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201화 (201/293)
  • 201.

    그게 얼마 전의 일이었다.

    그레이는 바빴다. 아버지를 설득하고 다른 귀족들의 동향을 살피며 숨죽인 채 수도에서 머물렀다.

    바움쿠헨 백작은 약속된 장소에서 대기 중이었다.

    “도련님. 왕성 시종이 다녀갔습니다.”

    집사가 그레이에게 편지를 가져왔다.

    에드워드인가? 새 소식이 있는지도 모른다.

    편지를 열자마자 그레이는 눈을 의심했다. 익숙한 필체였다. 에드워드의 것은 아니었다.

    -만나자. 얼굴 보고 얘기 좀 하고 싶은데. 낮엔 바쁘니까 저녁 이후에 찾아올래? 같이 식사해도 좋고.

    격식이라곤 손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이 보낸 편지였다면 첫 줄을 읽자마자 가까운 화분에 심어 버렸겠으나, 그레이는 편지의 마지막 줄까지 읽고 다시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

    심장이 잡힌 듯 긴장됐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편지를 접고, 지금 보러 가면 안 된다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왕자는 둔한 척하지만 사실 어마어마하게 눈치가 빠르지 않은가. 그레이의 표정 같은 건 보자마자 읽어 낼 것이다. 그리고 ‘내게 뭘 숨기고 있어? 에드워드와 계책을 논의했군. 어서 털어놔.’라고 말하겠지. 아니면 그레이가 또 자신을 속인다고 실망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거나.

    가면 안 된다.

    하지만 왕자가 그의 얼굴을 보고 싶다지 않는가?

    아무렇게나 한 말일 것이다. 왕자가 하고자 했던 말은 ‘이야기하고 싶다’겠지.

    정말로 용서받은 건가. 조프리 왕자는 자신과 대화를 나누고 싶은 건가? ‘식사하자’ 같은 말을 왕자가 함부로 할 것인가?

    물론 조프리 왕자는 그런 제안을 아무렇게나 하는 사람이긴 했지만.

    아니다. 가면 조프리 왕자는 ‘다시 생각해 보니 너와는 인연을 끊고 싶어졌어. 얼굴 보고 이야기하는 게 예의일 것 같아서.’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쓸데없는 생각이다!

    왜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거지?

    그레이는 예의를 갖춰 거절의 편지를 적었다. 그리고 집사에게 다음 날 적당한 시간, 그러니까 조프리 왕자가 한창 바빠서 편지를 못 읽을, 읽더라도 오래 마음에 담아 두지 않을 만큼 정신없을 낮 시간대에 전달하라고 지시했다.

    그는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어두운 천장을 노려보고 있으려니 손에 땀이 식고 우울한 기분도 한결 나아졌다.

    왕자는 아무 생각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무슨 생각이 명백히 있거나…….

    그레이가 고민해서 알아낼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건 분명했다. 달리 알 방법도 없었다. 그는 이미 거절하지 않았는가.

    다음 날 저녁, 집사가 그레이에게 다시 편지를 전달했다.

    “왕궁 시종이 방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도련님.”

    “또?”

    이번에야말로 에드워드인가? 그러나 예감이 나빴다.

    “동안에 키 작은 시종인가?”

    “어려 보이긴 했습니다만…….”

    왕자의 시종이잖아! 봉투와 편지지까지 일전에 받은 것과 똑같았다. 그레이는 괴로워하며 편지를 펼쳤다.

    한 줄이 쓰여 있었다.

    -나한테 죄송하다며? 빨리 와.

    “…….”

    * * *

    몽블랑 상단의 하인 오트는 며칠 허탕을 친 끝에 소문 유포자를 발견했다.

    사람들의 대화에 의미 없이 끼는 놈.

    시도 때도 없이 조프리 전하와 셔벗을 엮는 놈.

    ‘저놈이다.’

    그는 확신했다. 동료들은 근처에 없었고, 범인은 혼자였다.

    성과 없이 며칠을 헤매고 다녔더니 한 일도 없이 지치는 기분이었다. 오트는 하루 빨리 범인을 잡아 본업으로 복귀하고 싶었다. 그는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멍하니 살펴보는 것보다 몸을 움직이는 노동이 체질에 맞았다.

    오트는 미행을 들키지 않기 위해 가판대에서 사과를 샀다. 시장 구경하는 사람처럼 사과를 먹으며 휘적휘적 걸었다.

    범인은 저만치 앞서 가고 있었다. 오트는 걸음을 빨리해서 조금씩 거리를 좁혔다. 가는 길에 동료와 눈이 마주쳐서 신호를 보냈다. 동료가 고개를 끄덕이고 거리를 둔 채 따라왔다.

    그들은 걸었다. 큰 거리로. 인적 드문 곳으로.

    오트는 주변이 귀족들의 타운 하우스가 위치한 곳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이 추측한 대로 범인은 귀족의 하인이었다.

    어서 들어가라. 넌 어느 댁에서 나왔냐?

    오트는 과심을 근처에 버렸다. 그때 울타리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저택에서 하인들이 우르르 튀어나왔다.

    “저놈 잡아라! 수상한 놈이다!”

    “어?”

    오트는 붙잡혔다.

    끌려간 오트는 바닥에 이마를 댄 채 식은땀을 흘렸다. 그의 머릿속엔 ‘무슨 일이 생기면’이라고 말하던 아가씨의 목소리가 메아리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생기고야 말았다. 따라온 동료가 구해 줄 수 있을까? 불가능하겠지.

