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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억 FA선수가 되다-41화 (41/204)

41화. 나고야

* * *

단체 샷 말고는 주로 옆모습과 뒷모습 위주의 촬영이 끝나고, 그때까지 나를 기다린 여우와의 면담을 시작했다.

“왜 이러는 거냐? 나한테 이러는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만만해서?”

“만만해서?”

사람 면전에 놓고 만만하다는 얘기를 서슴지 않는 동갑이라는 어린애와 계속 얘기를 해야 하나 고민이 생긴다.

“집에다가는 뭐라고 얘기를 했길래 회장님이 날 만나러 오시냐?”

“우리 아빠가 사람은 좋은데 눈치가 좀 없으셔. 너 때문에 인턴 잘리고 방에다 너 유니폼 걸어놓고 다트 좀 던지면서 저주를 퍼붓고 있는데 아빠가 그거 보고는 오해를 좀 하신 거야.”

미… 미친……. 나한테 다트를 왜 던져…….

“오늘도 아빠가 국대 감독인 철우 삼촌 보러 간다고 같이 가자길래, 국대라고 모아놓으면 좀 다른가 구경하러 왔어. 아빠가 너 불러서 그런 얘기할 줄 몰랐다고.”

언젠가 저것의 꼬리를 확인해 봐야겠다. 꼬리가 9개는 아니더라도 최소 6개 이상은 확정이다. 요망한 것. 유니폼을 걸어놓고 다트질이라니. 그래서 내가 요즘 자꾸 왼쪽 어깨가 당기는 거였어.

“믿을 순 없지만 믿어줄게. 그럼 우리 이제 만날 일 없는 거지?”

더 이상 말 섞기 싫어 이별을 통보하자 여우가 피식하고 웃는다.

여자의 웃음. 순간 조금 예쁘다라는 생각이 살짝 스쳐 지나가지만 정신 차려야 한다. 저 여우의 환술에 당하면 인생 고달프다.

“너 자격지심 있냐?”

“뭐? 뭐? 자격? 뭐?”

“자격지심 몰라? 열등감 뭐 이런 거? 내가 너무 예뻐서 부담스럽거나… 힉~ 설마… 너 나 좋아하냐?”

졌다. 이쯤 되면 졌다고밖에 표현할 수가 없다.

내가 전생에 잘못한 게 많거나 엄마가 절에 가서 공양을 조금 해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고밖에 설명할 수가 없다.

이번 기회에 우리 엄마 종교 바꾼다.

“전혀 아니다. 너한테 관심 1도 없다. 너 내 스타일 아니니까 그런 얘기는 꺼내지도 마라.”

내 솔직한 마음을 알려주자 여우가 발끈한다.

“야! 솔직히 말해도 돼. 사람이 말이야 좋으면 좋다. 예쁘면 예쁘다 솔직히 말해야지, 쓸데없는 거짓말은 건강에 좋지 않아.”

“거짓말이라니! 난 너 같은 불여시 스타일 싫어한다. 난 홍시 누나처럼 강아지상… 아니다. 어디 너 따위를 홍시 누나랑…….”

내가 말을 다 끝마치지도 못했는데 앞에 있는 여우가 비 오는 날 XXX처럼 웃기 시작한다.

“호호호호. 너 오늘 처음으로 재밌었다. 그냥 좋으면 좋다고 얘기를 해.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어디 크다만 중딩 같은 언니랑 비교를 해. 흐흐흐. 너 재미있는 사람이었구나?”

이쯤 되면 선 넘는 거지.

“너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너 정말 안 예뻐. 대기업 회장님 딸이니까 주변에서 자꾸 너 예쁘다고 해주나 본데. 아니야, 정신 차려.”

내가 진실을 일깨워 주자 웃고 있던 여우의 얼굴이 확 바뀐다. 그러면서 카페 내에 스산하게 내려앉는 차가운 기운.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진다.

