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오스가에서의 대형 폭발 사고로 전치 4주 진단을 받은 나는 병원에 3주 입원해 있었고 나머지 한 주일은 집에서 쉬었다.
병문안이랍시고 떼로 몰려와서 사람 속을 홀랑 뒤집어 놓고 가는 동료들 성화에서는 벗어날 수는 있었지만 일주일간의 휴식이 마냥 평화롭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 기간 중에는 집으로 병문안을 온 비니가 선반에 얹어 놓은 아내의 미니 크리스털 장식을 깨부순 것 외에 다른 사고는 없었다. 서에서는 비니 손에 걸려서 사람 상하지 않은 것만 해도 큰 다행으로 여기지만, 자세한 사정을 잘 모르는 위니는 며칠이나 다섯 조각난 크리스털을 이리저리 맞춰보며 속상해 했다.
싸구려 장식품에 대한 집착과 지나치다 싶은 위니의 상심은 그녀의 만성적인 우울증 탓이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위니와 내가 꼭 필요한 말 이외에 다른 얘기를 하지 않게 된 것이…… 그녀의 화장대 옆에 화장품보다 더 많은 종류의 약병이 놓이게 된 것이…….
위니는 본래 말수가 적고 약간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형편없이 나약한 사람도 아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무너지기 시작해서 이제는 위니도, 나도 외부의 도움 없이는 돌파구를 찾기가 어려울 정도로 모든 것이 엉클어져버렸다.
몇 년간 파트 타임으로 일하던 고가구점이 폐업하고 난 후 집안에만 있게 되면서부터 위니는 증세가 더 심해져서 수면제 없이는 잠도 깊이 자지 못하는 지경이었다.
당황스러운 건 이 모든 사태의 원인이 나라는 사실이었다. 평온한 중산층 가정에서 시련이라곤 모르고 자란 위니에게는 경찰과 같이 산다는 것 자체가 견딜 수 없는 스트레스였다. 뉴스만 켜면 쏟아져 나오는 끔찍한 사건, 가끔 만나는 동료의 부인들에게서 듣는 여러 가지 불길한 얘기, 게다가 심심찮게 터지고 깨져서 들어오는 남편까지…… 위니를 괴롭히는 것은 내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극도의 불안감이었다.
그러던 것이 몇 달 상간으로 한번은 교통사고, 또 한 번은 폭발 사고로 입원까지 하게 되고 보니 상황은 불붙은 데 기름을 쏟아 부은 격이 되고 말았다. 내색 않으려고 애쓰고 있었지만 위니는 전보다 더 예민해졌고 아무 이유 없이 울음을 터뜨리는 일도 잦았다.
그 와중에 위니도 나도 점점 말이 줄어 갔다. 한때 진심으로 사랑하던 우리 사이는 이제 대수롭지 않은 자극에도 박살나고 마는 유리그릇처럼 얄팍하고 위험한 관계가 되고 말았다.
위니와 같이 보내는 하루하루가 견딜 수 없을 만큼 길고 부담스러웠다. 위니가 정말 두려워하는 게 뭘까? 나 없이 사는 걸까? 아니면 앞으로도 계속 나와 함께 사는 걸까?
한 달 만에 출근한 직장은 여전히 어수선하고 살벌했다. 그래도 동료들은 내 출근을 잊지 않고 축하해줬다. 라커에는 내 신분증 사진을 확대 복사한 사진으로 만든 현상수배전단이 붙어 있었는데 죄목은 빨간 뱀 살해와 그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저지른 타이오스가 폭파…… 그리고 호객행위였다. 사진으로만 보면 호객행위 빼고 나머지는 충분히 저질렀을 것 같았다.
“감방에서 195년 3개월은 살아야 한다던데?”
야간 근무가 막 끝났는지 초췌한 얼굴로 사복을 갈아입던 스티키가 심각한 얼굴로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어떤 놈이 그래?”
“베네딕트 판사가. 우리가 물어봤거든. 칼 오마르 같은 일급 변호사가 나서도 거기서 더 깎기는 어려울 거래. 일급살인 70년, 폭탄 테러 125년, 호객행위 3개월.”
“말도 안 돼.”
