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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 피폐물 악녀, 남주에게 찍혔다-45화 (44/122)
  • @45화

    “예?!”

    생각지도 못한 발언에 알렉스의 동공이 터질 듯이 팽창했다. 락센 부부는 다시 없을 잉꼬부부가 아니던가? 소문으로는 락센 경이 자신의 부인을 위해 따로 연회장을 지었다던데. 락센 경이 라밀라 님을 버린다니? 알렉스는 믿을 수 없단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초대에 응하겠다 보내 둬.”

    “하, 하지만 락센 경이 초대장을 보낸 이유가 너무 노골적이지 않습니까?”

    “그대가 보기엔 무슨 이유 같은데?”

    그야 뻔하지 않은가. 밀러의 아버지이자 선대 대공을 들먹이며 밀러의 속을 긁는 동시에, 자신의 아내와 자신의 면을 세우기 위함이 아닌가. 알렉스가 확신에 찬 얼굴로 입을 떼려던 순간 밀러가 낚아챘다.

    “라밀라의 과거를 그 많은 사람 앞에서 다시금 상기시키는 게. 진정 사랑하는 아내를 두고 할 짓인가?”

    “아…….”

    “새로운 여인이 생겼나 알아봐. 필히 있을 테니까.”

    밀러는 제 앞으로 도착한 연회 초대장들을 한쪽으로 밀어 뒀다.

    “하, 하지만. 각하께서 락센 경의 초대에 응하시게 되면 다른 연회에도 참석하셔야 할 수도 있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밀러의 불안 증세가 악화할 때마다 보인 비슷한 양상을 띠는데. 그건 한꺼번에 많은 인파에 시달릴 때이다. 특히 연회 시즌에 얼굴이 비친 적도 드무니, 많은 귀족이 밀러를 보기 위해 몰려들 게 뻔했다.

    “그대가 무얼 걱정하는지 아니까, 그만해 두고 락센 경의 새로운 여인이나 찾아봐.”

    밀러는 무심한 표정에 입꼬리만 올려 알렉스를 다독였다.

    * * *

    “난 그대가 이토록 시간 약속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인 줄은 또 몰랐어.”

    정확히 9시 30분을 가리키는 시계를 보며, 밀러는 린느에게로 다시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린느는 헤헤 웃으며 어정쩡한 자세로 제 자리에 앉았다.

    린느의 책상을 밀러의 집무실에 들인 지 3일이 지나서야 책상의 주인을 찾았으니. 밀러는 어이가 없는지 헛웃음을 뱉었다.

    “지난 일은 덮고, 오늘부터는 진심으로 임하길.”

    “그럼요! 저는 늘 진심이에요.”

    “……그래.”

    평소라면 잔소리만 애국가처럼 4절을 외울 텐데, 웬일인지 밀러는 흔한 잔소리도 뱉지 않았다. 하지만 이게 더 무서운걸…. 린느는 책장 앞에서 두꺼운 책 여러 권을 꺼내는 밀러의 뒷모습에 시선을 뺏겼다. 웬만한 성인 남자도 까치발을 짚고 꺼내야 할 두꺼운 책을, 밀러는 간식 통을 숨기는 부모님처럼 능숙하게 꺼내 들었다. 그의 왼손에 두꺼운 책이 차곡차곡 쌓였으나, 그는 장바구니를 채우는 사람처럼 무신경했다.

    “이 정도면 되겠군.”

    “설마 그거 다 제가 읽을 책은 아니죠?”

    밀러는 책을 자신의 집무 테이블 위로 올려 두며, 그녀의 물음을 가볍게 피했다.

    “꿈은 크게 잡는 게 좋지.”

    아, 그럼 그렇지. 상대가 얄밉기 그지없는 대공 각하라는 걸 그만 잊어버렸네요! 린느는 입술 쭈뼛댔다.

    반면, 밀러는 그녀의 포부 넓은 꿈에 그만 감탄을 삼켰다.

    ‘하기 싫다고 엄살을 피우더니, 막상 닥치니 열의가 생겼나 보군.’

    좋은 시작이다. 밀러는 그녀의 학구열에 칭찬하는 의미로 책 한 권을 가져다줬다.

    “개정된 귀족법과 간단한 세법들이 적혀 있으니, 읽어 두는 게 좋을 거다.”

    “간단한 세법도 있어요?”

