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44. 사절(1)
휴가는 조금 이르게 끝났다.
루카와 함께 한국으로 돌아와 상황을 정리해야 했기 때문이다.
최현석은 ‘휴가 가서 또 무슨 일을 벌인 거냐?’ 라며 한숨 지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일은 벌어졌고 수습은 그의 몫이었다.
다행이라면 진호의 행동이 나쁘지 않은 쪽이었다는 것.
반응 자체는 좋았다.
[영화배우 홍 진호. 페루에서 춤을 추다]
[전통 춤을 추는 한국 배우. 문화 교류의 장]
[현지인이 극찬한 배우]
[문화 교류를 위한 학교 설립. 탑 스타의 긍정적인 영향력]
쏟아지는 기사들에도 나쁜 말은 거의 없었다.
방탕하게 논 것도 아니고 페루에서 전통춤을 배우고 왔다는데 싫어 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문화 교류라는 이름으로 학교까지 세우기로 했으니, 나름의 한류였다.
실제로 페루 쪽 고위 인사가 직접 나서서 진호의 행동을 칭찬했으니 외교적으로도 좋은 성과였다.
“자, 여기가 루카.”
그 사이 루카를 회사 식구들에게 소개했다.
혈혈단신 한국에 올라온 터였기에 새롭게 친구들을 만들어 줄 필요성이 있었다.
그나마 나이가 가까운 세미와 하윤을 먼저 만나게 했다.
“헤에. 반가워, 난 세미야.”
“난 하윤. 근데, 진호 형. 얘 한국말은 할 줄 알아요?”
“아직. 차차 배워야지.”
루카는 쭈뼛거리며 진호 뒤에서 나오지 않았다.
고향에서는 나름대로 안방이라고 겁 없이 날뛰었는데, 타국에서는 그러기 쉽지 않았다.
“루카. 루카? 귀엽게 생겼다.”
“······”
“세미. 난 세미라고 해. 세미 누나라고 해 봐. 세미 누우나!”
“야. 아직 한국 말 모른다고 하잖아.”
“내가 가르쳐 주면 되잖아. 세미 누나라고 해 봐.”
적극적으로 다가가는 건 세미였다.
루카의 주변을 빙빙 돌면서 연신 웃었다.
자기보다 어린, 누나라고 불러 줄 남자 아이가 들어 온 것이 꽤나 신난 눈치였다.
“세······히. 누아.”
“와! 방금 들었어요!? 누나라고 했어!”
“세히. 세이.”
“세미. 세미야. 이쪽은 하윤. 앞으로 우린 가족이니까 잘 지내자. 내가 잘 보살펴 줄게!”
확실히 세미의 텐션이 높았다.
가족에 대한 결여가 있었기 때문일까, 진호는 추측했지만 굳이 언급하지는 않았다.
서로 잘 보듬으면 될 일이었다.
“일단 통역을 겸해서 루카를 보살펴 줄 사람을 고용 할 거야. 그리고 2사옥 한쪽을 숙소로 변경해서 사용하기로 했어. 추가 숙소 건설이 완공되기 전까지는 임시로 사용하는 거야.”
“2층 오른쪽 복도 방들이요?”
“응. 당장은 연습생을 급하게 늘릴 마음이 없으니까. 대표님도 숙소로 사용하다가 획장 공사와 외부 숙소가 완공되면 그때 용도변경하기로 했어.”
“여기서 확장을 더 해요?”
진호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부분은 최현석과 공동투자 개념으로 시작한 프로젝트였다.
일종의 아티스트 양성 계획.
분야 별 아티스트들이 상주하면서 서로의 생각을 공유 할 수 있는 공간이다.
외부 숙소는 이를 위한 발판이었다.
“일단 준비 할 게 많으니까 당분간은 너희한테 루카를 맡겨 둘 거야. 잘 보살 필 수 있지?”
“물론이죠! 가족처럼 보살필게요!”
“저도 동생이 있었으면 했어요. 먼 곳 까지 와서 고생인데, 서럽게 만들면 안 되죠.”
“그래. 두 사람이면 마음이 놓이네.”
루카도 어느덧 경계가 풀렸는지 세미와 하윤의 주변을 편하게 돌아다녔다.
“누나라고 해 봐.”
“형부터 하자.”
진호는 걱정을 한 술 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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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머리야.”
최현석은 갑자기 터진 일복에 앓는 소리를 냈다.
