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제5장 장악(2)
“아까는 별일 없었냐?”
허수현이 오후 수술을 마치고 당직실로 복귀하자 먼저 와 있던 동기 하준하가 그에게 물었다.
“무슨 별일?”
“컨퍼런스 중간에 치프랑 응급 수술 들어갔던 거. 계속 엇갈리는 바람에 결과를 못 들었다.”
“아… 그거라면 엄청난 별일 있었지.”
수술 당시를 떠올리며 허수현이 감탄하듯 말했다.
이믿음과 함께 한 수술은 허수현이 지금까지 어시스트한 최고의 수술 중 하나였다.
충격과 공포, 그리고 기적이 뒤에 섞여 있었으니까.
“하긴, 별일이 없으면 그게 더 이상하지. 그 위급한 환자를 4년 차에게 떠넘긴다는 게 말이 되냐고?”
“…….”
“본원 사람을 방패로 쓰다가 버릴 생각인가? 나중에 욕 처먹을 것 같은데?”
하준하는 수술이 실패했을 거라 단정 짓고 있었다.
이믿음의 처지를 동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것은 하준하의 착각과 오해에 지나지 않았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쪽이 아니다. 수술은 잘 끝났어. 성공적으로.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다른 쪽이야.”
흥분한 허수현이 언성을 높였다.
그는 수술을 하면서 목격한 이믿음의 위기 대처 능력, 침착함, 말도 안 되는 손놀림을 치켜세웠다.
그중 백미는 당연히 손놀림이었다.
“믿음 선배, 양손잡이다.”
“그러니까 그게 어쨌다고?”
“양손잡이인데 평범한 양손잡이가 아니라 양손을 완전 똑같이 쓴다니까. 수술 도중에 자기 멋대로 왼손, 오른손을 바꿔서 쓴다고!”
허수현의 흥분이 정점에 도달했다.
양손을 쓰는 사람은 종종 있지만 양손을 똑같이 잘 쓰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보통 주력으로 쓰는 손이 있고, 다른 손이 잘 쓰는 손을 받쳐 주는 식이었다.
그런데 이믿음은 달랐다.
예를 들어 왼손으로 니들홀더를 쥐고 처치하나, 오른손으로 니들홀더를 쥐고 처치하나 별반 차이가 없었다.
“너도 나중에 수술 같이해 봐. 완전 미쳤다니까. 솔직히 교수님들보다 나은 것 같기도 해.”
“뭐야, 너. 왜 어시스트 썰이 아니라 간증을 하고 있어?”
“너도 믿음 선배랑 어시스트 서면 저절로 이렇게 될 거다.”
이믿음과 수술을 한 후 허수현은 이믿음에게 완전히 빠져 버렸다.
이믿음의 실력이 워낙 압도적이었기에 시기나 질투하는 감정이 아닌 동경하는 마음이 생겼다.
“그나마 다행이긴 하네. 본원에서 맹탕을 보낸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라서.”
“맹탕일 수가 있냐? 우리가 학대당한 것도 눈치로 때려 맞춘 사람인데.”
화제가 바뀌면서 허수현은 조금 우울해졌다.
존경하는 선배가 생겼다는 것은 고무적이었으나 그에겐 아직 넘지 못한 거대한 산이 있었다.
산의 이름은 1년 선배이자 상습 폭행범인 장경철.
-수현아, 너 아까 내가 남다른 구석이 있다고 했지? 보여 줄게. 내가 과연 남들하고 어떻게 다른지.
허수현은 오전에 이믿음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이믿음이 보여 주었던 동영상도 떠올렸다.
동영상 속에는 단체로 기압을 받으며 장경철에게 야구 방망이를 맞는 전공의들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놀랍게도 이믿음은 당직실 캐비닛 위에 캠코더를 설치했다.
어제부터 당직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었다.
왜냐고?
장경철이 상습 폭행범이라는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서.
설마 이믿음이 이렇게까지 나올 거라곤 상상도 못했던 허수현이었다.
본인이 말한 대로 이믿음은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자상하면서 교활한 면이 있었고, 친절하면서 단호한 면이 있었다.
그 양면적인 모습이 더 매력적이었지만.
“후우우우우.”
허수현은 캠코더가 숨겨진 캐비닛 위를 쳐다본 후 심호흡을 했다.
이제 슬슬 결단을 내려야 했다.
장경철과의 악연에 종지부를 찍어야 했다.
허수현이 흉부외과를 전공으로 택한 것은 외과에 대한 애정 때문이었다.
장경철의 비위를 맞춰 주고 샌드백으로 전락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준하야.”
“왜 또?”
