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34화 (34/366)
  • 34화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갈수록 가야금 소리가 경쾌하게 들려왔다. 내가 지금 던전에 온 건지 민속촌에 온 건지 슬슬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네를 타던 춘향이가 방자를 돌려보낸 장면 이후 계속해서 걸었지만 게이트는커녕 춘향이랑 이몽룡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지금쯤 던전 밖의 시간은 얼마나 흘렀을까? 적어도 하루는 지났겠지?’

    몬스터도 없이 계속해서 걸으려니 영 따분하다.

    ‘녹두랑 교감할 시간도 필요한데.’

    피잉.

    “엥?”

    꺄―웅!”

    “노, 녹두야. 너 왜 나왔어?!”

    ‘언니가 나 부른 거 아니었어?’

    그냥 생각만 한 건데 갑자기 팔찌에서 녹두가 튀어나왔다. 내 품에 안긴 녹두는 어느 정도 커진 제 덩치는 생각도 하지 않는 듯 내 가슴께에 얼굴을 마구 비볐다.

    “와, 이 강아지 뭐예요?”

    “강아지…라고 하기엔 생긴 게 좀 특이하지 않아요?”

    난데없는 녹두의 등장에 헌터들의 눈도 동그래졌다.

    “아, 제 소환수예요! 원주 던전에서 아이템을 얻었거든요.”

    “아이템에서 나온 소환수라…….”

    “어유, 녀석. 신지의 헌터를 아주 좋아하네요.”

    헌터들이 녹두를 보며 저마다 한마디씩 뱉었고, 최민 헌터는 무리의 뒤쪽에 서서 아무런 말 없이 녹두를 바라보았다.

    “어… 같이 다녀도 될까요? 공격도 스스로 잘 피해요.”

    “당연하죠!”

    “이렇게 귀여운 동행자라면 환영이죠, 하하하!”

    다들 싫어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녹두는 내 옆에 딱 붙어 쫄래쫄래 걷다가 공중으로 날아올라 내 주위를 맴돌기도 했다.

    아까도 느낀 거지만 정말로 많이 컸네.

    “아, 쩌~기 초가집 보이네요!”

    “저기가 디펜스전 포인트입니다! 도착하기 전에 체력보충 한 번 하고 가시죠!”

    디펜스전. 시부야 던전에서 했던 사계절과 비슷한 시스템이다. 저 초가집 안에서는 아마 춘향이와 이몽룡이 좋은 밤을 보내고 있을 것이고, 우리는 그들의 행복한 밤을 위해 몬스터들을 해치워야 한다.

    “좀 드시겠습니까?”

    “던전용… 기력 회복제?”

    최민 헌터가 작은 유리병을 내게 건넸다.

    기력 회복 식품은 처음 먹어 보네.

    뚜껑을 열고 한 번에 들이켰고, 미지근한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기가 무섭게…….

    “아, 어, 우으윽.”

    “어이구, 괜찮아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끔찍한 맛이 입 안에 퍼졌다.

    ‘이게 무슨 맛이야?!’

    혀가 자동으로 말리고 모든 수분을 다 뺏어갈 만큼 떫었다.

    누가 내 혀를 후드려 팬 게 아닐까? 이걸 먹으라고 만들었다고? 제조사 어디야, 이거?

    제조원 : 대한민국 헌터 협회 부산물 연구소

    판매원 : 대한민국 헌터 협회

    ‘분명 안미래 씨 작품이다, 이거.’

    나중에 마주치면 맛부터 어떻게 해보라고 말해야겠어.

    오만상을 찌푸리며 빈 병을 인벤토리에 넣은 뒤 나무 밑동 위에 털썩 앉았다. 다른 헌터들도 저마다 편한 곳을 찾아 쉬고 있었고, 최민 헌터 역시 바닥에 앉은 채 평온한 얼굴로 저 끔찍한 기력 회복제를 마시고 있었다.

    처음의 끔찍한 맛이 서서히 잊힐 때쯤 무거웠던 다리가 가벼워지고 피로로 아득해진 정신이 또렷하게 돌아왔다. 분하게도, 효과는 직방이었다.

    “어느 정도 쉬었겠다, 얼른 갑시다~!”

    이상욱 헌터의 힘찬 목소리와 함께 다시 대열을 정돈한 우리는 불빛이 새어 나오는 초가집 앞으로 발을 옮겼다.

    가까이 갈수록 누군가의 인기척이 선명하게 느껴졌고, 우리가 완전히 초가집 앞에 다다르자 검은 천으로 온몸을 휘감은 자객들이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모두가 똑같이 생긴 데다가 저 멀리서부터 한 트럭 더 다가오는 걸 보니 디펜스전이라는 게 실감나기 시작했다.

    투쾅!

    이상욱 헌터가 초가집 입구에 나무 방패를 세우며 1차 방어벽을 만들었고, 그와 동시에 자객들이 일제히 우리에게 달려들었다.

    우우웅!

