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살부터 의사 생활-173화 (173/257)

173화 제5장 장악(3)

“죄송합니다. 전부 제 불찰이었습니다.”

김호는 엄숙하게 이야기를 마치고 고개를 숙였다.

용인 신원대학교 별관 회의실에서 징계 위원회가 진행 중이었다.

참석자는 진료부원장, 순환기 내과 과장, 간호부원장, 원무과장 등으로 병원의 중추 세력들이었다.

‘표정을 보고 싶은데 볼 수가 없군.’

김호는 초조함과 호기심을 동시에 느꼈다.

그는 이믿음의 작전대로 흉부외과 의국 내 폭행 사실을 까발린 직후였다.

레지던트들을 상담하던 도중 멍을 발견했다.

이에 미심쩍은 기분이 들어 당직실에 캠코더를 설치했다.

나중에 동영상을 확인해 보니 웬걸?

3년 차가 1, 2년 차에게 얼차려를 주고 야구 방망이로 엉덩이를 후려치더라.

그래서 이를 고발하는 동시에 사전에 문제를 막지 못한 자신을 문책해 달라는 것이 이야기의 요지였다.

그동안 김호의 설명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으며 폭행 영상은 그의 주장을 견고하게 만들어 주었다.

남은 것은 위원들의 반응뿐.

과연 위원들이 이믿음의 말대로 움직여 줄까.

아니라면 제 몸에 기름을 뿌리고 불난 집에 들어가는 꼴이 될 텐데…….

쿵. 쿵. 쿵.

밀려오는 긴장감에 김호의 심장이 사납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입안이 바짝 마르고 건조한 목은 따가웠다.

“김 과장.”

가장 먼저 운을 뗀 것은 진료부원장이었다.

“네, 부원장님.”

“무척 훌륭한 대처였어요. 다들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저도 부원장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김 과장님 눈썰미가 엄청나신데요? 캠코더 설치할 생각은 또 어떻게 하셨는지…….”

진료부원장의 칭찬에 다른 위원들의 칭찬이 차곡차곡 쌓여 갔다.

순간 벅차오르는 가슴.

의국에서 폭행 사건이 터졌는데 위원들에게 박수갈채를 받다니 이게 웬 말이냐.

김호는 지금 이 순간이 꿈만 같았다.

황당하게도 정말 이믿음의 계획대로 되어 버렸으니까.

“웬만해서 이런 이야기 잘 안 하는데, 여러분들도 김 과장을 본받으세요.”

“…….”

“여러분들의 사소한 관심이 밑에 있는 직원들을 울리고, 죽이고, 반대로 살릴 수도 있단 말입니다.”

훈계를 좋아하는 진료부원장이 입을 열었다.

부하 직원 관리가 중요하다는 말을 어휘만 바꾸어서 10분 동안 떠들었다.

김호도 평소라면 이 끔찍한 잔소리에 치를 떨었겠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진료부원장이 말하는 모범 케이스가 바로 자신이었으니까.

자신에 관한 칭찬을 듣는 일은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다.

“그리고 김 과장.”

“네, 부원장님.”

“부하 직원들을 똑바로 관리하지 못했으니 책임을 달게 받겠다는 태도도 마음에 들었어요.”

“감사합니다.”

“김 과장 처벌은 없는 걸로 하고, 그 몹쓸 3년 차 레지던트만 병원에서 내쫓읍시다. 우리 병원 계열사 블랙 리스트에도 올려놓고.”

“…….”

“혹시 다른 의견 가진 사람 있어요?”

진료부원장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의원들 사이의 암묵적 동의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로써 김호는 원했던 모든 것을 얻게 되었다.

문책은커녕 칭찬을 받았고, 문제를 일으킨 3년 차에게는 중징계를 줄 수 있게 되었다.

‘세상에 이런 요물이 다 있을 줄이야.’

그는 문득 이번 계획을 꾸민 이믿음을 떠올리며 감탄했다.

본원에서부터 날아다녔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이믿음은 고작 4년 차에 인공 심폐기를 사용한 폐동맥 복원술을 펼쳤다.

더욱 굉장한 점은 임기응변과 모략에도 뛰어나다는 점이었다.

후자의 경우 외과의에게는 많이 부족한 덕목인데, 그 덕목까지 갖추고 있었다.

“자, 오늘 회의는 이만 해산합시다. 김 과장, 바빠?”

진료부원장의 질문에 김호가 번뜩 정신을 차렸다.

“아뇨, 여유 있습니다.”

