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 Smith (42)
플랜B는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놈들이 더 몰려오기 전에 세상 빠르게 적들을 일망타진시켰고, 베어낸 청파 일원만 해도 수십에 육박했다. 다행인 점은 놈들이 길드 내부에 별 다른 긴급신호를 보내지 못했다는 것. 남은 목격자는 하나도 없으므로······.
“은밀하군. 완벽하게.”
미호가 태클을 걸었다.
“암만 생각해도 이건 은밀한 게 아니라니까.”
“목격자가 없으니까 됐어. 남은 건 이 놈뿐인데······.”
바드는 밧줄로 단단히 속박한 공작급 장군을 내려다보며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이놈의 모가지를 따버려서 그 근처에 백파일원의 완장을 던져두는 것이다. 하지만 이놈이 이렇게 애걸복걸하니······.
“사, 살려다오. 뭐든지 할 테니까 제발······.”
“살려달라고? 그동안 네가 죽여온 사람들도 같은 말을 했을 텐데. 너는 어떻게 했지?”
“미,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어! 뭐든 줄게. 돈이든 뭐든 줄 테니까 제발!”
그가 핏발을 세우며 소리치자 꽁꽁 묶어둔 밧줄이 불길한 소리를 내질렀다. 그 이상 힘주면 안 될 것 같으니까 말이지,
퍽!
“크헉!”
“입 다물어. 버러지 같은 자식아.”
최대한 힘 조절 한 건데 그의 이빨이 송두리째 날아갔다. 원펀치 다섯 강냉이!
바드는 노골적으로 유감을 표하며 눈썹을 찡그렸다.
“널 죽이지 않으면 도로 B플랜이 될지도 모르니까. 나는 어떻게든 A플랜을 유지하고 싶거든? 미안해서 어떡하지?”
“모, 목격자를 전부 죽일 생각이군. 거, 걱정마라! 입을 절대로 안 열 테니까!”
“허갤을······.”
누가 믿나?
푸욱!
나는 그의 목 안으로 파천도를 깊숙이 찍어 눌렀다. 누르면 누를수록 끈적끈적한 핏기가 찌걱찌걱 베어 나왔다. 그의 눈이 붉게 충혈 되었고, 단말마의 신음과 함께 세상자리를 뜨고 말았다.
“으으~ 잔인해.”
“너도 못지않거든.”
나는 청색완장을 어깨에 착용하고, 흰색 완장을 목 뚫린 주검의 손아귀에 단단히 쥐어주었다. 이로써 청파 쪽은 해결했고. 남은 건 백파인데······.
“굳이 백파로 가서 소란 피울 필요가 있어?”
미호의 질문에 나도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크큭! 나도 방금 그 생각했거든. 귀찮게 또 싸울 필요는 없으니까 이대로 보물창고까지 돌진해버릴자.”
“결국 기승전 B플랜이잖아. 솔직히 말해봐. A플랜 별로지?”
“자꾸 말대답하면 목걸이 작동시킨다?”
“······.”
미호는 일말의 말대답도 하지 못하고 합죽이가 되었다. 내 머리위로 기어오르는 건 아직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기세라면 언젠가 분명히······.
언젠가 분명히 까불겠지. 주인 무는 개도 있는데 얘라고 다를까?
바드는 곧장 땅굴의 중심부로 향했다. 쿠샨의 길안내가 없었더라면 절대로 이르지 못했으리라. 얽히고설킨 벽과 방과 방 사이의 비밀의 통로, 수천 개에 이르는 방을 지나서, 아래로 내려가고 또 내려가고 끝없이 내려가고······.
“니미럴 더럽게 크네. 언제까지 내려가야 하는 거야?”
[땅굴은 Y자 모양으로 이루어진 구조다. 좌측은 백파 우측은 청파. 각 파벌의 가장 깊숙한 곳의 통로를 따라 들어가면 서로 만나는 통로가 나온다. 거기가 네가 지나온 중립지역. 땅굴의 중심부다.]
“땅굴의 중심부 치고는 적이 아무도 안 보이는군.”
