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전단 1941-10화 (10/464)

# 10

10화 필리핀으로… (4)

1시간이 조금 지난 후에 공개 토론의 준비가 끝나자 각함에서 전탐실과 음탐실의 필수 요원들을 제외한 승무원들이 토론장소로 지정된 곳에 모였다.

토론장소의 전면 벽에 걸린 커다란 스크린에는 고 제독의 모습이 투영되고 있었다. 인원확인을 하는 과정에서 잠깐의 소란이 지나가고 드디어 공개토론이 시작되었다.

“…귀관들이 본 전투기록과 그동안 확보한 방송을 비롯해 확인 가능한 정보들을 취합했을 때, 우리는 1941년 12월 18로 시간이동을 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에, 앞으로의 우리가 어떻게 해 나가야할 지를 우리 모두 함께 의논하고자 한다.”

고 제독의 발언이 끝나자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가운데, 스피커를 통해서 젊은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감찬함 기관실 소속 류인규 하사입니다. 지금 우리가 과거로, 그것도 태평양 전쟁 초기로 넘어온 것이 확실한 겁니까 ”

“지금까지 확인한 걸로는 확실하다.”

고 제독이 다시 한 번 사실을 확인시켜 주자, 다들 현실을 인식했는지 웅성거리는 소리는 조금씩 잦아들었다.

“곽재우함 항공정비 소속 현석현 중사입니다. 현재 상황이 꿈같고 앞길이 막막하다는 것이 제 솔직한 심정입니다. 17시 경에 함장단 회의가 있었던 걸로 압니다. 그 회의에서 혹시 도출된 결론이 있습니까 ”

“중사의 말대로 17시 경에 본 제독이 함장들을 소집해 회의를 가졌다. 그리고 그 회의에서는 적극적인 행동을 하는 쪽으로 가닥을 지었다.”

“적극적인 행동이라면… 참전인 겁니까 ”

“그렇다.”

“곽재우함 함장 장명석 대령이다. 나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참전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고 제독의 짧은 대답에 이어 곽재우 함의 함장까지 나서서 단정 짓듯이 이야기를 하자 선원들을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역시 참전인가….”

“그 수밖에 없는 것 같은데...”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는 한데 말이지….”

“가족 걱정하면서 중국과 싸우는 것보다는 차라리 나을지 모르겠다.”

“가족이라… 앞으로는 못 만나겠지 참 그렇네.”

“중국하고 싸워도 마찬가지 결말 아니었을까 우리가 탄 배가 뭐냐 1급 목표잖아….”

중국이 미사일을 쐈을 때부터 전쟁과 자신의 죽음은 각오를 했었지만, 가족만은 무사하기를 빌던 승무원들은 차라리 다행이라는 심정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돌아갈 곳도, 가족들도 잃어버린 그들은 거의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어 참전을 향해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위와 아래의 동상이몽으로 ‘답정너’라는 우스갯소리가 더 이상 우스갯소리가 아니게 되어버린 상황에서 방금 전까지 넘쳐나던 고위 장교들의 목소리가 아닌 다른 남자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울렸다.

“광양 프론티어3호에 승선한 필코 세이프티 소속 팀장 김진한입니다. 참전 말고 다른 방법도 있습니다.”

“다른 방법 ”

“은신입니다. 세칭 잠수라고도 하지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잠시 몸을 숨기는 것도 방안이 될 수 있습니다.”

진한의 발언에 고 제독이 반박을 했다.

“세계대전일세. 숨을 곳이 있다고 보는가 ”

“이 지구는 넓습니다. 그리고 21세기에도 뭐가 있는지 모르는 곳이 한둘이 아니었는데 1940년대면 더 하지 않겠습니까 정 안되면 남미로 가도 됩니다.”

“한전 소속 성기남 부장입니다. 몇 가지 지적할 문제가 있습니다. 우선 한반도에 설치된 원자로의 문제입니다. 연료봉은 별 걱정이 없는데 주변시설의 정비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여기서 발생할 교환부품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겁니까 그리고 그 다음으로 식량은 어떻게 할 겁니까 설마 북한 애들처럼 배 위에서 농사지을 겁니까 ”

날카로운 지적이었지만 진한은 기다렸다는 듯 바로 대답을 했다.

