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100화 (100/293)
  • 100.

    검술 선생님은 갈색 머리를 하나로 묶은 허술한 인상의 캐릭터였다. 이름은 크렘 경.

    이델라는 검술을 중급까지 들었는데, 기초부터 중급 수업까지 한 사람이 담당했다.

    검술뿐만 아니라 다른 수업도 담당 선생님은 한 명이었다. 제작자가 캐릭터 디자인하기 귀찮아서가 아니었을까?

    수업 난이도가 올라가면 변하는 건 수업료와 능력치 변동 폭 정도였다.

    크렘 경은 수업 시간에 조금 늦었다. 그런데도 운동장 가장자리에서 어기적거리며 다가오다가, 에드워드를 발견한 뒤 걸음이 빨라졌다. 나를 발견한 뒤에는 날듯이 달려 우리 앞에 도착했다.

    “왜……. 왜 두 분 전하께서 이 수업에?”

    나와 에드워드는 그를 빤히 쳐다봤다.

    크렘 경은 생긴 것만큼이나 허술한 사람이었다. 그는 우리를 보고 ‘이 수업은 두 분 전하에게 맞지 않는다.’, ‘난이도가 너무 낮다’, ‘기초 체력만 기를 것이다.’ 등등 조언을 하더니, 에드워드가 “수업은 안 하는 건가?” 하고 묻자 일단 학생들을 달리게 했다.

    그리고 운동장 가장자리에 서서 안절부절못하고 우리를 쳐다봤다.

    뭘까?

    난 그가 엄청나게 신경 쓰였지만 그런 사람은 나뿐인 듯했다. 다른 학생들은 왕족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한 바퀴를 달리자 몸에 땀이 배기 시작했다. 아카데미는 뭐든 컸고 운동장도 마찬가지였다. 어릴 적 돌던 연무장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두 바퀴를 돌자 땀이 흘렀다. 손등으로 이마를 닦아 내는데 뒤에서 따라 달리던 학생이 소곤거렸다.

    “헉, 왕자 전하께서 땀을 흘리셔…….”

    “우리가 봐도 되는 거야?”

    왕족은 땀도 안 흘리는 줄 아나? 나도 모르게 뒤를 돌아볼 뻔했다.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마침 우리는 크렘 경이 있는 곳을 통과하는 중이었다. 학생들의 말을 들은 크렘 경이 헉 하는 얼굴로 다가왔다.

    “왕자 전하. 몸이 안 좋으시다면 무리하지 마시고 쉬시는 게 어떠십니까?”

    “경은 달려도 땀 한 방울 안 흘리나?”

    “예? 아. 그렇군요! 땀이군요!”

    크렘 경은 안도했지만 내 뒤를 따라오는 걸 멈추지 않았다.

    “죄송합니다만 전하, 바움쿠헨 백작에게 검을 사사했다고 들었는데요.”

    “응. 아마 그럴걸.”

    “얼마나 수련하셨습니까?”

    “오 년은 넘었을 거야.”

    “아…….”

    크렘 경은 여러 의미가 담긴 탄식을 했다. 안타까움인지 의아함인지 알 수 없었다. 그만한 기사한테 오 년이나 배워 놓고 왜 이 모양 이 꼴이냐는 뜻은 알겠지만.

    사실 바움쿠헨 경은 오 년간 나랑 놀다 갔다. 스승이 훌륭해도 제자가 싹이 없으면 어쩔 수 없는 법이다.

    조프리의 꿈을 꾼 이후 말만 보면 몸이 경련해서, 난 다시 승마를 배우는 데도 일 년이 걸렸다. 반년은 말을 보고 떨지 않도록 적응하는 훈련이었고 나머지 반년은 말에 올라탄 채 버티는 훈련을 했다.

    바움쿠헨 경은 그동안 지루해하지도 않고 내 옆에 있었다. 내 옆에 있기는 도트도 마찬가지였지만.

    도트는 힘든 일을 굳이 할 필요 없다고 계속해서 말해 줬다. 내가 진짜 조프리였다면 그 말에 도움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아니. 진짜 조프리도 그 말엔 위안받지 않았을 것이다. 조프리는 못하는 일이 없어야 했으니까.

    도트가 조프리의 침실에서 그런 말을 해 줬다면, 바움쿠헨 경은 연무장에서 말했다. 여기서 포기하면 다시는 말을 탈 수 없을 거라고.

    난 그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내가 승마 비슷한 것과 약간의 호신술을 익히는 데 성공한 뒤에는, 전하께서는 몸치이신 것 같다며 수련할 시간에 공부하시는 게 낫겠다고 하긴 했지만.

    난 그럴 때마다 진짜 조프리가 얼마나 대단한 애인지 생각하게 됐다.

    이런 몸으로 이 악물고 에드워드를 따라잡으려고 했구나. 노력의 승리다.

    아무리 해도 에드워드를 이길 순 없었지만.

    조프리는 나랑 다른 인간이었다. 난 불가능한 일은 도전하지 않는다. 최선을 다했는데 잘못되면 그 실망감을 견딜 수 없으니까.

    내가 뭔가를 잘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든 크게 실망하지 않고 대처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살아온 벌을 지금 받는 건지도 모른다.

    운동장을 열다섯 바퀴 돌자 수업이 끝났다. 내가 도중에 쓰러질 것 같았는지 크렘 경은 끝까지 함께 달렸다.

