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 Smith (37)
날이 밝자 하나 둘 잠에서 깨어난 일행들의 눈가에 상쾌함이 묻어났다. 다들 잠 편히 주무셨나? 나는 밤새 한숨도 못 잤는데 말이야. 여기계신 우리의 파이터님께서 민폐 좀 끼쳤거든.
가장 먼저 일어난 사람은 원래 깨어있던 바드를 제외한 카스티바였다. 바드의 품에서 일어나자마자 그의 턱주가리를 시원하게 한방 날려버리는 해프닝도 있었지만 그 상황을 알고 있는 사람은 본인들밖에 없었다.
뭐냐? 잘못은 자기가 했으면서 다짜고짜 폭력이나 휘두르고. 게다가 지 멋대로 화내고. 어젯밤에 어리광 부리던 사람이 누군데? 하여간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이 마음에 안 든다.
“바드님.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아, 뭐······ 그럭저럭.”
눈 밑에 다크써클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이 양반아.
가장먼저 인사해준 게르덱에게 피곤함 가득 묻어난 눈웃음을 답장해줌으로서 아침을 시작.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동정의 기운을 풍겼다.
바닥에서 일어난 쿠샨은 육중한 갑옷을 착용하고 아직 잠이 덜 깬 안토니오를 어께에 짊어졌다. 나는 새삼 챙겨줄건 다 챙겨주는 그의 모습에 여러 번 당황했다. 친절하다고 해야 되나? 아니면───
‘츤데레?’
그 덩치에 츤데레라니······ 미안하지만 상상도 하기 싫다. 차라리 빨리 일어나라고 호통을 치던가. 은근히 잘해주면 타인은 혼란스럽거든.
“서둘러 출발하지. 앞으로 몇 백 미터만 걸어가면 워프 장소가 나온다. 여우 숲으로 빠져나오면 내 뒤를 바짝 붙어서 따라오도록 해.”
“이유는?”
나는 머리위로 물음표를 잔뜩 그리면서 질문했다. 이에 친절히 답변해주는 우리의 츤데······ 아니, 엠페러 길드의 공작 씨.
“여우 숲에는 레벨120에 달하는 여우요괴가 서식한다고 한다. 물론 우리들의 실력으로 못 잡을 것도 아니지만 가끔씩 현혹 술에 걸려들면 상당히 성가시다고 하더군.”
“난 그런 것에 대해서 면역 있는데?”
“저도 마찬가집니다.”
게르덱이 바드의 말에 바짝 붙어서 뒷받침했다. 하기야 마법사는 여러 악조건과 상태이상에 저항하는 감항능력이 뛰어나야한다. 가뜩이나 체력도 저질이고 마법을 캐스팅하는데 긴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쿠샨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부정형의 억양으로 재차 강조했다.
“그런 잡몹들의 현혹 따위야 신경도 안 쓴다. 문제는 그 숲에서 호족이 나타난다는 소문 때문이지. 평범한 여우요괴와는 다르게 몇 배에 달하는 마력과 요술을 사용해서 인간들의······ 그것도 남성들의 혼을 빨아먹는다더군. 단순한 소문은 아닐 거야. 벌써 수차례 피해사례가 있었으니까.”
호족······?
이에 옆에서 코웃음을 치며 조소한 사람은 카스티바였다.
“그 호족도 참 잘나셨네. 남자들은 원래 다 그래? 어떻게 동물 따위에게 속아 넘어가?”
“듣자하니 그 호족은 ‘초 절세가인’이라고 하더군. 남자들이 그놈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면 그건 남자가 아니라는 말이 나올 정도라고······.”
“······마음에 안 드는데?”
팔짱을 끼고 고개를 팩 돌려버리는 그녀의 모습에 농밀한 시기질투가 번졌다. 설마 진짜로 질투야? 요괴한테 질투심 느끼면 그건 수치스러운 건데?
바드가 돌직구를 파바박 날려보지만 입 밖으로 내뱉지 않은 목소리가 그녀에게 닿을 리 만무하다.
“알겠습니다. 쿠샨님 말대로 워프를 넘어가는 순간 따라붙도록 하겠습니다.”
게르덱이 그렇게 하겠다고 선언한 가운데 쿠샨이 “도착했다.”하고 중저음의 말을 꺼냈다. 딱 보기에도 뭔가가 있을 법한 장소였다.
