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만 전생 배우-100화 (100/178)

Chapter44. 사절(2)

꿀릴 것 없는 진호는 기다렸다.

스케줄을 소화하고 루카의 적응을 도왔다.

전화가 빗발쳤지만 적절하지 않은 건 전부 걸렀다.

그리고 삼일이 지난 시점에, 고위 인사가 방문했다.

장관이었다.

“진호 씨. 정말 마음대로 안 되는 사람이네요.”

푸근한 인상의 중년 남자였다.

수행원 몇 명만 대동해서 사무실을 직접 찾아왔다.

“세상에 마음대로 움직이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습니까. 배 아파 난 자식도 멋대로 못 하는데.”

“하하. 이거 한 방 먹었습니다. 역시 대 배우라 그런지 굉장히 유식하군요.”

“그냥 필요한 상식 몇 토막 알고 있다고 해 두죠.”

진호는 태도를 분명하게 했다.

숙이지도, 물러나지도 않았다.

장관을 수행하는 이들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지만 무시로 일관했다.

“서로 감정싸움은 하지 맙시다. 전 문화진흥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고 진호 씨는 그 역꾼 아닙니까. 우리는 상호협력을 해야 하는 사이라 이거죠.”

“말대로만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하. 일단 이전의 일부터 사과를 드리죠. 아무래도 직원들 간의 소통 문제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최대한 정중하게 부탁을 하라고 했는데, 일이 왜 그렇게 됐는지.”

“부하 직원의 실수라 이겁니까?”

“뭐, 흔한 일 아닙니까. 과잉 충성하는 직원.”

능글맞은 얼굴은 딱 정치인의 것이었다.

한 대 때리고 싶다, 진호는 속으로만 생각했다.

어깨를 으쓱하는 것으로 답을 대신하고는 자세를 풀었다.

그제야 주변에서 얼쩡거리던 회사 직원들이 커피와 차를 내 왔다.

겨우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었다.

“이번 방일 과정에 따른 협조 요구를 공문으로 가지고 왔습니다. 확인해 보시죠.”

커피 한 잔이 돌고 장관이 서류를 꺼냈다.

구두로 늘어놓던 전 직원보다는 정돈된 태도였다.

진호는 손끝으로 서류를 집어 처음부터 끝까지 말없이 읽어 내려갔다.

침묵은 어색했지만 방 안의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공식 행사에는 불만이 없습니다.”

“그럼 수락하시는 건가요?”

“아뇨. 왜 공문에는 공식행사 일정만 적혀 있고, 프로그램 출연에 대한 이야기는 빠져 있습니까?”

“아무리 문체부라고해도 프로그램 출연을 지시하는 건 어색하지 않습니까. 이 일은 비공식으로 하는 것이 옳습니다.”

“비공식이면 그냥 빼고 하시죠.”

“······하하.”

장관의 얼굴에 실금이 가는 것 같았다.

“진호 씨.”

“네. 듣고 있습니다.”

“진호 씨도 최근 한일관계에 대한 건 알고 계시겠죠?”

“뉴스로 접하고는 있습니다. 꽤나 험악하게 돌아가더군요. 얼핏 제제 얘기도 오가는 것 같고.”

“그건 대외적인 수준이죠. 실상은 더합니다. 당장 단교를 하는 수준, 이라고 말 할 정도로 험악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장관의 말투는 진지했다.

진호도 이 부분 만큼은 진심일 거라 추측했다.

“정부에서는 일분일초를 다투며 대응 방안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당장 관계가 틀어지면 손해를 보는 건 아무래도 저희가 될 테니까요.”

“그럼 이번 방일은 눈 가리고 아웅 아닙니까?”

“시간 벌기라고 해 두죠. 어떻게든 몸을 낮추어 시간을 버는 겁니다.”

“그래서 극우 쪽 방송에 출연해 달라 이건가요?”

“심한 이야기까지는 안 나올 겁니다. 적당히 비위를 맞추며 분위기를 느슨하게 해 달라 이거죠.”

“제가 아무리 대단해도 일개 연예인입니다. 효과가 있을 거라 보기는 어렵습니다만.”

“아뇨. 생각보다 진호 씨의 힘은 강합니다. 지금 일본에서의 인기를 잘 모르시는가 보군요. 괜히 일본에서 이본 방일 행렬에 진호 씨를 요구 한 것이 아닙니다.”

진호가 슬쩍 최현석을 봤다.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본은 뒤늦게 진호 열풍이 불어 도시 곳곳에서 그의 방송이 연달아 방영되었다.

말마따나 어중간한 국회의원보다는 그가 훨씬 더 영향력이 있었다.

“이거 참. 생각보다 어려운 걸 주문하는군요.”

“진호 씨도 대한민국의 국민 아닙니까. 부디 손을 빌려 주셨으면 합니다.”

