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나도 저녁 식사 좋아하는데.”
로웰이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알렉스가 그를 쳐다봤다.
로웰은 눈을 굴렸다.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돼. 왕자 전하께 해가 될 일은 안 하니까. 그렇죠, 전하?”
“그럴걸.”
로웰이 무슨 짓을 할 게 있나?
기억을 뒤져 봐도 떠오르는 사건이 없었다.
알렉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로웰이 와, 하고 투덜거렸다.
“그렇게 안 봤는데, 영웅의 아들은 소문만 듣고 사람을 판단하는 성격이었잖아? 나 같은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어?”
“아니. 소문 때문에 꺼린 건 아니야.”
알렉스가 입을 열었다.
“그럼 뭐 때문인데?”
“다른 사람에게 너에 대해 들었어.”
“역시 소문이잖아?”
알렉스는 약간 당황한 듯했다.
“그런 것도 소문인가요, 전하?”
“넓은 의미에서 그렇지 않을까?”
알렉스는 안절부절못했다.
“전하께서는…… 소문에 휘둘려서 다른 사람을 나쁘게 대하는 사람을 싫어하시죠?”
“그런 사람이 좋은 사람 같진 않네.”
물론 알렉스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내가 덧붙이기 전에 알렉스는 사과했다.
“미안해.”
“응?”
로웰은 당황했다.
“아아, 으응. 사과를 들으려던 건 아니고, 좀 서운하다는 거였지. 난 너랑 친하게 지내고 싶으니까. 앞으로 일 년 내내 봐야 할 얼굴이기도 하고…….”
“맞아. 내가 신중하지 못했어.”
“응?”
“소문 때문은 아니라고 말했지만, 결국 다른 사람의 평가나 소문이나 다를 바 없다는 걸 깨달았어. 선입견으로 널 차별해서는 안 됐는데.”
“으응.”
로웰이 눈을 굴렸다.
“다른 사람이 널 시도 때도 없이 발정기를 겪는 망나니라고 말했다고, 바로 믿어 버려선 안 되는 거였는데.”
나 저 말을 누가 했는지 알 것 같은데.
“앞으로 네가 행동하는 것만 보고 스스로 널 판단할게.”
“오.”
로웰이 대답했다. 그는 눈을 반짝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좋아. 사과를 받아들일게. 우리 잘 지내자. 그런 의미로 같이 저녁이나 먹으러 가는 게 어때?”
알렉스는 기사답게 말했다.
“전하께서 허락하시면.”
“난 상관없어.”
내가 대답했다.
로웰이 활짝 웃으며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어때요?’라는 표정이었다. 무슨 말을 원하는 걸까?
“잘됐다, 로웰. 오해를 풀 기회를 얻어서.”
“예. 정말, 너무도 기뻐요, 전하.”
“그래. 둘이 친해지면 좋겠네.”
아마 불가능하겠지만.
아카데미 앞 거리는 왕성 광장 근처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광장에는 약속을 잡은 사람들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고, 광장에서 뻗은 거리마다 상점과 노점이 늘어서 있었다.
다른 점은 이곳의 연령대가 훨씬 낮다는 것뿐이었다.
몇몇 학생들은 벌써부터 교복 차림이었다. 여러 개의 양장점이 불을 켜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학생 식당 음식은 앞으로 질리도록 먹게 될 거라는 로웰의 주장에 따라 우리는 아카데미 밖으로 나갔다. 광장을 가로질러 음식점 거리로 들어서자 고기 굽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른 저녁 식사를 하러 온 학생들이 우리를 지나쳤다.
그들이 우르르 어딘가로 들어갔다. 간판을 보니 술집이었다. 로웰이 좋아할지도 모르겠다.
손가락으로 간판을 가리키는데 로웰이 나를 붙잡고 어휴 한숨을 내쉬었다.
“전하, 학생이 벌써부터 술이라니요. 전 그런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해요.”
네가 할 말이야?
“전하께서 원하신다면 어디든 따르겠습니다.”
알렉스가 말했다. ‘전하께서 술을 좋아하시는구나’ 하는 눈이었다.
아니야.
“그렇게 마시고 싶은 건 아니었어.”
왜 내가 변명하고 있지?
“전하, 여기가 어떠세요?”
로웰이 맞은편 음식점을 가리켰다. 술집과 정반대 분위기의 차분한 음식점이었다. 가정식을 판매한다고 적혀 있었다.
로웰이 웃으며 손뼉을 맞부딪쳤다.
“서민 가정식이에요, 전하. 궁금하시죠?”
로웰은 내가 아주 왕자인 줄 아는 경향이 있다.
기대를 배신할 필요는 없었다. 내가 “와, 정말 궁금해.”라고 말하자, 알렉스는 ‘전하께서는 서민 음식점을 좋아하시는구나’ 하는 얼굴로 음식점 문을 열었다.
아니지만.
셋이 낮은 문턱을 통과하는데 밝은 목소리가 우리를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몇 분이세요? 자리 안내해 드릴게요. 어머!”
이델라였다.
심장이 떨어지는 듯했다. 그녀는 우리를 알아보고 얼굴이 환해졌다.
“전하!”
“안녕, 이델라…….”
벌써 다른 아르바이트를 더 구한 건가? 아니면 원래 하던 일인가?
일을 대체 얼마나 하는 거야?
아카데미 안에서만 조심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어느 길에 들어서든 이델라나 에드워드와 조우할 수 있다는 자세로 임했어야 하는데.
이델라는 싹싹하게 웃으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와! 여기 식사하러 오셨어요? 세상에. 제가 말씀드리기 뭐하지만, 전하께서 드시기에 여기 음식이 그렇게 훌륭하지 않은데요.”