    세상에 간단한 법이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물론, 밀러 그에게는 간단하고도 쉽겠지만.

    “이 정도 세법은 12살에 마쳤다.”

    “아, 넵.”

    세상에 어떤 12살이 법을 공부하나. 그러고 보면 빙의됐다고 마냥 좋은 것도 아닌가 봐. 적어도 현생에서 12살이 법을 공부하고 깨우친다면 인터넷이나 방송 프로그램에 나오지 않겠어? 린느는 두꺼운 책을 들여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눈대중으로 보면 숫자밖에 없으니 어려울 수밖에 없어. 뭐든 그래.”

    “…각하께서도 어려웠어요?”

    순간 밀러의 눈동자가 아주 미세하게 움찔했다. 실은, 12살이 아니라 10살에 마친 학문이었으니. 어렵다고 하기엔 무리가 아닌가.

    “아니죠? 각하께선 처음부터 쉬웠던 거죠?”

    “아니다.”

    “각하께선 12살에 세법을 마치셨지만, 거짓말은 여전히 엉터리예요.”

    “여전히라니.”

    “지금도 이렇게 거짓말에 서투신데, 어릴 땐 얼마나 더 서툴렀겠어요? 그러니 여전히 거짓말에 엉터리인 거죠.”

    깜찍한 발상에 밀러는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반면, 그가 웃자 린느의 안색이 다시 굳었다.

    “죄송해요. 실언했어요.”

    “실언 좀 하면 어떻다고.”

    원작에선 실언 좀 했다고 사람 머리도 댕강댕강 잘 자르시던데요? 린느는 입이 가려웠으나 말을 말았다. 그래도 밀러가 직접 저런 말을 해 두니, 오전부터 내내 불안했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화난 게 조금 풀렸나 봐. 기분 나쁜 것도.’

    고용주 눈치 보기 힘든 건, 현생이나 빙의된 인생이나 똑같구나. 린느는 책을 끌어와 목차를 펼쳤다.

    “그럼 수업하실래요?”

    “그 책은 그대가 틈틈이 읽다가 모르는 게 있으면 물어보러 오라고 준 거다.”

    “네? 그럼 수업은요?”

    “그대에게 안성맞춤인 수업이 때마침 오늘 아침에 도착했어.”

    “제게 안성맞춤인 수업도 있어요?”

    린느는 느릿하게 말끝을 흐렸다. 도대체 무슨 수업이기에 린느에게 안성맞춤이란 말인가. 불안감이 뭉근하게 차올랐다. 그리고 밀러는 말보단 행동으로 보여 주는 사람이 아니던가.

    텁.

    그는 구석에 밀려나 있던 초대장을 들어, 린느에게 건넸다. 평소라면 와서 가져가라 할 남자가, 직접 다정까지 떨며 건네주는 모습에 린느는 공손하게 양손 검지와 엄지로 편지를 받았다.

    “루텡라스 클라메린 락센?”

    이 오두방정다운 이름은 또 뭐람? 이름만 봐서는 어디 머나먼 제국의 초대 황제의 이름 같은데? 게다가 처음 보는 이름에 린느는 고개를 갸웃댔다.

    “그대도 알다시피 연회 시즌이니, 대공저로 초대장들이 쏟아지는 건 당연한 거지.”

    원작에서도 언급된 부분이었다. 이맘때쯤, 제국의 온갖 귀족들이 자신의 저택에서 연회를 개최하여, 자신의 부와 명예를 자랑하기 바쁘다는 그 ‘연회 시즌’ 말이다.

    개최자는 자신 혹은 선대 귀족과 안면을 튼 가문에게 초대장을 보내, 주최자의 초대에 응한 귀족 라인업을 두고서 연회 주최자의 명예를 따지고 드는…… 한마디로 머리 아픈 짓이었다.

    그리고 그 효율적이지 못한 머리 아픈 짓에 밀러가 동참할 리가 없지 않은가. 게다가, 그는 불안 증세를 앓고 있으니 더더욱 초대할 리가 없다.

    “각하께선 참석하실 건가요?”

    린느는 초대장을 빤히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이 초대장의 주인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심심한 위로를…….

    “응. 그대와 함께 가려는데 시간 되나?”

    그의 물음에 린느는 거추장스러울 만큼 화려한 초대장에서 밀러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린느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시간이 안 되나?”