“대한민국의 국민이니까?”

“네. 애국심으로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진호가 가볍게 코웃음 쳤다.

“국가 간의 문제를 개인에게 떠넘기는 건 너무 염치없지 않습니까?”

“······이건 그렇게 딱 잘라 말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일본 내부의 사정도 있고.”

“글쎄요. 제가 보기에는 만만한 연예인 하나 희생양으로 던져 놓고서 살 길 모색하는 것으로 보입니다만.”

애초에 문체부 장관이라는 사람은 정치적 입지 때문에 영화 하나를 묻으려던 인간이다.

이런 사람이 정말로 애국심으로 움직일까?

턱도 없는 소리.

결국 무언가 이익의 아귀가 맞아 떨어지니 이런 제안을 위해서 무거운 발걸음을 한 것이다.

“······진호 씨.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오면 곤란합니다. 예전 일 때문에 감정이 안 좋은 건 이해하지만 이건 대사 아닙니까. 사적인 감정은 넣어 두어야죠.”

“죄송합니다만, 저는 정치인이 아닙니다. 사적인 감정이 최우선인 인간이죠.”

“결국 이런 식으로 나오겠다 이겁니까? 그쪽이 잘 나간다 해 봐야 연예인입니다. 정치권에 밉보여서 얼마나 오래 갈 거라 봅니까?”

“하하. 결국 협박입니까? 보통 사람이라면 과거 일을 사과부터 하고 볼 텐데 말이죠.”

너무 당연한 흐름에 진호가 웃었다.

어떻게 한 점의 어긋남도 없을까.

신기할 정도였다.

“돌아가세요. 그런 태도와 말로는 제 마음을 바꿀 수 없습니다.”

“당신······”

“장관이라는 이름에 마음을 휙 바꿀 만큼 전 가벼운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축객령은 굉장히 쉬웠다.

#

“괜찮은 거냐?”

최현석은 뒤늦게 물었다.

일을 진호에게 일임하고 있던 터라 개입하지는 않았지만 센 발언에는 가슴이 철렁거렸다.

그도 나름대로 소신껏 사는 사람이지만 아무래도 장관은 어려웠다.

“괜찮아요. 어차피 저번 일로 감정도 상했겠다, 한 술 더 얹어도 망할 건 없죠.”

“······표정 보면 망한 것 같은데.”

“글쎄요. 그 표정을 하면서까지 오는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이유?”

진호가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려 보였다.

“생각해보면 첫 번째와 두 번째의 갭 차이가 크잖아요. 일을 대충 처리하다가 어그러진 건가 싶었는데, 문체부에서는 제가 어떤 놈인지 알잖아요.”

“그럼 뭐 계획된 태도라는 거야?”

“어쩌면요. 첫 번째 놈과 대비해서 장관이 저자세를 취하면 일이 스무스하게 흘러 갈 거라 여겼을지도 모르죠.”

“굳이 왜?”

“그러니까요. 굳이 그럴 이유가 있을까요?”

“내 질문이잖아.”

진호가 짧게 하하, 하며 웃었다.

그라고 당장 이유를 아는 건 아니었다.

“보니까, 방일에 절 데려가야 할 이유가 있어 보여요. 다음 방문까지 그걸 찾아서 멱살을 콱 틀어쥐어 보죠.”

“어휴. 난 늙어서 그런지 네 배짱을 못 따라가겠다.”

“배에 힘 딱 주고 견뎌 봐요. 장관 정도에 쫄면 저랑 일하기 힘들어요.”

“다음에는 대통령 멱살이라도 잡으려고?”

“살다보면 그럴 날도 있지 않겠어요?”

“그때는 나 그냥 없다고 해라.”

엄살 떠는 최현석에 진호가 다시 한 번 웃었다.

말은 저래도 일 터지면 가장 먼저 달려 올 사람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럼 각자 조사를 해 보죠.”

“······”

“응? 대표님, 뭐하세요?”

“아니, 잠깐만. 이쪽으로 와서 이거 봐봐라.”

최현석이 쥐고 휘두르는 건 타블릿 PC였다.

열어둔 화면은 일본 쪽 뉴스.

일어가 복잡하게 펼쳐져 있었다.

“대표님 히라가나 알아요?”

“대충 신문 정도는 읽을 줄 안다. 넌 못 읽냐? 영어랑 스페인어도 하는 놈이.”

“아직 일어까지는 진출을 안 해서요. 눈에 띄는 뉴스라도 있어요?”

“여기 이거. 일왕이 네 팬이라는 뉴스다.”

“일왕이? 제 팬이래요?”

“그것도 꽤나 열성 팬이란다. 공개적으로 한 얘기는 아닌데, 꽤 신뢰도 높은 언론에서 흘러나왔어.”