“네 취향이 변태적인 롤리타 취향이라면 내가 최대한 인정해 줄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객관적인 사실까지는 왜곡하지 말아줘. 내가 작년 춘향이 선인데 중딩 같은 언니보다 안 예쁘다고 하면 조금은 속상하니까.”

나름 올바로 살아왔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얘를 만나면서부터 내가 이상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저게 예쁜 거라고? 저렇게 싼 티 나게 강남 스타일로 생긴 게 춘향이라고?

춘향이 출신이면 나미춘 누나처럼 토끼같이 예쁘고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더 말 섞다간 내 영혼까지 흑화될 것 같으니 이만 끝내야 한다.

“네, 네. 잘 알겠으니 이만 일어나시죠. 앞으로 연락하지 마라. 나 야구만 하기도 바쁘다.”

“무슨 소리. 내가 어떻게 잡은 호군데. 너 내 전화 재깍재깍 받아라. 특히 아시안 게임 가서 잘 받아라. 누나가 물어볼 게 많다.”

학교에서 사람을 때리면 안 된다고 배웠는데 여우는 때려도 되지 않을까? 혼자서 진지하게 그러면 안 되나 고민을 해본다.

* * *

9월이 시작되는 시점. 일본에서 열리는 아시안 게임에 맞춰서 시즌이 중단되었다.

시즌 초반 잘 달리던 랩터스가 여름이 되면서 성적이 확 떨어졌지만, 아시안 게임 브레이크까지 반 게임 차 선두를 지켜 내었다.

야수는 쓸 놈 쓸. 투수는 갈아 넣기를 시전하며 간신히 지켜낸 순위. 랩터스로서는 팀이 터져버리기 직전에 갖게 된 천금 같은 순간이다.

이 말도 안 되는 팀 운영을 가능하게 한 선수. 그 선수가 생전 처음 뽑힌 태극 마크를 달고는 대한 해협을 건너 절친과 다음 시합에 대해 진지한 이야기를 나눈다.

“내가 네 전화 받으려고 비싼 로밍한 게 아니다. 용건만 간단히.”

- 구단에서 통화료 다 내주는 거 알고 있는데 어디서 약을 팔아. 잘 듣고… 아니다. 적어. 내가 해주는 얘기 적어. 첫 경기 라오스잖아. 물론 우리가 쉽게 이기겠지만, 아니지, 이겨야지. 그건 당연한 건데 불안 요소를 줄여야 하잖아.

정신이 혼미해진다.

- 그치? 라오스에 내일 선발이 오리얀이야. 내가 미리 영상이랑 좀 봤거든. 우선 패스트볼 구속은 120 정도에서 형성이 되는데…….

하품이 나온다. 이걸 들어줄 필요가 없다는 건 알지만 그랬다간 하루 종일 전화가 오니 안 들어 줄 수도 없다.

차단 시도도 해봤는데 그럴 때마다 경기장에 찾아오질 않나, 자기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던 구단주 삼촌에게 전화 받으라고 시키질 않나. 더 피곤하다.

- …알았지? 너도 혹시 나올 수 있잖아. 점수 차가 벌어지면 컨디션 조절 차원에서 나올 거란 말이지. 그럴 땐…….

“…….”

- 무슨 말인지 알아? 너 발이 빠르잖아. 그러니까 평범한 안타에도 2루를 노려보라고. 특히나 좌익수 어깨가 물이야. 그러니까…….

“…….”

- 알았지? 포수에 송철형이 나올지 전승민이 나올지 모르겠는데. 뭐 둘 다 나오겠지만. 굳이 떨어지는 변화구 안 던져도 돼. 아니, 안 던져야지. 우리는 결국 일본이랑 맞붙어야 하는데.

“…….”

- 야! 자냐? 이게 누나가 이렇게 열심히 얘기해 주는데 리액션이 없어! 야! 대답 안 해!

아이고. 잠깐 졸았다.

