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252화 (252/293)
  • 252.

    “꺄악!”

    그녀는 어쩌다 미셸이 말에서 튕겨져 나갔는지는 보지 못했다. 그가 바닥에 처박힐 기세로 날아가는 것만 목격했을 뿐이다.

    그녀는 조프리 왕자가 망설임 없이 말 아래로 뛰어드는 모습을 봤다. 왕자는 흙바닥 위를 구르면서도 미셸을 지켜 냈다. 그가 구르는 대로 흙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제히 일어났으나,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볼 수 없었다.

    에브니아도 까치발을 들고 있는 관객 중 하나였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흙먼지 사이로 웅크린 두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한 명은 다른 사람을 끌어안고 있고, 다른 한 명은 아래 깔려 있었다. 조프리 왕자가 미셸을 받아 낸 것이다.

    그러나 안도하기도 잠시였다. 그 위에서 미셸의 말이 앞발을 치켜들었다.

    주변에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이대로라면 왕자는 말에 짓밟힌다!

    “심판!”

    정적 속에서 누군가 심판을 불렀다. 그러나 심판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에브니아는 두 눈을 크게 뜬 채 그 광경을 봤다.

    관객석에서 난입한 키 큰 기사가 말의 허리를 잡아 제압했다. 에브니아는 말이 허리를 졸리는 것만으로 기절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그 기사는 말이 쓰러지자마자 왕자를 번쩍 안아 들었다.

    관객석에서 차례로 사람들이 뛰어내려 왕자에게 달려가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은 왕자에게 달려가다가, 방향을 바꿔 경기장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 남자가 에브니아의 앞을 스쳐 지나갔다.

    에브니아는 그를 알아봤으나, 그는 그녀의 앞에서 멈칫하지조차 않았다.

    “의사를!”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의 로웰 몽블랑이 다급히 달려가고 있었다. 그가 그녀에게서 멀어졌다.

    숨을 멈추고 있던 관객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상대가 강력한 경쟁자임에도 망설임 없이 뛰어들어 구한 왕자. 주인을 지키기 위해 규정을 어기고서 경기장에 뛰어든 수하들.

    기사도 소설에 나올 것처럼 멋진 광경이었다.

    왕자는 미셸 에이드가 정신을 차린 것을 확인한 뒤에야 안심하고 기사의 품에서 의식을 잃었다.

    기사도 정신 그 자체가 아닌가. 반면에 미셸 에이드의 행동은 너무 흉포하지 않았나? 그가 왕자 대신 다음 경기를 치르는 건 온당한 일인가?

    관객들은 의문이었다.

    그 의문이 너무 커져 경기를 속행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에브니아는 경기장을 빠져나왔다. 뒤의 경기는 볼 필요 없을 것이다. 경기가 진행될지도 모르겠지만.

    그녀는 조프리 왕자가 형편없는 사람이길 바랐다. 형편없는 정도까진 아니더라도, 이 경쟁에서 두각을 나타낼 정도의 사람은 아니기를 바랐다.

    소문대로 왕자가 뛰어난 사람이라면, 아버지는 욕심을 내고야 말 테니까.

    그 정도의 관심이었다. 그녀 자신이 왕자에게 흥미를 품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로웰의 그 표정은…….

    그녀는 로웰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로웰 몽블랑이 ‘충실함’이나 ‘간절함’ 같은 마음을 아는 사람이던가?

    아니.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로웰. 나를 만나러 왔어야지. 아니면 내가 너의 왕자님과 결혼해 버릴지도 모르잖아.”

    * * *

    셔벗 사교계와 어울리지 않는 건 양날의 검이었다. 난 나에 대한 정보를 셔벗에 숨길 수 있었지만, 반대로 나도 셔벗 귀족들의 생각을 알 수 없었다.

    내 평판이 어디선가 나빠져도 알 방법이 없다는 뜻이었다. 반대로 내 평판이 어디선가 좋아지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나만 아니라 사신단의 모두가 사교 행사는 불참하고 있었으니까.

    도트나 다른 사람들은 난리도 아니었지만, 난 경기장에서의 일이 내 일행에게만 색다르게 보였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도트는 조프리라면 다 좋게 보는 인물이었고 다른 사람들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그레이가 비교적 객관적일까?

    하지만 사람의 시선은 다 비슷한 모양이었고…….

    나도 모르는 사이 조프리는 어딘가에서 급성장한 주식이 된 듯했다.

    미셸과의 경기는 엉망진창이었다. 미셸도 나도 크게 다치진 않았으나, 결과에 대해 지저분한 말이 나오기 충분했다.

    귀족원에서는 때 아닌 토론이 일어났다. 미셸을 나 대신 다음 경기에 참가시키는 게 옳으냐는 논란 때문이었다.

    한쪽은 ‘왕자가 기권을 했으니 어쩔 수 없지 않냐. 게다가 부상자를 다음 경기에 내보내는 건 옳지 않다.’고 주장했고, 다른 한쪽은 ‘명백한 패배자를 올리는 것도 옳지 않다.’고 주장한다는 모양이었다.

    왕의 시종이 물었다.

    “귀족원에선 전하와 에이드 경을 모셔 의견을 듣고자 합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회의라면 오랜 시간 서 있어야겠지?”

