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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 피폐물 악녀, 남주에게 찍혔다-43화 (43/122)
  • @43화

    아침 정찬 준비에 한창인 사용인들의 입에서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들 중심에는 오늘도 메이드복을 입고서 나타난 린느가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대공저에서 젊은 날을 보낸 베테랑 사용인처럼 능숙하기 그지없었다.

    “세상에, 아가씨! 그건 무거우니 저희한테 맡기세요!”

    “그래요! 준비를 거의 마쳤으니, 그만 환복하고 오세요. 그러다 또 각하께 한 소리 들으십니다. 네?”

    그들의 만류에도 린느는 제 몸통보다 널찍한 은쟁반을 잘도 구슬려 다뤘다. 유명한 프랜차이즈 횟집부터 결혼식장 뷔페, 유명 패밀리 레스토랑 알바까지 섭렵한 그녀에게 이 정도는 일도 아니었으니. 사용인들은 린느의 빠른 손과 군더더기 없는 일 처리에 넋마저 뺐다. 넬 부인은 그들 사이에 묻혀, 조용히 린느를 응시할 뿐 거들거나 뺏지도 않았다. 그저 신기한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자! 여기까지 마무리했으니 전 이만 드레스로 갈아입으러 갈게요!”

    마지막 메인디쉬 세팅까지 마친 후에야 린느는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그런 그녀를 넬 부인은 말없이 응시했다.

    ‘하여튼 이상해. 다른 아가씨들처럼 얌전이나 빼지, 참나.’

    넬 부인은 린느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자리를 벗어나지 않고, 고개만 갸웃거렸다.

    덜컥.

    뜨거운 김 서리가 앉은 부엌에서 나서자마자, 차가운 공기가 린느의 동그란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식혔다.

    “이럴 줄 알았지.”

    “허.”

    로비로 나오자마자, 아침 바람을 쐬던 밀러와 딱 마주쳤다. 평소 겹겹이 정갈하게 차려입은 수트 차림과 달리, 흰 셔츠에 정장 바지만 차려입은 그는 내추럴한 머리에도 오히려 날카로운 눈빛이 빛났다. 마치, 대공저를 가로지르는 매서운 바람의 주인이 밀러 자신인 것처럼 고독하고도 우아했다. 동시에 그의 눈그늘은 오늘따라 더 깊었으니, 린느는 오늘은 얌전하게 하루를 보내리라 다짐했다.

    “어떤 후계자가 부엌일을 공부하려 할까. 바로 그대뿐이겠지.”

    노동에 급을 매기며 하찮은 일과 고귀한 일을 나누기 좋아하는 귀족들이 천지이거늘. 린느는 노동에 급을 매기지 않고 직접 행동으로 보이는 사람이다. 요즘처럼 개나 소나 귀족이라며 목에 힘주기 바쁜 하등한 것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정직한 여인이 아닌가. 그런 그녀를 자신의 가신으로 뒀다는 사실이, 제 눈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한 듯하여 밀러는 내심 기뻤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잖아요? 그러니 부엌일이야말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부엌일이 뭐 어때서? 대공저에 후계라니 얌전 빼며 집무실에서만 지내야 하나? 린느는 말을 덧대고 싶었지만, 평소보다 밀러의 안색이 좋지 않아 그만 입을 꾹 다물었다.

    “더 말해도 좋아. 뭐든 말해 봐.”

    난데없이 뭐든 말해 보라는 주문에 린느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눈동자를 도르르 굴렸다. 게다가, 평소엔 남 비웃을 때나 올리던 입꼬리를 뭐 저렇게 자애롭게도 웃나? 린느는 밀러의 눈치를 살피기 바빴다.

    ‘화가 났나……?’

    하긴, 메이드복을 뺏긴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 메이드복 차림으로 만났으니 화날 수밖에! 린느는 한층 부드러운 얼굴로 말했다.

    “아시다시피, 의식주가 가장 중요하잖아요? 그중에서도 식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되어, 사용인들과 친해질 겸 부엌일을 조금 배운 거뿐이에요.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먹고 사는 게 제일 중요하니까… 요?”

    그녀의 말대답은 늘 나름의 철학이 담겨 있으며, 가끔은 밀러의 허를 찌르기도 하니. 그녀의 말대꾸는 일상에서 그의 머릿속을 콕 찌르고 도망가길 반복한다.

    그녀의 말대로 교장 선생님의 집처럼 지루한 집무실에 종일 지루한 업무를 볼 때도, 황실에 들러 황태자와 담소를 나누며 찻잔을 기울일 때도, 뜨거운 목욕물에 피로를 덜어낼 때도. 시도 때도 없이 밀러의 입꼬리를 간지럽혔다.

    그런 귀여운 말대꾸에 밀러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린느는 눈썹을 굽이치며 짧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긴 요즘에 하지 말란 짓만 골라서 하긴 했지. 그녀는 난감한 표정으로 조심스레 입을 뗐다.

    “화나셨어요?”

    “……전혀.”

    아닌데, 화난 게 분명한데. 그렇지 않고서야 화났냐는 물음에 기겁하며 한껏 올라간 입꼬리를 뚝 내려놓을 리가 없잖아? 린느는 잠시 텀을 두고 예의 바르게 말했다.

    “안 그래도 환복하려던 참이었어요. 그럼 이따 정찬실에서 봬요.”

    린느는 그의 눈치를 살피며 도망치듯 제 방으로 향했다. 그 탓에 밀러는 그녀에게 메이드복도 잘 어울린단 말은 꺼내지도 못했다. 어제부터 내내 말하고 싶었지만, 목에 커다란 씨앗이라도 걸린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제는 뒷마당에서 일하는 인부들을 도와주다가 걸렸으니, 오늘은 부엌에서 아침 준비를 도와주고 있을 거라는 추리까지도 맞췄지만. 정작 린느와 대화할 기회를 잡았지만, 정작 린느가 그에게 시간을 허락하지 않았다.