시큰둥하게 대꾸하며 라커 문을 열자 벽돌 모양의 스티로폼 덩어리가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부지런도 하다. 대체 이런 건 어디서 구했을까? 어느새 몰려왔는지 수십 명이나 되는 동료들이 둘러서 있다가 때맞춰서 라커가 터져 나갈 듯 웃어댔다.
경찰이라는 직업이 대체로 만족스럽지만 이런 때는 문득 회의가 몰려오곤 했다. 남의 아픈 상처에 소금을 뿌리고 저렇게 좋아하다니…….
“결백하다는 거야?”
옆구리를 쥐고 웃던 스티키가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당연하지. 나는 결백해.”
“그래 봐야 형기만 더 늘어날 걸?”
“빨간 뱀을 죽인 건 정당방위였고 타이오스가를 날려버린 건 단순 과실이었어. 그리고 호객행위는 처음이었잖아? 초범은 다 집행유옌데 왜 나만 3개월이야?”
스티로폼 더미를 헤치고 필요한 비품을 챙겨서 아수라장으로 변한 라커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복귀 보고 차 반장의 방으로 갔다.
다행히 반장은 타이오스가 사건에 대해 농담 따위를 하지는 않았다. 그저 건강상태가 어떤지 의례적인 인사를 건넨 후에 다른 지시가 있을 때까지 당분간 내근을 하라는 말뿐이었다.
사건은 항상 넘쳐 나고 일손은 언제나 모자라서 근무 복귀하자마자 잠깐 앉아서 숨 돌릴 틈도 없이 현장으로 쫓겨 나가던 전례를 떠올리며 이상하다…… 고 생각하고 있는데 반장이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그런데 말이야. 자네…….”
“예?”
“마키바 반장하고 뭐 안 좋은 일 있었나? 그 친구 벌써부터 잔뜩 벼르고 다니던데…….”
“…….”
“자넬 좀 봐야겠대.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가 봐.”
방을 나온 후, 마키바 반장의 방을 향해 몇 걸음 떼어 놓다가 걸음을 멈췄다. 생각해보니 나는 지금 할 일이 무척 많았다. 우선 급한 일은 새 총을 지급 받는 거였다.
사정이 어떻든 총기 분실은 중과실이었다. 이런 경우는 새로운 총기를 지급 받기 위한 서류가 꽤 복잡했다. 우선 분실 사유서에 정확한 시간과 정황 등을 기재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렸다. 어렵게 쓴 사유서를 3차에 걸쳐서 수정하고 오타를 잡아서 깨끗하게 완성한 다음, 총기 지급 신청서와 함께 지하 1층에 있는 무기관리과에 접수시키고 나니 점심때가 됐다.
바로 마키바 반장의 방으로 가려는데 문득 컴퓨터 모니터를 끄지 않은 것이 생각났다. 쓸데없이 모니터 켜 놓고 돌아다니는 것을 도밍고 여사에게 들키면 그 잔소리의 융단폭격을 피할 길이 없었다. 다시 자리로 돌아와서 모니터를 끄려다가 잠깐 확인이나 할 생각으로 우편함을 살펴보니 그동안 쌓인 각종 메일들로 우편함이 터질 지경이었다. 요것 하나만 처리하고 갈까? 우편함 정리야 시간 많이 걸리는 일이 아니니까…….
거의 다 광고성 메일이었다. 그래도 혹시 유용한 것이 없을까 싶어 꼼꼼히 읽어 본 후 하나씩 지워나가다 보니 두 시간이 언제 갔는지도 모르게 지나버렸다.
점심때도 지나가서 슬슬 배가 고파 오니 우선 점심을 먹고, 커피도 한잔 마시고, 담배도 한대 피우고……. 구내식당으로 갈까, 밖으로 나갈까 고민하며 복도를 걷고 있는데 뒤쪽에서 요란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위치가 어디라고?”
“발록 거리, 경마중계소 지하주차장이랍니다.”
또 한 건 터졌나 보다.
“시체들이 다 썩어 문드러졌다면서! 그놈의 주차장에는 경비원도 없었나?”