    자아로 공기를 한 번 울려 자객들의 움직임을 멈췄다. 머리를 붙잡고 겨우 한 걸음을 뗀 녀석을 향해 크게 한 방을 날리자 그 뒤에 서있던 다른 자객 서너 명도 한꺼번에 뒤로 날아가더니 이내 터졌다.

    “우왓!”

    탱그랑.

    다른 한 놈이 자객답게 날렵한 몸짓으로 내 눈앞에 칼을 들이밀었다. 나는 자아로 실드를 뽑아내 그것을 튕겨냈다.

    ‘하마터면 미간 뚫릴 뻔했다.’

    가까이 다가온 그의 머리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으나 자객은 빠르게 몸을 틀어 피해 담벼락을 타더니 다시 공격을 시도했다.

    실드로 겨우 공격만 피하던 도중 또 다른 자객이 내 뒤를 노렸다. 서늘한 칼끝이 목 뒤에 닿는 것이 느껴지자마자 입에서 절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으아아악!!”

    쿠과과광!

    몸에서 뿜어져 나온 흰 음파가 녀석들의 몸을 관통했고, 부글거리다가 금방 가루가 되어 흘러내렸다.

    ‘입만 뚫려 있으면 적어도 목숨은 건지네.’

    전투는 점점 난전이 되어갔다. 조금이라도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순간 곧바로 목이 날아갈 수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이다.

    “이리 오너라, 업고 놀자! 이리 오너라, 업고 놀자! 사랑, 사랑, 사랑. 내 사랑이야. 사랑, 사랑, 사랑. 내 사랑이지.”

    팔자도 좋은 놈들!

    미친 듯이 몰려오는 자객들을 없애기도 바쁜데 저 망할 사랑가를 부르는 소리꾼은 제 실력을 여과 없이 뽐내고 있었다.

    이상욱 헌터의 ‘광개토’를 뚫고 춘향과 이몽룡이 하하 호호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왼쪽에 둘, 그리고 앞쪽에 하나.’

    실드를 앞세워 ‘발 없는 말’로 앞쪽으로 도약하자 튕겨져 나온 자객 하나가 뒤로 나동그라졌다. 거리를 확보한 후 나머지 두 녀석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펑!!

    그들은 보기 좋게 사라졌다. 아까 눕혀 놨던 놈이 몸을 일으키더니 총알처럼 내게 튀어왔다.

    쿠웅!

    “아오 씨, 팔 저려!”

    급하게 만든 실드를 잡고 녀석의 공격을 튕겨냈다. 자객의 몸이 다시 한번 뒤로 날아가자마자 곧바로 자아를 꺼내 들어 소리 탄환을 발사했다.

    타앙!!

    ‘오케이, 이제 남은 건 저놈들뿐이다.’

    파도처럼 다가오는 자객들을 향해 방아쇠를 힘차게 당기자 내 키보다 조금 큰 흰 구체가 빠른 속도로 그들을 향해 날아갔다.

    퍼버버벙!

    소리 탄환이 지나간 흙길은 밑으로 깊게 파였고, 무기처럼 보이는 단검들이 여기저기 널렸다.

    “하아, 후… 하아아…….”

    정말 본능에 모든 걸 맡긴 전투였다.

    ‘얼른 진짜 내 실력으로 만들어야 할 텐데.’

    쓸데없는 생각은 나중에 하자.

    숨만 겨우 돌리고 다른 헌터들 쪽을 살폈다. 김수아 헌터가 부상당한 팔로 힘겹게 자객들을 막아내고 있었다.

    투우웅!

    하늘을 향해 음파를 방출하자 자객들의 움직임이 더뎌졌고, 그 틈에 김수아 헌터가 자객의 명치에 ‘칼바람’을 꽂아 넣었다.

    “하아아!!”

    김수아 헌터가 철퇴로 주위에 있던 다른 자객들을 순식간에 쓸어버렸다. 그는 숨을 몰아쉬며 호흡을 가다듬다, 이내 한계에 다다랐는지 한쪽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았다.

    “으윽!”

    “제가 맡을게요! 진주현 헌터, 치료를 부탁합니다!”

    “김수아 헌터, 이쪽으로 오세요!”

    김수아 헌터를 진주현 헌터 쪽으로 인도한 후 아직 처리하지 못한 자객들에게 소리 탄환을 한 발씩 박아 넣었다.

    파사삭.

    다행히 남은 수가 얼마 되지 않아 근접전이 이루어지기 전에 상황이 종료됐다. 자객들은 검은 천과 무기 몇 개를 남기고 가루가 되었다.

    퍼엉.

    “훕!”

    갑자기 폐부에 뜨거운 열기가 들어찼다. 숨을 겨우 토해 내며 고개를 돌리자 활활 타는 불 속에서 태연하게 걸어 나오는 최민 헌터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손으로 허공을 긋자 불타던 공간이 작은 불씨만 남기고 공중으로 흩어졌다.

