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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 피폐물 악녀, 남주에게 찍혔다-46화 (45/122)
  • @46화

    눈앞이 아찔했다. 잠시나마 잊고 있던 최악의 방해꾼이 언급되다니. 밀러는 쓰디쓴 약초를 혀에 댄 사람처럼 미간을 찌푸렸다.

    “그건 왜 묻는 거지?”

    “그야, 각하께서 그나마 교류하시는 분이라곤 공작님뿐이잖아요?”

    코흘리개 3살짜리 제국민을 데려와도 이런 철없는 소리는 하지 않을 테지. 그것도 당사자인 밀러의 얼굴에 대고 ‘그나마’라는 단어까지 써 가며 이런 실언을 늘어놓을 자가 얼마나 되겠나.

    “그나마 교류하는 공작마저도 끊기게 생겼으니, 그런 이상한 말은 넣어 둬.”

    “왜, 왜요? 공작님은 성격도 좋으시고, 아는 것도 많으시고, 각하와 그나마 죽도 잘 맞는 분이신데요?”

    “착각도 유분수지. 공작과 죽이 맞는다니. 도대체 누구 입에서 시작된 말인가? 공작인가? 어디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밀러는 불쾌감을 선명하게 드러내며 미간마저 좁혔다. 아무리 섀르넌이 명망 높은 공작가의 가문주일지라도, 딱 거기까지.

    황족과 황족이 만나 이뤄진 페리하츠 대공가와는 비교조차 민망할 지경인 터. 밀러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린느를 빤히 바라봤다.

    그래, 모르면 이제부터 공부하면 된다. 그 정도 각오도 없이 그녀를 제 집무실에 들인 게 아니니까.

    “그대는 귀족과 그들의 가문을 무얼 보고 판단하나?”

    외모? 린느는 그 대답 말고는 딱히 떠오른 게 없어 입을 다물었다. 말도 안 되는 대답을 하느니, 차라리 입을 다무는 게 나을 테니까.

    “명망과 위신. 그대가 몸담은 페리하츠 대공가의 명망과 위신을 고작 공작가와 견주나?”

    우습군! 밀러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비록 섀르넌과 나이는 차이가 몇 살 나지도 않지만, 그와 같은 선상에서 비교될 위치는 아니었다.

    어수룩한 조무래기 소공자를 그나마 제 몫은 하도록 만든 게 누구인데! 밀러는 어이가 없는지 헛웃음을 연이어 뱉었다.

    그 어수룩한 꼴을 세르트 영애가 미리 봤더라면, 지금처럼 섀르넌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니지도 않았을 테지. 그것만은 자부한다.

    “린느, 그대는 대공가의 가신임을 잊지 말라.”

    “이, 잊은 적 없…….”

    “아, 내가 말을 잘못했군. 그러니, 공작과 친분이라도 나눌 생각은 꿈에서도 꾸지 말란 뜻이었다.”

    꿈이라도 꾼다면, 내가 악몽으로라도 그대를 찾아갈 테니. 밀러는 노기 어린 숨을 푹 뱉으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린느는 그런 그를 당혹감에 젖어 빤히 바라봤다.

    ‘왜, 왜 저렇게 화를 낸대? 아싸인 게 뭐 창피한 일이라고.’

    새삼스럽기도 해라! 친우가 섀르넌뿐이라고 말한 게 그렇게 창피했나? 쓸데없이 섀르넌 험담을 이어갈 게 뭐람. 두 사람 사이가 얼마나 견고한지는 린느 그녀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원작 처음부터 끝까지 밀러의 곁을 지킨 건, 섀르넌뿐이었으니까. 그만큼, 밀러 역시 섀르넌을 아끼고 지지해 줬으니 가능한 관계였다. 그런 공작이 이번 연회에 함께 참석해 준다면, 밀러에게 도움이 될까 싶어 물어본 거였는데…….

    ‘괜히 조금 나아졌다고 무리하는 거 아니야? 규모도 큰 연회장이라면 귀족들도 많을 텐데.’

    그렇기에 섀르넌도 함께 참석하냐 물은 것뿐이었다. 밀러의 불안 증세를 아는 사람이라곤 섀르넌 하나뿐이니까. 그런데, 고작 그 질문에 저렇게 성난 아이처럼 굴 일이냔 말이다.

    린느는 턱을 괴고선 초대장 여기저기를 살폈다.