상징적인 지위기는 하지만 일왕은 일본인들에게 있어서는 꽤나 중요한 존재였다.

“어쩌면 이거 아니겠냐?”

“오. 일왕이 방일 행렬에 저를 포함시켰다?”

“그 정도 인물이 요구사항을 전한 거라면 장관이 저렇게 나오는 것도 이해되잖아.”

“확실히 그렇죠. 요구 사항을 만족시키며 우익 프로그램에 내보내서 아부까지. 역시 시간 끌기라는 말은 변명으로 들리네요.”

“변명이라고 보는 거냐?”

“막말로 정책 결정에 제가 무슨 영향을 주겠어요. 그냥 아부용 선물이면 모를까.”

사실 아부용 선물이든 시간끌기용 미끼든 상관없다.

둘 다 마음에 안 들기는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럼 역시 거절하는 편이 나을까?”

“아뇨. 이렇게 된 거 직접 가서 만나보고 싶네요.”

“누구를? 일왕을?”

“네. 팬이라잖아요. 팬이 찾으면 얼굴 내보이는 것이 연예인의 숙명이죠.”

“그것뿐이냐?”

“설마요.”

최현석이 불안한 얼굴로 진호를 봤다.

진호의 표정, 예전에도 본 기억이 있었다.

#

장관이 다시 찾아온 건 바로 다음날이었다.

굉장히 불쾌하지만 어쩔 수 없이 참는다는 얼굴로 진호에게 사과를 했다.

어지간히 일왕의 요청이 강했던 모양이다.

진호는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적당히 장관의 속을 긁어 낸 뒤 수락했다.

옳거니 잘 걸렸다, 싶은 장관의 얼굴은 짜증났지만 정한 일을 바꾸지는 않았다.

그렇게 방일을 며칠 남기고 일정이 정해졌다.

“페루에서 온 지 얼마나 됐다고 이번에는 일본이래.”

은서는 입술을 내밀고 볼멘소리를 냈다.

휴가를 다 채우지 못하고 돌아온 것도 마음에 안 드는데 벌써부터 스케줄이 차니 불만이었다.

“어차피 하루 이틀자리 스케줄이야. 돌아오면 같이 바다나 보러 가자.”

“정말? 시간 돼?”

“안 돼도 되게 해야지. 휴가 못 채운 건 내 잘못이잖아. 만회 할 기회를 달라고.”

“오빠 잘못은 아니지만, 기회는 줄게.”

“그거 어딘가 어폐가 있지 않아?”

“어폐물 먹자고? 좋네. 안 그래도 조개가 땅겼는데.”

어딘가 진호를 닮아가는 은서였다.

“아, 그리고 일본에서는 사고 좀 치지 마.”

“사고라니. 누가 보면 내가 사고나 치고 다니는 줄 알겠다.”

“오빠가 무사태평한 사람은 아니잖아? 요즘 분위기가 뒤숭숭한데 괜히 가서 말 잘못하면 구설수 세게 휘말리잖아. 최대한 조용하게 있다가 와.”

“나는 그러고 싶지.”

“한두 번이면 그냥 참고 말아. 일본 방송이 우리나라보다 수위가 좀 센 편이거든. 괜히 그 분위기에 휘말리면 오빠만 손해라고.”

은서도 아이돌을 할 당시에 일본을 참 많이 갔다.

지리적으로 가깝고 같은 문화권에 속해 있음에도 다른 점이 굉장히 많았다.

머리로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알았어. 너무 심한 말이 아니라면 참아 볼 게.”

“기준이 애매한데?”

“그럼 네가 기준을 세워 봐. 어떤 것까지는 참아도 될까?”

“음. 그냥 영화 험담 정도는 넘겨. 오빠 외모나 성격에 대한 농담도 그냥 참고. 연기 지적은······못하겠지만 하더라도 그냥 멍청하구나, 하고 넘어가.”

“다 참으라는 거네. 다른 건?”

“딱히 그 이상 이야기가 나올 것 같지는 않은데.”

“가족 욕이나 그런 건 안 참아도 되지?”

“당연하지. 누가 그런 걸 참겠어.”

별 소리를 다 한다는 듯 은서가 웃었다.

아무리 일본 방송 수위가 세도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

“오케이. 기준이 잡혔다. 가족 욕에 준하는 거 아니면 참기로.”

“약속하는 거지?”

“그럼. 내가 약속은 칼같이 지키잖아.”

손가락 걸고 도장까지 꾹.

그제야 은서가 만족 한 듯 웃었다.

방일이라고 해 봐야 스케줄은 고작 하루 이틀.

별 문제 없을 거라고 여겼다.

“가족 욕은 하면 안 되지. 암.”

두고 봐야 할 일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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