“어… 그래. 그렇지. 다 맞는 말이야.”

내가 맞장구를 쳐주는데 반대쪽에서 소리가 안 들린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끊겼나?”

- 내가 방금 뭐 얘기하고 있었어? 말해 봐.

목소리가 깔려서 들려오는 게 말 잘못 하면 20분짜리다.

“어… 음… 도루. 그렇지. 도루하라고. 아니, 하지 말라고. 아니, 하라고 했나?”

전화기 반대쪽에서 거칠어진 숨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나도 모르게 전화기를 귀에서 멀리 떼 본다.

- 야@$#%^@#$!

한두 번도 아니고, 이젠 스킬이 는다.

“욕 다했으면 이제 그만 하자.”

- 나쁜 XX. 내가 조별 과제도 뒤로 미루고 준비했는데, 사람 성의를 이렇게 무시해! 너 나 무시하고 금만 못 따 봐. 아주 다리몽둥이를 요절내 버릴 거야!

우리 엄마도 고이 모셔둔 내 다리몽둥이를 왜 그쪽이 요절을 내시려고……. 에효…….

“그러니까 학생이면 공부를 하세요. 조별 과제나 잘하시지, 왜 국가 대표 전력 분석팀을 못 믿어서 쓸데없는 짓을 하고 그러세요. 그렇게 공부해도 학교에서 가만둬?”

- 우리 과에서 최근 생긴 말이 있지. 세상에서 제일 쓸데없는 게 이루다 학점 걱정이다. 모르냐? 이 누나는 말이지, 새벽 세 시까지 챔스 보면서 술 먹고도 학점 4.5를 찍는 분이시다.

내가 대학은 안 갔어도 학점이 4.5가 만점인 건 들어서 알고 있는데… 그런 구라를…….

- 이번 학기부터는 조기 졸업도 준비 중이시고. 너 같은 1.5군 백업 야수가 자리 잡기 전에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스포츠 기자를 하실 분이라고. 그러니까 내가 말할 때 좀 적어서 팀에 공유하라고 이 멍청한 놈아!

왜 얘랑만 얘기하면 정신이 몽롱하고 어지러운지 모르겠다. 저것이 분명 말로 환술을 쓰고 있는 게 틀림없다.

부적을 더 써야 해. 더…….

* * *

- 대한민국과 라오스와의 아시안 게임 첫 경기를 나고야구장에서 보내드리겠습니다.

- 나고야 하면 주니치 드래곤스의 연고지로 유명한 도시죠. 주니치가 나고야돔을 사용하기 전 홈구장으로 사용하던 나고야구장입니다. 지금은 주니치 2군이 사용하고 있는데 관리가 아주 완벽합니다. 야구 하는 데는 좋은 환경이에요.

- 조별 예선, 라오스와의 첫 경기입니다. 조별 예선에서 대한민국이 라오스, 인도네시아, 태국과 맞붙게 되었습니다. 어려운 상대는 아닙니다.

- 이번 대표팀은 해외파를 제외한 KBO 최고의 선수들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조별 예선은 쉽게 지나가고 우리의 진짜 상대인 대만과 일본을 준비해야 합니다.

- 9회 초, 대한민국의 공격입니다. 이 경기가 9회까지 진행될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겁니다.

- 그렇죠. 조별 예선 1차전 라오스와의 경기가 9회. 이러면 안 되는 경기거든요. 침통합니다.

- 스코어 3 대 0에서 시작되는 9회. 대한민국 대타를 내보냅니다. 타석에 김소전 들어옵니다.

- 이번 시즌 랩터스에서 가장 고생하고 있는 선수죠. 2년 차. 이번 시즌 신인왕 타이틀이 가장 유력한 선수입니다. 이번 국가 대표팀에 전천후 내야 백업으로 승선했습니다만 내야뿐만 아니라 외야까지 커버 가능한 선수죠. 답답한 경기 실마리를 풀어줬으면 좋겠어요.