“보통 때는 사용하지 않는 내실이 하나 있었답니다. 지난 2, 3주 동안 드나든 사람도 없었고…… 주차장 이용자들이 냄새가 난다고 불평을 하도 해서 열어봤다가 혼비백산 한 모양이더라고요.”
“잘 한다! 지하 3층에 내실을 만들어 놓고 무슨 짓을 한 거야?”
노디 반장이 툴툴거리면서 나를 추월했다. 살인사건이다. 시체들이라면…… 피살자가 최소한 한 명 이상이란 얘기다. 갑자기 가슴이 뭉클하면서 한줄기 서광이 눈앞에 들이쳤다. 초조하게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노디 반장과 내 눈이 딱 마주쳤다.
“너, 지금 바쁘냐?”
얼른 고개를 저었다.
“하나도 안 바쁩니다.”
이심전심이라…… 손이 딸려서 혼자 사건 현장으로 달려나가게 생긴 조직 폭력 전문 베테랑과 경찰서 안에 죽치고 있다가 조만간 경을 치게 생긴 가련한 수사관의 이해가 기막히게 맞아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일단 경찰서 밖으로 나가면 마키바 반장과 마주칠 확률은 극히 희박했다. 때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했고, 문이 열렸다. 역시 죽으란 법은 없나 보다.
헤벌쭉 웃으며 엘리베이터에 한발 딱 올려놓는데…… 갑자기 목덜미가 후끈하더니 발이 땅에서 떴다. 어찌된 영문인지 알아보려고 뒤를 돌아볼 필요도 없었다.
“그 손 놔! 마키바.”
노디 반장이 닫히려는 엘리베이터 문을 억지로 잡고 선 채 마키바 반장에게 엄중하게 항의했다. 마치 입에 문 먹이를 강탈당한 하이에나처럼 기세가 거칠었다.
“제이는 나랑 같이 갈 데가 있단 말이야!”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혼자 가. 난 이놈하고 할 얘기가 쌓이고 쌓였어.”
목소리만 들어도 마키바 반장의 노여움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갔다. 잘못하면 저녁쯤엔 다시 병원에 실려 갈지도 모르겠다.
“발록 거리에서 구더기 들끓는 시체가 3구나 나왔는데 나 혼자 가서 이리 뛰고 저리 뛰어야 니 속이 후련하겠냐? 무슨 얘긴지 몰라도 나중에 해!”
하지만 마키바 반장은 그럴 마음이 추호도 없는 듯 내 뒷덜미를 더 세게 움켜쥐었다. 얇은 여름 셔츠 솔기가 투둑…… 소리를 내며 터져나갔다. 노디 반장이 눈을 가늘게 뜨고 마키바 반장을 노려보더니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섰다. 둘이 맞장을 한번 뜰 모양이었다.
하지만 예상했던 유혈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마키바 반장은 노디 반장을 상대로 싸울 마음이 별로 없는데다 노디 반장도 바삐 나가야 할 처지였기 때문에 사태는 의외로 싱겁게 일단락 났다. 마키바 반장이 노디 반장에게 히든카드를 내밀었던 것이다.
“대신 말로이를 데려가.”
노디 반장이 그제야 마키바 반장 옆에서 알짱거리고 있던 말로이를 발견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저걸 데려다 뭐에 쓰라고?”
“삶든 튀기든 니 맘대로 해.”
노디 반장이 아쉬운 듯 나를 쳐다봤다. 나는 안타까운 정도가 아니었다.
마키바 반장한테 뒷덜미 잡혀서 끌려가면서 생각해보니, 이건 정말 경우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나한테 죄가 있다면 임무에 충실 하느라 눈앞이 노래질 때까지 그 뜨거운 길가에 서 있었던 것뿐이다. 내가 니콜라스를 거기로 불러낸 것도 아니고, 아는 척 하고 싶어서 인사를 주고받은 것도 아니었다.
마키바 반장이 빈 회의실 문을 열고 나를 안으로 집어던졌다. 벽에 머리부터 들이박고 바닥에 풀썩 주저앉으니 머리위로 새와 별이 번갈아 날아다녔다.
“제가 뭘 어쨌다고 이러세요?”
“하도 기가 막혀서 그런다! 이 웬수야!!”
“일이 그렇게 된 게 왜 제 탓이에요? 저도 근무 중이었다고요!”
