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251화 (251/293)
  • 251.

    의사는 내 팔다리를 들어 보게 하고 온몸을 구석구석 살피더니 이상 없다는 판정을 내렸다.

    “몸에 큰 충격은 가지 않은 듯합니다. 갑옷 입은 상대를 밑에서 받아 준 것치곤 대단히 양호하군요.”

    걸을 수 있을 때부터 짐작은 했다. 역시 안겨서 나올 만큼의 부상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렇군요. 전하께 잠시 드릴 말씀이 있는데, 자리를 비워 주실 수 있나요?”

    로웰이 물었다. 의사는 흔쾌히 나갔다. 애초에 로웰이 데려온 의사이기도 했다.

    엉덩이에 시큰거리는 통증이 남아 있었으나 다른 부위는 쓸린 정도였다. 거의 갑옷으로 가리고 있어 다칠 일도 없었다.

    바닥을 구른 것보다는 미셸에게 깔린 통증이 더 심했다. 갑옷과 미셸의 무게 때문에 바닥에 한번 엎어진 뒤로는 일어나기도 쉽지 않았다.

    말에게 짓밟혔으면 큰일 났겠는데.

    “운이 좋았어.”

    “운이요.”

    그레이는 팔짱을 낀 채 내 옆에 서 있었다. 동의하는 어투가 아니었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침대를 빙 두르고 있어서 분위기가 이상했다. 그들이 선 위치에선 그림자도 역광이라 표정이 더 안 좋게 보였다.

    유일하게 앉아 있는 사람은 알렉스였다. 의자에 앉은 건 아니었고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는 내 팔다리를 주무르다가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그대로 침대에 이마를 묻었다.

    “경기 전에…….”

    자책하는 걸까? 안 그래도 알렉스는 이번 경기에 걱정이 많았다.

    알렉스의 머리에 손을 올리려는데, 그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놈을 죽였어야 했는데.”

    “그놈?”

    미셸 에이드?

    “그럼 안 되지.”

    큰일 날 소리를 하고 있다. 알렉스가 주먹을 쥐었다. 손등에 핏줄이 튀어나왔다.

    “그놈을 반만 죽여 놓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너 에이드를 찾아갔어?”

    로웰이 놀라서 물었다.

    “시험 전에 잠깐 경고하려고 했던 것뿐이다.”

    “무슨 경고야! 아니, 어떻게 경고했는데? 말로 한 건 아닐 거 아냐!”

    알렉스가 침묵했다.

    아, 진짜?

    로웰은 질린 듯이 말했다.

    “어쩐지 미친 듯이 달려들더라니, 너 때문이었냐?”

    “나 때문…….”

    알렉스는 충격받고 나를 돌아봤다.

    “아니야.”

    나도 잠깐 의심했지만, 미셸 에이드는 자기 의지로 달려든 게 아니었다.

    아니. 자기 의지로 달려든 건 맞았지만 금방 통제력을 잃었다.

    “말에 문제가 있었어. 여기 참가자들, 왕실에서 나눠 주는 말을 제공받지 않았나?”

    로잘린 왕비가 내게도 제안했던 게 떠올랐다. 난 국왕 부부가 이 시합에 더 개입할 구석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미셸 에이드는 아니에요. 자기 말을 탔거든요. 그보다, 그래서 뛰어드신 거예요?”

    로웰이 한숨을 쉬며 물었다. 그의 옆에서 이델라는 가슴에 두 손을 얹고 있었다.

    그녀가 큰 눈망울로 나를 쳐다봤다.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전하. 전하께서 에이드 경을 안고 바닥을 구르시고…….”

    “흙먼지 때문에 전하께서 어떻게 되셨는지도 안 보이고요.”

    “전하께서 큰일을 당하셨으면 어떡하나 싶어서, 심장은 뛰고 숨이 안 쉬어지고…….”

    “자신을 소중히 하겠다고 하셨잖아요.”

    이델라와 로웰이 번갈아 가며 부드러운 어투로 타박해서, 영문도 모르고 죄책감이 들었다.

    그런데 내가 날 소중히 안 한 적이 있었나?

    로웰이 두 손을 모아 짝 소리를 냈다.

    “사람 목숨이 안 중요하다는 게 아니라요! 미셸 에이드가 전하만큼 중요한 사람일까요? 뭐, 낙마 사고로 목이 꺾여 죽을 수도 있었겠지만요. 그게 전하의 목숨보다 중요할까요?”

    목숨이 소중하다고 말한 것치고 미셸의 목숨은 전혀 안 소중하게 여기는 듯했다. 낙마한다고 사람이 다 죽는 것도 아닌데…….

    그보다 왜 내가 추궁받고 있는 것 같지?

    “미셸 에이드가 경기 중에 죽으면 일이 곤란해졌겠죠.”

    그레이는 여전히 팔짱을 낀 채였다.

    “전하와의 경기 중이었으니까, 전하께서 무슨 음해를 당했을지도 모를 일이고요. 그 해가 비스코티에도 미칠 수 있다고 계산하셨겠죠. 전하께서 왜 에이드를 구하려고 하셨는지는 알겠어요.”

    나도 모르는 이유를 그레이는 안다고 주장했다.

    “이해는 되지만, 저희가 그렇게 못 미더우셨어요?”

    그레이가 팔짱을 풀었다.

    뭐라고 더 말을 붙이려던 로웰과 이델라도 조용해졌다. 알렉스는 낮은 곳에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난 무슨 상황인지 깨달았다. 내가 미셸을 구하려 한 것처럼 보였다고?

    아니……. 다들 내 실력 알지 않나? 내 실력으로 그 자식을 어떻게 구한다고?