    폐까지 토해 낼 듯 숨을 내쉬고 있으려니까 에드워드가 다가왔다.

    “조프리, 어디 아파?”

    놀리는 건가?

    에드워드는 진지하게 묻는 듯했다.

    안 그래도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너까지 도와줄 필요는 없는데.

    알렉스가 에드워드와 내 사이를 가로막았다.

    에드워드가 왜 이러는 걸까. 달리면서 생각해 봤다. 그간 놀라느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알렉스에게 손을 내밀자, 그가 나를 일으켜 세웠다. 에드워드의 시선이 알렉스의 손에서 내 얼굴로 옮겨 갔다.

    웃지 않는 에드워드는 한결 상대하기 편했다. 에드워드가 아니라도 약간 죽을 것 같은 상태이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에드워드가 정신 산란한 미소를 만들어 내기 전에 난 무슨 말을 하려고 했다. 용건이 있으면 그냥 말하라든가, 뭐 그런 내용을.

    에드워드가 헛소리를 꺼내지만 않았어도 그럴 수 있었을 것이다.

    “조프리, 같이 점심 먹을래?”

    “싫어.”

    “…….”

    에드워드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 * *

    “알렉, 혹시 국경에서 무슨 일 있었어?”

    “어떤 일 말씀이십니까?”

    알렉스가 빵을 베어 먹다 말고 물었다. 우리는 로웰이 없는 301호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다.

    대답하려고 식사를 멈출 필요는 없는데. 하지만 나 때문에 빵을 내려놓고 손까지 닦을 필요는 없어, 라고 말하는 것도 자의식 과잉 같아서 그만뒀다.

    “혹시 에드워드 사고라도 당했어? 말에서 떨어져서 머리부터 돌부리에 찧었어?”

    “예? 그런 사고가 있었다면 전하께 말씀드렸을 겁니다.”

    “그랬겠지.”

    역시 에드워드는 머리를 다친 게 아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가 화해했을 리도 없었다.

    에드워드에겐 속셈이 있다.

    그건 아마도, 확실히, 나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식사를 대충 마치고 철학 수업에 들어갔다. 강의실에는 놀랍지 않게도 에드워드가 앉아 있었다.

    그는 이번엔 내게 인사도 하지 않았다. 이제 포기했나? 아니면 내 존재를 눈치 못 챘나?

    잠깐 희망을 가졌지만, 철학 교수가 들어온 뒤부터 에드워드는 나만 쳐다보고 있었다.

    사람은 왜 어리석은 희망을 품을까?

    누군가의 시선 때문에 심장이 두근거리다니. 연애 게임 같았다.

    내 장르는 스릴러인 것 같지만.

    강의 초반은 수업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이었다. 철학 교수의 이름은 클로스였다. 그는 풍성한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자장가 같은 목소리로 수업을 진행했다.

    그가 어떤 철학가의 삶을 이야기하며 신화와 인간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을 땐 대부분의 학생들이 눈을 감고 있었다.

    이델라에게 번역 아르바이트를 소개해 주는 교수님이 이분이었나? 잘 기억나지 않았다.

    에드워드가 고개를 돌렸으면 좋겠다.

    그가 날 죽이려고 하는 것만 아니라면, 난 그가 판 함정에 빠질 용의가 있었다. 조프리 지지 세력을 깎아 먹을 정도의 멍청한 짓, 혹은 추문.

    왕비님 앞에서는 차마 할 수 없었던 일도 아카데미에서라면 가능했다.

    에드워드는 뭘 하고 싶은 걸까? 멀쩡한 입 뒀다 사용하지 않는 심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이델라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학생들의 눈이 일제히 이델라를 향했다. 그녀는 땀을 흘리며 자리를 찾아 앉았다. 강의실 뒤편에는 빈자리가 없어서, 그녀는 학생들 사이를 지나 앞으로 나와야 했다.

    이델라의 얼굴이 달아오른 게 보였다. 그녀는 시선을 내리고 걷다가, 나를 발견하고 눈에 빛을 띠었다.

    “전하. 여기 앉아도 될까요?”

    그녀가 내 앞자리를 가리켰다.

    내가 이 두 사람을 피하는 게 의미가 있나?

    “응.”

    “감사합니다.”

    나와 알렉스 근처가 텅 빈 건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

    우리가 앉아 있는 걸 본 학생들이 자리를 띄워 놓고 앉은 거였다.

    에드워드의 시선이 잠깐 사라졌다. 그는 의자에 앉는 이델라를 빤히 보고 있었다. 턱을 괸 채 몸을 돌리고, 눈만 움직여서.

    처음에는 관심의 시선인가 했지만, 빈말로도 그 시선에선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나와 눈이 마주친 에드워드가 고개를 돌렸다.

    그는 책을 내려다보고 있었지만 내용을 읽고 있는 것 같진 않았다.

    여주인공과 에드워드. 그리고 조프리. 이 구도는 좋지 않았다.

    이델라가 내게 작은 소리로 물었다.

    “지금 어느 페이지를 설명하고 계신 건가요?”

    “그냥 수업을 어떻게 진행할지 개괄하는 중이야.”

    이델라는 배시시 웃더니 “감사합니다” 하고 몸을 돌렸다.

    난 책에 머리를 파묻었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알렉스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다시 에드워드의 시선이 느껴졌다.

    이 구도는 정말 괜찮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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