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제5장 장악(4)
“하아아암.”
나는 하품하며 의자 등받이에 허리를 기댔다.
현재 시간은 오전 4시, 당직 근무자가 가장 지치고 힘들 때였다.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자니 지난 한 주가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지난주 최고의 수확이라면 누가 뭐래도 장경철에게 천벌을 내린 것이었다.
장경철은 번갯불에 콩을 구워 먹듯 짤렸으며 신원대학교 병원 계열에 취업도 못하게 되었다.
장경철의 부재로 내가 더 피곤해지긴 했다.
흉부외과에서 빈자리를 채우는 건 하늘의 별 따기였기에 장경철의 일을 내가 도맡게 되었다.
그로 인해 수술 어시스트는 2배로 늘고, 후배들 관리까지 내 손에 떨어졌다.
하지만 그편이 백배는 더 속이 후련했다.
사회생활을 해 본 사람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속담이 반드시 옳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일의 능률과 직원 간의 케미를 망치는 고문관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사실을.
장경철이 떠난 후 나는 1, 2년 차 후배들을 교육하는 데 집중했다.
쓰레기 3, 4년 차가 해고된 시점에서 이 친구들이야말로 용인 흉부외과의 새싹들이었다.
이 친구들이 내게서 처치와 수술을 잘 배우고, 본인들의 후배들에게 잘 전한다면 말이다.
용인도 최악의 험지 소리는 피할 수 있지 않을까.
오히려 외상 환자 처치의 메카가 되지 않을까.
나는 그런 희망과 기대를 품어 보았다.
드르르륵.
별안간 열리는 당직실 문, 고개를 돌리니 졸린 눈을 비비며 들어오는 허수현이 보였다.
“왜? 벌써 일어났어?”
“중간에 깨서요.”
“더 자 둬. 오늘도 수술 어시스트도 많더만.”
“제가 아무리 많이 봐야 치프만큼은 아니겠죠. 그리고 어떤 유명한 사람이 그랬대요.”
허수현이 믹스 커피 두 잔을 타며 말을 이었다.
“지금 잠을 자면 꿈을 꾸지만 잠을 자지 않으면 꿈을 이룬다고. 멋있지 않아요? 치프.”
허수현의 말에 나는 빈정거리는 코웃음부터 나왔다.
왜 그렇게 사람들은 잠을 나쁜 놈 취급하지 못해서 안달일까.
시간을 좀 먹는 도둑놈으로밖에 생각하지 않을까.
“잠 안 자는 거 엄연히 학대다. 자기 학대.”
“자기 학대씩이나요? 너무 멀리 가는 거 아닙니까?”
“잠의 가치를 너무 비하하니까 그렇지.”
“근데 치프가 그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모순 아닌가요?”
허수현의 인신 공격성(?) 반박이 시작되었다. 잠의 가치를 주장하는 내가 정작 평소 잠을 잘 안 잔다는 것이었다.
허수현의 지적에 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구구절절 맞는 이야기였다.
나는 예전부터 당직 근무가 아닐 때도 공부로 밤을 새웠다.
논문을 읽고, 논문을 쓰고, 모형을 봉합하고 후배들을 가르쳤다.
이제 보니 내겐 잠의 중요성을 변호할 자격이 손톱만큼도 없었다.
“선배, 요즘 엄청 피곤해 보이는 거 아세요? 눈 밑에 다크서클이 점점 내려오고 있다고요.”
“…….”
“거울 보세요. 이러다가 판다 되겠어요.”
농담 반, 진담 반이 섞인 허수현의 말에 나는 거울을 확인했다.
금방 쓴웃음이 터졌다.
파견 온 지 얼마 안 된 사이에 부쩍 수척해진 얼굴, 그늘처럼 짙게 드리운 다크서클, 생기와 수분감을 잃은 입술 등등.
후배 관리를 하면서 정작 내 관리는 못했던 것이다.
“선배야말로 조금이라도 주무세요. 나머지 근무는 제가 설 테니까.”
“아직 할 일이 남았는데…….”
나는 책상에 있는 봉합용 피부 모형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외과의로서 더 성장하기 위해 내가 최근 가장 주목하고 있는 것은 무아경이었다.
주변이 고요해지면서 나만의 세계에 빠진 상태.
동시에 스태프들의 움직임이 느리면서도 또렷하게 보이고 모든 감각이 증폭되는 상태.
근 몇 년 사이에 드문드문 느끼던 초감각을 나는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자주 모형으로 봉합 연습을 하고 있었다.
무아경이 언제 어떻게 발동하는지 파악하기 위해서.
