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
9화 필리핀으로… (3)
“야, 벌레야.”
“왜, 빨갱아.”
“방금 기가 막힌 소리를 들었다.”
“기가 막힌 일은 아까 아침에 겪은 난장판으로 족해. 시답잖은 소리할 거면 그냥 컨테이너에나 들어가라. 가뜩이나 덥고 답답해 열 받는데 빨갱이 배딱지 갈라버릴라.”
광양 프론티어3호의 화물창. ‘필코 세이프티’ 소속의 두 젊은 남자들이 대화를 하고 있었다. 벌레라는 별명을 가진 이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빨갱이라는 별명을 가진 이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내가 언제 너 같은 벌레들이나 할 개똥같은 말 한 적 있냐 귓구멍 열고 잘 들어봐라. 아침에 난장판이 벌어지고 난 다음에 12호차 TICN 켰거든 ”
“그거 목적지 도착할 때까지 마음대로 키지 말라는 명령이 있었잖아 ”
“그 난장판이 벌어진 다음에 점검한다고 켰다.”
“좌우지간 누가 좌빨 빨갱이 새끼 아니랄까봐 명령이나 규칙은 개소리로 알아요.”
“꼰대 같은 소리하고 앉아있네. 벌레새끼. 난리가 났는데 개죽음 안 당하려면 알 건 알아야 하잖아 ”
“그래. 너 잘났다. 그래서 그 TICN에서 뭔 소리가 튀어 나왔는데 ”
“아까 한반도에서 함재기 날아간 것 봤지 그 함재기들이 일본기들을 격추했어.”
“잉 그게 무슨 헛소리야 독도 앞바다라면 모를까 한국군이 필리핀 앞바다에서 일본기를 왜 쏴 오인사격이야 ”
“아니. 일본 국적을 확인하더니 떨구더라고 ”
좌빨의 이야기에 벌레가 욕설을 내뱉었다.
“씨팔! 이 작자들이 미쳤구나!”
“오랜만에 벌레가 맞는 소리 하네. 그런데 그 난장판을 벌이는 파일럿들 사이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들리더라고. 1식육공이 어쩌고, 1941년이 어쩌고 하고 말이야.”
좌빨의 이어지는 이야기를 들은 벌레는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1식 육공이 우리가 아는 그 육공은 아니겠고… 1941년이라… 1941년 ”
“그래 1941년의 태평양. 뭔가 감이 오지 않냐 ”
“무슨 소설 쓰냐 ”
“소설 같은 이야기이기는 한데 한반도에 있는 대빵이 함장들 소집했다. 17시에 모이래.”
자신의 이야기를 듣던 벌레가 입을 다문 채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있자, 좌빨이 벌레를 채근했다.
“우리가 가만히 앉아만 있으면 엿 될 것 같지 않냐 난 내 밑의 애들 모으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냐 ”
좌빨의 말에 벌레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너하고 나만으로는 무리야. 영감님부터 찾아라. 나도 애들 모으고 우리 밥벌이 도구들 챙겨놓을 테니까.”
* * *
17시가 되자, 다시 한 번 함장들이 회의실에 자리를 함께 했다.
“모였으니 시작하지.”
함장들이 모두 자리한 것을 확인한 고 제독이 회의를 시작했다. 공군 소속 장교가 낮에 있었던 공중전의 과정과 결과를 설명한 다음, 고 제독은 함장들을 돌아봤다.
“설명을 들어서 알겠지만, 우리는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공격 이후의 시점으로 이동을 한 것이 확실하다. 따라서 우리는 앞으로의 거취를 정해야 한다. 이에 귀관들의 생각을 듣고 싶다.”
“제독님의 의견은 무엇입니까 ”
“나로서는 일본과의 전쟁에 참전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대한민국의 국민이자 군인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제독님의 말씀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의 손으로 독립을 쟁취해야 합니다. 이는 하늘이 주신 기회입니다!”
회의실에 모인 이들 대부분이 한 목소리로 참전을 외치는 가운데 곽재우 함의 함장 장명석 대령이 제독에게 질문을 던졌다.
“저 역시 참전에는 동의를 합니다만… 애들한테는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합니까 ”
장 대령의 질문에 옆에 앉아있던 강 대령이 대신 대답을 했다.
“현재 상황을 설명하고 왜 이런 결정을 내리게 되었는지 이야기해줘야겠지.”
“적응을 못 하는 애들이 적지 않을 텐데 ”
“각부 사관들을 시켜서 애들 관리에 신경을 쓰라고 하면 돼.”
“쉽지는 않을 텐데….”
