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새 스승
땅에서도 먹어본 적이 없는 풀 코스 정식을 하늘에서 먹을 줄은 몰랐다. 캐비어, 트러플, 푸아그라까지. 맛대가리 하나 없는 음식을 겁나 텁텁한 와인과 함께 오물오물거리다 보니 기분까지 안 좋아진다.
하지만 음식이라는 게 좋은 사람과 먹으면 동네 떡볶이도 미슐랭급 음식이 되는 법인데, 앞에 있는 멍청이들과 함께하니 안 그래도 이상한 맛의 저 화려한 요리들이 어제 버린 음식물 쓰레기와 자꾸 비교된다.
입맛을 버려 가장 큰 컵의 물을 벌컥벌컥 원샷으로 해치우는데…….
“응? 뭐 해?”
“네? 입이 좀 텁텁해서요.”
“그럼 물을 마셔야지.”
“물 마셨는데요.”
“그거 손 씻는 건데?”
“네?”
“아니다. 마시고 안 죽으면 됐지. 자, 먹자.”
하늘에서 밥을 먹어서 그런가 어질어질하다. 그냥 컵라면이나 끓여 먹었으면 좋겠다.
뭔가가 끝도 없이 나오더니 언젠가부터 과자 부스러기가 미친 듯이 나온다.
냄새도 이상한 것들을 먹다 달달한 게 입에 들어오니 좀 살 것 같다. 이 XX들이 헛소리를 늘어놓기 전까지는…….
“소전아. 공을 보고 때리라고.”
“너 팔다리가 길잖아. 배터 박스에서 떨어져서 쳐도 돼.”
“내가 소전이 야동만 만 번은 봤다. 임팩트 때 손이 덮어지면 안 돼, 알잖아. 유소년 때부터 배운 거 아니냐?”
소전아…….
소전아…….
소전아…….
대기업 회사원들이 왜 그리 빨리 은퇴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매일같이 해외 출장 가고 좋은 음식 먹고 다니면 뭐 하냐. 위에 상사라는 XX들이 X도 모르면서 아는 척을 해대니 뭐라고 받아칠 수도 없고 속만 타들어 간다.
10시간 동안의 비행. 화면으로만 보던 악플을 직접 귀로 들으며 정신과 육체가 분리될 무렵, 비행기가 공항에 도착했다.
“소전아. 형들은 다른 일정이 있어서 여기부터는 혼자 가야 해. 내가 우리 소전이 소식을 빼먹지 않고 들을 테니까 혼자 잘하고 있어.”
10시간 만에 제멋대로 형이라고 관계 설정을 한 못생긴 놈이 감사하게도 나를 놔준다고 한다.
“네, 형님. 잘하고 오겠습니다. 형님도 하시는 일 잘 마치고 오십시오.”
딱히 마음에서 우러나오진 않았지만, 입이 알아서 최소한의 인사치레는 한다. 역시 내가 세상을 헛살지 않았어.
“그러고 보니 소전이도 여자 친구가 있던가? 이번 출장 마치고 내가 선물 하나 줘야 하는데.”
“야! 쟤도 너처럼 찐따형으로 생겼는데 여자 친구가 있겠냐? 고민하지 말고 집에 갈 때 하나 줘.”
뭐, 뭐지……. 저 XX는… 내 비록 여자 친구는 없지만 찐따라니. 그리고 어딜 봐서 저 존못의 구단주랑 닮았다는 거야!
“전 야구랑 결혼했습니다. 여자 문제는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이놈의 입이 아무 생각도 없이 조건 반사적으로 헛소리를 내뱉는다. 야구랑 결혼은 뭔 X소리야…….
“와~ 우리나라 사람 누구한테 물어봐도 너 여자 문제는 걱정 안 해. 거울 안 보냐? 여자가 너한테 붙겠어? 얼굴만 너 닮은 줄 알았더니 생각이 없는 것도 너랑 똑 닮았어. 이건 뭐. 둘이 배다른 형제라도 되는 거냐?”
“죽.고.싶.어? 나 같은 절세 미남이랑 저런 찌그러진 붕어빵이랑 자꾸 비교할래! 엉!”
고민이 된다. 분명 화를 낼 시점인데 화를 내도 되는가. 당사자를 앞에 두고 저딴 X소리를 지껄이는 걸 보면 정신병이 확실한데 모욕죄로 경찰에 신고를 해야 하는지, 미친놈이라고 병원에 신고를 해야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소전아. 형이 4차 산업 시대를 맞이해서 메타버스 장비에 투자하기로 했거든. 그래서 너 과외받는 동안 형은 신제품 개발에 몰두해야 해. 형도 열심히 해서 꼭 성공시킬 테니까.”
