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250화 (250/293)

250.

백작이 뭐라 말하는 걸 한 귀로 흘리며 생각을 정리했다.

어디서 봤더라? 첫인상이 모든 걸 결정한댔는데.

조프리에 대한 첫인상이 능력 없는 후보로 박히면, 셔벗 귀족들의 경계도 바닥으로 떨어질 것이다. 그럼 사신단에 대한 시비도 사라지겠지.

비스코티로 언제 돌아갈 수 있을까?

조프리의 생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매해 조프리는 생일을 축하받았지만 행복하진 않았다. 초를 불 때마다 이게 내 명줄이로구먼, 하는 생각만 들어서 기분이 복잡해졌을 뿐이다.

같은 성 안에 생일을 전혀 축하받지 못하는 에드워드가 있는데 파티가 즐거울 리도 없었다.

생일이 지나기 전에 돌아가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놀랐다.

조프리의 생일은 내게 특별한 날은 아니었다. 특별하긴 했지만, 다른 의미에서다.

그걸 챙겨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게 이상했다.

그날을 에드워드와 함께 보내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게.

“…….”

지금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지뢰가 될 만한 건 다 피했다.

이대로 첫 번째 시험에서 떨어지는 일만 남았다.

* * *

콜린 코크는 아버지에게 말해 첫 시험 종목이 토너먼트가 되도록 조종했다.

“그건 에이드가 원하는 바일 텐데?”

코크 공작은 의문을 표했다.

“예. 그래서입니다. 에이드에게 양보하는 척하고 두 번째 시험 종목은 우리에게 협력하겠다는 약속을 받아 주세요. 어차피 이번 시험은 미셸보다 돋보일 수 없습니다. 저들이 원하는 대로 해 주는 게 낫겠죠.”

“그게 다냐?”

“그럴 리가요. 미셸이 돋보이도록 둘 생각도 없습니다.”

콜린이 미소 짓자, 코크 공작은 만족했다. 그의 아들은 영리한 데다 쓸데없이 정공법을 고집하지도 않았다.

콜린은 미셸의 하인을 매수했다. 그 하인은 미셸에게 여러 차례 매질을 당해 주인에게 원한을 품은 데다, 도박 빚을 지고 있어 돈도 급한 자였다. 콜린은 그에게 빚을 갚고 고향에 내려갈 만한 거금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경기 당일, 네 주인이 타는 말에 이걸 박아 두거라.”

콜린은 바늘을 건넸다. 길이가 짧은 바늘이었다.

이걸 발굽에 박아 두면, 평상시에는 말이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단단한 발굽이 신경을 보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이 달리는 순간 바늘이 발을 깊이 찌르고, 말은 몸부림치게 될 것이다.

그 위에 타고 있는 미셸은 어떻게 되겠는가?

콜린은 미셸이 꼴사납게 낙마하는 모습을 떠올렸다. 절로 미소가 나왔다.

미셸이 왕의 말을 빌렸다면 이런 방법은 사용하지 못했을 텐데. 그가 자신만만한 멍청이라 다행이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콜린이 1차전에서 미셸과 마주치는 거였다. 미셸을 떨어뜨린 말은 앞뒤 모르고 들이받으려 들 것이다.

날뛰는 말을 상대하는 건 숙련된 기사여도 어렵다. 자칫하다간 콜린까지 덩달아 망신을 당할 수 있었다.

이건 어쩔 수 없다. 확률에 맡기는 수밖에.

토너먼트는 후보들까지 포함해 총 열여섯 명의 기사가 참가했다.

15분의 1의 확률이다. 설마 그가 미셸과 마주치진 않겠지.

마창 경기가 열리는 원형 경기장은 구경꾼으로 인산인해였다. 꼭대기의 귀족석은 물론이고 평민들도 찾아와서 좌석을 채우고 있었다.

콜린은 참가자석에 앉은 채 왕의 연설을 들었다.

“……공정한 시합이 되길 바라네. 모든 참가자에게 축복이 있기를!”

이어서 왕은 첫 대결을 치를 참가자를 뽑았다.

“미셸 에이드. 그리고…… 조프리 비스코티!”

콜린은 고개를 숙인 채 미소 지었다. 하늘이 그를 돕고 있었다!

* * *

마창 시합은 말을 탄 기사 두 명이 격돌해서 승부를 가리는 경기였다. 셔벗에서 대인기라는 듯했다. 평소에도 시합이 열리면 사람들이 몰려와서 구경할 정도라고.

난 말을 탄 채 앞으로 나갔다. 창의 무게가 느껴졌다. 한 손으로 들려니 팔이 뻐근해질 정도였다.

나를 제외한 다른 기사 참가자들은 언뜻 봐도 대단한 근육질이었다. 토너먼트 단골 참가자들인지 팬도 많았다.

내 뒤의 관중석에서도 사람들이 응원하는 참가자의 이름을 불렀다. 물론 대부분은 이 경기의 의의를 잊지 않았다. 두 공자를 응원하는 목소리가 큰 편이었고, 그중에서도 미셸 에이드의 인기는 압도적이었다.

“에이드! 에이드! 에이드!”

“비스코티의 왕자에게 지진 않겠지!”

미셸 에이드가 반대편 출입구에서 나오는 게 보였다.

원형 경기장에 들어찬 관중들이 우리를 빙 둘러싸고 있었다. 우리가 싸우는 무대는 관객석보다 낮아서, 관중의 시선이 더 위압적으로 느껴졌다.