    ‘…….’

    밤새 생각하고 생각한 방법이 수포가 되었다. 해가 뜨자마자 잠긴 목소리를 가다듬고 칭찬하는 방법까지 연습했건만. 이 역시 수포로 돌아갔다.

    원래도 발 빠른 여인이지만, 오늘은 마치 사냥꾼에서 쫓기는 토끼처럼 중앙계단을 이용해 사라지지 않았는가. 밀러는 민망하게 뻗어 있던 손을 거두고, 중앙계단을 바라봤다.

    “각하, 아침에 도착한 우편물을 정리하여 집무실 테이블에 올려 뒀습니다. 곧, 연회 시즌이라 그런지 초대장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바람도 이렇게 잽싸지 않겠지. 아니, 마치 바람과 같은 여인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손에 쥐기 힘들까? 단순 오늘만의 일이 아니다.

    그녀를 쥐려 들면 사라지고, 어렵사리 잡아도 언제 사라질까 늘 조바심 나게 하는 여인. 마치 철없는 아이가 반딧불이를 쫓듯. 오늘도 그는 떠난 린느의 흔적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정리한 우편물 중에 하이레니아 후작가에서 도착한 우편물도 있었습니다. 올해는 연회 참석이 불가피할 거 같습니다….”

    밀러는 반딧불이를 발견한 아이처럼 린느가 지나간 중앙계단에 시선을 꼭 고정했다.

    “……각하?”

    반딧불이에 홀린 아이가 사냥을 마치고 주먹을 펼쳤을 때는, 텅 빈 손바닥이 짓궂게 아이를 놀린다. 그의 심정이 딱 그 심정이리라. 밀러는 멍한 눈으로 텅 빈 손바닥을 바라봤다.

    며칠 전, 그녀의 머리칼을 매만진 손이었으며, 마차에서 내리는 그녀의 손을 잡아 준 손이었다. 그리고, 두려움에 찬 그녀에게 내민 손이었다. 그런 그의 손이 갈증이라도 느끼는지 헛헛해했다.

    그가 그녀의 눈동자와 닮은 청포도를 좋아하고 찾듯이. 이번엔 그의 손이 그녀와 맞닿은 곳곳을 그리워했다. 그에게는 한없이 생경한 감정이었다.

    그는 그제야 깨달았다. 제 손끝과 심장이 그녀를 원한다는 것을.

    * * *

    “린느 님!?”

    미리안의 목소리에 린느가 핑그르르 돌아섰다.

    “어! 미리안 님!”

    미리안은 린느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심장께를 부여잡았다. 귀여운 메이드복과 어울리는 것도 어울리는 거지만…….

    “리, 린느 님이 왜…….”

    “아, 이 옷이요? 아침에 부엌일을 하다 와서요! 지금쯤이면 얼추 마무리되었을 테니, 미리안 님 먼저 정찬실에 가 있으세요.”

    부엌일이라니, 이건 또 무슨 말인지! 미리안은 이해할 수 없어 어버버 댔다. 차라리 부엌일을 시킬 거라면, 린느가 아닌 미리안 자신에게 시키는 게 맞지 않을까?

    ‘도대체 린느 님께서 무얼 잘못하셨다고 부엌일까지 시키시는 건지…….’

    미리안은 멀지 않은 곳에서 정답을 찾은 듯이 나직이 탄식을 뱉었다.

    ‘나 때문이야. 나 때문에 린느 님께서 대신 미움받는 거야. 그날 내가 도망가려 해서…….’

    그리고 이런 허드렛일을 린느에게 시킬 수 있는 사람은 밀러뿐이지 않은가. 미리안은 속이 아픈 듯 미간을 찌푸렸다.

    ‘도대체 누굴 위해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아버지에게서 목숨을 살려 주신 건 고맙지만… 이건 너무 지나치잖아. 나도 린느 님도 이렇게 대공저에서 살게 해 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

    처음부터 미리안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그나마, 린느의 조언 덕분에 그리워하던 오라버니는 만날 수 있었으나. 그것뿐이었다. 결국, 미리안 그녀가 원하는 자유는 대공저에도 없었다.

    「할 말이 있다고.」

    「대공저에서 얼마나 더 지내야…… 할지 여쭙고자…….」

    「모른다. 때가 되면 말해 주지.」

    하지만 반년이 지나도록 그 ‘때’라는 건 다가오지 않았다. 애초에 처음부터 나갈 수 있다는 사실이 허상인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차라리 희망이라도 안겨 주지 말지.

    그런데, 그 잔악한 짓을 린느마저 겪게 된다면? 그것도 미리안 자신 때문에, 겪게 된다면?

    ‘지쳐서 죽을지도 몰라.’

    햇살 같은 린느는 말라 죽을 게 뻔하며, 내내 갇혀 지낸 탓에 미리안 그녀 자신도 함께 말라 갈 테지. 미리안은 밀러가 그녀의 본가로 금화를 보낸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처럼 화가 났다.

    지금, 이 순간에도 탐욕스러운 아비가 밀러가 보낸 돈으로 욕심을 채우며 지낸단 생각에 구역질이 났다. 우연이라도 아비와 마주친다면 그 탐욕에 찌든 돼지는 고맙다고 할 위인일 테지.

    ‘난 아버지 때문에 어쩔 수 없다 해도… 이곳에 린느 님까지 가둘 순 없어. 린느 님이라도 도망치게 할 거야.’

    미리안은 자신의 도망 대신에 린느의 도망을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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