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
20화 샌프란시스코 (3)
인수는 벌레가 속한 PMC회사가 필코 마이닝에 인수되기 전 가장 마지막으로 합류한 인원 가운데 한명이었다. 앞에 ‘특’자가 붙은 곳 출신이 대부분인 다른 이들과 달리 알보병 출신으로 대학 학비와 유학자금을 위해 들어온 이였다.
하지만 자기 몫은 확실하게 하는 이였고, 붙임성도 좋은 호인이었다. 시간이동 이후-정확히는 마닐라를 뜬 이후-부터 무엇인가 허공에 붕 뜬 것 같은 인수의 모습에 벌레는 인수를 따로 불렀다.
“요즘 무슨 일 있냐 ”
“아닙니다.”
“그런데 왜 발이 허공에 둥둥 떠다녀 그렇게 허공에 둥둥 떠다니면 표적지 신세밖에 안 된다는 거 잊었냐 너만 표적지가 되는 게 아니라 다른 놈들까지 다 표적지 신세가 되어버린다고!”
“죄송합니다.”
“다 죽은 다음에 저승 가서 ‘죄송합니다.’할 거냐 대체 무슨 일이야 ”
“저기 갑자기 생각이 많아져서….”
“무슨 생각이 그리도 많아졌는데 ”
“별 거 아닙니다….”
“별 거 아니긴, 새꺄! 그 별 거 아닌 일에 내 목숨이 달렸다! 당장 불어!”
벌레가 윽박지르자 인수는 그 동안 고민했던 것을 이야기했다.
“종전 후에 사업을 하면 어떨까 해서….”
“사업 너 경영학과였냐 ”
“그건 아닙니다만, 꽤 괜찮은 아이템이 생각나서… 뭐냐하면….”
인수가 자신이 생각한 아이템을 설명하려 하자 벌레는 손을 들어 인수의 말을 막았다.
“스톱! 마누라 자랑, 애인 자랑, ‘전쟁 끝나면 뭐할 거다.’하는 녀석들이 꼭 먼저 뒈지더라. 그러니 거기서 스톱!”
“알겠습니다.”
“말로만 ‘알겠습니다.’로 끝내지 말고 생각 자체를 아예 접어!”
“예….”
벌레의 다그침에도 불구하고 인수는 계속해서 허공에 붕 뜬 상태였다. 결국, 보다 못한 벌레가 다시 인수를 붙잡았다.
“새꺄! 아직도 파리새끼마냥 붕붕 떠다니냐!”
“죄, 죄송합니다….”
“됐고! 그렇게 사업 생각이 간절하냐 ”
“예!”
인수의 대답에 벌레는 필코 마이닝의 직원들이 묵는 컨테이너 하우스를 가리켰다.
“저기에 가서 정 수석팀장 찾아서 상담 좀 받아봐라. 어떻게 왔냐고 하면 내 이름 대고.”
“예!”
“그렇다고 다 알려주지는 말고! 저기 있는 양반들 다 재벌 소속이야. 잘 알지 괜찮다 싶으면 낼름! 하는 게 저 양반들 주특기라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가보겠습니다!”
대답과 동시에 벌레가 가리킨 곳으로 달려가는 인수였다.
* * *
“도대체 누가 미국에서 판 벌리라고 하드냐 ”
“수석팀장님이….”
인수가 정 수석팀자을 언급하자 벌레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노안 그 자식이 너 다 오픈했냐 ”
“아뇨…. 대충 전기 관련 제조업이라고 했더니 광복후 한반도에서 바로 수익을 내기에는 기술적 기반이나 시장 모두 답 없다고…. 그냥 미국에서 판 벌리라고… 나중에 진짜 판 벌릴 때 돈 필요하면 꼭 자기 찾아오라고… 그 때는 자기도 한자리 하고 있을 거라고….”
“너 전공이 뭐였는데 ”
“전자공학이었습니다만….”
“그래 ”
인수의 말에 벌레는 갑자기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어깨동무를 한 채 침묵에 잠긴 벌레의 모습에 불안해진 인수가 뭐라 말을 하려는 순간 벌레가 입을 열었다.
“인수야.”
“예 ”
“거기에 나도 투자하자.”
“예에 ”
“앞으로 이런 저런 월급과 위험수당 받아봤자, 내가 쓸 곳이 어디 있겠냐 그거 모아서 너한테 투자하는 거지. 혹시 아냐 너 대박나면 나도 팔자 피는 거잖아 아! 난 기술 같은 거 쥐뿔도 모르니까 네가 다하고!”
“그러니까….”
“그러니까! 주식회사 만들자 이거지! 너 회사 만들면 난 내 돈만큼 주식을 챙기면 되는 거고… 어떠냐 ”
“뭐가 어떠냐야 왜 애는 붙잡고 괴롭히고 있어! 그러다 나중에 뒤통수에 총구멍 나고 싶냐 ”
자신에 뒤에서 들리는 호통소리에 벌레는 인상을 팍 구기며 고개를 돌렸다.
