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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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한 길이나 되는 눈 속에 처박혀 있었다. 침입자들이 내게 총질을 해대는 순간, 니콜라스가 나를 창밖으로 들어 던졌던 것이다. 덕분에 목숨은 건졌지만 큰 다행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살육만큼이나 이런 식의 생존도 끔찍했다.

경찰차와 앰뷸런스 사이렌이 멀리서, 혹은 가까이서 들려왔다. 연회장에 있던 사람들 중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생각하면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몸을 일으켜서 거의 구르다시피 눈 비탈을 내려왔다. 발치에 뭔가 딱딱한 것이 걸려서 내려다보니 시체였다. 검은 정장차림의 경호원들이 곳곳에 그렇게 죽어 있었다. 2층에서는 아직도 산발적인 총성과 비명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어느새 번진 불길이 창밖으로 새빨간 혀를 날름거렸다.

맥없이 2층 창문을 올려다보며 잠시 이상한 기도를 했다. 니콜라스가 죽지 않았기를…… 지금이라도 저 깨진 창문으로 뛰어나와주기를…… 그리고 어디론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주기를…….

그때 안에서 뭔가 시커먼 것이 흐린 밤하늘로 날아올랐다. 내게는 그것이 누군가가 띄워 올린 커다란 연처럼 보였다. 검은 그림자는 경사진 지붕을 타고 미끄러지듯 날렵하게 내 앞에 내려섰다. 그가 나를 보고 웃었다. 아니, 내가 먼저 그를 보고 웃었던 것 같다.

니콜라스가 내게 고갯짓을 한번 해보이고 어두운 숲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나도 그를 따라 뛰었다. 이 악몽 같은 밤에서 되도록 멀리 도망치기 위해서…….

설광과 달빛이 있어서 숲은 그리 어둡지 않았다. 이따금 달이 구름 속으로 숨어버리면 한치 앞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어두웠지만 달리다보면 곧 다시 밝아졌고 니콜라스는 여전히 내 앞에 있었다. 얼마를 그렇게 달렸는지 모르겠고 여기가 어딘지도 알 수 없었다. 밤인데다 온통 눈밭이라 방향감각이 없어진지 오래였다. 상관없었다. 지금은 몬티첼리 저택에서 멀어졌다는 것 외에 다른 건 중요하지 않았다.

더는 한 걸음도 더 떼어 놓을 수 없을 때까지 달린 후 기진해서 눈밭에 주저앉자 그제야 니콜라스가 뒤를 돌아봤다. 그의 모습은 엉망진창이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피투성이라서 어디를 다치고 어디가 성한지조차 분간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얼굴이나 어깨의 부상도 가벼운 것은 아니지만 저런 팔을 가지고 어떻게 지금까지 달릴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니콜라스는 아까부터 왼쪽 손목을 오른손으로 꽉 잡고 있었다. 그러지 않았으면 손목이 벌써 떨어져 나갔을 거다. 응급조치라도 해야 할 텐데 수중엔 일회용 반창고 한 장도 없었다. 잠깐 궁리를 하다가 주저앉은 채 입고 있던 모직 셔츠를 벗었다.

“나도 좀 쉬어 갔으면 좋겠지만, 놈들이 금방 따라 붙을 거야.”

“놈들은 우리한테는 볼일 없어. 프란시스 몬티첼리만 잡아 죽이면 그만이야.”

그간 숨어 다니느라 정신이 없었을 테니 쿠간 시 암흑가에서 벌어지고 있던 조직 간의 암투 따위 모르는 게 당연했다. 우리 둘 다 정말 운이 없다. 나는 내일이면 복직해서 저택을 나갈 예정이었고, 니콜라스는 모처럼의 방문 일이 하필이면 중국 마피아의 습격 날짜와 맞아 떨어졌으니까. 잠옷 대신 입고 있던 면 티셔츠까지 벗자 니콜라스가 당황했다.

“지금 날 유혹하는 거야?”

“닥쳐요!”

티셔츠 자락을 입에 물고 찢었다. 땀에 쩐 셔츠라 붕대로 쓰기는 적당하지 않았지만 이렇게라도 해두지 않으면 조만간 왼손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게 될 판이었다. 살점이 너덜거리는 손목을 대충 뭉쳐서 둘둘 감는 동안 니콜라스는 눈살을 잔뜩 찌푸린 채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이 정도 중상이라면 기절을 해도 열 번은 했을 텐데 니콜라스는 신음소리도 내지 않았다. 이럴 땐 정말 인간 같지 않다.

“넌 여전히 다정하구나.”