    그때 숙연한 분위기를 깨고 밖에서 소음이 들렸다.

    “셔벗은 무슨 관리를 이렇게 하나요? 그분은 시험 참가자이기 전에 비스코티의 왕자세요! 사신으로 온 분이란 말이에요!”

    “이번 일에 대해선 큰 책임을 느끼고…….”

    “책임을 느껴야겠죠. 양국의 문제로 키우고 싶지 않다면!”

    도트가 화를 쏟아 내고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왕자님, 왕자님…….”

    굳어 있던 얼굴이 나를 보자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왜 그러셨어요? 정말 멋지긴 했지만요, 부상도 다 낫지 않으신 분이. 셔벗 일엔 관여하기 싫다고 하셨잖아요…….”

    도트가 울먹였다. 난 그에게 끌어안겼다. 진짜 그렇게 보였다고?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그런 거 아냐. 내가 뭐라고 걜 구하려 했겠어?”

    “예. 전하께서 구하려던 건 비스코티였겠죠.”

    그레이가 말했다.

    아니라니까? 하지만 그레이랑 입씨름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있었다.

    “이게 시험에 영향이 있을까?”

    시험 주제는 기사도였다. 셔벗 왕이 수작을 부리려 한다면 여론조작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있어도……. 괜찮지 않나요?”

    그런데 그레이가 뜬금없이 대답했다.

    뭐?

    로웰이 웃으며 끼어들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각하. 전하, 정말 후계자 경쟁에서 탈락하실 생각은 있으신 거죠?”

    “당연하지.”

    그는 바닥을 구르느라 엉망으로 찢긴 내 장갑을 품에 넣었다.

    “그럼 이렇게 매력 발산하지 마세요. 그런 건 저희 앞에서만으로 충분하잖아요. 뭐, 각하께서도 그런 말씀을 하려고 하셨던 거겠죠.”

    그가 그레이를 보며 싱긋 웃었다. 그레이는 얼굴을 찡그리고 있어서 호응이 안 됐다. 전혀 아닌 것 같은데?

    아니, 그보다 내가 언제…….

    “저희가 전하께 반한 걸로는 불충분하세요?”

    “아니…….”

    “안 하시는 거예요. 약속했어요.”

    “모처럼 옳은 말씀을 하시네요!”

    도트가 동조했다. 분위기에 떠밀려서 난 약속하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뭘 약속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레이는 유일하게 분위기에 안 휩쓸린 사람이었다. 그는 입을 다물고 있다가 밖으로 나가 버렸다.

    왜 저러는 건데?

    “각하, 잠시만요. 저희 버리고 가지 마세요. 드릴 말씀도 있으니까요.”

    로웰이 그를 쫓아갔다.

    쟤넨 언제 또 친해진 거지?

    * * *

    에브니아 스프라우트는 관객석에 앉아 있었다. 일반 관객석은 귀족석보다 위치가 낮아 경기장과 더 가까웠다.

    바람이 불 때마다 흙먼지가 피어올라서 그녀의 얼굴을 때렸다. 그녀는 소매로 입가를 가린 채 기침했다.

    눈에 띄는 금발은 머릿수건으로 가렸고, 옷은 하녀의 것을 빌려 입었다. 그녀를 알아볼 사람은 이곳에 없다.

    기침을 하면서도 그녀는 재빨리 귀족석을 훑어봤다. 로웰 몽블랑이 있을까?

    그는 자리에 없었다. 있었다면 단번에 알아봤을 것이다.

    몇 년이 지났어도 상관없다. 그녀라면 머리카락만 스쳐 지나가더라도 알아봤을 것이다. 담장을 넘어오느라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밤의 정원에서 그녀를 올려다보던 얼굴.

    그는 소년이었고 그녀는 소녀였지만, 한눈에 사랑에 빠졌다. 그게 사랑이란 걸 알 수 있었다.

    달빛 아래서 그는 그녀를 올려다보며 함께 도망가자고 말했다.

    웃는 얼굴과, 그녀를 향해 내민 손이 달빛을 받아 희게 빛났다. 얼마나 아름답고 가슴 뛰는 광경이었는지 모른다.

    그때 경기가 시작됐다.

    둥, 둥, 둥.

    북소리가 울렸다. 경기장 양 끝 통로로 두 참가자가 들어왔다.

    덩치가 큰 미셸 에이드는 어디서나 눈에 띄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기만큼이나 거대한 말을 탄 채 위풍당당하게 입장했다.

    반대편에서 나온 조프리 왕자는 새까만 머리카락에 늘씬한 체형이었다.

    “어머나.”

    주위에서 탄성이 들렸다.

    당당하게 팔을 치켜들고 환호를 받는 미셸과 달리 왕자는 길 잃은 어린애처럼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어설픈 느낌이다. 하다못해 여유로워 보이지도 않아서, 에브니아는 소문이 역시 과장됐다고 생각했다.

    저런 사람이 자신을 바쳐 내전을 막을 수 있을까?

    “에이드, 에이드, 에이드!”

    “셔벗 제일의 기사!”

    토너먼트를 자주 보는 관객들은 이미 경기의 승자를 예상하고 있었다. 미셸 에이드는 그 나이대에 적수가 없는 기사였다.

    남자들이 목이 터져라 에이드를 외치고 있어서, 에브니아도 그 사실을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그녀는 흥미를 잃고 눈으로 반대편 관객석을 훑었다. 로웰은 사신단의 일원이라고 했다. 어디선가 또 ‘놀이’를 하고 있는 게 아니라면, 그는 이곳에 있을 것이다.

    순간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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