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
“전하. 이델라 양이 찾아왔습니다.”
밖에서 병사가 알렸다. 들어오라고 허락하자, 얼굴이 발갛게 익은 이델라가 다급히 달려왔다.
“전하! 상단 하인이 잡혔어요!”
“어디에?”
몽블랑 상단 하인이라면 소문의 배후를 쫓고 있었다.
“파이 공작의 저택에요. 그런데 공작이 알고 있었어요.”
“뭘?”
대화를 따라갈 수 없었다. 파이 공작이 여기서 왜 나오지?
“전하께서 조사 중이라는 사실을요!”
어?
“파이 공작이 범인이었다고?”
“예! 제게 이 편지를 전하께 전달하라고 했어요!”
난 일단 편지를 받았다.
“하인의 진짜 주인은 전하이니, 전하께서 직접 말씀하신다면 하인을 놓아주겠다고…….”
파이 공작은 왕족이었으나 신분을 내세워 문제를 일으킨 적은 없었다. 이상적인 왕족으로, 왕자들의 스승이라는 명예를 유지할 만한 분이었다. 학자로서 명망이 있는 데다가 인품도 신뢰받고 있어서, 어떤 면에서는 귀족들에게 큰 영향을 발휘하기도 했다.
난 선생님들께 좋은 제자는 아니었는데, 내게 처음으로 칭찬 비슷한 걸 해 준 스승님이기도 했다.
-전하께서 폐하의 친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저와 대화를 나눠 주십시오.
“…….”
파이 공작이 보냈다고?
봉투를 봤다. 편지를 봉한 건 파이 공작의 문장이 맞았다.
다시 읽어도 내용은 바뀌지 않았다.
나 지금 협박당하는 건가?
* * *
파이 공작은 옷을 갖춰 입고 조프리 왕자를 기다렸다. 그는 왕자가 편지를 받고 고민할 거라고 생각했다.
공작은 협박 같은 일은 해 본 적 없었다. 그는 살아가면서 다양한 문제를 맞닥뜨렸으나 그것을 협박으로 해결하지는 않았다. 그런 성품이 아니었던 탓이다. 게다가 왕족으로 태어났음에도 왕이 될 수는 없다거나, 종잡을 수 없는 왕을 모셔야 한다거나 하는 문제는 어떤 방법으로도 해결할 수 없기도 했다.
그는 조프리와 에드워드의 관계를 갈라놓아야 했다. 조프리 왕자는 에드워드의 보호하에 있었는데, 그 보호가 너무 굳건해서 귀족들은 조프리에게 접근할 수 없었다.
조프리 자신도 에드워드를 굳게 믿고 있을 것이다. 그를 셔벗에 볼모로 넘기려는 귀족들을 에드워드가 막아 주는 것 같을 테니까.
그게 허상이라고 설득해야 한다.
이미 파이 공작을 적으로 규정한 조프리가, 가장 믿음직한 아군을 의심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파이 공작은 목이 말랐다.
그는 하인을 불러 물을 내오게 명령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전에 집사가 손님이 도착했음을 알렸다.
“조프리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들어오시라 하게.”
파이 공작은 일어나서 왕자를 맞았다. 젊은 왕자가 응접실로 들어섰다. 왕자는 온화한 인상이어서,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호감을 줄 만했다.
공작은 그 얼굴에서 왕의 흔적을 찾아낼 수 없었다. 조프리 왕자는 왕을 전혀 닮지 않았다. 왕비를 닮았다는 인상도 주지 않았는데, 사람이 가진 고유의 분위기가 아예 달랐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자면 왕자는 양쪽 부모를 모두 닮지 않은 셈이었다.
“전하.”
“스승님.”
왕자가 부드럽게 불렀다. 공작은 놀랐다. 왕자는 화났거나 초조한 것 같지 않았고, 냉담하지도 않았다. 그는 협박받은 사람처럼도 보이지 않았다.
큰일을 겪었으니, 어느 정도 냉소적으로 변해 있을 것이다. 경계심을 내비칠 것이다. 예측하던 것도 들어맞지 않았다. 파이 공작은 왕자를 여느 때와 같이 왕성에서 우연히 만난 기분이었다.
그는 당황을 드러내지 않고 말했다.
“밖에서 만나 달라는 요청을 받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건강한 모습을 뵈어 기쁩니다.”
“어려운 부탁도 아닌데요. 저도 스승님의 건강한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습니다.”
“그렇습니까?”
공작은 저도 모르게 반문했다. 그럴 만한 서신이 아니었을 것이다.
“예.”
왕자는 동요하지 않았다. 공작이 기억하는 그는 솔직한 아이였는데, 지금은 그가 불가해했다.
“저는 전하께서 오지 않으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스승님께서 부르시는데요?”
“제가 불렀기 때문에.”
왕자가 서신을 읽지 않은 것이 아닌가?