근심이 사라지지 않는 장 대령의 얼굴에 강 대령이 목소리를 높였다.
“이번 일은 하늘이 우리에게 주신 기회야! 기회는 왔을 때 잡아야 하는 법! 이 기회를 살려야….”
“제독님! 큰일입니다!”
갑자기 회의실의 문이 열리며 들어온 이 중령이 말을 끊자, 강 대령의 눈초리가 사나워졌다. 이 중령의 표정과 목소리가 심상치 않은 것을 본 강 대령이 사나운 목소리로 용건을 물었다.
“무슨 일이야 ”
“광양 프론티어3호가 점거되었습니다!”
이 중령의 대답에 고 제독은 자리에서 튕기듯이 벌떡 일어났다.
“뭐 누가 왜 ”
“탑승하고 있던 필코 세이프티의 직원들이 배를 점거한 채 제독님과의 대화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져 다들 갈피를 못 잡는 상황에서 통신장교가 회의실로 들어왔다.
“제독님, 원자로를 담당하는 한전의 성 부장이 대화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 작자는 또 왜 ”
“저한테는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무조건 제독님과의 대화해야 한다는 것만 반복하고 있습니다. 인터콤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통신장교의 말에 고 제독은 성난 얼굴로 옆에 놓인 인터콤의 수화기를 들고 스위치를 조작했다.
“나, 제독이….”
“썅! 내가 아까 경고했지! 군바리들끼리 짝짜꿍하지 말라고! 사람이 좋게 말하면 좋게 들어야 할 거 아냐! 씨팔! 배 세워버린다!”
제독이 입을 열기가 무섭게 수화기 너머 성 부장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회의실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들을 정도로 고함을 지르던 성 부장의 목소리가 잦아들자 고 제독이 상황을 설명했다.
“지금 상황이 전시상황이라….”
“누구 마음대로 전시 상황이야! 지들끼리 짝짜꿍하고 끝나면 단 줄 알아 이 배에 탄 민간인들은 그냥 장식이야 이봐! 고 제독! 군사정권 시절에도 그딴 짓은 안했다!”
“후우~.”
성 부장의 악다구니에 고 제독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주변 함장들은 모두 불편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성 부장의 말도 정론이었기 때문에 고 제독은 성 부장을 불러야 했다.
“올라오십쇼.”
“알았수다.”
성 부장을 해결한 고 제독은 이 중령을 돌아봤다.
“프론티어3호와 연결해.”
“알겠습니다.”
이 중령에게 명령을 내린 고 제독은 회의실에 모인 함장들을 돌아봤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귀관들도 들어 보지.”
잠시 후, 통신이 연결되었다는 말이 스피커를 통해 울리자 고 제독은 스위치를 누르고 대화를 시작했다.
“나, 고재환 제독이다.”
“필코 세이프티의 대표인 원명환이오.”
스피커 너머로 들리는 늙수그레한 목소리에 고 제독은 의문을 표했다.
“내가 알기로 그 배에 탑승한 필코 세이프티의 대표는 송일한 사장으로 알고 있는데 ”
“송 사장은 지금 인질놀이의 인질역을 하는 중이오.”
“그럼 그렇다치고…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
“공개토론.”
“공개토론 ”
“우리 배와 함대의 모든 사람들이 참가하는 공개토론. 주제는 현재 상황의 설명과 앞으로의 거취. 아! 미리 말하는데 그쪽은 이미 빠방한 통신시설들이 있고, 우리 역시 TICN이 있으니 어쭙잖은 핑계 댈 생각은 하지 말고.”
“지금 시국은 비상시국이다. 한가하게 토론을 할 시간이 없어.”
고 제독의 말에 수화기 너머 원명환은 코웃음을 쳤다.
“흥! 우리는 제독이 하는 병정놀이의 군인이 아니야. 함부로 명령질 하지마쇼.”
“뭐라고 ”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강 대령이 발끈하는 것을 손짓으로 막은 고 제독은 대화를 이어갔다.
“만약 내가 거부를 한다면 ”
“우리는 독자노선을 갈 거요. 제독이라면 우리 배에 뭐가 얼마나 실렸는지 어느 정도는 알 텐데 아! 우리가 어떤 놈들이라는 것도 알려나 ”
“만약 내가 막는다면 ”
“화려한 불꽃놀이를 보겠지. 그리고 그 대단하신 항공모함은 몰라도 근처 배 한둘은 같이 불꽃놀이를 하게 될 거야.”
“이!”
원명환의 협박을 들은 함장들이 발끈하며 일어서는 것을 손짓으로 막은 고 제독은 원명환에게 시간을 요구했다.
