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제1장 푸른 거탑(2)
똑. 똑. 똑.
“지대장입니다.”
“들어와.”
나는 대대장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대대장은 편한 활동복 차림으로 책상에 앉아 있었다.
대대장의 이름은 김진섭으로,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어르신처럼 피부가 까무잡잡하고 거칠었다.
키는 작았으나 다부진 체격이 인상적인 사내였다.
대대장과 단둘이 마주한 것은 임관할 때 얼굴을 비친 것을 제외하면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더 예감이 좋지 않았다.
대대장이나 나나 피차 서로를 신경 쓰는 사이가 아니었으니까.
“피곤하실 텐데 아직 퇴근 안 하셨어요?”
나는 살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군대에서는 쓰는 다, 나, 까 말투는 군의관인 내게는 통용되지 않았다.
군의관이란 군인보다 군인의 탈을 쓴 민간인에 가까웠으므로 누구도 군의관의 말투나 호칭으로 시비를 걸지 않았다.
“오늘은 저녁 늦게까지 처리할 일이 있었어. 거기 앉게.”
내가 소파에 앉자 대대장도 책상에서 일어나 소파에 앉았다.
“군대에 들어오니까 시간도 안 가고 따분하지?”
“대대장님 앞에서 말하긴 부끄럽지만 아니라고는 못하겠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도 적고, 해야 할 일도 적어서 왜 여기에 있어야 하는지 의문이 들 때가 많아요.”
“그만하면 자네는 꽤 괜찮은 사람인 편이야.”
“어떤 점에서 말입니까?”
“자신의 역할을 회의하고 고민하고 있으니까.”
대대장은 그가 지금까지 만난 군의관들의 특징을 언급했다.
게으르고, 놀기 좋아하고, 책임지기 싫어하는 군의관들의 행실을 신랄하게 꼬집었다.
대대장이 특히 싫어했던 인물은 나 바로 전에 있었던 지대장이었다.
8개월 전 행군 도중 병사 한 명이 열사병으로 사망하면서 부대가 발칵 뒤집혔다는 것이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어요. 그냥 3년 동안 푹 쉬고 간다고 생각하면 되니까.]
인수인계를 해 주고 떠났던 전 지대장을 떠올리며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열사병으로 사망한 환자의 구체적인 사망 이유나 당시 상황을 나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환자 사망에 전 지대장의 안일한 태도가 한몫했음은 부정할 수 없을 듯했다.
이 한심한 인간아.
푹 쉬는 건 네 자유인데 최소한의 할 일은 다 해야지.
만약 전 지대장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었다면 나는 그가 뼈도 못 추리도록 몰아붙였을 것이다.
네 밑에서 병사가 죽었는데 그걸 지금 인수인계라고 하는 거냐고.
“진급에 불이익을 받으셨겠군요.”
“당연히 받았지.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울화가 치밀어. 그 뻔뻔한 놈이 내 오랜 농사를 망쳐 버렸으니까.”
전 지대장을 언급하는 대대장의 얼굴은 어느새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런데 어쩐 일로 저를 호출하셨습니까?”
대대장의 이야기를 들어 주던 내가 본론을 꺼냈다.
이 야심한 밤에 고작 하소연을 하고 싶어서 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호출의 이유가 궁금했다.
“뭐, 대단한 건 아니고 요새 몸이 안 좋거든. 간단하게 진찰을 받고 싶어서.”
“그거라면 제가 발 벗고 나서야죠.”
나는 강한 의욕을 드러냈다.
이번 사건으로 대대장의 신뢰를 받는다면 부대 내에서 내 치료 반경은 더욱 넓어질 것이다.
발이 아픈 병사들에게 활동화를 좀 더 신겨 준다거나.
허리가 아픈, 짬이 안 되는 허리 환자들이 누워서 쉬게 한다거나 등등.
병사의 건강이 대대장의 진급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면 대대장을 은근히 조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제 발로 굴러온 이 기회를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됐다.
“어디가 제일 불편하십니까?”
“으음… 빈혈기가 있는 것 같아. 요새 종종 어지럽고 몸을 가누기 힘들어. 피곤해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어지러운 순간이 구체적으로 언제인가요?”
“자고 일어났을 때와 업무 보고 일어났을 때가 특히 심한 것 같군.”
나는 차분하게, 그리고 꼼꼼하게 문진을 해 나갔다.