“이 빨갱이 새꺄! 사람을 어디다 취직시키고 있어 ”
“그럼 왜 삥 뜯는 양아치 고딩 같은 자세를 하고 있는데 ”
“그냥 인생 상담 좀 해주고 있었다!”
“인생 상담 하이고~.”
기도 안 찬다는 표정을 짓던 빨갱이는 인수 옆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인수야. 이 벌레 새끼가 협박하면 당장 뒤통수에 구멍 내버려라.”
“그거 아닙니다. 단지 사업 이야기를 좀….”
“쉿! 야! 쉿!”
“사업 이 미친 벌레 새끼가 순진한 애한테 무슨 사기를 치려고….”
“그게 치프가 아니라 제가 사업을….”
“잉 ”
인수의 말에 빨갱이는 인수 옆에 바싹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잠깐 우리 함께 심도 깊은 이야기 좀 나눠볼까 ”
인수의 자초지종을 들은 빨갱이는 턱을 쓰다듬으며 상황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인수 네가 좋은 아이템을 갖고 있는데… 저기 졸라게 무지하게 똑똑하신 수석팀장‘님’과 상담을 해본 결과 미국에서 판 벌리라는 답을 들었다 이거지 ”
“예.”
“그리고 이 멍청한 자본주의의 벌레 새끼는 그 말을 듣고는 앞으로 벌 돈을 냅다 너한테 투자한다는 거고 ”
“예에….”
“내가 왜 멍청한데 ”
“넌 닥치고 있어, 새꺄! 인수야, 걔한테 무슨 아이템인지 말 안 한 것 확실하지 ”
“예!”
씩씩거리는 벌레에 대해서는 신경을 끈 채 이런저런 고민을 하던 빨갱이가 인수의 어깨를 붙잡았다.
“나도 투자하마!”
“예 ”
난데없는 투자제의에 인수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고, 옆에 있던 벌레가 투덜거렸다.
“자알 한다! 빨갱이 새끼가 자본주의자 행세를 하려고 하네 ”
“넌 닥치고! 인수야, 계약서 쓰러 가자! 이런 건 계약서부터 써야 하는 거야!”
* * *
“그래서 계약서를 작성하러 오셨다 ”
“예.”
“맞아. 그러니까 계약서 좀 만들어주라. 이런 계약서는 네가 전문이잖아. 안 그래 노안 정 선생.”
“그럼. 친구 좋다는 게 뭐냐 이럴 때 써먹어야지. 부탁한다. 노안 정 선생.”
필코 마이닝의 정 수석팀장은 자신의 눈앞에 버티고 선 ‘자칭 친우’인 두 동년배들을 보며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첫 번째 공개토론 이후 납치당하듯 두 사람에게 끌려가 술잔을 나누고 엉겁결에 친구가 되어버린 정 수석팀장이었다. 거기에 더해 친구라면 나이를 알아야 한다며 민증까지 까보여야 했고, 그 결과 붙은 별명이 ‘노안’이었다.
“32살이면… 우리하고 동갑인데 어째 이렇게 삭았냐 너 군대도 안 갔다며 물 좋은 미쿡에서 유학생활 했다며 회사에서도 고속 승진이고….”
“전쟁터에서 삭은 우리보다 더 삭아보이다니… 과연 대기업에서 살아남는 것이 힘들다고 하는 말이 사실이었구나… 불쌍한 놈.”
“나나 빨갱이 새끼나 일찌감치 공부 때려치운 것이 신의 한수였어. 역시 엄니 말을 잘 들어야 한다니까.”
불쌍하다는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며 벌레와 빨깽이가 나누는 대화내용 + 바카디의 취기 덕에 정 수석팀장은 대차게 폭발했다.
“닥쳐라! 이 깡패 새끼들아!”
악연이 맺어지게 되었던 악몽 같은 기억을 억지로 지운 정 수석팀장은 한심하다는 얼굴로 벌레와 빨갱이를 바라봤다.
“그래서 이 친구에게 무슨 아이템인지 확실히 물어는 봤어 ”
“아니. 괜히 그런 거 자세히 물어봐서 동티나면 어떻게 하냐 전쟁터에서 애인 자랑, 마누라 자랑, 미래 계획 떠벌리는 건 금기라는 거 몰랐냐 얘도 살고 우리도 살아야지.”
“지금 니들이 하는 건 그 마지막 세 번째 금기를 확실히 어기는 건데 ”
“아니지. 우리는 정확한 건 모르잖아 얘도 정확한 아이템을 입에 올린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그렇게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면 금기를 어긴 것은 아니다 ”
“그러췌!”
대답을 들은 정 수석팀장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이 천진난만한 새끼들… 니들 ‘묻지 마 투자’라는 말은 들어봤냐 ”
“네가 보증했다며 그건 묻지 마 투자가 아니지!”
“그럼, 그럼!”
