연구실.

노크와 함께 그녀를 부르는 탑주였다.

“자네 심정은 충분히 이해하네. 한다만, 계속 그러고 있을 수도 없지 않은가. 들어갈 테니 얘기를 좀 나눠보세.”

인자한 목소리와 함께 연구실의 잠금을 풀어버린 탑주.

그가 천천히 문을 열어 안으로 들어서자.

쨍그랑!

탑주를 향해 날아드는 술병. 순간적으로 발동된 실드 주문이 막아냈지만, 연구실의 상태는 생각보다 최악이었다.

“허허…….”

바닥에 굴러다니는 수십 병의 포도주병.

여기저기 깨진 채로 널브러진 유리잔.

책이고 뭐고 어느 하나 성한 부분이 없었다.

“헬레느.”

“나가요.”

“이러고 있어봐야 해결되는 건…….”

“나가라니깐!”

헝클어진 머리, 퀭한 얼굴, 풍기는 술 냄새.

그야말로 폐인이 되어버린 헬레느의 몰골.

단순한 패배의 후유증만은 아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굴욕적으로 패배했다.

꼴사나운 비명과 애원은 기본이었다.

한데도 파훼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기껏 해봐야 도망치는 게 전부라니?

하나부터 열까지 인정할 수가 없었다.

마지막 자존심마저 갈기갈기 찢어짐을 느꼈다.

“일단 술부터 반입시키지 말아야겠군. 정신 차리고 끼니부터 챙기게나. 마법사의 몸은 개인의 것이 아니야. 상아탑의 것이지. 잘 알면서 어찌 그러는가?”

“나가줘요. 제발…… 제발!”

“……알겠네. 내일 또 오도록 하지.”

당부의 말과 함께 연구실을 빠져나온 탑주.

“쯧쯧. 꼬락서니 하고는.”

그가 혀를 끌끌 찼다.

표정마저 구겨지기 시작했다.

너무 안일한 판단이었다. 거친 자로 하여금 기부터 꺾어놓고자 했다. 한데 기가 꺾이기는커녕 헬레느를 감당, 아니 저토록 박살을 내놓을 줄이야.

‘길들이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군.’

그날, 이안이 헬레느를 저리 만들었을 당시.

옥상에서 마주친 이안 페이지의 한마디.

길을 비켜 달라. 분명 그렇게 얘기했다.

탑주 본인을 포함한 선배 마법사들에게.

참으로 당돌한, 그 이상의 소년이 아닌가.

‘목줄이 어울리는 개가 아니라…….’

목줄은 개한테나 채울 수 있는 도구다.

사나운 맹수에게 채워봤자 반항만 하겠지.

틈만 나면 목줄의 주인을 물어뜯고자 할 거다.

‘늑대였던 겐가.’

새끼라 한들 길들여지지 않는 맹수.

그렇다면 얘기가 조금 달라진다.

더 이상 목줄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

본질적으로 다른 방도를 선택해야 할 터.

사나운 맹수 한 마리를 상아탑의 소유로.

아니.

‘나만의 도구로 만들기 위해서는…….’

보다 확실한, 비공식적인 술수.

고위마법사들조차 알아서는 안 되는.

그런 특별한 대우가 필요하리라.

‘시간이 꽤나 필요하겠구나. 시간이.’

이윽고 22층 탑주의 방에 도착한 허버트.

그곳에는 제법 익숙한 얼굴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셨어요?”

“황자전하.”

감히 탑주의 자리에 앉아 있는 소년.

5황자 라그나르 그린리버.

그 소년이 탑주를 반갑게 맞이했다.

“제가 많이 늦었습니다.”

“괜찮아요. 그보다 하던 말씀이나 계속해 주세요.”

“하던 말씀이라 하시면…….”

“이안 페이지, 그 마법사 얘기요.”

겉과 속이 전혀 다른 두 남자.

의외로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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