“제 기억이 맞는다면 이 전쟁에서 남미 국가들이 직접적인 피해를 받은 것은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그들도 자국 방위에 신경이 날카로울 겁니다. 그들에게 자국 방어에 도움을 주는 대신 식량과 기타 편의를 요청하면 되는 겁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

“한국으로 돌아가면 되는 겁니다. 어차피 우리가 아는 역사대로만 가도 한반도는 독립합니다. 해방 직후의 혼란 속에 우리 함대가 모습을 드러낸다면 우리 함대의 전력이면 그 누구도 우리를 무시 못 합니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라는 말이 있지요 친일파 청산의 불발 분단 6.25 분단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친일파 청산 불발과 6.25는 확실하게 막아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만약 6.25가 터지면 그 때는 통일입니다.”

진한의 설명에 이곳저곳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다시 커졌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강 대령이 마이크를 잡았다.

“그렇게 잠수를 타면 우리에게 무슨 이득이 있는가 ”

“참전을 하면 무슨 이득이 있습니까 참전을 하게 되면 유럽이든 태평양이든 전투에 뛰어들어야 합니다. 타국 땅에서 타국의 이익을 위해 죽는 것은 개죽음입니다!”

“개죽음 민족의 독립을 위한 고귀한 희생이다!”

“그렇게 민족의 독립을 위해 희생한 독립 운동가들이 나중에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 모르는 거요 ”

“우리는 군인이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죽는 것은 군인으로서는 가장 영광된 죽음이다!”

“PMC라고 들어봤어 엿 같은 팔자의 용병이야! 군인이 아니라고! 같잖은 군인정신 운운하지 마!”

진한의 외침에 강 대령은 순간적으로 말이 막혔다. 진한은 스크린 너머로 보이는 고급 장교들을 노려보며 피를 토하듯이 외쳤다.

“아마도 참전을 하게 되면 댁들은 자기들끼리 알아서 별 달고, 달아주고, 승진하고, 그러고 뒤에 앉아서 명령질만 하겠지! 그러는 동안 나 같은 말단들은 총알밭 사이에서 굴러댈 테고! 그러다 죽으면 ‘아~ 안타까운 희생이었네.’하고 서류 몇 장 싸인하면 땡이잖아 그게 개죽음이 아니면 뭐가 개죽음인데 ”

“삐이익! 벌레 새끼! 말 잘했다!”

“시끄러! 빨갱이새꺄!”

휘파람을 불며 응원하는 ‘빨갱이’에게 버럭 소리를 지른 진한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국가를 위해서 뒈지라고 그 잘난 국가 덕에 먹고 살 길이 없어 용병을 하게 된 게 나고, 저 빨갱이 새끼를 비롯한 내 동료들이야! 그리고 그 잘난 국가가 그 잘난 꼴이 되어버린 건 댁 같은 잘난 양반들 때문이고! ‘길은 하나밖에 없다! 명령이니 따르라!’라는 식의 같잖은 개소리는 집어치워! 댁들 생각대로 하고 싶으면 제대로 우리들을 이해시켜 봐!”

진한의 말이 끝났지만 토론에 참석한 이들 가운데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이들이 없었다. 긴 침묵 끝에 고 제독이 마이크를 잡았다.

“내가 왜 그 잘난 양반에 속하는지 의문이지만 나 역시 명령이니 따르라는 말은 하고 싶지 않네. 마찬가지로 뒷자리에 앉아서 명령질만 할 생각은 더더욱 없기에 이 자리를 마련한 것이고…….”

잠시 말을 멈춘 고 제독은 목을 축이고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내 생각에 우리는 첫 번째 갈림길에 선 것 같은데. 김진한이라고 했나 ”

“그렇습니다.”

“이 토론에 모인 이들이 다수결로 결정을 내린다면 자네는 그 결정에 따르겠나 ”

“따르겠습니다. 단, 그 다수결의 의견을 모으는 과정에 문제가 없다면.”

강 대령이 다시금 앞으로 나서려는 것을 손짓으로 막은 고 제독이 마이크를 잡았다.

“첫 번째 선택이다. 오늘 토론이 끝날 때까지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할 상황이 오면 전체 투표를 한다. 만약 반대 의견이 있으면 30초 이내에 의견을 말하도록. 지금부터 시간을 세지. 30.”

고 제독이 30초를 세는 동안 아무도 마이크를 잡는 이가 없었다.

“30초가 지났군. 그럼 전체 투표를 하는 것으로 하고, 두 번째 선택을 하도록 한다. 1. 참전, 2. 잠수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한다. 투표방법은….”