빨갱이와 벌레의 말에 정 수석팀장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무슨 보증 ”
“네가 전쟁 끝나고 미국에서 판 벌리라고 했다며 그리고 돈 모자라면 대준다고 했다며 그게 보증 아니고 뭐야 ”
벌레의 대답에 정 수석팀장은 인수를 노려봤다.
“이봐요. 박인수씨. 사람의 말을 전하려면 제대로 전해야지. 특히나 돈이 걸린 문제라면 토씨 하나 빼놓지 말고 전했어야지. 지금 인수 씨가 말한 식으로 전하면 나중에 사고 났을 때 인수 씨가 옴팡 뒤집어쓰고 한강 다리위에서 뛰어내리게 되는 겁니다.”
“잉 ”
“응 그럼 그거 구라였어 ”
정 수석팀장의 말에 벌레와 빨갱이는 인수를 노려봤다. 두 사람의 살벌한 눈초리와 사색이 된 인수의 얼굴을 본 정 수석팀장이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구라는 아니고 몇 가지 전제가 있었다. 온 김에 잘 들어봐. 첫째, 우선 박인수씨가 아이템을 공개 안했기 때문에 나로서는 대략적인 정보, 그러니까 대충 우리가 배우고, 경험한 역사적 사실만 가지고 조언을 할 수밖에 없다. 둘째, 박인수 씨의 대학 전공이 전자공학이었고, 대충 물어본 사업 아이템이 그쪽과 관련은 되어 있지만 21세기의 최첨단의 전자제품은 아니고 보조적인 아이템이다. 셋째, 1960년대 이후에나 나오는 물품이 아니라 지금도 사용하는 물품이다. 난 이 세 가지 전제 조건에 더해 전쟁 후 확실하게 상담을 다시 한 다음 투자를 할 수도 있겠다고 말을 해준 것뿐이야.”
정 수석팀장의 말에 벌레와 빨갱이는 고개를 모로 꼬았다.
“그러니까 그 뜬구름 잡기 같은 전제조건만 가지고 미국 가서 판 벌리라고 한 거냐 ”
“맞아. 난 대충 뭔지 알 것 같거든.”
“아시겠다고요 ”
정 수석팀장의 말에 놀란 것은 인수였다. 정 수석팀장은 별 거 아니라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앞의 전제조건 가운데 두 번째와 세 번째로 대충은 알겠더라. 그래서 미국으로 가라고 한 거고. 그리고 이건 내 예상이지만 저 한반도 함이 가져올 나비효과라면 전쟁이 끝나고 몇 년 안에 전기전자 업종에 엄청난 변혁이 올 것 같거든.”
“헐… 머리 좋은 놈이 다르긴 다르구나… 씨발, 난 이래서 머리 좋은 놈들이 싫다니까….”
정 수석팀장의 설명에 벌레가 감탄을 하는 것과 달리 정 수석팀장의 설명을 곰곰이 따져보던 빨갱이가 정 수석팀장에게 따지고 들었다.
“방금 네가 한 말이 보증이 아니고 뭐냐 ”
“보증은 아니지. 난 예상했을 뿐이지 확실하다고는 말 안했잖아 그러니까 박인수 씨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살아있고, 그 때는 아이템을 오픈해서 확실한 시장성이 보이면 투자한다고 한 거지. 알겠어 이래서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하는 거에요. 이 개미 양반들아.”
“빌어먹을… 지가 빠져나갈 구멍을 이미 다 만들어놨네… 이래서 난 재벌이라던가 대기업의 엘리트가 싫어.”
정 수석팀장의 핀잔에 빨갱이는 김 빠졌다는 표정을 지으며 투덜거렸다. 하지만 옆에서 정 수석팀장의 말을 듣고 있던 벌레는 뭔가 미심쩍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이거 하나만 묻자. 만약 인수가 하겠다는 아이템이 네가 생각하는 아이템과 같다면 시장성은 충분한 거냐 ”
“아까 이야기 했잖아.”
“그래 그럼 계약서 쓰자.”
“뭐 ”
“예 ”
별 거 아니라는 듯한 표정으로 벌레가 결정을 내리자 빨갱이와 인수, 정 수석팀장 모두 놀란 얼굴로 벌레를 바라봤다. 벌레는 별 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옵션 넣으면 되잖아 전쟁 끝나고 인수가 진짜 사업을 한다면 그 때 아이템 확인한 다음에 투자 여부를 확정 지으면 되는 일인데 뭐 벌써부터 구라네, 한강 다리네 하고 떠들고 앉아있냐 ”
“…그건 그러네.”
벌레의 말에 잠시 말을 잊었던 빨갱이는 곧 고개를 끄덕이고는 정 수석팀장을 바라봤다.
“벌레 말이 맞네. 노안 정 선생. 계약서나 써줘!”
벌레와 빨갱이의 만담을 보던 정 수석팀장은 한숨을 내쉬고는 노트북을 꺼내들었다.
“이런 긍정적인 팔랑귀 녀석들. 한강다리에 올라가던, 태평양 바다 한복판에서 다이빙을 하던 난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