[그야, 적이 없는 장소로만 우회해서 돌아가고 있으니까. 바깥에서 감시하고 있으니 땅굴 내부에서 누가 나오는지 확인이 가능하거든.]
그 말은 지상으로 올라간 세력이 어느 방, 어느 땅굴에 위치했는지 알아채고 경비가 미약한 부분을 바로 안내하고 있다는 소리렷다?
“대단하군. 상상 이상으로 쓸모가 있는데?”
[크흠! 나도 할 땐 하는······ 그보다 네게 칭찬받을 이유는 없다! 그리고 곧 지하 15층이다. 그곳부터는 경비가 없는 곳이 없다. 이제 어찌할 셈이지?]
“어찌하긴······.”
지하를 떠받치고 있는 거대한 인공 구조물 시야에 들어왔다. 직경 10미터의 거대한 강철기둥. 높이 50미터의 천장에 단단히 고정되어 웅장한 광경을 만들어낸다. 그 주변에 빽빽하게 깔려있는 수많은 점들. 청파와 백파를 알리는 완장이 곳곳에 널려있다.
“네, 네놈은 누구냐!”
“남이사.”
콰드득!
반격할 여유는 개뿔. 이름 모를 허갤은 내 손아귀에 쥐어져 안면이 으스러졌다.
나는 무전기에 입을 갖다 대고 말했다.
“이제부터 싹 다 쓸어버려야지. 허갤도, 보물도.”
***
“보물창고한번 리스펙하군. 얼마나 많은 재료를 꽁쳐놨으면 저만한 크기의 창고가 필요한 거지?”
“주인님 대장장이 맞아? 암만 봐도 도둑체질인데?”
미호의 날카로운 지적에 바드는 괜히 심술을 부렸다.
“너 아까부터 말 놓지?”
“죄, 죄송합니다.”
축 처진 귀와 꼬리로 상한 감정을 표현. 마음 같아선 요망한 꼬리를 뜯어버리고 싶지만 지금은 참자.
이상하다. 명색이 전설등급 제작재료를 보관하는 보물창고인데 전력이 이것밖에 없다고? 아니, 전력의 수준이 이렇게 뒤떨어진다고? 끽해야 레벨300에 겨우 닿는 놈들뿐이다. 마법사도 4서클 수준의 마법사. 직위로 따지면 백작이나 그 아래쯤 되는 자작, 남작들이다. 마음만 먹으면 10인의 공작들이 힘만 쓰면 털 수 있는 수준 아닌가?
‘길드마스터란 놈은 뭘 하고 있는지······. 이렇게 풀어주면 뒤통수 맞기 십상일 텐데.’
아니지. 이미 들킨 거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대놓고······.
“대놓고 살기를 뿜을 수가 없지.”
나는 어둠으로 가려진 천장을 주시하며 조소를 머금었다.
“미호. 입 벌려.”
“캬악! 그, 그게 무슨 소리······?!”
이 남자가 지금 미쳤나? 지금 상황에서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적들을 앞에 두고 갑자기? 무슨 이유로? 갑자기 쌓였던 게 폭발하기라도 한 건가?
거, 거절하면 또 화난 얼굴로 노려보겠지······?
미호는 자신의 처량한 신세를 한탄하며 굴복했다.
“네. 주인님.”
나는 바드의 하반신 앞에 무릎 꿇고 입을 벌렸다. 지퍼를 붙잡고 바지를 벗기려던 찰나. 바드의 주먹이 머리를 후려갈기며 핀잔이 날아왔다.
“뭐하는 거야. 네놈 발정에 놀아날 시간 없으니까 이거 먹고 전투준비 해.”
A플랜, A플랜 하더니 결국 전투다. 더럽게도 많이 모여 있다. 창고 앞에는 수천 명이, 창고 주변을 둘러싼 능선의 벽면에도 수천 명이, 높이 세워진 첨탑 위에도 수천 명이. 다 합치면 수만 명이······.
저걸 다 상대해야한다니, 한숨만 나온다.
