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200화 (200/293)
  • 200.

    로웰은 괜히 머리를 긁적이며 상단으로 돌아갔다. 상단에 마련된 숙직실에선 이델라가 졸고 있었다.

    “로웰 씨 오셨어요?”

    “깨우려던 건 아니었어요. 여기서 잠들었어요?”

    “조사하다 보니 시간이 늦어서요.”

    이델라가 배시시 웃었다. 그러더니 뺨을 문지르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어제 상단 하인들과 함께 광장을 순찰했는데요, 소문을 퍼뜨리는 무리들은 보이지 않았어요. 이대로 영영 몸을 숨긴 거면 어쩌죠?”

    로웰은 잠시 생각했다. 덩치 큰 하인들 틈에 이델라가 끼어 있는 모습을 상상하니 문제를 알 것 같았다.

    “순찰한 게 문제일지도 모르겠는데요. 아무래도 하인들은 체격이 좋아서 눈에 띄니까요.”

    이델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소수로 잠입 수사를 해 볼까요? 저처럼 눈에 안 띄는 사람들만 모아서요.”

    “이델라 양은 미인이라 눈에 띌걸요. 차라리 저와 함께 광장 근처에서 데이트하는 사람처럼 꾸며 보는 게 어때요?”

    “와, 로웰 씨 같은 유명 인사와 함께 있으면 정말 눈에 안 띌 거예요. 잠입이 잘될 것 같아요!”

    “사실 저 잠입이든 뭐든 못 해요. 장례 준비로 당분간 바쁠 것 같아요.”

    로웰이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델라는 따라 웃다가 멈췄다.

    “아…… 장례 준비. 왕자님은 괜찮으신가요?”

    “모르겠어요.”

    이델라는 고개를 숙였다.

    “그렇구나. 다들 바쁘시네요. 당분간 조사는 제게 맡겨 주세요.”

    “부탁드려요.”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왕자를 모시는 사람들 간의 따듯한 공기가 흘렀다. 돌아선 뒤에야 로웰은 의문이 들었다.

    ‘다들?’

    왕자와 로웰을 말하는 건가? 하지만 이델라의 충성심을 생각해 보면 왕자를 칭하는 표현으로는 이상했다.

    “다들 바쁘다고요?”

    로웰이 확인하자, 이델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네에, 바움쿠헨 백작님이 급한 일로 성을 비우신 게 떠올라서요.”

    로웰은 인상을 썼다.

    * * *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저에게 말씀하세요.”

    로웰 몽블랑은 이델라에게 신신당부했다.

    “무슨 일이란 게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이델라가 묻자 로웰은 “아닌가? 이쪽은 괜찮을지도 모르겠어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하고 나갔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저렇게 말하면 걱정해야 할 것 같지 않은가?

    아무튼 이델라는 상단 하인들과 새로 계획을 짰다. 그들은 인내심을 가지고 은밀하게 움직여야 했다. 서너 명이 몰려다니며 수상한 자를 발견하면 붙잡는 대신에, 뿔뿔이 흩어져 소문 유포자를 포착하기로 했다.

    하인이 물었다.

    “발견하면 어떻게 할까요?”

    “가능하면 붙잡고, 위험할 것 같으면 몰래 따라가 봐요.”

    이델라가 대답했다.

    소문 유포자가 귀족 거주구로 도망친다면 배후를 특정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운이 좋기는 힘들지도 모르지만.

    조프리 전하는 장례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에겐 내색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마음이 말이 아닌 게 보였다.

    셔벗에선 전하의 신변을 노리고 있고 국내 정치적 상황도 위태로운 것 같다.

    하루빨리 배후를 찾아내고 싶다. 그녀는 조급해지는 마음을 한숨과 함께 억눌렀다.

    이델라가 빙그레 웃었다.

    “우리 천천히 해 봐요. 어제는 나타나지 않았어도 오늘은 또 모르니까요. 오늘 나오지 않으면, 내일은 나타나겠죠.”

    “예, 아가씨.”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나면 제게 바로 말씀해 주세요.”

    이델라는 로웰이 남긴 말이 떠올라서 일러두었다.

    “무슨 일 말씀이십니까?”

    이델라가 생각할 수 있는 문제는 하나밖에 없었다.

    “범인을 잡으려다가 우리 정체를 들킨다거나, 그래서 영영 놓친다거나, 그러면 곤란하겠죠?”

    “하하. 그런 실수를 할 리가요. 저희가 이래 봬도 산전수전 다 겪었답니다.”

    “도주하는 도련님……. 아니, 사람을 잡는 건 전문이라고요.”

    하인들은 자신만만하게 나갔다.

    * * *

    도트는 알현 신청 목록을 가져왔다.

    왕족을 만나는 방법은 다양하겠지만, 가장 전통적인 방법은 측근에게 선물을 바치고 ‘누구누구가 왕자 전하를 뵙고 싶어 한다’고 청을 넣는 것이었다. 이때 측근은 보통 시종들이었다.

    왕비님은 이런 귀족들을 꽤 만났다. 왕비궁에는 자주 선물이 들어왔고 왕비님은 그걸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반대로 나는 누굴 만나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알현 신청이 꾸준히 들어오긴 했다. 지금도 조프리를 만나고자 하는 귀족들이 몇 있었다.

    “이 사람들이 다야?”

    “예, 왕자님.”

    “적은 거지?”

    도트가 분개하는 걸 보니 내 착각은 아니었다.

    “전하께 등을 돌린 자들은 저희가 따로 기억해 두고 있어요! 대국을 보는 눈이 없는 자들이에요. 왕자님은 신경 쓰지 마세요.”