“치프, 이게 말로만 듣던 자기 학대 아닌가요?”
허수현이 내가 했던 말을 고스란히 써먹는 바람에 나는 반박도 못했다.
그나저나 수현이 이 녀석, 의외로 당찬 구석이 있네.
장경철의 폭행 때문에 원래 강단 있는 성격을 감춰 놓았던 건가.
“학대가 아니라 나도 너처럼 그냥 잠이 안 온다, 이 녀석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끝끝내 버텼다.
기적 같은 회귀로 얻어 낸 두 번째 삶이었다.
외과의로서의 스킬.
사회생활에 필요한 정치력과 사교성 등등.
다양한 능력들이 이미 전생과 비교 불가능할 정도로 성장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가야 할 길은 아직 멀고 거칠었다.
앞으로 마주쳐야 할 중증 환자와 불치병 환자들이 태산이었다.
강태섭을 비롯한 악당들을 물리칠 힘도 길러야 하며 더 나아가서는 흉부외과의 시스템까지 건드릴 수 있을 만한 그릇도 키워야 했다.
그러므로 나는 아직 잠들 수 없었다.
“잠이 안 오면 잘 수 있게 만들어 드리면 되잖아요. 그쵸?”
허수현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고, 나 역시 허수현과 비슷한 미소를 입가에 띠었다.
우리는 서로 비장의 한 수를 가지고 있었다.
“나 1시간 전에 커피 마셨다. 자고 싶어도 잘 수가 없어.”
“후후후, 그건 치프의 짧은 생각이죠. 그럼 도전해 보실래요? 과연 제 비장의 수법으로 치프가 잘 수 있는지 없는지?”
“그래. 해 보던지.”
“숙직실로 먼저 가 보세요. 제가 준비해서 따라갈 테니까.”
일단 나는 고분고분하게 숙직실로 이동했다.
일찍 일어난 허수현을 제외한 1, 2년 차들이 꿈나라에 흠뻑 빠져 있었다.
누가 업어 가도 모를 정도였다.
후배들이 곤히 잠든 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편안함을 느꼈다.
그러다가 2층 침대 중 1층에 누워 말똥말똥한 눈으로 위층 칸을 올려다보았다.
피곤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졸린 상태는 아니었다.
몸이 조금 무겁게 느껴지는 정도?
허수현이 어떤 수작을 부릴지는 알 수 없었지만 갑자기 졸릴 것 같지는 않았다.
잠시 후 허수현이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숙직실로 들어왔다.
허수현의 손에 들린 물건을 보고 나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수현아, 장난하니?”
“어떤 유명한 사람이 그랬대요. 인생은 거대한 농담이나 장난과 같은 거라고.”
“유명한 사람이 한 이야기 맞아? 네가 대충 그럴듯한 말을 던져 놓고 위인 핑계 대는 건 아니고?”
“아니에요. 찾아보면 진짜 있어요.”
허수현은 극구 부인하더니 문제의 물건을 내 얼굴 위로 덮었다.
그 물건의 정체는 다름 아닌 마스크 팩!
냉장고에 있던 마스크 팩이 얼굴에 닿으면서 낯짝이 싸늘하게 식었다.
진한 알로에 향이 코끝을 자극했다.
“마스크 팩으로 날 재우겠다고? 너도 어지간하구나.”
“마스크 팩 하고 누워 있다가 안 자 보셨죠? 그럼 말을 하지 마세요.”
허수현이 30분 뒤에 돌아오겠다고 말한 뒤 숙직실을 떠났다.
어떻게 해서든 선배를 재우고 싶고, 쉬게 만들고 싶은 후배의 마음은 기특하다만 이걸 어쩌나.
나는 자고 싶은 마음이 손톱만큼도…….
* * *
“선배, 일어나세요.”
어깨에 전해지는 흔들림에 TV 전원처럼 꺼졌던 의식이 켜졌다.
“으으음…….”
게슴츠레한 눈으로 상대를 확인하니 허수현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허수현의 입가에는 승자의 미소가 걸려 있었다.
나는 그제야 잠들기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릴 수 있었다.
“이야, 꼼짝없이 당했네?”
나는 피식 웃으며 얼굴에 붙어 있던 메마른 마스크 팩을 떼어 냈다.
겸사겸사 볼을 두드려 보니 피부가 촉촉해져 있었다.
“수술실에서는 선배가 최고일지 몰라도 일상적인 분야에서는 아닐 수도 있어요.”
“암… 이렇게 당했으면 인정해야지.”
나는 빙그레 미소를 띠었다.