나는 미호의 입안으로 구슬하나를 넣어주었다. 구슬의 정체는 마력단약. 영구적으로 MP소모량이 줄어들고 MP회복속도가 증가하는 걸로 모자라서 소모된 MP를 일시적으로 회복시켜주는 초 레어 소모품이다. 가치로만 따지면 HP를 채워주는 회복 포션의 100배! 미호에게 투자하기엔 너무 아까운 물건이지만 내가 먹은 단약만 해도 수백 개가 넘으니까 새삼스럽게 바닥을 치며 통곡하진 말자.
마력단약이 체내에 녹아들 때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할 터. 그때까지 내 역할은······.
“그대로 엎어져있어. 내가 책임지고 막아 줄 테니까.”
“어? 자, 잠깐만 주인! 혼자서는 무리야! 단약효과가 나타나면 같이 싸우는 것이······.”
“그땐 늦어.”
이미 들켜버린 통에 머뭇거릴 이유는 없지. 그렇다고 녀석들이 대놓고 정면으로 싸울 것 같지도 않고 말이다. 그렇다면 선택지는 하나뿐이다.
내 쪽의 전력이 하나 없어지면 놈들은 반드시 싸움을 걸어올 터. 미호가 마력단약을 완전히 흡수할 때까지 상대해주다가 싸울 준비가 된다면 나는 전투에서 발을 빼고 보물창고로 쳐들어 갈 것이다.
그렇게 판단을 내리기 무섭게 어둠속에서 날아드는 번쩍이는 금속체. 화살? 표창? 단도? 별 거 없다. 방금 말한 거 전부 날아왔다.
“주인 엎드려!”
미호는 식은땀을 흘려가며 가슴이 타는 듯한 고통의 인상을 찌푸렸다.
“COMMAND: EQUIPMENT SUMMONS SET.1”
바드가 커맨드를 영창하자 그의 전신이 하얀 빛으로 감돌았다. 순백의 빛이 너무나도 밝은 나머지 지하 15층의 어둠은 일순간 물러났고, 수만 명의 시선이 한곳으로 몰리게 되었다.
윈드 마스터착용 완료. COMMAND: EQUIPMENT SUMMONS는 사전에 지정해둔 장비로 바로 스위칭 할 수 있는 마법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장비를 착용하고 다니는 게 보통이고 두 세트 이상의 장비를 구비하지 않기 때문에 장비소환 마법을 사용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나 같이 장비가 엄청 많은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다.
카캉! 챙그랑!
바닥을 무지막지하게 때려버리는 금속성 암기들. 수백 개의 암기폭풍 속에서 바드는 일말의 데미지도 허용하지 않았다.
“갑옷이 전부 튕겨냈어??”
“그럴 리가 없다! 방어관통마법이 부여된 암기란 말이다! 두께 5센티의 철판도 가볍게 꿰뚫어 버리는 프라이어티를 가졌는데 그걸 막아낼 방어구 따윈······.”
“왜 없냐? 좀 도둑들아.”
“제, 제길! 청파 녀석! 저 자식 위험한 놈이다.”
“청파? 아아, 내 어깨에 이것 때문에 착각한 건가?”
“착각? 그게 무슨 소리냐! 아무튼 모두 공격해!”
눈이 위험한 녀석이다. 탐욕과 욕망으로 가득한 인간. 허갤보다 더한 욕망을 가진 남자다. 이대로 가면 속옷 한 장 안남기고 빼앗길지도 몰라!
원거리전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는지 수백 명 가량의 백파일원이 일제히 어둠속에서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넌더리가 난다는 듯 머리는 휘젓는 바드는,
“근접전이라면 바라던 바다.”
암살자면 암살자답게 어둠속에 찌그러져 있을 것이지, 의욕만 앞서서 목숨을 버리게 되는구나. 허무한 죽음이 뭔지 천천히 깨달아라.
“바드! 위험해!!!”