    불꽃만큼이나 붉은 머리카락과 날카로운 눈매 안에 박힌 검붉은 눈동자.

    ‘불로 인간을 빚으면 저런 형태이지 않을까?’

    실없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다닌다.

    “초동아이 낫자루 잡듯 우악한 놈 상투 잡듯. 양각을 취어드니, 베개는 우그로 솟구치고, 이불이 벗겨지며 촛불은 제대로 꺼졌구나.”

    소리꾼이 또다시 알 수 없는 가사를 또박또박 쏟아냈다.

    소리꾼의 목소리가 끝나자마자 저 멀리 다가오던 자객들이 파도를 맞은 모래성처럼 스러져갔다.

    “후우… 디펜스전 정말 빡셌네요.”

    “10분 쉬고 이동하겠습니다.”

    “김수아 헌터, 괜찮아요?”

    긴장이 풀리자마자 사람들은 자리에 주저앉거나 아까 부상을 입은 김수아 헌터에게로 다가갔다. 팔이 꽤 심하게 찢어진 터라 김수아 헌터의 얼굴은 고통으로 물들어 갔고, 진주현 헌터가 열심히 검은 안개를 만들어 상처를 치유했다.

    “한 5분 정도만 더 치료하면 될 거예요. 조금만 더 참아주세요.”

    “감, 사합니다……. 으.”

    고통스러워하는 김수아 헌터에게서 시선을 거둔 후 짚더미에 털썩 앉아 부산물을 갖고 노는 녹두를 멀리서 지켜보았다. 녹두는 제법 날렵해진 다리로 공중을 뛰어다니다 헥헥거리며 내 곁으로 다가왔다.

    “아주 제대로 놀았네. 재밌어?”

    컹!

    애교도 몸이랑 같이 컸나? 어리광을 부리는 게 수준급이다.

    녹두는 앞발로 내 손을 툭툭 치더니 그 앞에 발라당 누웠다. 턱밑과 배를 마구 긁어주니 녹두가 바보같이 웃으며 이리저리 굴렀다.

    “신지의 헌터, 게이트 위치 확인 부탁드립니다.”

    최민 헌터가 내 옆으로 불쑥 다가왔다. 나무 타는 냄새가 은근히 코를 간지럽혔다.

    “신지의 헌터?”

    “아, 아. 저쪽이에요.”

    나도 모르게 멍하니 있자 최민 헌터가 내 주의를 환기시켰다.

    “하이고~ 또 등산 시작이구나~”

    이상욱 헌터가 앓는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스트레칭을 했다. 계속된 산행과 몬스터 사냥, 그리고 아까의 디펜스전 때문에 모두의 얼굴에는 피로가 끼어있었다.

    아무래도 다들 많이 지쳐있겠지.

    ‘…최민 헌터만 빼고.’

    최민 헌터는 지친 기색도 없었다.

    저 마른 몸에서 어떻게 그런 체력이 나오는 건지 모르겠네.

    곁눈질로 힐끔 그를 보자마자 눈이 마주쳤고 나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신지의 헌터.”

    “네?”

    최민 헌터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을 걸어왔다. 그는 주변을 살짝 살핀 후 눈동자만 내려 나를 쳐다보았다.

    “혹시 동생 있으십니까?”

    쿵.

    ‘이 여자 뭐야……?’

    순간 가슴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세빈이를 제외하고 지유의 존재를 아는 헌터는 없다. 세빈이가 여기저기 말하고 다녔을 리도 없고 인터넷에 비슷한 내용이 올라온 적도 없다.

    ‘정말로 회귀 전의 기억이 있나?’

    머릿속에서 비상벨이 울려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최민 헌터가 다시 눈동자를 굴려 정면을 쳐다보았다.

    “어린아이한테 약하다고 하셔서 물어보는 겁니다.”

    “아, 아아…….”

    ‘그런 이유였구나.’

    그러고 보니 이 사람도 남동생이 있다고 했었지. 가평 게이트 폭발 때 가족들과 함께 죽었고…….

    난 약간의 경계심을 내려놓고 말을 덧붙였다.

    “네. 근데 병 때문에 먼저 갔어요.”

    “아…….”

    최민 헌터가 탄식인지 뭔지 모를 소리를 뱉었다. 이다음에 나올 소리가 뻔해서 그보다 먼저 입을 열었다.

    “사과하지 마세요!”

    입술을 달싹이는 최민 헌터를 향해 검지를 들어 보이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이 이야기를 했을 때 사과한 사람만 한 트럭이었기 때문에 선수를 쳐야 한다. 애초에 사과 듣자고 말한 것도 아니고.

    “트라우마가 아예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많이 나아진 거예요.”

    “…그렇습니까.”

    최민 헌터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돌렸다.

    눈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놀라지 않는 태도. 감정 변화가 잘 드러나지 않는 얼굴. 여전히 의심스러운 구석은 한가득 있었지만 인간미가 아주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우스운 동질감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