“멍청아. 쉬운 얘기를 왜 어렵게 해. 소전아, 얘가 폰X브가 개발하는 VR 투자하기로 해서 겨울 동안 개발 상황 확인할 거거든. 너 과외 잘 받으면 집에 갈 때 샘플줄 테니까 잘해.”
“아… 이 머리 나쁜 놈. 그냥 VR이 아니고 웨어러블 기어라니까. 고글과 전신 슈트를 입고 상황을 그대로 느끼는…….”
뭐? 폰X브? 그거? 내가 좋아하는 그거? 아니지. 좋아하는 건 아니고……. 하여간 극장에 걸 수 없는 예술 영화만 전문으로 취급하는 그거? 그거 얘기하는 거지, 형님들?
“형님들, 베이브 루스보다 위대한 선수가 되겠습니다.”
* * *
인류의 발전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시는 형님들을 산업 현장으로 보내고, 여행사에서 준비한 통역과 함께 LA 인근의 작은 건물을 찾았다.
라타 볼야드.
라타라는 재야의 코치가 운영하는 사설 야구 연습장.
동네 연습장을 운영하던 라타라는 사람이 본인의 타격 이론을 정립하고 마이너리거를 몇 명 가르치다가 폭망한 메이저리거를 몇 명 성공시키면서 재야의 고수 자리에 올랐다.
특히나 야구판에 스탯 캐스트가 도입되면서 발사각 혁명이 일어났고 어퍼 스윙을 기본으로 한 교육을 받은 라타의 제자들이 메이저에서 성공하자 시대를 앞선 혜안을 가진 절대자로 입지를 다지게 된, 이 판에선 글로벌 스타.
내가 오기 전에도 한국 선수들이 종종 찾아 왔지만 한국 선수들 대상으로는 성공 사례보다 폭망의 경우가 훨씬 많아 우리나라에서는 사기꾼으로 알려졌다.
특히나 겨울에 라타 코치에게 과외를 많이 보낸 팀의 팬들이 국제 소송을 준비하면서 후원금을 모집하다 튀어 버려 사회적 문제가 되는 등 요즘 인기는 별로인 코치.
소문은 많이 들었는데 내가 여기 올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내가 이제 정상적인 타격 폼을 장착하려고 노력 중이긴 하지만 그래도 장타보단 적당한 라인드라이브 타구를 날리려고 노력하는 사람인데… 라타 코치와 궁합이 맞으려나 모르겠다.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색해하면서 들어간 연습장. 내 생각보다도 훨씬 작다.
간단한 인사를 하고 내가 주위를 둘러보고 있는 동안 여행사에서 나온 통역이 간단한 서류 작성을 마친다.
마지막으로 뭔지 모를 서류를 내미는 통역. 펜을 쥐여 주길래 뭔지도 모르고 우선 사인을 휘갈겼다.
그걸 보고는 만족해하는 라타 코치. 생긴 건 편안한 뒷집 아저씨 같이 생겼는데 눈엔 탐욕이 가득하다.
“생각한 것보다 몸이 더 좋네요. 간단히 몸 풀고 시작할까요?”
서류를 치우더니 대뜸 운동부터 하자고 얘기를 한다.
운동하러 왔으니 운동해야지. 내가 그동안 갈고 닦은 영업용 미소를 짓고는 천천히, 그리고 꼼꼼히 몸을 스트레칭을 마쳤다.
“김소전 선수 자료를 먼저 본 게 있는데 직접 보고 싶어요. 훈련장에 들어가서 토스 볼 몇 개만 쳐볼까요?”
공 몇 개 치는 게 뭐 대수라고. 어차피 2군에 있었으면 하루에 스윙 2, 3천 개는 일상인데.
통역을 통해 대화를 이어 나가는 게 좀 불편하지만, 예의 바르게 대답하고는 연습장으로 들어갔다.
작지만 스윙 연습을 하는 데는 불편함이 없는 연습장.
배팅 장갑을 꽉 조여 매고 코치의 토스 볼을 기다린다.
“편안하게 본인이 치고 싶은 대로 쳐보세요.”
동네 아저씨가 꼬맹이 처음 야구 알려 주듯이 던져 주는 토스 볼.
첫날인데 좋은 인상을 남겨야겠다는 일념으로 공을 쪼개버릴 듯 날려버린다.
딱! 딱! 딱!
10개도 채 치지 않았는데 코치가 토스를 멈춘다.
“영상으로 봤을 때보다 훨씬 더 이상하네요. 프로 야구 선수라고 들었는데, 야구 처음 하시나요? 나이 들어 처음 야구 하는 사람 같아요.”
이 아저씨가 지금 무슨 소릴 하시는 거야. 내가 야구를 14년, 아니지… 1년 더했으니까 15년을 한 베테랑인데 처음? 지금 나랑 장난하나!
