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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살부터 의사 생활-203화 (203/257)

203화 제1장 푸른 거탑(3)

기립성 저혈압을 진단한 일로 나는 대대장의 단단한 신임을 샀다.

대대장은 내 말이라면 ‘암, 지대장 말이 맞지.’ 하고 맞장구치기 바빴다.

대대장에게 얻은 신뢰를 바탕으로 나는 병사들이 좀 더 편히 쉴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자 노력했다.

첫째로 회진을 돌 때 발목이나 발이 안 좋은 병사들을 보면 무조건 활동화 처치를 내렸다.

군용 전투화를 신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군대에서 일어나는 발과 발목 관련 질환은 모조리 전투화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전투화는 밑바닥이 딱딱할 뿐만 아니라 공기도 잘 통하지 않았다.

전투 시에는 유용할지 몰라도 작업이나 일상 훈련을 할 때는 발을 괴롭히는 데 특화되어 있었다.

전투화가 아니라 고문화라고 해야 할까.

-지대장님, 소대에 활동화 신는 병사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러면 전투화 신는 병사들은 뭐가 됩니까?

-활동화 착용을 남발하면 오히려 역차별이 될 수도 있습니다.

몇몇 간부는 내 활동화 처치를 마땅하게 여겼다.

형평성을 들먹이는 간부가 있었고, 사회도 아니고 군대인데 어느 정도 고생은 감수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주장하는 간부도 있었다.

물론 나도 할 말은 많았다.

활동화 착용을 권하는 병사들의 기준을 가지고 있다.

결코 남발이 아니다.

그리고 아픈 사람과 건강한 사람을 똑같이 대하면 그게 오히려 형평성에 어긋나는 일 아니냐.

군대는 원래 고생하는 곳이라고?

아무리 군대라고 해도 안 해도 될 고생까지 할 필요 없는 것 아니냐 등등.

하지만 말싸움을 하면 끝이 없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나와 간부들은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고 우리의 의견이 맞닿을 가능성은 제로였다.

그래서 구구절절 논쟁을 벌이는 대신 마법의 문장을 구사했다.

「불만이 있으면 대대장님에게 직접 말하세요. 대대장님께 이미 승인을 받았으니까.」

대대장이란 과연 마법 같은 단어였다.

곶감이 우는 아이의 울음을 뚝 그치게 한다면 대대장은 간부들의 입을 뚝 그치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군의관인 내게는 개겨도 대대장에게 개길 수 없는 것이 간부들이었다.

대대장은 그들의 직속상관이니까.

나는 운동화 착용 말고도 몇 가지 시도를 더 했다.

허리나 어깨 통증이 극심한 병사들.

그중에서도 짬이 낮은 병사들을 따로 추려서 의무대로 데려왔다.

짬이 낮으면 선임과 간부 눈치를 보느라 제대로 쉴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의무대에 온 병사들이 무조건 누워서 쉬도록 했다.

병사들의 만족도가 무척 높았다.

또한 일주일에 두 번 있는 외진에 최대한 많은 병사를 데려가도록 노력했으며 초소 회진의 횟수도 늘렸다.

내 노력에 보답하듯 대대 병사들은 나를 좋아했고, 나는 그런 병사들을 보며 뿌듯함을 느꼈다.

더 이상 나는 무력한 군의관이 아니었다.

한편 그쯤에서 큰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잠시 가려졌던 사건이 세상에 드러났다고 하는 편이 맞겠다.

내가 군국 태극 병원에서 수술한 총상 환자가 매스컴의 집중 조명을 받은 것이다.

초소 근무 중 제 가슴에 세 발의 총탄을 쏜 박 일병.

모두가 박 일병의 동기를 궁금해했다. 나 역시 그런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박 일병이 입을 열 수 있을 만큼 건강해지면서 진실은 밝혀졌다.

총기 사건의 배경에는 너무 많이 되풀이되어서 지겹고, 너무 많이 되풀이되어도 매번 끔찍한 집단 따돌림이 존재했다.

선임들이 박 일병을 상습 폭행하고 추행까지 했다는 것이다.

뉴스를 접한 나는 선임 병사들의 잔혹한 행동에 치를 떨었다.

계급장에 작대기 한두 개 더 달렸다고 지들이 무슨 왕이라도 되는 줄 착각했단 말인가.

그런 인간들에게는 개새끼라는 말을 해도 모자랐다.

아니, 곤충이나 벌레와 비교해도 실례될 정도였다.

사건이 터지면서 선임들은 줄줄이 헌병대에 끌려갔다.

