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99화 (99/293)
  • 99.

    22. 대면

    식당을 나와서야 깨달았다. 옷 물어 주는 얘기 또 못 했다.

    게임 속 이델라는 특별한 날 빼고 매번 똑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옷장 탭을 선택하면 평상복이라는 이름으로 나오는 단순한 옷이었다.

    수업을 받으러 갈 때는 교복.

    이델라가 넘어질 때 망가진 옷이 그 평상복이었던 것 같은데.

    방금 식당에서 이델라가 입고 있던 옷을 떠올리려고 해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 평상복에 복구 기능이 있나?

    이 게임이 멀쩡한 정신을 가지고 있으면 없겠지만, 확신할 수 없었다.

    “왕자 전하, 알고 계셨어요?”

    “뭘?”

    “저희 집안이요.”

    “몽블랑 상단?”

    “모르시는군요.”

    로웰이 쓴웃음을 지었다. 사연 있어 보였다.

    로웰도 공략 캐릭터니까 당연히 사연이 있을 것이다.

    에드워드와 조프리만큼이나 방대한 사연일까? 내가 알 필요 없었다. 로웰 몽블랑을 공략할 것도 아닌데.

    이번엔 출생의 비밀이나 혈통이 어쩌고 하는 사연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이미 에드워드를 포함해서 조프리와 알렉스까지 그 비슷한 사연의 소유자였다.

    “안 물어보세요? 파벨이 왜 저런 소리를 했냐든가……. 궁금하지 않으세요?”

    로웰은 엄청나게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물어봐 달라는 건가? 묻기만 해 보라고 벼르는 것 같기도 했다.

    날 훌륭한 왕자로 봐 주는 건 고마웠지만, 돌려 말하기는 아직도 알아듣기 힘들 때가 있었다.

    내가 잘못 알아들었나? 난 알렉스를 돌아봤다.

    알렉스는 로웰을 쳐다보고 있지도 않았다. 그는 주변을 유심히 보면서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그가 멀리 있는 어떤 간판을 가리켰다.

    “전하, 저 식당에서 가정식을 판매한다고 합니다.”

    넌 너무 관심 없는 거 아니냐.

    “그럼 그리로 갈까? 넌 저 식당 괜찮아?”

    난 로웰에게 고개를 돌렸다. 로웰이 당황했다.

    “전하, 제 질문은…….”

    “안 궁금해.”

    “전하께선 그러실 줄 알았어요.”

    로웰은 방긋 웃더니 “저기로 들어갈까요? 괜찮아 보이는데요.” 하고 알렉스의 말을 받았다.

    식사를 마치고 내 방으로 돌아갔을 땐 밤이 늦었다. 좋아. 이쯤이면 에드워드가 없겠지.

    문을 열자 그레이의 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는 초를 켜고 책을 읽고 있었다.

    “늦으셨네요.”

    “왜 아직 안 자고 있어?”

    “전하께서 늦으실 것 같아서요.”

    그레이가 책을 덮었다.

    잘됐다. 나도 그레이랑 할 말이 있었다.

    “그레이. 잠깐 나랑 얘기 좀 해.”

    “네. 그래요.”

    왠지 기시감이 느껴졌다. 그레이도 느꼈는지 찜찜한 표정이었다.

    “우리 방을 같이 쓰는 규칙을 정하자.”

    “예?”

    “우리 첫날을 너무 막 보낸 것 같아. 이제 한방에서 일 년을 같이 자야 하는데.”

    “첫날 전하께서 그냥 주무셨잖아요? 무슨 규칙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데요?”

    그레이는 투덜거리면서도 물어봤다.

    “이상한 거 말고, 기본 예의로 지켜야 하는 거 있잖아. 예를 들어 서로 방에 친구는 들이지 않는다거나.”

    예를 들어 에드워드 같은 친구.

    “문밖에서 낯선 사람이 기다리는 것도 불편해. 그러니까 친구랑 약속 장소는 기숙사 외의 장소로 잡자.”

    “…….”

    “기숙사 보안이 썩 믿을 만한 건 아니니까, 문은 3중 잠금으로 바꿀까? 다른 사람이 침입할 수 없게. 비용은 내가 댈게.”

    “그건 규칙이 아니잖아요?”

    그레이는 안경을 벗고 콧대를 주물렀다.

    “그럼 왕자가 베푸는 혜택 같은 걸로 하자. 아예 각 기숙사실 문 전체에 잠금장치를 다는 건 어때? 다른 학생들도 좋아할 텐데. 학생들 간에 혹시 발생할지 모를 불상사를 예방할 수도 있고.”

    “전하.”

    “응.”

    “그냥 제가 에드워드 전하께 말씀드릴게요. 방에 찾아오시지 말라고.”

    “그래 줄래?”

    “…….”

    * * *

    새 학기 수업이 시작되는 첫날이었다.

    에드워드는 페이퍼 나이프로 편지 봉투를 뜯고 단숨에 편지를 읽었다. 편지의 내용은 그가 예상하던 대로였다.

    왕성의 일은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에드워드는 초조해할 필요 없었다. 아직 시간은 충분히 남아 있다.

    정말로 충분한가?

    에드워드는 조프리의 반응을 떠올렸다. 얼굴을 마주 보면 눈을 피하고, 손을 뻗으면 몸을 물리는…… 경계심 가득한 모습.

    에드워드의 맞은편 침대는 비어 있었다. 같은 방을 쓰는 상대는 모종의 이유로 아카데미를 휴학하기로 마음먹었다.