얼기설기 잡아맨 자기 팔뚝을 들여다보면서 니콜라스가 중얼거렸다.

“당신은 여전한 정도가 아니야.”

“나야 항상 나무랄 데 없는 신사였지.”

“전보다 더 심하게 미쳤어. 콘웨이 요양소 같이 비싼 병원에 있었으면 상태가 더 나빠지지는 않았어야지!”

차디찬 겨울 숲에 니콜라스와 단 둘이라니…… 지금까지 꿨던 어떤 악몽도 이렇게 지독하지는 않았다.

머리 위로 헬기 몇 대가 낮게 날아갔다. 경찰 헬기다. 지금쯤 저택에서는 경찰 타격대와 침입자들이 일전이 벌어지고 있을 터였다. 지금이라도 큰길을 찾아 내려가면 어렵지 않게 경찰 차량이나 앰뷸런스를 잡을 수 있을 텐데 니콜라스는 엉뚱하게도 언덕 위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일단 거울 호수까지만 같이 가자.”

거울 호수란 서부 호수의 겨울철 이름이었다. 서부 호수는 보통 때도 이상할 만큼 물이 차서 초겨울에 일단 한번 얼면 어지간히 기온이 올라가도 그 얼음이 이듬해 봄까지는 풀리지 않았다.

“거긴 왜?”

돌아서는 니콜라스의 옷자락을 얼떨결에 붙들었다.

“우선 놈들에게서 벗어나야지. 벌써 시간을 많이 낭비했어.”

“당신은 지금 병원에 가야 돼!”

니콜라스가 고개를 저었다.

“놈들은 나만 노리는 게 아니야. 머뭇거리다가 여기서 잡히면 너도 위험해.”

“놈들은 우릴 안 쫓아와!”

왜 그자들이 우리를 쫓아올 거라고 믿는 걸까? 너무 오랫동안 쫓겨 다니다 보니 과대망상이 악화되었든지, 출혈이 심해서 상황파악이 제대로 안 되든지 둘 중 하나, 혹은 둘 다인 것 같았다.

“그 자식들은 마피아야. 아마 마피아에 고용된 용병이겠지. 예전에 마피아한테 무슨 못된 짓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늘은 당신 때문에 온 게 아니야!”

니콜라스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니콜라스는 내 말을 한 마디도 이해 못했다. 눈빛만 봐도 그쯤은 알 수 있었다. 아주 잠깐 뭔가를 생각하던 니콜라스가 쌩하니 돌아서서 언덕으로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뭐…… 이쯤에서 따로 가는 게 나을 수도 있겠군.”

아, 진짜…….

별 수 없이 니콜라스를 쫓아서 언덕을 10분이나 올라갔다. 가파른 언덕을 평지라도 되는 양 날렵하게 오르는 뒷모습을 보니 상태가 생각만큼 나쁜 것 같지 않아 안심이 되면서도 한편 불안했다. 이대로라면 니콜라스를 놓쳐버릴 수도 있었다.

언덕의 경사가 어느 정도 완만해지고 니콜라스를 따라잡은 내가 막 그 옷자락을 잡으려는데 갑자기 숲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머리 위에서 뇌성벽력 같은 굉음이 울렸다. 놀라서 고개를 들어보니 헬기들이 새까맣게 몰려와서 우리 머리 위에서 교전을 벌이고 있었다. 니콜라스가 나를 끌고 커다란 전나무 그늘 아래 몸을 숨겼다.

침입자들의 헬기는 두 대였다. 경찰 헬기가 수적으로는 우세했다. 하지만 단지 그것만으로 안심할 수 있을까? 놈들의 저항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 거칠었다.

침입자들이 저렇게 날아다니고 있다는 것은 저택에서의 상황이 종료되었다는 뜻이다. 몬티첼리는 결국 놈들에게 살해된 걸까? 사실이라면 그 악명에 걸맞는 극적인 최후로 오래 기억될 테지만, 비니는 상심이 클 거다.

경찰 헬기 한 대가 놈들의 집중 포화를 견디지 못하고 동체에서 푸른 불꽃을 뿜으며 언덕 너머로 추락하고 말았다. 이어 지축을 울리는 폭발음과 함께 시뻘건 불기둥이 밤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뒤이어 놈들이 발사한 미사일을 아슬아슬하게 피한 경찰 헬기가 나무를 들이받고 굉음을 내며 숲으로 내려앉았다. 군대를 동원하지 않고는 놈들을 저지할 방법이 없어 보였다.