잠이 안 올 때는 마스크 팩을 하고 꼼짝없이 누워 있어라.
허수현 덕분에 좋은 팁을 깨달았다.
2시간 정도 푹 쉰 나는 개운한 몸으로 회의실로 이동했다.
다행히 오전 컨퍼런스와 회진은 별 탈 없이 끝났다.
일찍부터 수술이 잡혀 있었기에 집도의와 곧장 수술실로 향했다.
오전 첫 수술은 폐암 1기 환자에게 펼치는 흉강경 폐 절제술이었다.
집도의의 이름은 안성민.
폐·식도 파트 전공의 조교수로 근면 성실의 아이콘이었다.
응급 수술이 있으면 자다가도 집에서 뛰쳐나왔으며 주말에도 연구실에 나와 논문을 작성하고 논문 공부를 하기도 했다.
“교수님, 혹시 불편한 곳이라도 있으십니까?”
나는 안성민을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목소리 물었다.
안성민의 낯빛이 평소와 달리 창백했다. 무언가를 억지로 참고 있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어제 잠을 못 자서 그런가? 유독 두통이 심하네.”
안성민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미안하지만 오늘은 믿음이 네가 더 고생해 줘야겠다.”
“교수님 말씀이라면 언제든지 오케이입니다.”
내가 너스레를 떨자 안성민의 얼굴이 모처럼 펴졌다.
수술방에 들어간 후 우리는 나란히 계수대에 서서 스크럽(수술 전 소독)을 시작했다.
‘이거 느낌이 싸늘한데?’
나는 힐끔힐끔 안성민을 훔쳐보기 바빴다. 스크럽을 하던 도중 안성민이 소독용 솔을 바닥에 떨어트렸던 것이다.
딱 한 번의 실수였지만 나는 거기서 어떤 징조를 읽었다. 이번 수술이 어느 지점에선가 단단히 꼬일 것 같다는 징조를.
스크럽이 끝나기 전 나는 안성민의 몸 상태를 다시 걱정했다.
지금이라도 쉬어야 하는 게 아니냐고 건의했다.
하지만 안성민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우리 과에서 흉강경 할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잖니. 내 수술을 다른 사람에게 맡긴다는 것 자체도 민폐고.”
상황이 워낙 외통수라서 나도 더 이상 할 말은 없었다.
단 하나의 해결책이 있다면 내가 안성민 대신 수술하는 것인데, 이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장애물이 많았다.
응급 상황이라면 모를까.
정규 수술을 레지던트 4년 차가 집도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레지던트가 고난이도 수술을 한다고 해서 오냐, 하고 이해해 줄 환자와 보호자도 없었고 말이다.
교수가 되어서도 스케줄에 쫓겨 숨 가쁜 나날을 보내는 흉부외과.
흉부외과의 이 비참한 숙명이 앞으로 더 악화된다는 사실에 나는 새삼 치를 떨었다.
누군가는 나서서 이 끔찍한 굴레를 벗겨 내야 하리라.
그리고 그 누군가는 아마 회귀한 내가 되지 않을까.
지이이잉.
잡념을 물리치고 입장한 수술방.
먼저 도착해 있던 허수현과 1년 차 류민기가 수술 준비를 야무지게 해 놓았다.
타임아웃, 환자 바이탈 관리, 흉강경 도구 준비 등등.
“지금부터 좌폐 우하엽에 발생한 비소세포성 종양에 대한 흉강경 폐 절제술을 시작하겠습니다.”
안성민의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수술의 막이 올랐다.
환자의 옆 가슴에 1, 2센티의 절개창을 내고.
절개창에 깔때기 같은 포트를 장착하고.
포트 안으로 흉강경 수술 도구를 투입하고.
모든 과정은 물 흐르듯 매끄럽게 이어졌다.
본원에서 나와 양 교수, 그리고 다른 스태프들이 흉강경 수술에 성공한 것이 벌써 3년 전의 일이었다.
이제 흉강경 수술은 폐암 1기 수술의 대세가 되었다.
흉부외과계의 흉강경 수술 솜씨도 전반적으로 대폭 상승했다.
수술 시작 후 30분쯤 지났을까.
내시경 카메라가 종양이 위치한 좌폐의 우하엽까지 도달했다. 모니터를 향해 2x3센티 크기를 가진 종양을 송출했다.
카메라의 시야를 따라가며 안성민과 나도 수술 부위에 접근할 수 있었다.
그런데 본격적인 절제술이 시작되려는 찰나!
“으…….”
안성민이 고통 섞인 탄식 소리를 내며 손에서 수술 도구를 놓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