    ‘아무래도 이름이 특이한데 모르겠단 말이야? 음.’

    린느는 골똘히 생각에 잠긴 채 초대장을 빤히 바라봤다. 그렇게 들여다본다고 당장 떠오르진 않겠지만, 그게 최선이었다.

    “각하?”

    “말해.”

    평소라면 성의 없이 턱짓으로 대답할 그가 아닌가. 그는 하던 일도 멈추고 린느를 바라봤다. 그런 그의 주목은 꽤 생경했다.

    “그으… 미리안 님도 동행하시죠?”

    “미리안은 참석하지 않겠다 했어. 안나와 할 일이 있다나.”

    “정말요?”

    “차라리 대공저가 미리안에겐 더 안전할 테니 걱정할 거 없다.”

    린느는 주춤거리며 물어보길 꺼렸으나, 동시에 물어보고 싶은 게 많은 표정이었다. 그러자, 밀러는 그런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어볼 게 있으면 물어봐. 눈치 보지 말고.”

    “아직, 미리안 님의 아버지는 못 잡은 거죠?”

    “미리안이 대공저에서 지낸다면, 못 잡을 거 없어.”

    미리안을 백작저에서 구출한 후, 밀러가 두 달가량 미리안의 이름으로 그녀의 본가에 돈을 보냈다. 대공저의 이름을 달아서 돈을 보냈다가는 자칫, 지참금이란 이름으로 변질할 수 있기에 미리 손을 써 둔 터였다.

    밀러의 예상대로 미리안의 아비는 미리안이 보낸 돈이 어디서 어떻게 제 손아귀로 들어왔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심지어, 미리안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도 궁금해하지도 않았으니. 그의 목적은 오로지 돈이었다.

    하지만 그 지독한 작자도 자신의 딸을 궁금해하기 시작했으니. 밀러가 석 달째부터 돈을 보내지 않은 탓이다.

    그는 밀러의 눈치를 살피며, 아비라는 인두겁을 쓰고 미리안에게 서신을 보내기도 했다. 겉으로 보기엔 부정 깊은 아비가 딸에게 보내는 편지처럼 보였으나, 실상 그곳에 담긴 내용이라곤 오로지 돈뿐이었다.

    밀러는 그에게서 도착한 편지들을 모조리 불태웠고, 대공저에 그녀의 아비를 잡기 위한 덫을 설치했다.

    “돈을 좋아하는 자에게 돈을 끊었으니, 돈에 눈이 멀어 길을 잃고 여기까지 오겠지. 죽을 자리인지도 모르고.”

    몇 달이 지나도 대공저에서 돈이 나오지 않으니, 미리안의 아비는 차라리 밀러가 자신의 딸을 내쫓길 바랐다. 그러나 밀러가 미리안을 내쫓지도 않자, 그녀의 아비는 미리안을 납치하기 위해 괴한을 풀었다. 하지만 미리안이 대공저에서만 지내는 바람에 그마저도 녹록지 못했다.

    그렇다고 그가 포기할 리가 없다. 돈이 되는 미리안을 쉬이 포기할 작자가 아니니까.

    오랜 기간 폭력에 노출된 미리안이 자신의 말이라면 겁에 질려 모조리 응할 거라는 알량한 자만심과 함께, 이 대공저에 발을 들일 것이다.

    그럼, 그때를 놓치지 않고 그 악독한 종기를 떼어 내면 된다.

    “그러다 우리가 연회에 참석한 날 오면 어쩌시려구요?”

    밀러는 그녀의 물음에 그만 웃음을 터트렸다. 비아냥이나 실소가 아닌, 대공자처럼 천진한 미소였다.

    “잔걱정이 많은 성격이었던가? 그건 몰랐어.”

    “원래 거의 끝나갈 때쯤 악당이 나타나서 훼방을 놓잖아요.”

    “악당의 기준을 조금만 더 높이는 게 어때? 그깟 게 악당 구실은 하겠나?”

    “그럼 대공님 정도면 악당으로 최고겠죠?”

    “내가? 내가 악당이라 했나?”

    속으로 말한다는 게 그만 입으로 말했네. 린느는 장난스레 웃었다.

    “쓸데없이 대공저가 넓기만 한 것도 아니니, 그런 걱정은 넣어 둬. 타국의 침입 정도면 모르겠군.”

    상상력도 좋다는 말과 함께, 밀러는 다시 만년필을 집었다. 그의 널찍한 어깨가 왠지 무거워 보이는 건 린느만의 착각이었다.