회초리 같은 잡목 숲을 헤치며 숲속을 달렸다. 어둡고 험한 숲으로 달려 들어가는 니콜라스의 뒷모습이 금방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아슬아슬했다. 그를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 쓰며 쫓아가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쳐서 어느 방향으로 달리고 있는지 가늠해볼 여유도 없었다.

달이 또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거의 동시에 니콜라스가 눈앞에서 사라져버렸다. 잡목 숲의 음산한 바람소리에 파묻혀 그의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어둠 속을 헤매다가 걸음을 멈췄다. 니콜라스를 놓치고 말았다.

“니콜라스!”

내 고함소리가 적막한 겨울 숲속에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빌어먹을!”

니콜라스를 놓친 것보다 길을 잃었다는 사실이 더 기가 막혔다. 좀 전까지 지척에서 들려오던 헬기 소리도 어느새 희미했다. 정신없이 달렸다고는 해도 비탈진 숲길을 20~30분 올라온 것뿐이었다. 헬기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건 놈들이 멀리 날아가버렸기 때문이었다.

경찰 헬기는 아마 철수했을 거다. 공중 수색에나 쓰이는 경찰 헬기 따위, 수십 대 몰려와봐야 전투기나 다름없는 놈들의 블랙호크를 감당할 수 없다.

언덕을 몇 걸음 더 올라가다가 나무 그루터기에 주저앉았다. 너무 많은 일들이 삽시간에 터져서 그런지 도무지 실감이 나질 않았다. 지금까지 일어난 일이 모두 꿈속에서 일어난 일 같았다. 현실을 일깨워주는 것이라곤 이따금 얼굴을 후려갈기는 칼날 같은 겨울바람과 온몸에 말라붙은 검붉은 피뿐이었다.

길을 잃었다고 해도 언제까지 앉아만 있을 수는 없었다. 경황없이 뛴 덕에 추운 줄도 몰랐는데 잠깐 숨 돌리는 사이에 손끝에 감각이 없어졌다. 모직 셔츠 하나만 입고 나다니기엔 추운 날씨였다.

달이 구름을 벗어났는지 주변이 환해졌다. 억지로 몸을 일으키면서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가늠하고 있는데 니콜라스가 남겨 놓고 간 두 가지 단서가 눈에 들어왔다. 발자국과 핏자국이었다.

몬티첼리 저택의 넓은 후원은 곧바로 울창한 전나무 숲과 이어져 있었다. 쿠간을 빙 둘러싸고 있는 론테스 산맥에 속해 있는 완만한 산자락이었다. 바로 앞에 보이는 나지막한 산 하나를 넘으면 쿠간에서 가장 규모가 큰 호수가 있었다. 보통은 서부 저수지로, 겨울엔 거울 호수로 불리는 호수는 아득한 옛날 선주민들이 건설한 인공 호수였지만 이젠 거의 자연 호수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발자국이 위로 향해 있는 걸 보면 니콜라스는 예정대로 산을 넘어 호수 쪽으로 간 것 같았다. 호수엔 별게 없었다. 양어장과 얼음 낚시꾼들을 위한 오두막 몇 채가 있을 뿐인데 왜 굳이 거길 가려는지 모르겠다.

얼어붙은 눈 위라서 흔적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다. 핏자국이 점점 크고 뚜렷해지는 걸로 봐선 출혈이 더 심해지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이런 상태로는 아무리 니콜라스라도 가파른 저 언덕을 넘어갈 수 없다. 어쩌면 그는 이미 산기슭 어딘가에 쓰러져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더구나 추운 겨울밤이라 빨리 찾아내지 못하면 니콜라스의 시체를 보게 될 수도 있었다.

드문드문 보이는 핏자국을 따라 바닥만 내려다보면서 얼마쯤 가다보니 앞에 너른 공터가 나왔다. 능선에서 얼마 멀지 않은 산비탈에 이렇게 완만한 공터가 있다는 것도 의외였지만 걸음을 멈춘 것은 그 때문이 아니었다.

공터에는 침입자들의 헬기 두 대가 내려앉아 있었다. 달빛은 밝고 쌓인 눈은 시리도록 푸른데, 시커먼 헬기와 검은 전투복을 입은 침입자들의 모습만 무덤에서 기어 나온 악령처럼 음산했다.

어째서 아직 이런 곳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걸까? 경찰 헬기는 일단 물러났는지 몰라도 그걸로 상황이 끝난 게 아니다. 지역 방위군은 도시의 치안이나 살피는 경찰과는 다르다. 놈들도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을 텐데…….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어서 나무 그늘에 몸을 숨긴 채 숨을 죽이고 있으려니까 또 한 무리의 침입자들이 숲속에서 모습을 나타냈다. 놈들은 여기 헬기를 내려놓고 숲을 수색하다가 결국 찾던 것을 발견한 것 같았다. 숲에서 동료들이 합류하자 공터에 있던 나머지도 바짝 긴장하는 눈치였다.