“그럼 카페 가서 나랑 커피라도 한잔하지. 좀 더 자세히 듣고 싶은 이야기도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김호는 진료부원장과 함께 지하 1층 카페로 이동했다.

회의실에 들어올 때만 해도 족쇄를 찬 것처럼 무거웠던 발걸음이 지금은 깃털을 단 것처럼 가벼웠다.

* * *

“아, 씨발 x 됐네.”

장경철은 회의실을 나오면서 고개를 떨어트렸다.

이마에 자글자글 주름이 생겼고, 미간은 좁아졌으며 벌어진 입술 사이로는 한숨이 흘러내렸다.

지금으로부터 30분 전.

그는 병원 인권 센터에 불려 가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고 말았다.

자신이 상습적으로 후배들을 폭행했다는 사실이 접수됐다.

징벌 위원회에서 벌써 자료를 넘겨받아 검토를 해 봤다.

해고를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수준이며 민·형사상의 처벌 또한 면치 못할 것 같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설명과 함께 재생되는 폭행 동영상.

후배들을 엎드리게 만들고 야구 방망이를 휘두르고 있는 자신의 모습.

영상을 확인한 순간 장경철은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참담했다.

밟고 있는 땅이 푹 꺼진 것처럼 절망했다.

머릿속으로 생각한 가장 최악의 시나리오이자 동시에 일어날 리 없다고 자신했던 시나리오가 현실로 이루어졌다.

이건 또 무슨 장난 같은 상황이지?

이 병신 같은 동영상은 대체 누가 찍은 거야?

장경철은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자신이 낭떠러지로 향하는 급행 열차에 올라탄 것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이젠 열차에서 내려도 죽는다.

열차를 계속 타고 있어도 꼼짝없이 죽게 생겼다.

“쓰으으읍. 후우…….”

장경철은 옥상을 찾아 담배부터 물었다.

지금 그가 기댈 곳은 까맣게 타들어 가는 담배와 잿빛 연기뿐이었다.

이 모든 게 꿈이라면 좋겠지만 담배의 맛은 빌어먹게도 너무 생생했다.

내가 이 거지 같은 흉부외과에서 무려 3년을 버텼는데 잘린다고? 이제 와서?

끔찍한 현실을 견디기 위해 장경철은 줄담배를 세 대나 피웠다.

그제야 아주 조금은 마음이 진정되었다.

“허수현, 바쁘냐?”

“네, 바빠요.”

그는 옥상에서 내려와 병동 복도에서 마주친 허수현에게 아는 척을 했다.

하지만 허수현은 쌀쌀 맞게 대답하곤 그를 지나쳐 갔다.

순간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르는 분노.

“허수현, 이런 x만 한 새끼를 봤나? 내가 만만해 보여?”

“이제 쫓겨날 사람이잖아요. 난 그쪽한테 할 말 없어요. 그리고 지금 저한테 화를 내는 거예요?”

허수현이 맹랑하게 눈을 치켜뜨며 언성을 높였다.

장경철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당찬 모습의 허수현이었다.

“그쪽이 오히려 나한테 빌어야 할 처지 아니에요? 이제 곧 고소당할 텐데.”

“하… 허수현, 너 진짜 이러기냐?”

“누가 보면 내가 가해자인 줄 알겠네요? 할 말 없으니까 갑니다.”

허수현이 쌩하니 냉기를 풍기며 자리를 떠나갔다.

홀로 남은 장경철은 치욕에 파르르 몸을 떨다가 주먹으로 벽을 후려쳤다.

제 주먹만 아팠다.

그 후로 장경철은 후배들을 만나 선처를 구하려고 갖은 애를 썼다.

하지만 다들 허수현과 비슷한 반응이었다.

무시하거나 화를 내거나.

단 하루 만에 장경철은 자신이 흉부외과에서 투명 인간만도 못한 존재로 전락했음을 깨달았다.

현실 부정과 분노의 단계를 지나 장경철은 이제 절망의 단계에 빠져들었다.

눈을 감지 않았는데도 모든 것이 까맣게 보였다.

“치프, 저랑 잠깐 이야기 좀 해요.”

병동 복도에 우두커니 서 있던 장경철이 지나가던 이믿음을 붙잡았다.

이믿음은 막 수술 어시스트를 하고 복귀하는 모양이었다. 소독약 냄새와 피 냄새가 어렴풋이 났다.

“그러던가. 회의실로 와.”

“네.”

장경철은 이믿음의 뒤를 따라 고분고분 회의실로 이동했다.