자잘한 잔디가 새벽이슬을 머금어 눈부시게 빛나고 있는가 하면, 그 넓은 공터가운데 상식을 초월하고도 남을 거대한 나무가 하늘높이 뻗어나 있다. 주변에 흘러가는 모종의 기운은 마치 요정의 세계에 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나무직경은 얼핏 봐도 10미터는 넘어간다. 더욱 압도적인 것은 나무의 높이였다. 200미터쯤? 상식의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은 높이다.
“와아~ 이거 엄청난데?”
“그러게 말이야. 무슨 엘프라도 나올 것 같은 장소야.”
바드와 카스티바가 순서대로 감상평을 내뱉었다. 이런 장대한 광경이 또 있을까?
그야말로 1등상! 관광지로 개발하면 엄청난 돈을 쥘 수 있을 것이다. 저쪽에 푯말을 세우고, 이 주변에 울타리를 친 다음······.
“쓸데없는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다. 이 주변엔 사나운 숲의 요정(스프리 건)이 살고 있거든.”
쿠샨이 대뜸 충고하자 바드의 입가에 더욱 깊은 미소가 번졌다.
“오오~ 요정도 있는 건가?”
다음에 방문하면 생포해서 큰돈을 벌어들이······ 아니지. 사업계획을 함부로 입에서 꺼내면 좋지 못한 버릇이다.
“아무튼 지체 않고 게이트를 통과해 볼까?”
쿠샨이 그렇게 말하고는 거목의 나무 뒤편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나무의 두께가 워낙 두꺼운 탓에 반대편으로 돌아가는 것 마저 꽤나 긴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리고 그가 발걸음을 멈춘 곳에는······.
“이곳이다.”
“뭐냐 이 구덩이는?”
땅에 단단히 박힌 뿌리와 뿌리사이에 거대한 구멍이 있다. 안쪽이 얼마나 깊으면 빛 한줌 비치지 않아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다. 이런 곳으로 뛰어들라고?
“안쪽으로 뛰어들면 자동으로 워프할 거다. 껄끄럽다면 내가 먼저 뛰어내려도 상관없는데?”
“됐어. 어차피 다 들어갈 거잖아? 그러니까───.”
나는 슬며시 한발 물러나며 정중한 자세로 게르덱을 앞으로 내세웠다.
“게르덱이 먼저 들어가지.”
“······예?”
***
허공을 몇 바퀴나 돌았을까? 아니, 돌았던가? 여우 숲으로 워프하기위해서 정신없이 떨어지다 보니까 주변 풍경은 완전히 바뀌어버린 뒤였다. 거대한 나무는 시야에서 사라진 뒤였고, 음침한 수림만이 사방에 가득했다.
‘아직 낮 맞지?’
시간상 분명 아침이다. 잠자리에서 기상한지 한 시간 채 지나지 않았을 터. 그런데도 여우 숲이라는 이곳은 어두침침하기 그지없다. 음침한 분위기, 바짝 말라서 떨어져 내린 낙엽과 본적 없는 기이한 벌레들까지.
‘확실히 뭐가 나올 것 같기는 하군.’
그나저나 다른 사람들은 전부 어디로 가버린 거지? 떨어지는 순서는 내가 마지막이었을 텐데?
시차는 거의 없었다. 왜냐하면 순서만 달랐을 뿐 몸을 던진 것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기 때문이다. 나는 천천히 발을 움직여 앞으로 나아갔다. 바짝 마른 낙엽이 바사삭 거리며 부서지는 소리가 꽤나 중독성 있게 느껴진다.
‘아무도 없군.’
나 혼자다.
또 다시 배제된 공간에 남겨졌다.
가끔씩 고독을 즐기는 것도 좋지만 말이야······.
콰득! 나는 오른손을 왼쪽 어께위에서 오른쪽 대각선으로 휘두르며 마력을 방출했다.
‘이런 고독은 진절머리 날 정도로 겪어봤다고······!’
바드의 몸을 중심으로 방출하는 푸른색 아우라는 순도 높은 마력이 다량 함유 되어있음을 보여주었다.