    ‘하긴, 그 정도는 되어야 대공가겠지. 그럼 조금만 더 참으면 미리안 님은 자유의 몸인 거네? 으, 어서 망할 백작이 찾아왔으면 좋겠다.’

    미리안이 그토록 바라던 자유가 코앞에 다가왔음에 린느는 제 일처럼 기뻤다. 미리안이 대공저에서 당장 떠난다면 조금 아쉽긴 하겠지만, 티끌의 망설임도 없이 기뻐해 줄 수 있다.

    설령, 그녀가 떠나도 린느는 대공저를 떠날 수 없는 사정일지라도 말이다. 하지만.

    ‘밀러는 괜찮을까?’

    미리안을 떠나보내야 할 때, 그가 그녀를 제대로 놔줄 수 있을까? 원작이 꼬인 지는 오래되었지만, 그래도 두 사람 사이는 원작 여주와 남주 사이이니 이어질 가능성이 더 크지 않을까?

    쓸데없는 물음을 늘어놓을수록, 린느의 기분이 한껏 흔들렸다.

    마치, 폭풍우에 이제 막 머리를 세운 작은 꽃망울처럼 작지만. 비록, 폭풍우에 겁에 질려 쏙 숨어들 만큼 아슬아슬한 모습이었지만. 그건 그녀의 확연한 감정의 흔적이었다.

    이래서 사람은 가까이에서 자주 보면 안 돼. 린느는 잘게 도리질을 하며 섀르넌의 얼굴을 기억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자신과 함께 있는 저 남자가 그녀의 머릿속에 기억된 섀르넌마저 지운 것처럼. 종일 섀르넌의 얼굴은 떠오르지 않았다.

    * * *

    ‘기억이 안 나.’

    일과를 마치고 뜨거운 물을 받아 목욕한 후에도, 늘어지게 푹 자고 일어났음에도 섀르넌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 드뷔르 의상실 마담이 다녀간 후에도 섀르넌의 얼굴은 떠오르지 않았다.

    락센 경의 저택으로 떠날 시간이 가까워지자, 린느 역시 준비할 게 많아져 섀르넌은 가볍게 뒤로 미뤄 뒀다.

    “아가씨, 오늘은 일찍 쉬세요. 무리하다가 늦잠 주무시지 말구요.”

    “이제 몇 명 안 남았어. 누군 써 주고 누군 안 써 주면 너무 서운하지 않겠어?”

    “아가씨도 참…….”

    메리는 린느의 머리칼을 천천히 빗어 내리며 흐뭇한지 미소를 지었다. 고작 하루면 돌아올 연회이건만, 린느는 이런 때를 핑계로 대공저 사람들과 친해져야 한다며 며칠 내내 한 줄 편지를 썼다. 작은 협탁 위에 올려진 나무 바구니 안엔 며칠 동안 그녀가 적은 편지가 수북했다.

    “그런데 아가씨 정말 똑똑하신 거 같아요. 각하께 사용인 리스트를 빌려올 생각은 어떻게 하셨어요?”

    “그거야 쉬워. 아버지 집무실에서 종종 봤거든. 별걸 다 리스트로 만들어 놓으셨더라?”

    “그래야 주급 챙기기도 쉬우니까요. 하여간, 우리 아가씨 너무 똑똑하셔!”

    메리는 거울 너머로 린느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사랑스럽게 올렸다. 린느는 그런 메리에게 올해 연말에는 장문의 편지를 써 주겠단 약속도 잊지 않았다.

    [루비에게, 내가 없는 동안 메리와 청포도밭에 다녀와 볼래? 거기 예쁜 꽃도 많고 보기 좋더라. 물론, 연회 다녀와서 나도 함께 가는 거야! -린느가-]

    [셰프님께, 유능한 부엌 보조는 잠시 출장을 다녀오겠습니다. 셰프님 덕분에 입맛이 까다로워져서 걱정이네요. 연회장에서 쫄쫄 굶으면 어쩌죠? 다녀와서 셰프님 음식 다 먹을 거예요! -셰프님의 팬-]

    린느는 편지를 쓰는 동안 콧노래가 끊이지 않았다. 마지막, 가장 어려운 넬 부인에게도 편지를 적은 후에야 린느의 방 불이 꺼졌다.

    수학여행 떠나기 직전의 아이처럼 린느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고, 드디어 연회 당일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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