대대에서 엑스레이 촬영이나 피 검사를 할 수 있을 리 만무했기에 믿을 건 오로지 입뿐이었다.
질문하는 내 입과 대답하는 대대장의 입.
문진을 통해 과거력을 밝히는 도중 나는 대대장이 지방간을 앓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을 알아냈다.
현 증상과는 상관이 없는 영양가 없는 정보였다.
고혈압도 없고, 고지혈증도 없고, 당뇨도 아닌데 갑자기 빈혈이 생겼다라…….
딱히 의심되는 질환이 없어서 머릿속은 더 복잡해졌다.
대대장의 말대로 정말 단순한 빈혈인 걸까.
하지만 대대장이 정말 빈혈이라고는 해도 빈혈의 원인은 천차만별이거늘…….
“증상이 애매해서 지대장도 보기 힘들지?”
대대장이 후회 섞인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괜한 일로 나를 불렀다는 후회.
돌팔이 의사에게 뭔가를 기대한 내가 바보지, 라고 생각하는 후회.
대대장의 눈빛에 담긴 후회가 둘 중 어느 것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둘 중 뭐가 됐든 후회인 것은 마찬가지.
나는 대대장이 후회하게 내버려 둬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다.
대대장의 신뢰를 얻어 내 치료 반경을 넓힌다는 계획은 포기할 수 없었다.
짧지만 깊게 심사숙고한 나는 휴대폰을 손에 들었다.
의무병에게 연락해 구급함을 들고 대대장실로 오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곁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던 대대장이 호기심을 못 참고 물었다.
“뾰족한 수가 있을 것 같아?”
“네.”
내 대답은 모처럼 짧고 굵었다.
자신 있는 사람은 말을 길게 할 필요가 없었다.
* * *
김진섭은 지대장이라는 존재를 신뢰하지 않았다.
딱히 이믿음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만나온 지대장 전부를 신뢰하지 않았다.
그에게 군의관이란 말 안 듣고 뺀질뺀질 놀 줄밖에 모르는 출가외인이나 다름없었다.
어지럼증에 대한 진료를 받기 위해 지대장을 호출했지만 사실 큰 기대도 없었다.
기대도 기대를 할 법한 사람에게나 기대를 해야 하는 법이니까.
군의관을 향한 신뢰도가 밑바닥인 것과는 별개로 현 지대장은 꽤 괜찮은 사람인 것처럼 보였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들이 좋았다.
우선 초소 회진을 적극적으로 다녔으며 병원 회진을 돌 때는 개인 승용차까지 운전해 가며 병사를 한 명이라도 더 병원에 데려가려고 한다고 했다.
그런 의욕 넘치는 활동이 과연 며칠이나 갈지는 의심스러웠지만.
“내가 어지러운 이유를 알았다고? 정말인가?”
김진섭은 지대장에게 한 번 더 물었다.
“어지럼증이라는 거 말이야. 이것저것 묻기만 해서 원인을 찾을 수 있는 거였냐?”
“…….”
“병원 가서 검사도 하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니야?”
질문하는 김진섭의 목소리에는 못 미더운 기색이 역력했다.
“지금까지 말씀해 주신 증상 중에 눈여겨볼 만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다행히도 그건 대대에서도 확인할 수 있고요.”
“자신감 하나는 마음에 드는군. 하지만 전 지대장도 자네와 똑같은 말을 했어. 열사병 환자가 쓰러졌을 때 본인이 살릴 수 있다고 했지.”
“말은 똑같아도 결과는 다를 겁니다. 곧 직접 확인하실 거예요.”
지대장은 여전히 자신만만했고, 김진섭은 여전히 지대장이 의심스러웠다.
지대장이 허세를 부리고 있는 걸까.
아니면 자신이 지대장을 과소평가하고 있는 걸까.
어느 쪽이 진실인지는 곧 밝혀지리라.
똑. 똑. 똑.
노크 소리가 들려 들어오라고 말하자 의무병이 대대장실로 들어왔다.
“단결!”
김진섭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의무병의 경례를 받았다.
의무병이 지대장 옆으로 가서 챙겨 온 구급함을 열었는데 구급함에는 소독약과 소독 도구, 약통과 거즈, 붕대 따위가 들어 있었다.
그의 치료와는 하등 상관없어 보이는 것들이었다.
“대대장님, 잠깐 침대에 누워 보시겠습니까?”