    “예? 회의는 앉아서 진행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오랜 시간은…….”

    “부상 후유증이 너무 심하군. 내가 잠시도 앉아 있지 못할 지경이라고 전해 줘.”

    대체 누가 내 편을 들어 주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환자를 다음 경기에 올려 보낼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후자를 주장하는 쪽은 내 편이 아니라 미셸을 떨어뜨리고 싶은 세력이겠지만.

    시종은 멀쩡히 서 있는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다 나갔다. 자신이 참견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이로써 난 첫 번째 시험에서 무사히 탈락했지만, 문제는 다른 쪽에서 일어났다.

    궁인들이 궤짝을 책상에다 내려놨다. 무게 때문에 책상이 살짝 울렸다.

    궤짝 안엔 흰 편지지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이 편지들은 초대장이 아니었다.

    내가 그걸 아는 이유는 이런 궤짝을 받는 게 지금이 처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슷한 궤짝이 벌써 책상 위에 두 개 더 쌓여 있었다.

    “어떻게 할까요, 왕자님? 제가 일괄 답장을 할까요?”

    난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사이 도트는 편지의 인장을 보고 분개했다.

    “이 가문은 주제도 모르고! 셔벗인들이 아무리 연애결혼입네 하지만, 여긴 양심이 없네요! 남작의 딸이 전하를?”

    그러니까, 이 편지들은 청혼서였다…….

    ‘원치 않는 약혼을 청한다면…….’

    에드워드의 예언이 이렇게 실행된다고?

    이 편지들은 첫 번째 경기가 끝나자마자 하나둘 날아들기 시작했다. 난 이해가 안 됐다.

    “그러게. 뭘 믿고 이러지? 내가 망하면 이 가문들도 큰일 날 텐데?”

    “정말이요. 감히 왕자님을 어떻게 보고……. 예?”

    “내가 경쟁에서 탈락해 봐. 이 가문들은 자기를 배척하는 차기 왕의 지배하에 지내야 할 텐데?”

    “예? 앗, 왕자님. 저는 그 뜻이 아니라…….”

    물론 도트의 뜻은 알고 있었다. 내가 모르는 건 셔벗 귀족들이 왜 이렇게 경솔한 선택을 하느냐였다.

    조프리는 객관적으로 좋은 결혼 상대였다. 일 년 전엔 더욱더 그랬지만, 지금도 나쁘진 않았다.

    하지만 비스코티의 반란을 겪으며 디버프가 걸렸고, 셔벗에 와서는 하나가 더 추가됐다.

    조프리는 비스코티 왕위 다툼에서 실패한 데다 셔벗에서 또 왕위 다툼을 하고 있는 왕자가 됐다.

    이렇게 보니 엄청난 야심가 같다.

    그런데 셔벗 왕위 다툼은 조프리가 성공하기 아주 어려운 싸움이었다.

    내가 셔벗 귀족이면 이런 인간과 딸을 결혼시키진 않을 텐데.

    도박인가?

    어떻게 해도 가문의 세를 못 키운다는 생각이 들었으면, 갑자기 등장한 내가 판돈을 걸 만한 상품으로 보였을 수도 있다.

    이게 맞는 것 같다.

    난 확신했지만, 내 가설은 어떤 사람의 등장으로 깨졌다.

    “헉, 왕자님. 손님이 찾아오셨다는데요.”

    “나 아프다고 하고 돌려보내.”

    “하지만 왕자님이 깨어날 때까지 문 앞에 서 계시겠다는데요.”

    “누군데?”

    멋대로 문이 열리고 굳은 표정의 남자가 들어왔다. 뭐지? 무례한 행동 아닌가?

    “이러시면 안 됩니다!”

    “함부로 들어가시면…….”

    문을 지키던 병사들은 반발했으나, 침입자에게 손은 대지 못했다. 이 침입자는 셔벗의 대귀족이다.

    “여러 번 청을 넣어도 만나 주지 않으시기에 찾아왔습니다.”

    “누구지?”

    “스프라우트 공작 아이작입니다. 듣던 것보다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이군요. 잠시 시간을 내어주실 수 있습니까?”

    내가 아니라고 말하면 나갈까?

    아닐 것 같았다.

    “도트. 차를 준비해 줘.”

    스프라우트 공작.

    내가 만나지 못한 셔벗의 마지막 공작이었다. 공작은 평범한 외모였다. 어디에나 있을 법한 남자여서 이 사람을 대전에서 봤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두 공작이 나를 적대하는 건 확인했지만, 이 사람은 후계 경쟁에 안 끼어드는 줄 알았는데?

    공작은 소파에 앉자마자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칼인가? 알렉스가 검에 손을 올리며 경계했다.

    공작이 꺼낸 건 편지 한 통이었다.

    “받으십시오.”

    난 그의 말대로 했다. 설마 이걸 전해 주러 직접 온 건 아니겠지.

    “읽어 보십시오.”

    공작이 권했다.

    지금?

    난 편지를 뜯었다. 첫 줄은 이렇게 시작됐다.

    -온 마음을 다해 흠모하는 조프리 전하…….

    난 차를 뱉을 뻔했다.

    “어떠십니까?”

    대체 뭐가?

    “긴말하지 않겠습니다, 전하. 제 딸아이를 받아 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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