“지금 우리 직원이 손님 쫓는 소리가 들리는데?”
주방에서 머릿수건을 쓴 남성이 고개를 내밀었다.
장비처럼 얼굴을 뒤덮은 수염과 험상궂은 얼굴이 보였다. 머릿수건과 손에 든 식칼이 아니었다면 직업을 오해했을지도 모른다.
알렉스는 오해한 듯했다. 한 손이 검에 가 있었다. 로웰이 나를 가리고 섰다. 내가 로웰보단 강할 텐데.
이델라가 웃었다.
“와아, 사장님. 농담이에요.”
“야. 까다롭게 구는 놈 있으면 나가라 그래! 우리 집 음식은 고향의 맛이야. 대낮부터 술에 절어서 소금이랑 설탕도 구별 못 할 놈들이 어디다 대고 품평이야!”
“와아, 사장님. 지금은 저녁인데요.”
“해가 떠 있잖아! 그럼 낮이야!”
“와아…….”
이델라는 웃으며 대응했다. 내 여주인공은 사회생활도 잘했다.
그냥 봐서는 사장이 이델라를 잡고 있는 건지 아니면 둘이 대충 친근하게 지내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우리가 나가면 이델라가 곤란해질까?
“어디 앉으면 돼?”
어차피 들어온 거 식사만 하고 나가자.
별것도 아닌 일로 이델라를 곤란하게 만들 필요는 없었다. 안 그래도 삶이 피곤한 애였다.
이델라는 사장에게 소곤거렸다.
“사장님, 저분 왕자 전하세요. 그, 무례하게 대하시면…….”
“뭐, 제가 왕자면 다야……. 왕자?”
“예.”
“진짜 왕자?”
“그렇다니까요.”
“잠깐만, 두 왕자 중에 에드워드 전하는 금발이랬으니까……. 2왕자 전하?”
“예. 조프리 전하세요.”
알렉스가 굳은 표정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알렉스.”
“예, 전하. 저 무례한 자를 처단할까요?”
“아니. 앉으라고. 다리 안 아파?”
첫 만남에 무례하기로는 바움쿠헨 백작을 따를 사람이 없었다.
사장은 우리를 흘끗거리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로웰이 턱을 괴고 물었다.
“이 식당에 전에도 와 본 적 있으세요?”
“아니.”
“그런데 일하는 사람을 어떻게 아세요?”
“우리랑 같은 아카데미 신입생이야.”
“예?”
“대단하지?”
“……예?”
그때 이델라가 물컵을 내려놨다. 그녀가 활짝 웃는 얼굴로 속삭였다. 표정만 봐선 좋은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전하, 정말로요. 지금 나가시는 게 좋아요. 사실 여기 음식은 훌륭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가끔은 사장님 혀가 이상하다 싶다니까요.”
“아, 그래?”
“손님과 같은 메뉴를 먹고 있으니까, 믿어 주세요.”
“가게 주인한테 안 들키고 나갈 수 있을까요? 부엌 앞을 통과하면 저희 들킬 것 같은데.”
로웰이 이델라에게 물었다.
“제가 소리 안 나게 문 열어 드릴게요.”
이델라가 믿음직스럽게 대답했다.
진짜 나가야 하나? 로웰은 벌써 일어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우리가 부엌의 동향을 살피는데, 가게 문이 열리고 한 무리의 사람이 우르르 들어왔다. 선두에 선 사람은 파벨이었다. 그 옆의 남학생이 파벨에게 말하고 있었다.
“내가 봤다니까? 수행원이랑 같이 분명 이 근처 가게로 들어가셨…….”
“왕자 전하!”
파벨이 말을 끊고 내게 성큼 다가왔다. 그가 활짝 웃었다.
“여기서 만날 줄이야. 굉장한 우연이네요! 뭐야, 로웰. 너도 있었잖아? 난 부르지도 않고 혼자 나왔냐?”
“여기 식사하러 왔어?”
로웰이 웃으며 물었다.
“당연하지. 음식점에 식사 말고 뭐 하러 왔겠어?”
“잘됐네. 저녁 맛있게 먹어. 그새 친구도 많이 사귀었네. 외국에서 같이 놀 친구 없어서 나한테 그렇게 집착하나 했는데.”
“내가 너한테? 소름 돋는 소리 하고 있네. 요새 좀 잘해 주니까 건방이 하늘을 찌르기는…….”
얘네 친구 아니었나?
파벨은 비웃다 말고 움찔했다. 로웰은 무슨 소리를 들었냐는 듯 환하게 웃고 있었다. 파벨이 눈을 피했다.
“농담이야. 앗, 왕자 전하. 옆 테이블이 비었네요! 저희가 합석해도 될까요?”
이델라는 쟁반을 끌어안고 주문을 받아야 할지 망설이고 있었다.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자리로 되겠어? 의자가 적은데. 우리 마침 일어날 생각이었는데 잘됐네. 여기 앉으면 되겠다. 파벨?”
이름이 맞느냐는 듯 부르자, 파벨은 “예?” 하고 대꾸했다.
“식사 잘 해.”
“예? 전하?”
“뭐 해? 어서 앉아.”
파벨의 친구들은 어떡하느냐는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다가, 내 재촉에 얼결에 자리에 앉았다.
부엌에서 고개를 내민 근육질 장비 사장이 만족스러운 콧김을 뿜는 게 보였다. 이 손님들 붙잡아 주시면 좋겠다.
난 이델라에게 웃으며 인사했다.
“우리가 자리 비울게.”
이델라도 방긋 웃었다. ‘앗, 제 말씀을 들어주셨군요’라는 표정이었다.
아니, 식당에 이상한 애들 떠넘기고 나가는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