어차피 죽거나 까무러치거나 둘 중 하나였다. 내가 목소리를 뒤집어가며 필사적으로 항의하자 마키바 반장이 내 멱살을 틀어쥐었다.
“니가 잘못해서 일이 그렇게 된 거면, 넌 내 손에 벌써 죽었어!! 이 자식아!”
타이오스가 폭발사건 때문에 니콜라스 헤슬렘 수사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말았다. 니콜라스 헤슬렘은 타이오스가 폐 공장 폭발 사건의 주요 증인으로 경찰서에 두 차례 소환돼서 조사를 받았다. 두 번 다 변호사를 대동했고 당시 정황…… 그러니까 나를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났고, 내 뒤를 쫓아서 공장지대까지 갔다가 내가 빨간 뱀에게 공격을 당하고 있는 것을 보고 현장에 뛰어 들었으며 빨간 뱀을 제압한 후 현장을 빠져나온 과정을 진술함에 있어서 트집 잡힐 만한 축소 은폐도 없었고 듣기 민망한 뻥튀기 무용담도 없었다.
다만 빨간 뱀의 목을 부러뜨린 일에 대해서는 그저 주먹 따귀로 기절만 시켰다고 거짓말을 했는데 빨간 뱀의 시체를 찾아서 증명할 길도 없고, 나 역시 경황 중에 놈의 사망 여부를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에 경찰은 그의 진술을 그대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니콜라스가 조사를 받으러 올 때마다 크롬웰은 여자 화장실에서 오래 나오지 않았고, 비니는 잠복근무 중인 클럽으로 아침 출근을 했다. 굽타와 마키바 반장은 몇 개월이나 뒤쫓던 연쇄살인 용의자가 전혀 엉뚱한 사건으로 조사 받는 걸 조사실 매직미러 뒤편에서 지켜보며 수사를 접을까 말까 심각하게 고민했다. 조사 과정을 지켜본 결과,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만만치 않을 것 같다는 것이 두 사람이 내린 결론이었다.
“선생이 구해줬다는 그자는 잘 아는 사람입니까?”
니콜라스를 조사한 수사관은 샤오 마이 반장이었다. 젊었을 때 진지한 배우 지망생이었던 마이 반장은 전후 사정 다 알면서도 시침 딱 떼고 저런 질문을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수사관이었다.
“글쎄요…….”
니콜라스가 머뭇거리며 어깨를 으쓱할 때 굽타와 마키바 반장은 거울 뒤에서 숨을 멈추고 있었다.
“이름이 제이라고 하던데…… 그 외에는 잘 모릅니다.”
마키바 반장이 거울에 바짝 붙어 서서 중얼거렸다.
“저 자식이 우릴 놀리고 있는 거 아닐까?”
니콜라스가 내 정체를 이미 알고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은 수사팀의 묵은 두통거리였다. 굽타는 니콜라스가 경찰의 추적을 알건 모르건 수사를 진행시키겠다는 의지가 확고했지만 마키바 반장의 생각은 굽타 보다는 현실적이었다. 철저한 비밀 수사로 경찰이 노리는 것은 놈의 또 다른 범행이었다. 하지만 경찰의 움직임을 이미 알고 있다면 놈은 앞으로 몇 년이라도 모범적인 시민행세를 하면서 우리가 제풀에 떨어져나가길 기다릴 터였다.
지능범들은 언제나 어려운 상대였다. 흔적도 없이 살인을 해치울 정도로 잔인하고 영리한데다 성격까지 침착하다면, 아무리 귀신같은 수사관이라도 두 손 들고 물러서는 수밖에 없었다.
마이 반장이 질문을 계속했다.
“아는 사람이라면서요?”
“잘 아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선생은 잘 알지도 못하는 남창을 구하려고 공장 안으로 뛰어들었던 거군요.”
니콜라스가 마이 반장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남창은 아닙니다.”
“그 시간에 타이오스가에 일 없이 죽치고 있었다면 열에 아홉은 그렇고 그런 놈일 걸요.”
“친구를 기다린다고 했어요. 실제로 누굴 기다리고 있었고…… 그리고 그 공장지대 쪽으로 급히 가버렸습니다. 아마 기다리던 사람이 그쪽에 있었겠죠.”