진호가 페루에서 벌인 일이 꽤나 큰 영감을 주었던 모양이다.
수많은 나라에서 요청이 들어왔다.
문화교류의 일환으로 한 번 방문해 주면 안 되겠냐고.
영화 관련 사업 등으로 저변을 넓히고 있던 차라 손해 될 일은 아니었다.
다만, 요구하는 나라가 너무 많았다.
이걸 다 소화하다가는 진호 몸을 반으로 갈라도 부족할 판이었다.
“이것도 이건데······”
차라리 일이 이것만 있으면 괜찮다.
일정이야 빡빡하지만 일 자체는 단순한 터라 시간만 쓰면 그만이었다.
문제는 다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라.”
직통 라인을 통해서 전화를 받았다.
진호가 문화 교류의 일환으로 일본을 방문해 주면 안 되겠냐는 내용이었다.
일본이라면 영화 사업 등으로 틈 날 때마다 방문하는 장소.
그리 특별 할 건 없었다.
“······그렇게 뻔한 일 일리 없지.”
최근 뉴스라면 최현석도 잘 알고 있다.
일본 정부와의 마찰로 여러 가지 문제가 불거지는 상황.
이를 진호를 통해서 해소해 보겠다는 생각이다.
어차피 문화 사절로 유명인이 타국을 방문하는 건 그리 희귀한 일도 아니지 않는가.
다만, 예시로 들어준 몇 몇 방송이 걸렸다.
“셋 다 극우적인 스탠스의 방송이라 이거지.”
여느 방송이 다 그렇듯 일본의 방송도 정치계와 분리해서 생각 할 수 없다.
장관이 거론한 방송들은 일본의 극우 정치계와 상당히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즉, 한국의 유명 연예인이 극우 방송에 나가는 것.
이는 전체적 흐름에서 볼 때 굽히고 들어가는 것으로 보여 질 수 있었다.
“아니면 총알받이로 쓰려는 건가?”
문체부와는 이미 악연이 있다.
영등위 건으로 한 차례 홍역을 앓은 것이 문체부 장관 아니던가.
어쩌면 이를 빌미로 복수하는 걸지도 모른다.
한국 연예인이 극우 방송에 나가서 조금이라도 일본 친화적인 발언을 한다?
물어뜯기 좋은 먹잇감이 될 것이다.
‘머리 아프네.’
마음 같아서는 그냥 거부하고 싶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문체부 장관의 전화다.
진호가 아무리 잘 나간다고 해도 대놓고 거절하는 건 쉽지 않은 일.
“진호 좀 들어오라고 해 봐.”
혼자서는 결정이 어렵다.
최현석이 10년은 더 늙은 얼굴로 내선 전화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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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호는 기본적으로 정치와 문화를 분리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정치적 갈등이 문화적 대립으로 번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어떨까.
정치가 문화에 간섭하고 문화가 정치에 간섭한다.
정도야 그때그때 달랐지만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있음은 부정 할 수 없었다.
“장관이 직접 전화를 했다 이거죠?”
“어.”
“그럼 공식적인 행사에요?”
“방일 행사는 공식적이지. 사람을 만나고 그쪽 연회에 얼굴을 비추는 정도.”
“하지만 방송은 공식이 아니라는 거군요.”
“요구사항이야. 가는 김에 출연해서 다독여 달라, 이렇게 말을 하더군.”
진호가 다리를 꼬고 앉았다.
요구 자체는 이해 못 할 내용이 아니었다.
다만, 최현석과 마찬가지로 방송의 성격이 걸렸다.
“일본 쪽과 직접 타진 할 수는 없을까요? 출연 방송을 직접 결정하고 싶은데.”
“무난한 쪽으로?”
“문화 사절 개념으로 방일하는 건 상관없어요. 서로 잘 지내보자는 정도의 말도 괜찮겠죠. 하지만 그 이상을 요구하면 곤란해요.”
“그야 그렇지. 아무리 인기가 높아도 건드려서는 안 될 문제가 있으니까.”
한국에는 한국 고유의 선이 있다.
많이 희석되고 서구 문물에 다양하게 섞였다 해도 넘어서는 안 되는 선.
일본에 대한 뿌리 깊은 감정이었다.
“그럼 이렇게 해 보자. 네 요구 사항을 문체부 쪽에 전달을 해 볼게. 반응 나오는 걸 보고 판단하자고.”
“그렇게 해요. 여차하면 그냥 엎어버리면 되니까요.”