대략 20~30여 명 정도 되어 보이는 침입자들이 각자의 화기를 움켜쥐고 한 점을 조준했다. 정확히 말하면 니콜라스의 심장이었다. 그 광경에 내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거칠게 울렸다.

“우리와 같이 가주셔야겠습니다. 헤슬렘 씨. 아니…… 라두칸이라고 불러야 하나? 그도 아니면…….”

어정쩡하게 들어 올린 니콜라스의 팔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정도를 넘어서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달빛을 받은 그의 얼굴이 이상할 정도로 환하게 빛났다. 이제 그 얼굴엔 핏기라곤 없었다.

나도 모르게 뛰어나가려다 멈칫하고 말았다. 총 한 자루 가진 것 없이 달려나가서 뭘 어찌 해볼 도리가 없었다.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리더가 내가 숨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이렇게 무례한 초청에는 응할 수 없네.”

“팔다리 날아간 데 없이 멀쩡한 것만으로도 우린 충분히 예의를 지켰습니다.”

습격자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남자의 건조한 음성이 겨울 숲의 차가운 공기를 흔들었다.

“어련하시겠나? 기사님들.”

니콜라스가 처지도 잊고 비아냥거렸다. 그에 비해 리더의 경고는 꽤나 정중한 것이었다.

“얌전하게 행동하시죠. 팔다리 다 뜯어내고 당신 몸통만 모시고 가도 상부에선 우릴 탓하지 않을 겁니다.”

놈들은 중국 조폭이 고용한 용병들이 아니었나? 놈들이 노린 게 프란시스 몬티첼리가 아니었던 걸까?

“아직도 뭔가를 찾고 있군. 숲에서 단추라도 떨어뜨렸나?”

니콜라스가 주변을 빙 둘러보며 투덜거렸다.

“똑같은 걸 구하기 어려워서요.”

“자네들, 시간이 별로 없을 텐데?”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잘만 하면 놈들의 헬기에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 두 대의 헬기 중 한 대는 공터 어귀에 착륙해 있고 놈들의 시선은 니콜라스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헬기 안에는 뭔가 쓸 만한 무기가 있을지도 모르고…… 어쨌든 이렇게 멍하게 앉은 채로 저 정체불명의 헬기에 니콜라스를 태워 보낼 수는 없었다.

헬기에 접근해 보려고 한 걸음을 옮겨 놓는데 목덜미에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것이 와서 닿았다. 흠칫 놀라 돌아서는 순간, 어떤 놈이 무겁고 날카로운 것으로 내 뒤통수를 내리 찍었다. 잠시 정신이 아득해지는가 싶더니 뜨끈한 것이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렸다.

“부하들이 단추를 찾은 것 같군요.”

침입자들의 리더가 니콜라스를 비웃듯 쳐다봤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겠나?”

사냥당한 짐승처럼 질질 끌려나오는 나를 본 니콜라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우린 명령을 받았습니다.”

“데리고 가봐야 별로 쓸 데도 없고 거치적거리기나 할 거야.”

놈들이 나를 니콜라스의 발치에 내팽개치고 총을 겨눴다. 니콜라스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서 성한 손으로 내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그 밀랍처럼 하얀 손에 빨간 피가 흥건히 묻어나왔다.

“이 자식들…… 대체 누구야?”

고개를 들어 올려다 본 그의 얼굴은 시체 같았다. 심장이 얼어붙을 것 같은 이 공포감이 우리를 에워싼 채 총부리를 들이대고 있는 침입자들 때문인지…… 온기도, 생기도 느껴지지 않는 니콜라스의 얼굴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얼굴을 타고 흐르는 더운 피를 니콜라스가 손으로 닦아주며 혀를 끌끌 찼다.

“잘 좀 숨지, 이게 무슨 꼴이야?”

“니콜라스!”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이야. 비밀을 지키는 자들이지.”

니콜라스가 언짢은 눈길로 놈들을 힐끔 노려봤다.

“대장님! 방위군이 출격했답니다.”

침입자들 중 하나가 헬기 옆에서 다급하게 소리쳤다. 헬기 프로펠러가 돌아가기 시작하면서 벌판에 쌓인 눈을 거칠게 허공으로 걷어 올렸다.

“이만 갑시다, 현자 양반.”