“왜 따라갔습니까? 길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면 늘 그렇게 따라 갑니까?”
니콜라스가 잠시 머뭇거렸다. 같이 온 변호사가 그런 질문엔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고 일러줬다. 하지만 니콜라스는 짧고 애매하게 대답했다.
“왠지 위험해 보였거든요.”
마이 반장이 그 외에도 이것저것 물어봤지만 타이오스가 폭발 사건에 관한 한은 그에게서 어떤 범죄의 혐의도 잡아낼 수 없었다.
조사가 끝난 후 마이 반장은 니콜라스를 용감한 시민상 후보에 올릴 수 없다는 사실을 못내 아쉬워하며 마키바 반장에게 대체 그가 어떤 사건의 용의자냐고 물어봤다가 최소한 열다섯 건의 연쇄살인이라는 대답을 듣고 한동안 패닉에 빠졌다.
나를 소파에 죄인처럼 앉혀 둔 채 서장과 마키바 반장과 굽타와 크롬웰 양이 병풍처럼 둘러앉았다. 굽타가 5분만 늦게 왔어도 나는 마키바 반장 손에 숨이 떨어졌을 거다.
“진짜 모를 수도 있지 않을까?”
매사 긍정적인 검토를 즐기는 서장이 희망사항을 밝혔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희망 사항이었다.
“놈은 제이가 빨간 뱀하고 엎치락뒤치락 하고 있을 때 현장에 있었습니다. 그걸 보고도 저 자식이 경찰이란 걸 눈치 못 챌 정도로 미련한 놈은 절대로 연쇄살인처럼 어려운 일을 해낼 수 없단 말입니다!”
사람을 패서 턱에서 목 언저리까지 온통 시퍼렇게 만들어 놓고도 마키바 반장은 화가 덜 풀렸다. 서장이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미련이 남아서 굽타를 돌아봤다. 하지만 굽타도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감시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척 하는 용의자는 많습니다. 최대한 몸조심을 하면서 수사가 조용히 종결되기를 기다리는 거겠죠. 그래서 엘리스 스톤도 돌려보낸 거고요.”
“제이가 경찰이란 걸 알고 있다면 그…… 작전이 가능할까?”
서장이 이번엔 크롬웰에게 의견을 물었다.
“달리 할 일도 없잖습니까?”
크롬웰의 대답을 가로채면서 마키바 반장이 나를 사나운 눈초리로 노려봤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마키바 반장에게 이렇게까지 미운 털이 박힌 다음에야 다른 직업을 찾아보는 게 더 낫지 않을까? 그건 그렇고 작전이라니?
“나는 아무래도 내키질 않아.”
굽타가 고개를 저었다.
“너무 위험하고…… 또 제이한테는 그런 일이 안 맞아.”
뭔가 새로운 작전을 세운 모양인데 아무래도 나하고 연관이 있나 보다.
“헤슬렘이 호모라면 의외로 일이 쉽게 풀릴 수도 있어.”
“너무 안이한 방법이야.”
“몇 개월이나 줄창 잠복근무만 하는 것보다 더 안이한 수사가 또 있을까?”
“약은 수 쓰다 수사관을 하나 잃을 수도 있어.”
“죄 없는 시민을 잃는 것보다는 낫잖아.”
“우리는 뭐, 죄 짓고 경찰된 거 아니잖아?”
서장이 테이블을 쿵쿵 두드려서 두 사람의 설전을 중단시켰다. 서장의 얼굴에는 차기 경찰청장 자리에 대한 강한 집념이 엿보였다.
“언제까지 이렇게 손 놓고 쳐다만 볼 수는 없지. 알겠지만 쿠간은 자네들처럼 유능한 수사관들이 마냥 빈둥거리고 놀아도 될 만큼 평화로운 도시가 아니야. 하지만 그렇다고 헤슬렘 같은 살인마를 포기하는 건 말도 안 되지.”
거기까지 말하고 서장이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이미 들어서 알고 있겠지만 자네 어깨가 무거워. 자네가 우리의 마지막 희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그간은 실수도 많았지만…….”