미호는 가누지 못하는 몸을 간헐적으로 꿈틀거리며 목청껏 소리쳤다. 아무리 바드라도 수십 명이나 되는 고레벨, 그것도 잡다한 클래스와 마법사가 뒤섞인 조합을 상대로 이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조소를 지은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바드였다.
승기를 확신하는 건 나뿐인가?
“도망쳐 주인님······ 난 괜찮으니까······.”
“뭐라는 거야. 너도 잡을 수 있는 놈들을 내가 못 잡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나는 여유가 넘치는데 오히려 필사적으로 행동하는 미호를 보니 안쓰럽다. 그렇게 걱정할 필요 없다고. 백마탄 왕자가 공주를 구하는 장면을 리얼리티하게 보여줄 테니까 말이야.
뼈 빠지게──────!
“죽어라 침입자!”
“키야아아앗!”
괴이한 발성을 내지르며 쌍고 검을 들고 나서는 백파일원. 뿐만 아니라 거대한 폴암이나 창. 뜨거운 불덩이와 화살, 단검 등이 가차 없이 내 몸 쪽으로 빨려 들어왔다.
날카로운 금속면, 그리고 연소되는 화염덩어리. 수십 개의 마법세례가 퍼부어졌다. 그것도 단 하나의 타깃에게 말이다. 평범한 모험가들이 보기엔 말도 안 되는 화력을 가진 일제 공격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너무 느리다. 슬로우비디오마냥.’
모든 궤적이 보인다. 애당초 윈드 마스터의 특수효과 바알의 숨결 덕분에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피하는 공격이지만, 그래도 인간미 넘치게 눈으로 보고 피해주지.
목으로 천천히 날아오는 창끝, 심장을 향해 수직으로 들어오는 검의 날, 뒤통수에는 뜨거운 화염구까지. 나만의 세계, 나만의 공간처럼. 한순간 모든 것이 느려진다.
1. 제일 가까운 쌍검의 검신을 부러트린다.
2. 창의 궤적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화염구를 흘린다.
3. 허리중단으로 들어오는 폴암은 맨손으로 붙잡을 것.
4. 투사체는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궤적에서 빠져나온다.
5. 놈들의 공격이 끝난다.
떠엉! 카캉! 콰가가각!
공기의 밀도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감각이 예리하게 치솟았고, 머릿속으로 정리한대로 모든 움직임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쌍검을 파괴하기 무섭게 하단을 파고드는 창. 그러나 바드는 한 발 앞서 허공으로 몸을 회전시키며 궤적을 빠져나갔다. 동시에 등 뒤로 날아오는 화염구를 흘려 창술사의 안면에 적중! 곧바로 관자놀이를 노리고 들어오는 폴암을 붙잡았다.
“이, 이걸 어떻게?”
“힘 좀 키워야겠어?”
그 덩치에 안 맞게 너무 가벼운 공격인데?
투사체의 궤적으로부터 이미 떨어진 상황. 놈들의 공격이 끝났으니 이젠 짤막한 딜레마가 발생한다. 스킬에 따라서 미세하게 차이가 있지만 아무튼 아무런 움직임도 할 수 없는 그런 타이밍이 있다.
‘일명 딜 찬스.’
바드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공기압 터져나갔다. 땅굴이 미동하고 바닥이 방사형으로 아름답게 쪼개졌다. 거대한 기합, 그리고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농밀한 마나폭풍. 6서클 마법사조차 발현하기 어려운 순간적인 마나 증폭이었다.
“이럴 수가! 공격을 전부 받아 내다니!”
실질적인 시간으로 보자면 1초도 안 되는 시간에 모든 공격을 튕겨낸 것. 백파가시도한 합동공격에는 시간차가 거의 없었다. 즉, 피하지도 막지도 못하는 완벽한 공격이었을 터. 그런 공격으로부터 살아남았다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고.”
바드는 순수 악력으로 부러트린 쌍고검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챙그랑! 하고, 맑은 음질의 소리가, 그리고 바드의 대담한 담력과 실력에 한동안 멍 때리고 있었던 것은 미호도 마찬가지였다.
‘저런 게 가능해······?’