리더가 총구를 니콜라스의 목에 더 바싹 들이대며 재촉했다. 아무리 막강 화력을 자랑하는 전투용 헬기라고 해도 전투기를 상대로는 승산이 없다. 니콜라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니콜라스에게는 가까이 다가서지 말라는 방침이라도 세워 놓았는지 침입자들이 그를 경계하며 한 걸음씩 물러섰다. 눈으로 피가 자꾸만 흘러들어서 그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머뭇거리고 있는데 한 놈이 내 목덜미를 사정없이 잡아챘다. 좀 전에 당한 폭행으로 안 그래도 온몸이 저린데 어깨가 거칠게 당겨지는 바람에 비명이 절로 터져 나왔다. 순간, 뒤에 있던 놈이 나를 바닥에 사정없이 밀어 던지고 총을 고쳐 잡았다.

소맷자락으로 눈에 흘러 들어간 피를 대충 닦고 고개를 들어보니 어찌된 일인지 습격자의 리더가 니콜라스에게 잡혀 있었다. 좀 전까지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소총이 어느새 니콜라스에게 넘어가서 그 총구로 리더의 목덜미를 깊숙이 찌르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리더가 잠시 한눈이라도 팔았던 모양이다.

“애초에 가비우스란 놈도 상종 못할 망나니였지만, 네놈들처럼 소란스럽지는 않았다.”

내색은 안 했지만 니콜라스는 이 상황이 정말 불쾌했던 모양이다.

“나를 죽여도 넌 우리한테서 못 벗어나!”

“죽고 싶으면 말만 해. 얼마든지 죽여줄 테니까.”

“…….”

니콜라스를 향해 당장이라도 집중 사격을 해댈 자세로 미동도 않고 서 있지만, 놈들에게는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좀 전까지의 여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용케 총을 손에 넣고 인질까지 하나 잡았지만 니콜라스가 그렇게 유리한 것도 아니었다. 도망칠 곳도 마땅치 않고 인질도 맘 놓고 끌고 다닐 만큼 만만한 놈이 아니었던 것이다. 말은 거칠 것 없이 하지만 인질이 죽으면 니콜라스도 집중포화를 면하기 어려웠다.

“어쩔 생각이야?”

리더가 덫에 치인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같이 가겠다.”

니콜라스가 잘라 말했다. 점점 커지는 헬기 소음에 니콜라스의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니콜라스가 총구를 리더의 목덜미에 더욱 깊이 찔러 넣으며 언성을 높였다.

“나 혼자 가는 거야.”

침입자들의 철수는 신속하고 일사 분란했다. 니콜라스와는 잠시 시선이 마주쳤을 뿐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그도 말이 없었다. 니콜라스를 헬기에 밀어 넣으며 침입자들의 리더가 살기어린 눈초리로 나를 노려봤다. 마치 대단히 불길한 어떤 것을 보는 것 같은 눈길이었다. 놈은 이 자리에서 당장이라도 나를 죽여 없애고 싶은 눈치였다.

침입자들의 헬기 두 대가 동시에 눈 쌓인 언덕을 박차고 밤하늘로 떠올랐다. 세찬 바람이 추위와 허탈함으로 감각을 잃어가는 내 몸뚱이를 사정없이 후려 갈겼다. 얼마 멀지 않은 능선 너머로 헬기가 빠르게 사라졌다.

부질없는 생각으로 머리가 터질 듯한데, 머리 위로 다시 한 무리의 헬기가 지나갔다. 어림잡아 10여 대가 넘어 보이는 헬기 중에는 군에서 쓰는 공격용 헬기도 끼어 있었다. 또 한 차례 공중전이 벌어진다면 이번에는 침입자들이 무사하기 어려웠다.

전력을 다해 언덕을 뛰어 올라갔다. 언덕 너머에서는 벌써 요란한 교전의 총성이 들려오고 있었다. 아무리 달려도 능선이 나오질 않았다. 뛰다가 발을 헛디뎌서 덤불숲에서 몇 번이나 뒹굴었다. 셔츠도 성한 곳 없이 찢어지고 잔가지에 할퀸 탓에 여기저기서 피가 배어 나왔다. 그렇게 마치 등불에 홀린 나방처럼 서치라이트 불빛으로 대낮같이 환한 언덕 꼭대기를 향해 비틀거리며 달렸다.

능선에서는 아래쪽에 펼쳐진 호수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내가 막 언덕 꼭대기에 올라선 바로 그 순간, 침입자들의 블랙호크 중 한 대가 꼬리 날개에서 파란 불꽃을 뿜어내며 수면에 수직으로 내리 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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