“그런 편지를 보내지 않으셔도, 스승님께서 부르셨다면 뵈러 왔을 텐데요.”
왕자는 똑바로 눈을 마주쳤다. 공작은 그가 서신을 읽었으며, 자신은 그를 협박한 상태라는 사실을 자각했다.
“전하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려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전하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을 뿐입니다.”
“예. 스승님과의 대화는 언제든 기쁩니다.”
왕자는 말해 보라는 듯 턱을 들었다. 쓴웃음을 짓는 듯한 표정이었고, 파이 공작은 마음이 불편해졌다.
“전하께서 저희를 불신하시고 에드워드 전하를 믿으심을 압니다. 에드워드 전하께서는 이번 역모에 연루된 바가 있다면 재상이라도 용서치 않으시지 않습니까. 역사를 돌아보아도 다시 찾기 힘든 우애일 것입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모르시는 일이 있습니다. 왕비 전하를 피고로 한 재판이 계획되었음은 알고 계십니까?”
“그랬습니까?”
“예. 발안자는 에드워드 전하셨습니다. 그분이 제게 추밀원의 귀족들을 규합해 줄 것을 부탁하셨습니다. 왕비 전하를 이 나라에서 축출하기 위해. 재판이 이루어졌다면, 왕비 전하의 명예는 땅에 떨어졌을 것입니다.”
조프리 왕자는 동요하지 않았다. 공작은 그가 자신을 믿지 않는 것이라 여겼다.
“죄목은?”
“폐하를 독살하려 한 죄입니다.”
여전히 왕자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에드워드 전하의 친필 서한을 보여 드릴 수 있습니다. 필요하시다면 지하 감옥에서 왕의 하인을 찾아보십시오. 왕비 전하의 죄를 증언할 자입니다. 에드워드 전하가 가둬 두고 있을 것입니다. 에드워드 전하께서는 전하를 이용하고 계실 뿐입니다. 제가 전하의 적이었음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에드워드 전하 역시 전하의 적입니다.”
왕자는 대답이 없었다.
공작의 말에 놀라거나 동요하지 않았고, 하다못해 무시하지도 않았다.
공작을 믿지 않는다면 왕자는 화낼 수도 있었다. 에드워드는 그런 인물이 아니며, 공작이 자신을 능멸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
왕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문득 공작은 의문이 들었다.
왜 그는 공작에게 어떻게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느냐고 묻지 않는가?
왕자는 출생의 비밀을 부인하거나, 다시 입에 올리지도 않았다.
공작은 마음이 불편했다. 그는 자신이 명예롭지 않은 행동, 부끄러운 행동을 하고 있다고 느꼈다. 조프리 왕자를 협박하는 모양새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믿기 힘드시겠지만…….”
“에드워드가 왕비 전하를 재판정에 세우려고 했으며, 그건 경쟁자인 나를 제거하기 위해서였다고요. 지금 에드워드가 나를 보호하고 있는 것 같아도 믿어서는 안 된다고요.”
공작은 놀랐다.
“알고 계셨습니까?”
“아니요.”
아니라면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인가. 왕자는 찡그리는 것인지 실소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얼굴로 공작을 응시했다.
왕자가 공작을 스승으로 대했기 때문에, 공작은 스승이 제자에게 설명하듯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왕자는 표정 변화만으로 태도를 바꿨고, 공작은 답답해졌다. 그는 왕자의 손바닥 위에 있는 듯했다.
“스승님께서 저를 부르신 이유가 뭔가요?”
왕자는 문득 공손하게 물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이 공작의 이유였다. 왕자가 에드워드를 불신하게 만들고, 감정의 동요를 이용해 그가 에드워드를 상대하게 하는 것.
그러나 지금 동요하고 있는 건 왕자가 아니라 파이 공작이었다.
“에드워드 전하는 셔벗에 대항해야 한다며 귀족들에게 사병과 재물을 내놓으라 협박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전하를 아끼는 것이 아니라 전하를 명분으로 이용할 뿐입니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함은 과거에서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그분의 신의 없는 행동은 귀족들로 하여금 공포심을 불러일으킬 뿐입니다……. 그분의 말을 어찌 믿을 것입니까? 쓸모가 다하면, 그분은 전하를 어떻게 대하실 것입니까?”
에드워드가 귀족들에게 사병을 내놓으라 명령했기 때문에, 귀족들은 사병을 불러들였다.
그 병력으로 수도를 포위할 것이라는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무도한 일이다. 그러나 공작은 에드워드가 재상을 어떻게 대하는지 보았다. 그는 폭군이었다.
귀족들은 반역을 일으키려는 것이 아니었다. 구심점이 될 만한 인물도 없었다. 파이 공작과 귀족들은 에드워드를 압박하고 싶을 뿐이었다. 그가 더 이상 멋대로 국정을 뒤흔들 수 없게.
그러기 위해서는 조프리의 도움이 필수적이었다.
공작은 침착하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조프리 왕자가 미간을 찡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