“5분 후에 가부를 결정해 연락하겠다.”
“기다리지.”
“후우~”
대화를 끝낸 고 제독이 의자에 몸을 기대며 한숨을 쉬는 그 때, 중간에 회의실에 들어와 대화를 듣고 있던 성 부장이 시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따! 그 아저씨 말 한번 시원하게 하네!”
“이봐, 당신! 말이면 다인 줄 알아!”
성 부장의 말에 강 대령이 발끈했지만 성 부장은 오히려 강 대령을 타박했다.
“왜! 내가 틀린 말했어 뿅 하고 와보니 죄다 군국주의자 세상이라 댁들도 군국주의 놀이하고 싶어 어디서 개수작이야, 개수작이!”
“군국주의자라니!”
“그럼 지금 뭐하자는 짓인데! 군바리들 가운데 높으신 양반들끼리만 모여서 쑥덕거리고 나서는 ‘나를 따르라~’이러면 참 잘도 따르겠다! 박 대갈, 전 대갈 욕해서 뭐해!”
“야! 이 새꺄!”
“왜! 이 새꺄!”
“조용!”
급기야 강 대령과 성 부장이 욕설을 내뱉으며 멱살잡이까지 가려하자 고 제독은 호통을 쳤다.
“두 사람 다 자리에 앉도록.”
“제독님….”
“앉아!”
제독의 화난 목소리에 강 대령과 성 부장은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말없이 함장들의 얼굴들을 바라보던 고 제독의 눈에 꽉 닫힌 선실의 문이 들어왔다. 굳게 닫힌 선실의 문을 보며 답답함을 느끼던 고 제독은 결정을 내렸다.
“결정을 내렸다. 함대와 광양 프론티어3호의 모든 이들이 참가한 공개토론회를 벌이도록 한다.”
“제독님!”
“안됩니다!”
“비효율적입니다!”
제독의 결단에 함장들이 모두 반대의 목소리를 냈지만 고 제독의 결심은 굳건했다.
“우리는 군인이기 이전에 민주국가의 민주시민으로 교육을 받고 생활해 왔다. 그렇게 생각해 봤을 때, 저들의 요구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수단은 좀 문제가 있지만… 그리고 효율 측면에서도 다르게 생각해 본다면, 초기에는 시간이 좀 더 걸리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하고 자발적으로 움직인다면 단순한 상명하복보다는 좀 더 좋은 효율을 보일 거라고 생각한다.”
“…알겠습니다.”
제독의 설명에 대의명분이 있다고 생각한 함장들은 제독의 명령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 강 대령과 옥신각신하던 성 부장은 싱글벙글하고 있었다.
“그러췌! 그게 민주주의지! 이봐요, 제독님. 나중에 전쟁 끝나고 독립하면 대통령 한번 해보쇼!”
성 부장의 말에 고 제독은 피식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신소리 그만하시고 가서 사람들 준비나 시켜요. 귀관들 역시 각자의 함으로 돌아가 공개토론을 준비하도록. 다들 헬기격납고를 이용하면 공간이 나올 거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걸로 끝내도록 하지.”
고 제독이 회의를 끝내자 함장들은 자기들의 배로 돌아가기 위해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회의실 밖 복도에서 강 대령을 기다리던 이 중령은 강 대령을 보자마자 팔을 잡아끌고 외진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왜 무슨 일이야 ”
“아까 성 부장이 했던 말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뭐, 제독님한테 지랄한 거 나중에 시간 봐서 족쳐야지. 미친 새끼가 내 배가 자기 건줄 알고 있어.”
“그게 아니라 제독님 보고 대통령하라고 한 말 말입니다. 그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성 부장의 얼굴을 떠올리며 식식거리던 강 대령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그거… 가능하겠냐 ”
“확률 높습니다. 잘 생각해 보십쇼. 어차피 역사대로만 가도 미국이 이깁니다. 거기에 더해서 우리 함대가 가진 전력을 생각해 보십쇼. 절대 미국이 우리 무시 못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전선에서 날아다닐 때 얻을 인지도도 생각해 보십시오! 연합군 승리의 주력이자 가장 강력한 함대의 사령관! 아이젠하워가 어떻게 대통령이 되었겠습니까 ”
“흐음….”
이 중령의 말에 강 대령은 솔깃한 표정이 되었다. 이 중령은 거기에 쐐기를 박았다.
“함장님도 별 달고 제독 소리 한번 들어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도 함장 소리 들어보고 나중에 제독 소리도 듣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