“설마 푹 자면 낫는다고 말할 생각인가?”
“그럴 거면 애초에 자장가부터 불러 드렸을 겁니다.”
지대장의 허를 찌르는 농담에 김진석은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런 상황에도 농담할 만큼 여유가 있단 말이지? 제법인데?
김진섭은 업무용 책상 뒤편에 있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지대장이 무언가를 손에 쥔 채 침대 쪽으로 다가왔다.
힐끔 훔쳐보니 지대장 손에 들린 물건은 수은 혈압계와 청진기였다.
“아까 혈압은 멀쩡하다고 하지 않았나?”
“말은 잠깐 삼가시고 제 지시를 따라 주세요. 제게 딴지를 걸려고 부른 게 아니라 제게 치료를 받기 위해 부르신 거잖아요?”
맞는 말이라서 따지고 들 건덕지가 없었다.
김진섭을 입을 꼭 다문 채 지대장이 시키는 대로 했다.
누워 있을 때 혈압을 재고 곧바로 몸을 일으킨 후에 또 혈압을 쟀다.
김진섭에게는 마냥 신기한 혈압 측정법이었다.
보통 병원에서는 기계로 혈압을 한 번 재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지대장은 왜 누워서 한 번 재고, 또 일어서서 한 번 더 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역시 제 예상이 맞았네요. 누워서 혈압을 측정할 때와 서서 측정했을 때 혈압 차이가 많이 납니다.”
“…….”
“수축기 혈압에서 25mmhg 이완기 혈압에서 15mmhg 정도로요.”
지대장이 혈압계를 제거하고 청진기를 벗으며 말했다.
뭔가 묵은 때를 벗겨 내서 시원하다는 표정이었다.
“대대장님은 기립성 저혈압입니다.”
진단명을 듣고서 김진섭은 미간을 찌푸렸다.
기립성이라는 단어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저혈압이라는 말은 얼토당토않은 것처럼 들렸다.
매년 건강 검진을 받을 때마다 그는 항상 정상 혈압을 유지하고 있었다.
“난 정상 혈…….”
“대대장님, 제 이야기를 먼저 들어 주세요. 대대장님이 정상 혈압인 건 아는데, 이 저혈압은 일반 저혈압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이어지는 지대장의 설명.
설명의 핵심은 기립성이라는 단어에 이미 내포되어 있었다.
여기서 기립성이란 ‘일동 기립!’ 할 때 쓰는 기립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다는 뜻이었다.
그러니까 앉아 있다가 혹은 누워 있다가 일어날 때만 저혈압이 발생하는 것.
그것이 기립성 저혈압이었다.
난생처음 들어 보는, 신기한 질환에 김진성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그의 상식은 아직 기립성 저혈압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참나, 별의별 질환도 다 있군. 혹시 자네가 즉석으로 병을 만든 건 아니겠지?”
“인스턴트 식품도 아니고 즉석으로 질병을 만들다니요. 그런 재주는 지구상에 있는 어떤 의사도 없습니다.”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한 말이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그래서 원인은 뭔가?”
“원인은 너무 다양해서 일일이 말씀드리기 힘들 정도입니다만…….”
지대장이 뜸을 들이다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내놓았다.
김진섭이 기립성 저혈압을 얻은 원인은 스트레스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그 기폭제는 몇 개월 전 열사병으로 사망한 병사 사건으로 진급이 누락됐기 때문이고.
듣고 보니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김진섭이었다.
실제로 김진섭은 그 시기를 기점으로 어지럼증을 호소했으니까.
“지대장, 고맙고 고생했네. 솔직히 큰 기대는 안 했는데 이야기를 다 듣고 나니 믿음직스럽군.”
“그게 제 할 일입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죠. 어쨌든 최대한 빨리 시간을 내서 병원에 가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암, 당연히 그래야지.”
지대장에게 달밤의 진찰을 받고 난 후 며칠이 지난 뒤.
김진섭은 휴가를 내서 민간 병원을 찾았다. 기립성 저혈압 검사를 받고 기립성 저혈압 진단까지 받았다.
이후 실시한 다른 검사에서도 이상이 없었으므로 스트레스로 인한 기립성 저혈압이 의심된다고 내과의가 전했다.
전부 지대장이 말한 그대로였다.
김진섭은 지대장이 돌팔이 의사가 아니라 족집게 의사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