    “신경 안 써.”

    도트가 훨씬 신경 쓰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튼 아직도 조프리를 만나고 싶어 하는 귀족들은 에드워드는 감히 만날 수도 없는 사람들이거나 아니면 왕비님에 대한 충성심이 투철한 자들인 모양이었다.

    어느 쪽이든 대전 회의에 참석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내게 도움이 되지 않을 사람들이다.

    내게 필요한 건 고위 귀족. 그중에서도 회의에 참석해 에드워드와 대립하며 그의 의중을 상대해 온 대신들이다.

    문제는 내가 고위 귀족들과 친분이 전혀 없다는 데 있었다.

    사교 행사 좀 다녀 둘걸.

    살자고 한 일인데 이제 와서 후회하게 될 줄 몰랐다.

    에드워드가 제공하고 로웰이 들어서 전해 준 정보에 따르면, 회의에 참석한 귀족들은 내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리고 내게 호의적인 귀족들은 에드워드의 편이었다. 에드워드의 편이기 때문에 내게 호의적인 것이었고, 반대로 내게 호의적이기 위해서는 에드워드 편을 들 수밖에 없었다.

    에드워드의 정보를 믿느냐 마느냐는 다른 문제지만. 그 부분을 제쳐 두고 생각해 보면, 내가 만나야 할 사람들은 내 적이다.

    나한테 믿을 만한 정보를 제공하도록 그들을 설득할 수 있나?

    그 전에 나를 만나 주기는 할까?

    시종들이 회의 참석자 명단을 가져왔다.

    에드워드를 보러 회의장에 들어갔을 땐 경황이 없어서 누가 참석했는지도 제대로 못 봤다. 재상과 바움쿠헨 백작만 기억날 뿐이다.

    명단에는 여러 이름이 있었다.

    “이들에게 은밀하게 접촉할 수 있을까?”

    “다음 회의 때 시도할게요.”

    시종들은 의욕을 보였다.

    “회의 매일 열리는 거 아니었어?”

    “며칠 휴회래요.”

    “귀족들이 방문하지 않으니 왕성이 다 조용하더라고요.”

    “관리들만 바쁜 것 같아요.”

    시종들이 서로를 보며 말했다. 난 예감이 좋지 않았다.

    며칠 뒤면 늦다.

    역시 먼저 접촉하는 수밖에 없었다. 명단을 다시 읽었다. 이 중에서 대화라도 해 본 사람이라면…….

    재상.

    너무 힘든 상대 아닌가?

    * * *

    조프리 왕자의 측근들이 빠져나간 뒤에도 그레이 크래커는 에드워드 왕자와 논의를 주고받았다.

    그건 조프리의 측근들이 들어서는 안 되는 이야기였다.

    에드워드는 이미 모든 결정을 내린 뒤 그레이에게 통보하곤 했는데, 갑자기 출전한다고 했을 때가 그랬고 왕비를 축출해야 한다고 말했을 때가 그랬다.

    그레이는 따르는 사람이었고 에드워드는 명령하는 사람이었다. 그레이는 그것에 의문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그가 모시는 사람은 왕자였다.

    그러나 그레이는 의문스러웠다.

    “정말로 그렇게 하실 겁니까?”

    “네 가문에 피해가 없으리라 약속하지.”

    “예…….”

    그레이는 자신이 가문보다도 조프리 왕자를 가장 먼저 떠올렸다는 데 놀랐다.

    “조프리 전하께는 말씀드리지 않을 겁니까?”

    “뭐라고 말할까? 내가 설명하면 조프리가 좋은 방법이라고 찬성하고 기뻐할까?”

    그레이는 침묵했다.

    “모르는 게 나은 일은 분명히 있겠지.”

    에드워드가 말했다.

    두 사람은 조프리 왕자가 전쟁을 막기 위해 무슨 일을 했는지 알고 있었다. 그레이보다 에드워드가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희생은 필연적인 것이다. 비스코티는 누더기 천과 같았다. 에드워드가 팽팽하게 내리누르고 있으나, 안에서는 대귀족들이 고개를 내밀었고 외부에서는 셔벗이 잡아당기고 있다. 언제 찢어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역량 있는 왕이 등장해 나라 안팎의 혼란을 정리하는, 역사서에나 나올 법한 일은 기대할 수 없었다.

    아니, 에드워드는 그 일을 해내려고 하고 있었다. 평화로운 방법으로는 불가능할 뿐이다.

    모르는 게 더 나을 일.

    그럴지도 모른다. 조프리 왕자가 비정한 계략을 승낙하는 모습 같은 건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러나 조프리 왕자가 정말로 아무것도 모를 것인가?

    모든 일이 끝난 뒤에도 그럴 수 있는가?

    조프리 왕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될 것이다. 원인이 무엇인지도.

    그레이는 무엇이 마음에 걸리는지 깨달았다. 조프리는 결국 알게 될 것이고, 이 결정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랬구나.’

    조프리 왕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알아. 어떻게 된 일인지 들었어. 어쩔 수 없었겠지.’

    왕자는 그렇게 넘어갈지도 모르지만…….

    그레이는 가슴을 눌렀다. 답답했다. 조프리 왕자는 담담하게 말할 것이다. 두통이 일었다.

    “이 나라에 더 이상의 혼란은 필요 없어.”

    에드워드가 말했다.

    “예.”

    그레이는 동의했다.

    그는 조프리의 얼굴을 머릿속에서 지우고 다른 방식으로 생각해 보았다.

    혼란이 끝나면 조프리 왕자는 안전해질 것이다.

    그만 좀 해! 그레이는 스스로에게 윽박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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