    “아, 아니요? 안 될 게 뭐 있어요? 저야 늘 대공저에 붙박이처럼 붙어만 지내는걸요?”

    그것도 그녀 앞에 있는 잘생긴 누구 때문에 말이다.

    “그럼 드뷔르 의상실 마담을 불러오면 되겠나?”

    “아, 아니요! 제가 직접 가서 맞출게요.”

    허락하고 싶지만, 당분간 미리안 아비의 움직임이 드러날 때까진 함부로 그녀 홀로 다니게 둘 순 없다. 혹시 있을 사고는 예방하는 게 좋으니까 조심해서 나쁠 것 없다.

    “그건 안 된다. 드뷔르 의상실이 별로면 다른 의상실 잡지를 구해다 주지.”

    “번거롭게……. 알았어요!”

    그래도 연회가 어디인가! 이게 도대체 얼마 만의 연회인지! 섀르넌이 주최한 연회장에서 고작 몇 시간 논 게 다가 아닌가.

    ‘이번엔 아주 뽕을 빼고 온다, 진짜.’

    이번 기회를 놓치면 또 언제 연회장에서 콧바람을 쐴지 모른다. 그러니, 최대한 오래 그리고 재미있게 즐기고 와야 할 터. 린느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더니, 허공을 향해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그녀의 청록색 눈동자엔 이채마저 돌았으니. 대단한 결심이었다.

    “몇 시에 가서 몇 시에 돌아와요? 아니지, 몇 명쯤 참석하는 연회예요?”

    기대에 부푼 그녀가 여러 개의 질문을 던지자 밀러는 픽, 웃음을 흘렸다. 새로운 환경과 새로운 사람들을 좋아하고 적응하는 것도 능력이다. 그것도 밀러 그가 가지지 못한 능력 말이다.

    “글쎄. 몇 명쯤 참석할지는 주최자의 역량이라 내가 알 순 없어. 다만, 락센 경이 술과 사람을 좋아하니 규모는 꽤 클 테지.”

    “오오…. 완전 좋아요!”

    벌써 청록색 눈동자에 활기가 띤다. 원래도 생기가 넘치는 눈동자이지만, 요즈음엔 자못 심심해 보이기도 했으니. 밀러도 그녀의 웃음에 스며들어 옅은 미소를 지었다.

    “낮에 출발하면 시간에 맞춰 딱 도착할 수 있을 거고.”

    황홀하다. 새로운 영지에 방문하는 것도 신나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수도 있다니!

    “감사해요! 저 정말 말썽 피우지 않고 조용히 즐길게요!”

    “아니, 말썽 피워도 좋고, 시끄러워도 좋다. 그대 마음대로 즐겨.”

    린느는 그의 대답에 벙찐 얼굴로 바라봤다. 이건 마치, 시험 기간에 공부도 안 하고 노는 아들에게 계속 공부하지 말고 놀라며 타박하는 부모님 같은데……. 린느는 재빨리 웃음기를 없애고 힐끔힐끔 밀러의 눈치를 살폈다.

    “그 연회의 주인공이 그대라 여기고 즐겨도 좋다.”

    “저어…… 각하, 저한테 화나신 거 아니시죠?”

    “아까부터 계속 그 질문은 왜 하는 거지?”

    “자꾸 잔소리는 안 하시고 막 웃어 주시고. 원래라면 ‘쥐 죽은 듯이 내 옆에 딱 달라붙어 있어라.’라고 하셔야 하는데, 마음대로 즐기라고 하시니 불안해서요.”

    그 잠깐 사이에 근엄한 척, 밀러의 목소리와 표정까지 따라 하며 말하다니. 그는 그만 실소를 뱉었다.

    “그대가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화를 낼 이유가 없지. 웃지 않을 이유도 없고.”

    “하지만 그래 오셨잖아요.”

    몇 마디 되지도 않는 말이건만, 린느의 말이 얼음송곳처럼 날카롭게 번뜩였다. 그는 죄책감에 심장이 쿵 하며 울렸다.

    “……오해다. 앞으론 그럴 일 없으니 그대도 편히 해.”

    “…정말요?”

    “그래.”

    린느는 그의 대답에 배시시 웃으며, 콧노래까지 흥얼거렸다. 그때, 린느가 밀러를 향해 천진하게 물었다.

    “혹시 공작님도 그 연회에 참석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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