『왜 안 돼?』
대뜸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밉살스럽고 무뚝뚝한 느낌의 목소리다. 설마 이건······.
『네 목에 달린 목줄에 전음장치를 달아뒀지. 이런 식으로 대화할 수 있으니까 참고하도록 해.』
‘자, 잠깐만! 그럼 지금까지 이 목줄로 내 생각을 읽은 거야?’
『잡담은 넘어가. 지금부터 네가 나설 차례니까.』
이쪽에만 수백 명은 모여 있다. 아직 창고 근처에도 가지 못했는데 말이지. 게다가 우리의 존재를 눈치 챈 수천 명의 인원이 이쪽으로 몰려들고 있다. 내가 보물창고 쪽으로 가지 않으면 전력이 분산되지 않으리라.
일단 몇 명 때려눕히고 시작하자.
“연환봉춘권(聯煥鳳蝽拳)!”
바드의 주위를 부유하던 청색의 농밀한 마나는 영롱한 주홍빛 불꽃으로 사납게 일렁이더니, 등 뒤로 화염으로 만들어진 봉황이 거대한 날개를 펼치며 홍안(紅眼)을 부라리기 시작했다. 엄청난 기세로 솟구치는 열기는 사방으로 뜨거운 수증기를 방출했고, 거대한 열폭풍을 일으켜 백파의 무리를 덮쳤다.
“크, 크윽! 이건 무슨 열기지? 모두들 조심······.”
“으랴아아아아!!!”
불꽃을 두른 바드의 주먹이 수십 개의 잔상으로 그리며 작렬! 백파의 황홀한 갑옷은 허무하리만큼 손쉽게 파손/관통되었다. 무명의 검사는 뭉클한 피를 한 움큼 토해내며 동공을 열었다.
“커헉!”
“검을 놔두고 주먹으로? 저 녀석 무투가였나!”
그렇다면 방금 전 근접전도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지. 무투가라면 원거리에서······.
“에로우 스플릿!”
백파가 발현한 빛의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다. 허나 윈드 마스터로 온갖 스피드와 정확도 상승버프를 빼다 두른 바드에겐 유효타가 발생하지 않았다. 오히려 화살 한발 한발을 맨손, 맨발로 가격해서 일일이 분쇄시킬 뿐.
“으랴랴랴랴!!”
“빌어먹을! 저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속도야! 화살을 전부 맨손으로 막아버렸다고?”
“엄청난 무투가군! 하지만 수적으로 우리가 우위다! 동시에 원거리로 집중공격 해버리면······.”
“그걸로 되겠냐?”
바드는 백파의 무리에서 자연스럽게 입을 열었다. 가히 상식을 벗어난 속도. 그 누구도 바드의 접근을 알아차릴 수 없었다. 백파의 눈동자에 공포가 아른거렸다. 아직까지 바드의 불길은 잠잠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으으으······ 청파에 이, 이런 괴물이······.”
“아, 그러고 보니.”
나는 등 뒤의 봉황을 어루만지며 진득한 미소를 선사했다.
“나는 외부인이다.”
그 말을 끝으로 봉황의 날갯짓이 그들의 목숨을 거둬갔다.
푸화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단 한 번의 날갯짓으로 수백 명 말살. 바닥에 이리저리 반짝이는 것은 그들이 사용하던 방어구와 무기들이다.
나는 몸을 일으킨 미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뭘 그렇게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나? 약빨 받았으면 일을 하라고.”
“주인님 잠깐만! 나보고 저것들을 어쩌라고?”
수천 명이 몰려오고 있는데 혼자 저것들을 상대하라고? 정말? 뻥 안치고?
“너는 네 힘을 모르는 거냐? 아니면 약한 척을 하는 거냐?”
생명의 보주를 먹은 미호의 힘은 그야말로 엄청나게 변화되었다. 상식을 벗어난 힘의 상승. 굳이 비교를 하자면 미호는 아무런 장비를 착용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만든 장비를 착용한 것과 동급의 힘이 되었다는 소리다. 그 상태에서 마력단약까지 흡수했으니······.