    그는 자신의 마지막 모습을 동료가 로웰 도련님께 서둘러 전해 주길 바랐다. 그는 감옥에서 삶을 끝내고 싶지 않았다. 귀족들이란 얼마나 폭력적이고 두려운 존재란 말인가.

    저택의 주인이 오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공작 각하. 어떻게 할까요.”

    집사가 주인을 불렀다. 오트는 그 와중에도 공작이라는 단어가 귀에 들어왔다. 소문을 퍼뜨리는 배후가 공작이었다!

    오트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 뻔했다. 공작이라면 까마득한 귀족이었다. 오트 같은 신분은 평생 가도 만날 일 없을 존재다.

    그러니까, 공작은 왕족이지 않은가.

    왜 공작씩이나 되는 사람이 그런 일을 하고 있는 거지? 사실 귀족이란 정말 할 짓 없는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누구지? 어디 소속이냐. 감히 공작의 하인을 해치려 하다니.”

    공작이 말했다. 목소리는 낮고 점잖았다.

    오트는 벌벌 떨었다. 공작이 할 짓 없는 사람이든 뭐든 오트의 머리와 몸을 분리하기엔 충분한 힘을 가진 사람이었다.

    “해치다니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저, 저는 그저…….”

    “해치지 않으면, 죽이려 했느냐? 아니면 저택에 몰래 들어올 방법을 찾으려 했느냐? 어느 쪽이든 국법으로 엄히 다스려야겠구나.”

    공작은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오트는 더욱 두려워졌다.

    “아닙니다! 저는 이곳이 어디인 줄도 몰랐습니다! 공작님의 하인일 줄은 상상도 못 하고…….”

    “이곳이 어디인 줄 몰랐다? 길을 잃었구나.”

    “예, 예, 그렇습니다!”

    공작은 잠시 오트를 내려다봤다. 오트는 그 시간이 일 년 같았다.

    “그런가. 보아하니 너는 주인을 모시는 종복이구나. 네 주인이 사죄하고 너를 데려간다면 용서하마.”

    공작이 말했다.

    오트는 어안이 벙벙했으나, 이내 안도감으로 얼굴이 밝아졌다.

    거짓말이 통했다!

    “소속이 어디냐?”

    공작의 집사가 물었다.

    “예에, 저는 몽블랑 상단의 하인입니다.”

    오트는 대답했다.

    * * *

    관리들이 예산 다음으로 논의하려고 한 건 귀족들의 장례식 참석 문제였다. 누가 참석할 것인가, 어떻게 자리를 배치할 것인가를 정하는 데 내 도움은 필요치 않았다. 오히려 시종들이 도움이 됐다.

    “모 백작과 모 남작은 소문이…….”

    “아직도 관계가 나쁩니까?”

    “폐하 앞에서도 소리 높여 싸우던 자들입니다. 장례식이라고 다르겠어요?”

    “또 이자는 불온한 사상을 가진 자입니다.”

    “입에 담기 힘든 말을 감히 왕성에서 지껄인 적 있는…….”

    “그런 정보는 대체 어디서 얻는 겁니까?”

    관리들은 시종들의 놀라운 정보력에 감탄했다.

    시종들이 말없이 미소 짓자, 관리들은 감탄의 눈으로 나를 돌아봤다. 누가 보면 내가 조사라도 시킨 줄 알겠다. 난 걔네 취미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이리 진행하시면 문제는 없을 겁니다.”

    관리들은 긴 토론 끝에 내게 배치도를 가져왔다. 읽어도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타당하군. 이대로 진행하면 되겠어.”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오나 전하, 셔벗의 사신 일행은 어떻게 할까요?”

    예무부 관리가 물었다.

    “사신?”

    “장례식에 참석하겠다고 뜻을 알려 왔습니다.”

    “나와 가까운 곳에 자리를 마련해 줘.”

    “전하 곁에 말입니까?”

    “응.”

    관리는 놀란 듯했으나 반대하지 않았다.

    어쩌면 대화할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왕비님의 장례에 고향 사람이 몇 명은 참석하는 셈이다.

    마지막으로 관리들은 내게 명단을 척척 안겼다.

    “이들은 제외했습니다. 반역죄인들과 어울리던 자들입니다. 또 이들은 경계하시고……. 이들은……. 흉중에 무슨 속셈이 있을지 모를 자들입니다.”

    “이번 공개 처형으로 왕실에 불만을 품은 이들이 많습니다. 전하께서는 이미 아시겠지만, 철저히 방비를 해 두어도 현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알 수 없으니까요.”

    “충정을 모르는 자들을 조심하십시오.”

    처음 봤을 때에 비해 태도가 부드러워진 관리들은, 자신들은 충성심이 가득하고 귀족들은 아니라는 식으로 흉을 보더니 깍듯이 인사하고 나갔다.

    관리들도 귀족 아닌가?

    아무튼 관리들의 말은 옳았다.

    에드워드는 대역죄인들을 광장에서 공개 처형 했다. 이 세계는 어지간히 볼거리가 없어서, 이번에도 공개 처형은 인기가 좋았다.

    백성들이 몰려들어 구경했다. 이번엔 죄인들이 전부 귀족이었고, 이런 특별하고 모욕적인 처형은 쉽게 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백성들은 좋아했지만 귀족들의 왕성 출입은 극도로 줄어들었다. 겉으로 대는 핑계는 휴회였으나, 원래 왕성은 회의 여부와 상관없이 귀족들로 가득한 장소였다.

    이는 에드워드와 귀족들의 반목을 보여 주는 듯했다. 눈과 귀가 달린 사람이라면 분위기를 느낄 만했다.

    에드워드와 귀족들은 대립하고 있고, 그 원인 중 하나는 나다.

    관리들은 입 밖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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