아름답게 물결치는 파도가 주변의 공간을 일그러트리자 허공에서 방사형의 그물이 그려졌다. 바드의 터질 듯한 마력의 내압을 견디지 못한 공간은 콰창! 부산스럽게 깨져버렸다.
그 순간 바드의 눈앞에 작은 문구로 떠오르는 투명한 알림창. 오랜만에 봐서 그런 걸까? 이제는 반갑기도 하다.
《유혹(레벨10)에 완벽하게 저항했습니다.》
‘그럼 그렇지. 워프 하는 동시에 유혹에 걸린 거였나?’
그건 그렇고 유혹레벨10이라니? 그랜드 마스터급 유혹이 아닌가? 이정도 단계의 수준이라면 남녀노소 성별 관계없이 매료시키는 수준이다. 물론 나 같은 경우는 제외지만.
여유롭게 저항한 바드는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제야 눈에 띄는 반가운 얼굴들.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넋을 잃은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는 것을 보아하니 방금 전 나와 마찬가지로 유혹에 빠져든 상태인 듯하다.
하기야 방심했다고는 하지만 나조차 빠져든 유혹이다. 아무리 마법사라 한들, 쿠샨같이 전투에 익숙한 베테랑이라 한들, 스스로의 힘으로 상태이상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나저나 이정도 유혹스킬이라면 분명한 건가? 소문의 호족······.
“있으면 나오지?”
나는 멀찍이 떨어진 나무 한 그루를 주시하며 말을 던졌다. 아무리 녀석이라도 방대한 마력이라든가, 요기는 감출 수 없는 모양이다.
“······어떻게 빠져나왔을까? 오빠는?”
다행히 순순히 모습을 드러내는 구미······호? 일단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얀색 소복차림으로 맨살을 노출시키고 있었으며, 엉덩이 쪽에서 살랑대는 여우꼬리는 순백색 털로 뒤덮여 있다.
쿠샨의 말마따나 절세가인이라는 단어가 적합할 정도로 빼어난 미모와 가느다란 팔 다리는 황금비율의 몸매를 보여주고 있다.
“내 모습에 놀란 걸까? 다시 한 번 말해줘? 어떻게 빠져나왔냐구~”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투는 꿀처럼 달콤하고 끈적했다. 과연 요괴는 요괴로군. 이런 식이라면 누구든 홀렸겠어.
다른 의미론 안쓰럽기도 하다. 궁지에 몰린 쥐새끼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합할까?
“네가 호족이냐? 상상이상이군. 100점 만점에 100점이다.”
“그냥 호족이 아니라 구미호거든? 내가 꽤 급하거든. 다음 시나리오가 대충 예상되겠지? 어떻게 해줄까? 쾌락에 빠져든 상태로 보내줄까? 아니면······.”
구미호의 눈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악귀, 살인귀, 짐승······ 그 어떤 단어로도 형언하기 어려운 소름끼치는 눈동자다.
“쥐도 새도 모르게 정기를 다 빨아줄까?”
“이왕이면 전자가 좋겠다마는 예~ 제 혼을 받아주십쇼! 하고 넙죽 죽어주고 싶지도 않군. 너도 오래 살아봐서 알잖아? 승산이 없다는 사실을.”
나는 구미호와 동급 이상의 마력을 방출시켜서 마력충돌을 일으켰다. 강한 돌풍이 사방으로 휘날리고 마력의 충돌로 공간의 틈에서 청색 스파크가 일어났다.
“오빠가 강한 건 알겠는데, 앞서 말한 대로 내 나름대로 절박한 상황이란 말이야. 사람의 정기를 빨아본지 꽤 오래되었거든. 그러니까······ 목숨 걸고 싸울 거야.”
“유감이군. 나보다는 저쪽에 덩치 큰 남자 것이 더 맛있을 텐데 말이야. 그나저나 구미호는 정기 빨아먹으려고 아무한테나 들이대나?”
“캬아아아악!”
바드의 오만불손한 질문이 화근이 되었는지 구미호는 발톱과 이빨을 드러내며 달려들었다. 그 예쁜 모습 어디가고 이렇게 무섭게 변해버린 거람? 천지신명께서도 아쉬움의 무릎을 치며 탄식할만한 일이었다.