사방에서 외치는 목소리가 경기장 한가운데서 모여 웅웅 울리는 듯했다.

소름이 돋았다. 악역이 된 느낌이다.

그러고 보니 에드워드와의 대련이 이런 느낌 아니었나?

미셸의 눈을 보자 기시감이 강해졌다.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그는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미셸.”

난 대화를 시도해 봤다. 목소리가 안 들릴 거리는 아니었지만, 주변의 소음 때문에 내 목소리가 묻힐 듯도 했다.

“미셸 에이드!”

미셸은 나를 똑바로 본 채로 부름을 무시했다.

망한 것 같다.

경기 시작을 알리는 북소리가 들렸다. 미셸이 창을 꼬나 쥐었다. 그의 덩치와 흉흉한 분위기가 한눈에 들어왔다. 저 말은 뭘 먹고 자라서 저렇게 큰 걸까? 명마인 것 같다.

항복 선언을 하자.

판단은 빨랐다. 난 바로 창을 던지고 항복을 외치려고 했다. 그러나 단련된 기사의 행동보다 빠를 순 없었다.

미셸 에이드가 내게 달려들었다!

“조프리 왕자아아아!”

난 반사적으로 말을 걷어찼다. 내 말이 상대를 향해 달려갔다. 비껴가게 하고 싶었지만, 내 말도 겁을 먹었다.

부딪힌다!

순식간에 일이 일어났다. 난 몇 가지 단상밖에 보지 못했다.

미셸 에이드의 말이 앞발을 치켜들며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미셸 에이드의 당황한 얼굴과 나를 걷어찰 듯한 말발굽이 차례로 보였다. 미셸이 튕겨지듯 내게로 날아오는 것까지도…….

저게 뭐야!

미셸의 몸에 치이거나 말에 짓밟히거나 둘 중 하나다. 난 말고삐를 쥔 채 바닥으로 몸을 굴렸다.

손바닥 살이 쓸렸다. 고삐를 당기는 말의 힘이 나를 앞으로 끌어내서, 팔이 통째로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말이 비명을 지르는 게 느껴졌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온몸이 으스러질 듯했다.

“헉, 헉, 헉…….”

미셸의 숨결이 느껴졌다. 불쾌하기 짝이 없는 건 둘째 치고 죽을 것 같았다.

왜, 어쩌다 이런 상황이…….

“비켜…….”

난 간신히 미셸을 밀어냈다.

나를 짓누르는 거구가 사라지자, 간신히 숨이 쉬어졌다. 머리가 하얗게 변했다가 시야가 돌아왔다.

흙먼지가 걷히고 있었다. 귀족석 가장 좋은 자리에 앉아 있던 왕과 왕비 부부가 벌떡 일어나 있는 게 보였다. 그들을 제외하고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어나서 입을 벌리고 있었다.

죽겠다.

정신이 멍한 채로도, 이 승부가 미셸의 패배로 끝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봐도 이상 행동을 벌인 건 미셸이었다.

난 억지로 일어나서 미셸의 뺨을 내리쳤다. 깔린 건 난데 왜 이 자식이 기절했지?

뺨을 찰싹찰싹 때리자 미셸이 눈을 떴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검은자위가 드러났다. 난 그가 상황 파악하기 전에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미셸 에이드! 역시 훌륭한 기사로군. 정신을 차렸어!”

심판 들으라고 외쳤는데, 듣고 있는 건가? 심판은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지금 내려오시면 안 됩니다! 아직 승부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러시면 전하께서 실격을…….”

관객석에서 날 듯이 내려온 알렉스가 나를 안아 들었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바로 의사에게 가겠습니다. 조금만…….”

“알렉. 잠깐만……. 심판!”

난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내가 낼 수 있는 가장 큰 소리로 부르자 심판이 반응했다.

“예, 예, 전하?”

“에이드 경이 일어났어. 난 더 이상 시합을 속행할 수 없을 정도로 다쳤으니 항복하겠어. 승부는 에이드 경의 승리야.”

“예?”

“알렉.”

힘이 빠져서 늘어지자, 알렉스는 나를 조심스레 안고 달려 나갔다.

그가 나를 깃털처럼 보듬고 있어서 고통이 한결 가셨다. 여유가 생기자 관중의 반응이 신경 쓰였다.

그들은 조용했다. 기사에게 안겨서 나가는 모습이 꼴사납긴 할 것이다. 바라는 바였지만 한편으로 걱정이었다. 나 때문에 비스코티가 얕보일 정도면 안 되는데.

그래도 부상자에 대한 예의인지 야유는 없었다. 의외였다. 경기 시작 분위기로는 패배자에게 가차 없을 것 같았는데.

결투에 마가 끼었나? 일대일 승부는 다신 하지 말자. 할 때마다 다치는 것 같다.

“전하, 금방입니다. 괜찮으십니까? 로웰 몽블랑이 의사를 부르러 갔으니…….”

“응. 나 괜찮아.”

“말씀하실 필요 없습니다!”

아니, 진짜 괜찮다니까…….

관중들은 뒤늦게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 소음 속에서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고 생각했다.

“전하!”

그레이와 이델라가 달려오고 있었다. 관객석에서 죄다 뛰어나온 모양이었다. 그들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난 민망해졌다.

그렇게 다치진 않았는데. 다른 건 몰라도 낙마하는 법은 잘 배웠다.

미셸이 아니었으면 다치치도 않았을 거고…….

변명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걱정 받는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전하! 이쪽이에요!”

로웰이 천막을 젖혔다.

난 바로 의사에게 대령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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