    첫날 이후 이 기숙사실에 들어온 학생은 에드워드가 전부였다. 그는 다른 사람과 침실을 공유할 마음이 없었다. 가장 무방비한 상태를 어떻게 타인에게 노출시킬 수 있는가?

    에드워드는 옷장을 열었다.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고 옷장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봤다.

    그럴듯한 얼굴이었다. 가장 좋은 건 이 얼굴이 조프리에게 영향을 준다는 점이었다.

    불쌍해 보이는 얼굴인지도 모른다. 어릴 적부터 조프리는 에드워드의 얼굴을 좋아했다.

    ‘어떻게 네 얼굴을 못 알아봐?’

    에드워드는 천천히 미소 지었다. 근육을 움직인다고 생각하고 표정을 만들자 부드러운 미소가 거울에 비쳤다.

    이 표정에 대한 조프리의 반응이 떠올랐다.

    에드워드는 웃음기 한 점 없는 얼굴로 옷장 문을 닫았다. 복도로 나갔다.

    첫 수업은 기초 검술이었다. 그레이의 보고가 옳은지 확인할 시간이다.

    * * *

    수강 신청은 난항이었다. 알렉스는 내가 검술 수업을 듣지 않는다면 자신도 그러겠다고 선언했다.

    그런데 검술은 알렉스의 전공 수업이었다.

    “그럼 너 졸업 못 하는데?”

    난 조심스럽게 말했다. 알렉스가 내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겠다고 결심한 건 고마운 일이었으니까.

    그래도 졸업은 해야 하지 않을까?

    “괜찮습니다.”

    뭐가 괜찮아?

    “아니, 졸업은 해야지.”

    “아카데미를 졸업하지 않은 자는 전하의 기사로 두기 부끄러우십니까?”

    아니라고 대답해야 할까?

    “응.”

    알렉스가 충격받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하지만 내가 부끄럽지 않다고 대답하면 ‘그럼 졸업 안 하겠습니다’ 하고 나올 게 뻔했다.

    “졸업해.”

    “싫습니다.”

    알렉스는 충격받은 와중에도 꿋꿋하게 주장했다.

    “전하를 혼자 둘 순 없습니다. 미래의 보신을 위해 지금 전하를 지키는 걸 포기해야 한다면, 저는 미래를 포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알렉스의 콧잔등이 붉어졌다. 그는 눈을 깜박이기 시작했다. 내가 괴롭히는 거야?

    “잠깐, 울지는 말고…….”

    “그래서 전하의 기사가 되지 못한다 해도…….”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결국 우리는 기초 검술 수업을 듣는 걸로 합의했다. 에드워드가 아무리 그래도 기초 수업을 들을 것 같진 않았으니까.

    기초 검술은 알렉스 수준에도, 심지어 조프리 수준에도 맞지 않는 수업이었다.

    이델라가 기초 검술을 들을 때, 플레이 화면에서 운동장만 빙글빙글 달리던 모습이 떠올랐다.

    어? 이거 바움쿠헨 백작이 시키던 거 아닌가? 운동장 돌기…….

    사실 백작이 아카데미 커리큘럼에 맞춰 체계적인 수업을 했던 거라고?

    신입생들이 기숙사로 들어와 교복을 맞추고 아카데미에 적응하는 데는 일주일이면 충분했다. 그동안 기숙사에는 상급생들이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먼저 기숙사에 와 있던 학생들은 이제 들어온 학생들에게 왕자가 입학했다는 소식을 전할 의무감에 불타고 있었다.

    덕분에 나와 알렉스는 어디를 가든 웅성거리는 소음과 눈짓, 손가락질에 휘말렸다.

    아카데미에 도착한 건 상급생들만이 아니었다. 도트의 편지도 있었다.

    도트는 전하께서 차석이시라는 소식을 들었으며, 왕비님께도 전하의 소식을 전했다, 왕비님이 몹시 기뻐하셨다는 말을 편지에 담았다.

    왕비님이 에드워드가 수석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뒤에 어떻게 반응하셨는지는 적지 않았다.

    그렇구나. 기뻐하셨구나.

    답장을 쓰려고 그레이에게 새 편지지를 빌렸다. 편지지는 펼쳐 놓은 채 며칠째 손대지 못했다.

    ‘잘됐다. 잘 지내.’라고 쓰면 한 줄로 끝나겠지만, 살면서 처음 쓰는 개인적인 편지의 답장이 그 모양이라니 내가 생각해도 별로였다.

    도트에게 답장을 쓰면, 왕비님께도 편지를 보내야 했다.

    그 생각 때문에 한 자도 쓸 수 없었다.

    그러다 첫 수업이 시작됐다. 기초 검술 수업이었다.

    검술 수업은 애초부터 편한 복장으로 참여하라는 안내가 있었고, 상급생도 그렇게 충고했다.

    난 어떤 수업을 할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도트가 봤다면 견디지 못했을 수준의 편한 복장을 하고 수업에 참여했다.

    기숙사실을 나오기 전 에드워드나 이델라가 주변에 없음을 확인하는 건 물론이었다.

    아카데미는 위험 지대다. 앞으로는 잊지 않을 것이다.

    움직이기 전에 이중 삼중으로 확인해서 위험인물을 피하면 된다.

    운동장에는 나와 알렉스를 제외하고 네 명의 학생이 나와 있었다.

    세 명은 한곳에 모여 있었고, 나머지 한 명은 겉도는 것처럼 따로 떨어져 있었다.

    그 한 명은 에드워드였다.

    네가 왜 여기 있는데?

    “안녕, 조프리.”

    에드워드가 인사했다. 그는 웃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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