“나랑 영상 하나 같이 보자.”
허수현이 컴퓨터 앞에 앉자 하준하가 잔뜩 얼굴을 찌푸렸다.
“너 내가 모르는 이상한 취미 있냐?”
“등신아, 음란마귀가 쓰인 건 너고. 후딱 튀어와 봐.”
딸칵.
허수현의 손끝에서 어제의 추악했던 한 장면이 재생되었다.
* * *
일과가 끝나고 찾아온 야심한 밤.
소등이 된 병동은 어둡고 고요했다. 간호사가 근무 중인 스테이션만이 등대처럼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작은 소리만 내도 죄책감이 드는 적막한 병동에서 은밀하게 움직이는 세 사람이 있었다.
나와 허수현, 하준하였다.
우리는 영화 속 자객처럼 조심스럽게 병동 복도를 가로질렀다.
“선생님, 저희 셋이 같이 잠깐 자리를 비울 건데요. 다른 사람한테는 비밀로 해 주세요.”
“맨입으로요?”
“그럼 커피 콜?”
내 제안에 정예인 간호사가 손으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협상을 마친 후 우리가 도착한 곳은 한 층 아래 있는 휴게실이었다.
이동하는 동안 우리 셋은 각자의 세계에 빠져 말이 없었다.
‘애들이 현명한 판단을 했어야 할 텐데…….’
앞서 걷는 나는 조금 불안해졌다.
1, 2년 차 레지던트들이 결국 내가 아닌 장경철을 택할까 봐서였다.
스톡홀롬 증후군이란 용어가 있는데, 이는 과거 인질범이 강도들에게 동화해 오히려 강도들의 편을 들었던 사건에서 나온 용어였다.
용인 의국에서 스톡홀롬 증후군이 발생하지 말라는 법이 있을까.
나는 그 질문에 아니라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었다.
사람 마음이란 종잡기 힘든 법이었다.
인질범이 강도에게 연민을 느끼고 강도를 도울 줄은 누구도 몰랐을 것처럼.
드르르륵.
휴게실에 입장한 후 소파에 앉은 두 사람에게 캔 커피를 건넸다.
“그래서 생각은 잘해 봤니?”
나는 캔 커피 뚜껑을 열며 태연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를 불러낸 두 사람이 이제 와서 어중간한 대답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과연 두 사람은 어떤 판단을 했을까.
상습 폭행의 끔찍한 고리를 끊고 새로운 의국을 만들기로 결심했을까.
아니면 두려운 변화 대신 익숙한 악습을 택했을까.
“네, 저희 둘이 1년 차들까지 불러서 같이 이야기를 해 봤는데요. 그 결과…….”
허수현이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치프의 결정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잘 생각했다. 용기 있는 선택이었어.”
허수현의 시원시원한 대답에 나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은 괴롭겠지만 올바른 판단을 해 준 두 사람과 1년 차들이 고마웠다.
1, 2년 차들이 폭행 사실을 폭로하고 거기에 캠코더 영상이 더해진다면 장경철을 쫓아내는 건 시간문제였다.
용인 의국을 개혁하는데 첫 단추를 꿸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치프, 정말 괜찮을까요? 저는 아직 불안한데…….”
잠자코 있던 하준하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런 거 내부 고발해도 결국 저희만 손해 보는 거 아닌가요? 윗선에서 짤리거나 어영부영 사과만 받는 식이면 예전만 못할 것 같은데요.”
“그렇다고 언제까지 맞고 살 수는 없잖아? 우리가 장 선배한테 맞으려고 흉부외과에 들어온 것도 아니고.”
허수현이 나보다 먼저 나서서 하준하의 말을 반박했다.
“야,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잖아. 현실적인 결과를 생각해 보자는 거지.”
“내 정강이는 멍이 마른 적이 없어. 그게 진짜 현실이지.”
“아니, 내가 지금 그 부분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니까?”
“잠깐, 두 사람 다 조용.”
나는 두 사람이 과열되고 또 분열될 것을 염려해 중재에 나섰다.
두 사람이 의견을 맞추는 데 내가 모르는 엄청난 잡음이 있을 거라는 사실도 쉽게 예상해 볼 수 있었다.
“아군끼리 치고받고 싸우면 안 되지. 우리의 원수는 장경철이잖아. 안 그래?”
“…네.”
“…네.”
“너희 둘은 더 이상 고민하지 말고 이번 일에서 빠져도 좋아. 차후의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내 호언장담에 두 사람이 놀라서 눈을 깜빡거렸다. 내가 이리 화끈하게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던 모양이었다.
“이제 버티려고 애쓸 필요 없어. 힘들 때는 나한테 기대도 좋아.”