쿠샨 따위와는 비교도 못할 정도로 강하지. 엠페러의 공작? 우습다. 아주 많이. 저 상황에서 내가 만든 장비까지 착용하면······.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레벨500수준의 요괴는 될 것이다.
‘네 힘은 스스로 깨달아야 될 거다. 그래야 그 힘을 다룰 수 있을 테니까. 처음엔 힘들어도······.’
극복해. 그게 최선이야.
나는 미호의 애절한 눈길을 매정히 무시했다.
“저기······ 주인님아?”
한동안의 침묵. 그리고 밀려오는 고통.
“청파 놈이 사라졌다! 보물창고를 확인해!”
백파가 전력을 분산하여 바드를 뒤쫓아 갔다. 그런데 뭐지? 아까부터 몸이 이상해.
미호의 머리털이 곤두서고 뺨에는 붉은색의 가느다란 곡선이 부드럽게 그려지기 시작했다. 감춰진 8개의 꼬리가 완전히 개방되어 9개의 꼬리가 모두 드러났으며 그 모습은 가히 공포를 불러일으켰으니,
‘힘이······ 터진다.’
“이 녀석 구미호였어!”
“일단 물러서! 뭉쳐있으면 한꺼번에 죽는다!”
이럴 땐 한방 먹여주라고?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 일단 눈앞의 잡고기부터 다져주고 시작하자.
푸른색 마력이 물결처럼 일렁였다. 스산한 기운을 머금은 냉기가 붉은 피의 색으로 변질되기 시작한다.
“너희들 오늘 잘못 걸린 줄 알아. 입자하나 남기지 않고 모든 정기를 빨아 줄 테니.”
미호의 가느다란 손가락 끝으로 날카로운 손톱이 융기했다. 평소의 애교와 백치미 넘치던 모습은 온데 간데 사라지고 사나운 살기만이 교차된다. 그녀의 팔과 온몸을 기이한 문양이 휘감고 붉은색의 복잡한 마법진이 굴 전체를 가득 매웠다.
“이, 이건 다중마법?!”
“말도 안 돼! 도대체 몇 중 마법인거야!”
8서클의 대마도사(archmagus)조차 10중 마법 이상은 구사하기 힘들다. 아니, 그 이상의 마법은 구사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 단번에 제국 하나를 통째로 날려버릴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러나 미호가 발동한 마법은 8서클이라는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은 모양새였다.
“저 정도 되는 마법진이 수십 개. 땅굴 전체가 무너질 거야······.”
백파 일원의 얼굴에 절망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웠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무기를 내동댕이치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여우불.”
파르르르륵!
미호의 9개의 꼬리가 부채꼴 모양으로 펼쳐지더니 꼬리 하나에 푸른색 화염이 생성되었다. 생성된 불의 개수는 총 9개. 섭씨 5천도가 넘는, 말 그대로 작렬하는 불덩어리였다.
“마법주문을 읊지도 않고 이정도 위력이라니! 모두 도망쳐! 방어할 생각은 하지도······.”
콰악!
거대한 창이 쌍검사의 목을 꿰뚫었다. 남성은 두려움 가득한 눈으로 자신의 목을 비집은 창끝을 주시했다.
창이 아니다. 그건 타오르는, 기다란 푸른 불꽃······.
“변형 스피어.”
미호는 만년빙하와 같은 차가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어서 손을 움켜쥐는 시늉을 하더니,
콰각! 콰악! 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
그의 목에 박힌 불꽃 창이 수백 개의 가시형태로 변화되어 몸 전체를 꿰뚫었다. 온몸에 바람구멍이 생성된 남성은 피투성이가 되어서 그 자리에서 절명했다.
“끄으윽······.”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고깃덩어리가 기괴한 신음소리를 발성하면서 쓰러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발발한 상황. 백파에 소속된 일원들은 온몸이 얼어붙었는지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다.
겁먹은 그들 앞으로 다가서는 요괴. 미호는 냉소를 뿌리며 그들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었다.
“누구먼저 죽여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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