“아니, 그래도 문체부와 척지는 건 조금.”
“쫄지 마요.”
되레 진호가 다독였다.
“나, 진호에요.”
이유 있는 배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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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외로 문체부와의 접촉은 빠르게 이루어졌다.
다만, 장관은 나타나지 않고 그 아래의 사무직 직원이 대신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서 조금 마음이 상한 진호였지만 넓은 마음으로 참았다.
“긴 얘기는 필요 없겠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직원은 만나마자 일 얘기부터 꺼냈다.
사무용 타블릿 PC를 손에 쥔 채 면접이라도 보는 듯 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일주일 후 방일 일정이 있습니다. 이 행렬에 진호 씨도 함께 해주셨으면 합니다. 교류 행사와 만찬이 있으니 이에 대한 건 따로 기별을 드리도록 하죠.”
“행사 시간은 어떻게 됩니까?”
“공개석상에서 2시간 정도. 후에 개별적인 만찬이 있는데, 이는 따로 정해진 시간이 없습니다.”
“그냥 일행에만 포함되어 있으면 되는 건가요?”
“크게 할 일은 없습니다. 일본 쪽에도 진호 씨 팬이 많더군요. 가볍게 악수하고 사진에 응해주면 될 겁니다.”
말만 듣자면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다.
“일정이 마무리되고 난 뒤에 일본 쪽에서 요구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해 주셨으면 합니다.”
“일본 쪽에서 요구하는?”
“조건입니다. 외교에 대한 답변이라고 하면 될까요?”
“외교에 대한 답변을 왜 제가 해야 합니까?”
“진호 씨도 대한민국의 국민 아닙니까. 협조해 주시죠.”
하지만 쉽다고 꼭 받아들일 이유는 없다.
“기존에 알려 주었던 프로그램과 동일합니까?”
“네. 출연료도 지급 될 테니까 그 점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제 얼굴이 출연료를 걱정하는 사람의 걸로 보입니까?”
“그럼 문제가 없으니, 이렇게 결정하는 걸로 하죠.”
직원의 태도가 이렇다면 더더욱.
진호는 얼굴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역시, 거절하는 편이 나을 거 같습니다.”
“그럼 일정은······네?”
“거절한다고 했습니다.”
“아니, 진심입니까?”
“그렇게 전하세요.”
그리고 문을 발로 툭 차 열면서 밖으로 손짓했다.
벙찐 얼굴의 직원은 진호만 물끄러미 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안 나갑니까?”
“자, 잠깐만요. 뭔가 착각을 하신 거 같은데, 이거 문체부에서 정식으로 요구하는 내용입니다. 장관님 서명이 적힌 거라 이거죠.”
“압니다, 그런 거.”
“근데 거절한다는 겁니까?”
“하고 말고는 내 마음입니다.”
진호는 아예 등을 돌려 걸어갔다.
다급해 지는 건 직원이었다.
“아니, 기다려 보세요! 이봐요 진호 씨. 진담으로 하는 겁니까? 뒷감당 할 자신은 있어요?”
“뒷감당이라. 어떻게, 날 영화 업계에서 묻기라도 할 생각입니까?”
“그······”
“말하는 싹수하고는. 처음부터 태도가 되바라지더니 아주 사람을 물로 보고 있네? 내가 그쪽 부서에서 하라면 하고 마라면 마는 그런 사람으로 보입니까?”
직원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문체부 업무를 하면서 이렇게 강하게 나오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대부분 장관 직인 들고 다가가면 고개 숙이기 바빴으니까.
“가서 확실하게 전해요. 난 생각이 없다고.”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실 수 없습니까?”
“이딴 엉터리 기획안으로는 재고의 여지가 없습니다. 생각을 돌리고 싶으면 다시 정리해서 가져와요.”
“이 내용은 전부 장관님께서······”
“아니면 장관님께서 직접 와서 설명을 하시든가.”
직원의 입이 떡 벌어졌다.
아무리 사람이 간이 커도 그렇지 장관을 오라 가라 할 수 있단 말인가.
문화체육관광부가 외부에서 한직으로 보인다 해도.
‘제정신이 아니네, 이 인간.’
잘나가는 영화배우라고 머리가 이상해 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도무지 설명이 불가능했다.
“······다시 한 번 방문하겠습니다.”
“그래요. 그때는 제대로 된 설명을 들을 수 있기를 기대하죠.”
이 말을 전부 전해야 하는 걸까.
직원의 머리가 무거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