구미호의 속도는 가히 놀라울 정도였다. 나무 사이사이를 이동할 때마다 엄청난 공기압이 터지고 그녀의 공격이 스쳐간 나무는 본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산산이 분쇄되어 쓰러졌다.
강철발톱이 아니고서야 이만한 위력을 낼 수는 없을 터. 아, 구미호라서 특수하게 강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걸 죽여 말어?
“언제까지 도망만 칠거냐!”
“간 좀 보고 있었지. 조금 더 분발해 보지?”
“크으으······. 크아앙!”
각성인가? 아니면 그냥 미리내까지 화가 난 거냐? 오랜 시간 정기를 빨아먹지 못했다면서 이만한 위력을 내다니, 놀랄 노자로군!
하지만 그녀의 폭풍 같은 공격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역시나 힘의 소모가 컸던 탓인지 제풀에 지쳐 주저앉은 구미호.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인간 형태가 변해서 조금씩 크기가 줄어들었다. 줄어들고 줄어들어서······.
“······꽤 어리네.”
바드가 한아름에 안아줄 수 있을 정도로 작은 여우로 변했다.
“끼잉······ 끼이잉······.”
“이제 말도 못하는 거냐? 꽤나 예뻤는데.”
이제와 생각해보니 이 녀석도 불쌍하다. 사람의 정기나 빨아먹으면서 목숨을 연명해야하는 인생. 더군다나 사람들에게 질시 받으며 살아가는 요괴로 태어나지 않았는가? 그 때문에 이런 외진 곳까지 도망쳐 나와서 숨어 지내는 것이 아닐까?
“그 느낌 나도 알지. 거의 반평생을 혼자 지내왔으니까······.”
구미호의 숨이 죽어간다. 북슬북슬한 백색털이 은빛으로 바래져가고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힘겹게 헐떡였다.
너도 외로워서 살인을 저지른 거냐? 아니면······ 요괴답게 살생을 저지른 거냐?
이 질문은 마치 내가 나 스스로에게 하는 질문 같았다. 외로워서 망치질에 전념한 거냐? 아니면 그냥 대장장이로서 망치질을 한 거냐?
“후우, 이럴 생각이 아니었는데.”
갑자기 나 자신이 한없이 무르다고 느껴졌다. 요괴한테 동정심을 품다니 말이다.
“생명의 보주면 되는 거냐?”
“······!”
가방에서 꺼낸 아이템은 푸른 청색의 사과만한 구슬이었다. 구슬은 반투명해서 안쪽이 훤히 비쳤는데 그곳에는 청색의 기운이 천천히 회오리치고 있었다.
이름: 생명의 보주(재료등급: 에픽)
설명: 호족이 100년 동안 모은 인간의 혼백을 형상화한 아이템입니다. 구미호가 십미호로 진화하기 위해선 10개의 생명의 보주가 필요합니다. 생명의 보주를 사용한 아이템에는 인격체가 부여된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인하기 위해선 직접 물건을 제작해봐야 알 것 같습니다.
인격체가 부여된 무기를 만들어보려고 했다만 이게 뭐냐고······ 구미호 살리는데 이렇게 귀한 재료를 소모해야 하다니.
“생명의 보주는 인간의 넋을 100년 동안 모은 엑기스. 네게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물건이겠지?”
구미호가 고개를 끄덕이지도 못하고 힘겹게 숨만 내뱉었다. 이쯤 되면 구미호도 한계일 것이다.
“그냥 줄게.”
“······.”
구미호의 눈에서 “왜?”라는 물음이 그려졌다. 그렇게 물어봐도······.
‘나도 몰라 이놈아. 그냥 네가 불쌍해서.’
나랑 비슷한 처지라서.
단순한 동정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까.
나는 생명의 보주를 구미호의 입 앞으로 가져다댔다. 사과만한 구슬이 푸른 안개처럼 녹아 구미호의 입가에 녹아가듯 빨려 들어갔다. 아담한 짐승은 살포시 눈을 감았다. 그 짐승의 눈가에 작은 물방울이 맺힌 것을 확인한 나는 곧장 눈부신 광채에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눈부시군.’
말 그대로 눈부실 정도로 아름답다. 3미터정도 부유한 그녀의 모습은······.
그야말로 “오~”라는 감탄사밖에 나오지 않았다.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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