투표 방법의 문제를 놓고 잠깐 동안의 토론이 벌어진 결과 가장 단순하고 전통적인 방식으로 투표가 진행되었다. 투표에 참석한 모든 이들이 종이에 자신이 지지하는 쪽을 적은 다음 각 부서의 지휘사관들이 내민 야구모자에 집어넣었다.

“결과가 나왔네. 1번을 선택한 이들이 전체의 68%, 2번이 31%, 기권이 2%. 따라서 우리는 이번 전쟁에 참전을 한다.”

“와아!!!!”

고 제독의 발표가 나오자 토론 참석자들은 찬반여부를 떠나 속이 시원하다는 얼굴로 함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다.

“자. 그럼 하나의 선택은 끝이 났고, 다음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여러분들의 의견을 듣고 싶다.”

“필코 세이프티 소속 팀장 이진한입니다. 우선적으로 이 곳에 있는 이들의 처우부터 생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처우 ”

“쉽게 말해 돈 문제입니다. 전쟁 중에는 보급을 통해 먹고 입고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난 후에는 ”

“곽재우의 함장 장명석 대령이다. 그건 전쟁이 끝나고 적절한 보상을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그 모양, 그 꼬라지로 사셨습니까 전쟁도 열정페이입니까 ”

“말 잘했다, 빨갱이 새꺄! 열정페이는 사절한다!”

“시끄러, 벌레 새꺄! 전쟁은 열정페이로 한다고 칩시다. 그런데 전쟁 도중에 팔다리 병신 돼서 중간에 밀려 나올 수밖에 없는 이들은 어떻게 할 겁니까 전쟁 끝날 때까지 구걸질하면서 살게 할 겁니까 ”

“…….”

진한의 지적에 장 대령은 입을 다물었다. 장 대령이 입을 다물자 고 제독이 뒤를 이어받았다.

“그러니까 부상으로 인해 군을 나설 경우와 독립 후 보상을 해달라 이건가 ”

“정확히 말하자면 군대에 있을 때에는 충분한 봉급을, 그리고 운이 안 따라 군을 나가야할 때에는 적절한 보상을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 돈은 어디서 마련을 하고 ”

“…….”

고 제독이 자금원 문제를 언급하자 진한은 대답이 궁해졌다. 진한이 입을 다물자 옆에 있던 이가 마이크를 잡았다.

“필코 마이닝의 기획팀 정길수 수석팀장입니다. 자금원은 해결 가능하다고 봅니다. 저는 우리가 렌드리스의 자격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능하다 ”

“예. 오히려 두둑하게 받아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근거가 궁금하군.”

“설명 드리겠습니다.”

정 수석팀장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근거는 다음과 같았다.

첫째는 한반도를 포함한 함대의 전력. 사용하면 보급이 불가능한 유도무기를 빼더라도 레이더와 소나 등의 탐지 장비만으로도 미군은 충분히 지갑을 열 것이다.

둘째는 인적자원. 현재 이곳에 있는 이들 모두가 1940년대 당시로 보면 매우 탐나는 인적자원이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도 미국이 가장 탐낼 만한 인적 자원은 한반도 함의 원자로를 책임지고 있는 한전직원들이었다.

그 유명한 맨하탄 프로젝트의 빠른 성공을 위해서라면 지갑을 열기에는 차고도 넘치는 조건이었다.

“좀 더 확률을 높이자면 적당한 실적 하나 챙기는 것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실적 ”

“지금 우리가 가려고 했던 필리핀에 있는 미군들이 실적입니다. 제가 알기로 결국 도망도 못 가고 포로가 돼서 작살났다고 들었는데 그 친구들 데리고 나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실적이 된다고 생각됩니다만 ”

정 수석팀장의 설명이 끝나고 토론은 점점 더 활기를 띄어갔다. 결국 격론과 투표가 이어진 끝에 하나씩 결론이 내려졌고, 멈춰 섰던 함대의 행선지는 필리핀으로 정해졌다.

한편, 원자로로 돌아온 성 부장은 욕설을 내뱉었다.

“썅! 동해부터 태평양까지 죽어라 바다만 봤는데 이젠 죽어라 사막만 보게 생겼구만! 야! 하 대리! 막내야! 너 그동안 햇빛도 안 드는 곳에서 고생만한다고 징징거렸는데 당분간은 원 없이 햇빛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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