“치프, 정말 잘못했습니다. 제가 건방지게 까부는 바람에 속이 많이 상하셨죠?”

장경철의 고개가 잘 익은 벼마냥 숙여졌다.

이번 사건의 배후에 이믿음이 있다는 걸 장경철은 손쉽게 간파했다.

이믿음이 파견 오기 전까지만 해도 1, 2년 차들은 그의 손바닥에서 꼼짝도 못하지 않았던가.

그런 후배들이 갑자기 적극적으로 행동했다?

이는 누군가의 부추김이 있었기 때문인 게 분명했다.

“경철아.”

“네, 치프.”

“깨달음이라는 거 참 야박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이믿음이 차갑게 웃으며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이죠?”

“항상 사건이 다 터진 후에야 찾아오잖아. 지금 아는 걸 그때도 알았으면 참 좋았을 텐데 말이야.”

이믿음이 자신을 돌려 까고 있다는 사실을 장경철은 뒤늦게 깨달았다.

하지만 원통하다거나 치욕스럽다는 감정 따위는 들지 않았다.

앞서 만난 레지던트들에게 그런 감정은 이미 소모해 버렸으니까.

지금은 그저 지푸라기라도 붙잡아 살아남고 싶었다.

“깨달음을 얻은 게 그나마 다행 아닐까요? 끝까지 깨닫지 못하는 사람도 있잖아요.”

장경철은 비굴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본인의 잘못을 뉘우치고 있음을 어필한 것이다.

“어때? 넌 네 잘못을 깨달은 것 같아?”

“완벽하다고는 할 수는 없지만 차차 깨닫는 중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후배들에게 참회하면서 지내야겠죠.”

“…….”

“그러니까 치프가 힘 좀 써 주세요. 치프가 말하면 후배들도 이야기를 좀 듣지 않겠어요?”

장경철은 눈물의 사연팔이를 시작했다.

의료 사고로 쫓겨난 4년 차와 자신은 신원대학교 의대가 아닌 타 의대 출신이다.

타 의대 출신으로 갖은 차별과 핍박을 받으며 레지던트 수련을 해 왔다.

그런 상황에서 스스로를 지키려고 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폭행이라는 못된 행동을 하게 되었다.

이제 보니 정말 어리석은 짓이었다 등등.

장경철은 대배우라도 빙의한 것처럼 대화에 감성을 실었다.

많이 과장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없는 이야기를 지어낸 것은 아니었다. 타 의대 출신이라 차별을 받은 것도 꽤 사실이었다.

‘통했나?’

장경철은 슬쩍 고개를 들어 이믿음을 바라보았다.

이믿음은 한 손을 턱에 괸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을 못하는 걸 보면 마음이 흔들린 모양이었다.

그래, 내가 빠지면 너도 힘들겠지.

흉부외과 T.O라는 게 그리 쉽게 나오진 않으니까.

산전수전 다 겪은 3년 차라면 더더욱.

장경철은 한 줄기 희망을 마음에 품기 시작했다.

뉴스를 통해 폭행을 저지른 교수나 레지던트들이 솜방망이 처벌을 받고 복직하는 경우를 자주 봤다.

자신도 그런 케이스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경철아.”

“네, 치프.”

장경철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이믿음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중했다.

“네가 진심으로 뉘우치지 않았다는 증거를 내가 대볼까?”

이믿음의 입가에 그를 조롱하는 듯한 미소가 걸렸다.

장경철은 무언가 일이 비틀렸음을 직감했다.

“그… 그게 뭔가요?”

“네가 지금 나한테 와서 통사정을 하는 거, 그게 제일 큰 문제야.”

“그게 왜죠?”

“폭행을 당한 건 내가 아니라 네 후배들이야. 네가 고개를 백번 조아려야 할 사람들도 후배들이지.”

“…….”

“그런 네가 나한테 와서 잘못을 빈다? 이유는 딱 하나뿐이지. 나를 이용해서 책임을 회피하려는 거.”

“…….”

“마치 감형을 받기 위해 판사에게 반성문을 쓰는 범죄자처럼.”

이믿음의 소름 돋는 분석과 비유에 장경철은 할 말을 잃었다.

숨겨 왔던 자신의 속내를 이믿음이 완전히 발가벗겼기에.

장경철의 얼굴은 뒤늦게 수치심으로 뻘겋게 달아올랐다.

“경철아, 꺼져. 다시는 네 낯짝 보고 싶지 않다.”

바로 다음 날, 장경철은 가운을 벗고 흉부외과에서 쫓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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