“어느 부분이 이상합니까? 랩터스 코치들과 연구하고 또 연구해서 만들어 낸 타격 자세입니다. 이상한 부분 말씀해 주시면 다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나를 이상한 장난감 바라보듯 한참을 바라보던 라타 코치가 한숨을 내쉬면서 지적질을 시작한다.
“우선 중심이 너무 뒤에 있습니다. 뒤에 있는 게 나쁜 것만은 아닌데 키가 커서 그런지 중심이 떠 있습니다. 타석에 서 있는 자세부터가 불안정해요.”
내 자세를 따라 하는 라타 코치가 손을 뒤로 당기며 말을 이어 간다.
“거기다 테이크 백이 너무 뒤로 당겨지는 것도 문젠데 당겨진 후에 안으로 말리면서 강하게 코킹이 됩니다. 코킹이 되면서 타이밍이 흐트러지는 데다가 배트 움직임이 너무 많아요. 그러다 보니 타구를 정확히 맞히질 못하네요.”
이… 씨……. 공 몇 개 봤다고 나한테 지적질을.
“다운 스윙으로 어프로치를 빠르게 가져가려는 건 알겠는데 그러면서 왼손이 바로 덮이고, 배트가 크게 돌아서 나와요. 배트가 퍼져 나와서 32인치 배트를 쓰는 건지 모르겠는데 키나 힘에 비해 너무 짧은 배트를 쓰고 있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얘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허허허!”
어질어질하다. 하나하나 파고들면 그렇게 틀린 말도 아니지만, 스윙 몇 번에 그게 보일 만큼 내 연습량이 적지 않다고. 처음 연습할 때 화면 보고 하는 얘기라면 모를까, 지금은 아니…….
잠깐. 이 사기꾼 XX, 내 자료 먼저 받았다고 그랬지? 아, 그래. 그래서 이딴 소리를 하는구나!
“코치님. 잘 분석해 주신 건 좋은데 제가 하나하나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우선 중심은 제가 로테이셔널 회전을 바탕으로…….”
한참 동안 내 타격 자세가 만들어진 유래와 이게 왜 내게 필요했는지, 그리고 앞으로 이 자세를 어떻게 유지 발전시켜 나갈 건지에 대해 한 시간에 걸쳐 설명했다.
한 시간여를 맞장구쳐 주며 듣고만 있던 사기꾼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내게 묻는다.
“그래서 결과는요?”
“결과는…….”
44타석 9안타 2홈런. 2할 4리. OPS 0.6.
뭐. 어쩌라고 신인이 타격 폼 바꾸고 OPS 0.6이면 훌륭하지. 왜.
큰소리로 대들고 싶었지만, 벽에 걸린 성공한 메이저리거들 배트를 보면서 대들 수 있는 용기가 사라졌다.
“영상으로 봤을 때 선수의 재능은 충분해 보이는데, 지금은 뭔가 잘못된 옷을 입고 있는 거 같아요. 제가 먼저 살펴본 영상 중에 굉장히 마음에 드는 영상이 있었는데, 그 폼으로 토스 볼 몇 개 쳐볼래요?”
“어떤 영상이요?”
“번트 자세에서 슬래쉬로 바꾸면서 홈런을 치던 영상이었거든요. 내 눈에는 그게 선수에게 너무 잘 어울리고 잘 맞는 것 같았는데 그 폼으로 한번 쳐보겠어요?”
잡았다, 요놈. 내가 확신이 없었는데 잡았다, 요놈.
지금 장난하냐. 그땐 내가 어쩔 수 없이 먹고 살려고 근본 없는 타격 자세를 만든 거고. 지금 내가 이제 20살인데 벌써부터 그런 막장 자세를 연구하면 되겠냐?
너 그냥 이것저것 찔러보는 돌팔이 맞지? 확실하다.
내가 그물치고 너 잡는다.
“별로 좋은 자세가 아닌데 코치님이 원하시면 해보겠습니다.”
기억을 되살려 오래된 내 폼을 꺼내 본다. 거의 정면을 바라볼 듯 서서 배트를 짧게 잡는다. 장전 동작 없이 바로 공을 맞히면서 살짝 위로 들어준다.
타격이라기보다는 번트를 대면서 조금 강하게 때린다는 느낌. 이게 내가 지난 생 14년 동안 갈고 닦았던 오리지널 김소전표 타격이다.
“이, 이런……. 눈으로 보니 더, 더 대단하잖아. 이렇게 좋은 자세를 가지고 왜 아까처럼 이상한 자세로 치는 겁니까! 나랑 같이 일 한번 내 봅시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비행기부터 잘못된 거다. 비행기에서 미친놈들을 만났더니 내려서도 미친놈이 나타났네.
아니지. 미국, 여기 땅이 이상한 게 틀림없다. 이 땅이 미친놈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거였어.
더 늦으면 안 된다. 도망가자. 도망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