수사팀의 새로운 작전에 대해서 한 마디도 얻어 듣지 못했지만 어깨가 무거운데다 마지막 희망이라…… 무슨 얘긴지 대충 알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날더러 니콜라스에게 접근해서 놈이 연쇄살인범이라는 증거를 찾아내거나 그게 여의치 않으며 스스로 사냥감이 되란 얘기였다. 그런 식의 함정수사는 드문 일도 아니고 이미 한 번 시도했었던 일이다.
“어떻게 접근하지? 그놈 차 앞으로 밀어버릴까? 일전 그랬던 것처럼 말이야.”
마키바 반장은 꼭 그렇게 하고 싶은 것 같았지만 다행히 크롬웰이 말리고 나섰다.
“그냥 집이나 회사 근처로 찾아가는 걸로 하죠. 평범하고 우호적인 접근이 좋을 것 같은데요.”
“그러다 딱지 맞으면?”
굽타는 영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다.
“안 그럴 거야. 놈은 그렇지 않아도 우리랑 놀고 싶어 하니까. 게다가 이 녀석은 꽤 반반하게 생긴 편이잖아.”
나를 훑어보는 반장의 시선이 불쾌했다. 아까부터 반장은 어떻게 하면 내 기분을 긁어서 아까 못 때린 매를 마저 때릴까 그 생각뿐이다.
“내가 호모라면 절대로 거절 안 해.”
순간…… 속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어서 하마터면 반장한테 달려들 뻔했다. 하지만 성질을 누르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사자인 나한테 한마디 언질도 없이 자기네들끼리 이런 궁리를 했다는 것도 기분 나쁘지만, 아무리 좋은 말로 눙치고 구슬렸대도 내 대답은 같았을 거다.
“저는 빠지겠습니다.”
내 입에서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마키바 반장이 벌떡 일어서서 나하고 눈높이를 맞췄다.
“일을 이 지경을 만들어 놓고 누구 맘대로?”
“도와드리고 싶지만 제 능력 밖이에요. 정말 죄송…….”
정중하게 내 의사를 밝힌 다음 조용히 걸어 나올 생각이었지만,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마키바 반장의 주먹이 바람 가르는 소리를 내며 날았고 눈앞에 불이 번쩍 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바닥에 쓰러진 나를 반장이 깔고 앉아 있었다.
“내가 경찰이란 걸 그 자식도 다 아는데…… 만나서 뭘 어쩌라고요!”
마키바 반장이 내 멱살을 틀어잡더니 자기 턱밑으로 확 끌어당겼다.
“책임지고 그 자식이 널 죽이고 싶게 만들어!”
니콜라스 헤슬렘의 저택은 바다에서 멀지 않은 경치 좋은 언덕 중간쯤이었다. 쿠간에서 제일 돈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호사스럽고 조용한 주택가는 내가 주로 다니던 음침하고 위험한 도심의 뒷골목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이 언덕은 불어오는 바람조차도 도시 뒷골목의 후덥지근하고 쾌쾌한 그것하고는 격이 달랐다.
나는 현재 헤슬렘의 저택 앞에서 20분째 하릴없이 서성이고 있는 중이었다.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듣는 척 건들거리고 있었지만 사실 듣고 있는 건 굽타의 주의사항과 감청담당 이토의 잔소리였다.
「긴장 좀 풀어. 조금이라도 위험한 낌새가 있으면 우리가 들어간다니까! 함정수사 한두 번 해? 엊그제 경찰학교 나온 신참도 아니고…… 대체 왜 그렇게 떨어? 」
“좀 추워서 그래.”
「학질이라도 걸렸어? 한 여름에 추워서 떨게?」
굽타가 이토의 뒤통수라도 한대 때렸는지 따악, 소리가 제법 크게 들렸다. 이토가 투덜대면서 마이크를 굽타에게 넘겼다.
「내키지 않으면 그냥 철수하자. 며칠 두고 생각하다보면 더 좋은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반장님은 어쩌고요?”
이 질문에는 굽타도 뭐라고 대답을 못했다.