덕아웃 분위기가 침통하다. 처음에 다들 만만하게 보고 편하게 시작한 경기인데 라오스 투수들의 직구에 우리 타자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이유는…….

“야! 때리라. 엉거주춤하지 말고 공을 때려라!”

“공이 안 와요. 공이 안 옵니다. 타이밍이 전혀 안 맞아요.”

“저놈들 체인지업 장인이야. 체인지업을 4종류로 나눠서 던져. 느린 공, 더 느린 공, 더더 느린 공, 더더더 느린 공. 이건 못 쳐!”

“커브도 아닌 것이 아리랑 볼도 아닌 것이 알 수 없는 공이야. 공이 워낙 느려서 때려도 안 뻗어.”

타자들이 무수히 많은 빗맞은 타구를 뽑아내고서는 라오스 투수들을 경의에 찬 눈망울로 바라만 본다.

참고 참고 또 참았던 감독이 더는 참지 못하고 수비하라고 데려온 어린애를 대타로 내보냈다.

“소전아. 9회에 투수 바꿔서 올라왔잖아. 공식 경기 자료가 하나도 없는 투수긴 한데. 얘들 보니까 직구로 유인하고 커브로 카운트를 잡고 있어. 그러니까 커브를 노리고 길게 쳐. 애들 공에 힘도 없어서 뻗지도 않으니까 티 배팅 날려 버린다는 생각으로 길게 쳐봐.”

주섬주섬 장비를 착용하고 타석으로 향하는 나른 붙잡고 타격 코치가 한참 동안 조언을 해준다.

자료가 없다고? 쟤? 쟤 라오스 마무리 투수라며. 분명 라오스의 마무리 투수가 맥스 140 직구로 빠른 타이밍에 카운터 잡는 선수라고 들었는데… 아까 전력 분석 자료에 나와 있던 거 아니었나?

전력 분석 자료나 타격 코치나 둘 중 하나는 틀렸다는 건데……. 누굴 믿어야 할지 모르겠으니 그냥 타석에서 공 보고 공 치기로 마음을 먹는다.

어차피 9회 초 공격인데 잘 치면 내가 좋은 거고, 못 치면 경기 빨리 끝나는 거니 뭘 해도 위 아더 월드다.

- 김소전 벼락같은 타격. 우중간~ 담장을 넘겼습니다. 도망가는 솔로포! 김소전! 한국 야구의 힘을 보여줍니다.

- 지금 138킬로짜리 가운데 몰린 공이거든요. 김소전 선수 기다리지 않고 잘 받아 쳤어요. 이래야 해요. 공이 낯설어도 칠 수 있는 공이면 기다리지 말고 바로바로 받아쳐야 하는데 지금까지 우리 선수들이 너무 몸을 사렸어요.

- 그렇습니다. 우리 선수단, 공격적인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 김소전 선수가 우리 팀 막낸데 형들이 막내의 적극적인 모습을 보고 배웠으면 좋겠어요.

투수가 마운드에서 자세를 잡을 때부터 느낌이 왔다. 질끈 감은 눈. 저런 큰 백스윙. 자기 몸길이만큼 끌고 나오는 스트라이드. 그리고 저런 호쾌한 팔 스윙.

저건 100% 확률로 한가운데 직구다.

타석에서 히팅 포인트를 앞에다 두고 공을 마중 나간다. 투수가 혼신의 힘을 다해 던진 140은 될까 말까 한 공. 체중 이동을 끝마치고 최대한 몸통 회전을 감고 있다 폭발적으로 풀어낸다.

생각보다 살짝 앞에서 맞은 공. 살짝 우측으로 쏠려서 담장 밖으로 사라진다.

‘오우. 타이밍이 좀 틀어졌는데도 공이 뻗어가네. 아시안 게임 준비한다고 며칠 쉬었더니 몸 상태가 최고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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