박 일병은 태극 병원에서 치료를 마치고 타 부대로 전출을 갔다고 백경민을 통해 들었다.

나는 박 일병이 마음의 상처를 잘 극복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고.

지금 어딘 가에서 고통받고 있을 또 다른 박 일병을 안타까워했으며 내년이나 내후년에 나타날 제삼의 박 일병을 염려했다.

하지만 가혹 행위란 비단 군대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인간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혹 행위가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병원이라고 가혹 행위가 없었던가.

용인에서 근무할 당시 3년 차 장경철은 후배들을 엎드리게 만들고 각목을 휘둘렀다.

그러니까 박 일병은 군대뿐만 아니라 사회 곳곳에 존재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박 일병 사건으로 나는 치료 외적인 부분에도 눈을 돌렸다.

우리 부대 안에 존재하는 가혹 행위를 찾아내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다녔다.

그 가상한 노력으로 가혹 행위 한 건을 적발하는 데 성공했다.

팔뚝에 멍이 등 병사를 추궁한 끝에 선임들의 폭행 자백을 받았던 것이다.

해당 초소는 당연히 발칵 뒤집혔다.

그리고 부대 내에서 진행된 철저한 진상 규명을 통해 가해자는 영창 신세를 지게 되었다.

아마 이때부터였을 것이다.

내가 부대에 있는 간부들에게 제대로 미운털이 박히기 시작했던 게.

“군의관이면 군의관답게 얌전히 꿀이나 빨 것이지, 지가 뭔데 정의 사도 행세를 하면서 부대를 쑤시고 다녀?”

“제 말이 그 말입니다. 군대의 기역 자도 모르는 게 너무 나대는 것 같습니다.”

“건수를 잡아서 본때를 보여 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한 번은 초소 회진 중 간부들이 내 뒷담화하는 것을 엿듣기도 했다.

꼴같잖은 이야기를 다 듣고서 나는 콧방귀만 끼었다.

어디 할 수 있으면 해 보라지.

너희의 아둔한 대가리로는 평생 내 발끝도 못 쫓아올 테니까.

간부들에게 미움을 받는 만큼 병사들에게 사랑을 받으면서 내 군 생활은 계속되었다.

* * *

“하아아암.”

나는 하품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밤새 푹 잔 덕분에 몸과 마음이 개운했다. 평소라면 머리가 멍하고 몸이 축축 처졌을 텐데.

침대에서 일어나 시원하게 기지개를 켜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가 있는 곳은 비좁고 어수선한 지대장실이 아니었다.

가족들과 함께 사는 집, 그중에서도 내 방이었다.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 군의관으로 복무하던 3년이 지나고 나는 어느덧 민간인이… 되었을 리는 없었다.

주말이 되어서 집에 돌아온 것뿐이었다.

GOP 대대 군의관도 주말에는 집에서 쉴 수 있었으니까.

전에는 몰랐는데, 군의관 생활에는 큰 장점이 있었다.

병원에서 근무할 때는 가족들 얼굴 보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거늘…….

군의관 생활을 하니 일주일에 두 번은 무조건 가족 얼굴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대대가 GOP에서 철수한다면 아마 매일 가족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평범한 직장인들처럼.

어쨌거나 나는 이 소중한 시기에 가족들과 더 자주 이야기하고 더 많은 경험을 쌓으려고 노력 중이었다.

제대한 후 2년 반 동안 해외 연수를 가고.

그 직후에는 아마 교수가 되어 흉부외과의 생활을 이어 갈 것이다.

그러면 다시 가족들을 보기 힘들어질 테니까.

거실로 나가니 부엌에서 믹서기를 사용 중인 어머니가 보였다.

요즘 어머니는 내게 아침마다 ABC 주스를 만들어 주었다.

ABC 주스란 사과, 비트, 당근을 갈아 넣은 주스로 ABC란 각 과일과 채소의 영문 이니셜을 딴 것이었다.

“잘 잤어? 큰아들.”

뒤에도 눈이 달렸는지 어머니가 내게 먼저 아침 인사를 건넸다.

“꿈 한 번 안 꾸고 잘 잤어요. 어머니는요?”

“나는 잘 못 잤단다.”

어머니가 한숨 쉬며 말을 이었다.

“사랑이가 글쎄, 어제 새벽 4시에 들어왔지 뭐니. 사랑이 들어오는 거 확인하고 잠깐 잤다가 다시 일어났어.”