날이 어두워진지도 꽤 됐다. 헤슬렘은 여느 때와 같은 시간에 회사를 나왔다. 한 주일에 두세 번은 비니가 일하는 클럽에 들러서 한두 시간 놀다 오는데, 마이론의 보고에 의하면 오늘은 바로 집으로 올 모양이었다. 출장도 안 가고 여자친구네 집에서 외박을 하는 일도 없이 집과 회사를 규칙적으로 오가는 것이 요즘 헤슬렘의 일상이었다.
“어디쯤 오고 있는지 좀 물어 봐.”
「벌써 여섯 번이나 물어 봤잖아.」
“한번만 더 물어 봐.”
「너답지 않게 왜 그래? 니콜라스 헤슬렘이라…… 점잖게 생겼구만 호들갑은…….」
헤슬렘이 빨간 뱀의 목을 비틀어버리는 것을 보기 전까지는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아니, 이토 말대로 나는 지금 좀 이상하다. 그동안 살인범도 많이 봤고 난폭한 흉악범도 남 못지않게 겪었다. 지금까지는 한 번도 이런 적 없었는데…… 왜 이렇게 불안할까? 저만치 먼 곳에서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반짝였다. 올 게 왔다.
니콜라스 헤슬렘의 흑표범처럼 까맣고 날렵한 포르쉐가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내 두려움의 실체가 명확해졌다. 나는 그를 상대로 비밀을 캐낼 어떤 준비도 돼 있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차가 모퉁이를 돌아서 저택 정문으로 향하기 바로 직전에 정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아름드리나무 뒤쪽으로 뛰어들었다. 이어폰을 통해서 이토와 굽타의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송수신기 전원을 끄고 숨을 죽였다. 저택의 문이 열리고 헤슬렘의 차가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크롬웰을 위시해서 수사팀의 모든 사람들이 니콜라스 헤슬렘의 연쇄살인 행각을 믿어 의심치 않을 때, 나는 사실 그들의 주장을 믿지 않았었다. 굽타가 니콜라스 헤슬렘의 위험성에 관해 누누이 얘기했을 때도 굽타가 생각했던 것보다 비과학적이라고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심지어는 비니조차도 헤슬렘이 수상하다고 느끼고 있었는데 오직 나만 그가 그저 평범한 사업가일 거라고, 모두가 사람을 잘못 본 거라고 믿었다.
헤슬렘이 내 눈앞에서 빨간 뱀의 목뼈를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꺾어버리지 않았다면 그 생각은 변하지 않았을 거다. 모두가 보고 느낀 걸 왜 나만 몰랐을까? 나는 그동안 니콜라스 헤슬렘을 제대로 관찰하지 않았다. 그를 알려고 노력하는 대신 오직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나머지는 멋대로 해석했다. 그건 수사관으로써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잘못이었다. 나는 헤슬렘에게 반해 있었던 것이다.
갑작스런 두통 때문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심하게 긴장하고 있다가 상황이 종료될 때면 머리가 못 견디게 아플 때가 있는데 지금 건 정도가 굉장히 심했다. 두통이야 진통제 한두 알 먹으면 사라지겠지만 심란한 이 기분은 진통제 한 병을 털어 먹어도 누그러지지 않을 것 같았다.
당장 벤으로 돌아가서 굽타를 볼 낯도 없었다. 니콜라스 헤슬렘에게 호감을 가졌었고 그래서 그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해서 증거를 찾아내거나 범죄행위를 유도해내는 일을 못하겠다고 하면, 굽타는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얼마나 그렇게 서 있었을까…… 등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기다리다 못한 굽타가 벤에서 내린 모양이었다. 굽타를 실망시켰다는 사실 때문에 마음이 더 무거웠다. 그동안 굽타가 보여준 배려와 신뢰는 내게는 과분한 것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에게만은 인정받고 싶다는 열망 때문에 여러 날 밤잠을 설치기도 했었는데 일을 이렇게 망쳐버리다니…… 차마 마주 볼 면목이 없어서 머뭇거리면서 돌아섰다.
“죄송합니다…….”
“뭐가?”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심장이 경련을 일으켰다.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을 쳤다.
“당신…… 어, 어떻게…… 어떻게…….”
니콜라스 헤슬렘이 태연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뭘 그렇게 놀라? 나 만나러 온 거 아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