나는 진심을 다해서 진심으로 이야기했다.
뭔가 얼굴이 뜨거워지는 대사였지만 지금의 진심을 표현할 수 있는 문장은 저것밖에 없었다.
이 친구들은 외상센터로 지정된 흉부외과에서 고군분투하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3, 4년 차의 폭행으로 얼마나 지옥 같은 나날을 보냈을까.
이제는 그 끔찍한 시간들과 작별한 때가 되었다.
앞으로 용인 의국은 선배가 후배에게 좋은 경험과 노하우, 관심과 사랑을 물려주는 곳이 될 것이다.
내가 그렇게 만들 것이다.
“내일이면 모든 게 달라져 있을 거다. 이제 너희가 할 일은 당직실로 돌아가서 푹 쉬는 거야. 알았지?”
나는 따뜻한 말로 허수현과 하준하를 안아 주었다.
* * *
이것저것 잴 필요가 없었다.
다음 날, 오전 컨퍼런스와 오전 회진이 끝난 후 나는 과장에게 단독 면담을 신청했다.
“믿음아, 어제 수술은 기대 이상이었더구나. 설마 인공 심폐기를 사용하고 폐동맥 복원술까지 소화할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감사합니다, 과장님.”
과장의 칭찬을 나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그리고 레지던트 폭행 사건을 곧바로 도마 위에 올렸다.
캠코더에 담긴 동영상을 보여 주면서 나는 장경철의 비리를 고발했다. 장경철이 상습적으로 후배들을 폭행하며 의국의 물을 흐렸음을 지적했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과장은 말이 없었다.
대신 괴로운 신음 비슷한 것을 간헐적으로 내뱉을 뿐이었다.
의국 내 폭행이 있었다는 사실을 과장은 까맣게 몰랐던 모양이었다.
“장경철을 강력하게 처벌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쫓아내는 건 기본이고 신원대병원 계열에 아예 발을 못 디디게 하는 초강수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강경한 자세와 태도를 유지했다.
1, 2년 차가 지금까지 장경철에게 당한 몸과 마음의 상처를 감안하면 이조차도 약한 처벌이긴 했다.
“이 사실이 터지면 내 얼굴에 먹칠이 된다는 거 알고 있니?”
질문하는 과장의 입가가 고통스럽게 일그러져 있었다.
슬슬 내가 제일 우려했던 방향으로 대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과장이 몸보신을 위해 사건을 묻을 수도 있는 방향으로.
그 방향을 바꾸는 것이야말로 이번 사건의 조타수인 내가 해내야 할 역할이었다.
나는 미리 준비해 놓은 시나리오대로 운을 뗐다.
“하지만 잘만 이용하면 오히려 과장님께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지금 폭행 사건이 나한테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소리니?”
과장이 어처구니없다는 말투로 되물었다.
“네, 그렇습니다.”
“이믿음, 과장인 날 농락한다면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될 거다.”
과장이 맹수처럼 으르렁거리며 송곳니를 드러냈다.
확실히 과장도 호락호락한 사람은 아니었다.
“일단 들어 보시고 판단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차분하게 내 계획을 전달했다.
이번 사건을 완벽하게 과장의 활약으로 포장하자는 것이었다.
-레지던트 간의 일방적인 폭행 사실이 폭로되었다.
-레지던트 간의 일방적인 폭행 사실을 밝혀냈다.
이 둘 사이에는 의외로 깊은 심연이 존재했다.
전자가 수동적이라면 후자는 능동적이라는 차이가 있었다.
나는 이번 사건을 후자로 만들자고 제안했다.
“으음… 뭘 어쩌자는 소리인지 아직도 이해가 안 가는구나.”
“말장난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데, 의외로 차이가 큽니다.”
나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과장님이 레지던트들을 면담하다가 폭행 사실을 의심했고, 이를 캠코더로 촬영해 영상까지 증거로 확보했다고 하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요?”
“눈썰미가 좋다거나 대단한 사람이라고 하겠지.”
“그럼 반대로 가정해 보겠습니다. 레지던트들이 폭행 사실을 언론사에 흘려서 대외적으로 폭행 사실이 알려지면 말입니다, 사람들은 과장님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할까요?”
“당연히 무능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지. 아… 이제 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겠구나.”
과장이 내 논리를 이해하고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과장님이 과감하게 이번 일을 선수 쳐서 보고하신다면 오히려 영웅이 되실 겁니다.”
나는 폭행 사실을 역으로 이용하자는 미끼를 과장에게 던졌고, 과장은 그 미끼를 물었다.
이제 남은 건 장경철이 x되는 일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