이야기를 듣고 보니 어머니의 얼굴에 피로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사랑이도 다 큰 어른인데 편히 주무시지 그러셨어요.”

나는 어머니의 걱정이 조금 과하다고 생각했다.

포켓몬 마스터를 꿈꾸던 사랑이는 어느덧 신원대학교 법학과 2학년생이 되었다.

2학년이면 한참 대학교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돌아다닐 나이였다.

“엄마 눈에는 믿음이 너나 사랑이 너나 아직 애야. 너희가 꼬부랑 할아버지가 돼도 애일걸?”

“…….”

“어쨌거나 큰아들 말이 맞다고 치자. 그래도 새벽 4시에 들어오는 건 심하지 않니?”

어머니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지금 아니면 그렇게 못 놀고 그렇게 못 마셔요. 사랑이도 다 생각이 있겠죠.”

“그렇게 계속 동생 편들면 엄마 서운하다?”

“이사랑, 이 못된 놈. 술 깨고 일어나기만 해 봐라. 엉덩이를 걷어차 줄 테다.”

내가 익살맞게 사랑이 욕을 하자 어머니가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어머니는 ABC 주스를 건네고 방으로 들어갔고, 나는 주스를 단번에 비운 뒤 거실 소파에 앉았다.

토요일 오전 9시, 집안은 적막하면서도 평화로웠다.

병원에서는 죽어다 깨어나도 느끼지 못할 이 편안함을 나는 천천히 음미했다.

좋은 시절이었으므로 이 시절은 빨리 지나갈 것이다.

좋은 것들은 속도가 빠르고, 나쁜 것들은 속도가 느리기 마련이었으니까.

“믿음이 일어났니? 더 자지 그러니?”

안방 문이 열리면서 아버지가 거실로 나왔다. 손에 잔을 든 것을 보면 커피를 마시기 위해 나온 것 같았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잠은 지겨울 정도로 자서요. 아버지야말로 주무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내가 되물었다.

전업 작가이자 이제는 성공한 작가가 된 아버지는 부엉이 타입이었다.

남들이 잘 때 깨어 있었고, 남들이 깨어 있을 때 잤다.

“오늘은 작업을 좀 더 해야 할 것 같구나. 쓰던 소설이 개운하지 않게 마무리돼서 말이야.”

에세이를 시작하면서 나는 아버지를 더욱 존경하게 되었다.

글은 아무나 쓸 수 있었지만 독자에게 감흥을 주는 글은 아무나 쓸 수 없었다.

입구는 터널처럼 넓지만 출구는 쥐구멍보다 좁은 것이 글이라는 녀석이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좋은 글을 몇십 년째 써 오고 있으니 존경할 수밖에…….

“아버지.”

“왜?”

“괜찮으시면 제가 쓴 글을 한 번 봐주실 수 있어요?”

“글? 우리 큰아들이 글도 쓰니?”

아버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호기심을 보였다.

나는 흉부외과에 에세이를 쓰게 된 이유와 지금까지 쓴 분량에 대해서 간략하게 이야기했다.

“괜찮은 전략이구나. 세상 사람들은 흉부외과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잘 모르니까. 그 일들로 맛깔 나는 글을 쓴다면 많은 공감을 살 수 있겠지.”

아버지는 내 에세이를 호의적으로 봐주었다.

“그러고 보니 글을 쓰기에 좋은 시기구나. 딱히 수술을 하는 것도 아니고.”

“제 말이 그 말이에요. 그래서 열심히 써 보고 있기는 한데 잘 쓰고 있는 건지, 낙서를 하고 있는 건지 분간이 안 돼서요.”

“그럼 인쇄해서 가져와 볼래? 큰아들 수술 솜씨 말고 글솜씨도 궁금하구나.”

“네.”

나는 방으로 돌아가서 에세이 문서를 출력하기 시작했다.

에세이를 쓰기 시작한 게 벌써 한 달 전의 일이었다.

에피소드는 총 10편이 모였으며 각 에피소드별 분량은 A4용지 한 장 정도 되었다.

변변치 않은 글솜씨 때문에 에세이 쓴다는 사실을 누구에게 알린 적이 없었고, 당연히 누구에게 보여 준 적도 없었다.

그러니까 에세이는 소설가인 아버지에게 최초 공개가 되는 것이다.

“여기요.”

나는 거실 소파에 앉은 아버지에게 인쇄물을 건넸다.

아버지는 좀 전과는 다른 냉정한 눈빛으로 글을 읽었고 나는 아버지의 평가를 노심초사 기다렸다.

그래서 제 점수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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