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 Smith (38)
찬란한 후광이 잦아들었다. 공중으로 둥실 떠오른 그녀의 몸이 천천히 내려왔다. 그녀의 변화된 모습은 처음에 본 모습과 천차만별이었다.
가느다란 팔다리는 상처하나 없이 매끈한 피부와 뽀얀 체색을 가졌고 또렷한 윤기를 머금은 칠흑색 장발에는 잔잔한 금빛이 흘러나왔다.
처음과 다르게 창백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으며 오히려 온기를 머금은 활력이 그녀가 생생히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듯했다.
잠을 자고 있는 것처럼 살포시 감은 두 눈에는 은빛으로 빛나는 작은 물방울이 흘러나왔고 그것은 그녀의 앵두 같은 입술의 틈으로 천천히 흘러갔다.
생명의 보주란 구미호가 십미호로 각성하기위한 넋의 구슬이다. 100년이란 시간동안 사람의 혼령을 한곳에 모아서 응축시킨 생명의 보주야말로 고차원적인 에너지덩어리. 즉, 마력의 집결체라 할 수 있었다. 그런 보물을 통째로 집어삼켰으니 힘이 펄펄 나는 것도 무리가 아니겠지.
재료등급만 따져도 [에픽]이라는 등급에 육박하는 실로 희귀한 구슬을 내가 무슨 생각으로 그녀에게 넘겼을까?
이제 와서 후회해 봐야 소용없다. 왜냐하면 구슬은 이미 그녀가 집어삼켰고, 그녀의 변화를 보아하니 물릴 수도 없는 모양이니까.
여봐요 구미호 씨. 비싼 거 먹었으면 슬슬 말 좀 하지? 나 지금 진심으로 후회하고 있는 중이거든.
“당신 이름은······?”
그녀가 고결한 목소리를 울리면서 장엄한 분위기를 풍겼다. 굶주림이 없으니, 나 따위는 하찮다~ 뭐 이런 건가? 거슬리는 말투로군.
“바드다. 배가 부르니까 살만한가 보지?”
“덕분에 상당한 마력이 보충되었어. 설마 당신이 생명의 보주를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지.”
확실히 다르다 처음보다 수십 배, 아닌 수백 배는 강대해진 마력. 아마 이전의 컨디션이 완전했을 때도 이것보다는 약했을 것이다. 구미호로써 완전체나 다름없는 수준이라는 건가?
“덕분에 드디어 십미호로 각성할 수 있는 마지막 기틀을 마련했지. 내 친히 너의 이름을 영원토록 기억해줄게.”
빠지직! 한계치에 다다른 바드의 정신 끈이 팽팽하다 못해서 괴로운 소리를 자아 해낸다.
“그럼 이제 죽어주실까?”
············지금 이 여우새끼가 시방 뭐라고 씨부리는거냐? 죽어가는 동물새끼 목숨하나 살리겠다고 내 귀중한 재료를 옜다, 먹어라~ 던져줬건만 지금 은혜를 원수로 갚겠다는 소리 아닌가? 게다가 뭐? 기껏 은인에게 해준다는 것이 돈을 주겠다는 것도 아니고 뭐? 이름을 기억해줘? 죽여주겠다고?
겁 대가리를 초월하다 못해 개념을 우주 밖으로 날려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가만 보자. 이렇게 말 안 듣는 동물을 어떻게 길들여야 하던가? 이럴 땐 역시 ‘그것’밖에 없다.
매가 약이야.
“이봐, 잠깐 내 옆에 와볼래?”
“죽기 전 마지막 소원이야? 그 정도라면 얼마든지.”
자신의 앞날이 어떻게 될지 상상도 못하고 있겠지. 지금이라도 겸손한 태도를 보였다면 적당히 넘어가 줬을 텐데 끝까지 오만불손한 모습을 보이는군. 여자는 때리기 싫었는데 유감이다.
“그 정도 미모라면 인기가 많았을 텐데 아까워.”
“쓸데없는 참견이야. 어차피 내 본모습도 아니고.”
“그래? 나도 요괴한테 홀릴 정도로 무른 녀석은 아니거든.”
나는 바짝 붙어있는 그녀의 꼬리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말만 구미호지 꼬리가 한 개라서 붙잡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구미호는 꼬리를 붙잡히기 무섭게 민감하게 반응했다. 온몸에 정전기라도 일어났는지 몸을 크게 튕기면서 몸체를 S자로 꼬았다.
“흐, 흐아악?!”
“이제부터 제대로 길들여주지. 말 안 듣는 동물은 매가 답이라고 하더라고? 특히 너 같이 주제도 모르고 까부는 녀석들에겐 위아래를 확실하게 잡아줘야 하거든.”
바드가 가방에서 꺼내든 아이템에는 자극적인 물건들이 많았다. 천년누에의 실 섬유로 만든 비단밧줄, 황소정령이 깃들어있는 소가죽벨트, 일시적으로 강력한 전기를 만들어 몸을 마비시키는 스턴 밤(Stern bomb)등.
꺼내든 물건의 조합에는 문제가 많아 보이지만 버릇을 고치기 위해선 강렬한 충격이 답이다. 게다가 이 녀석은 요괴가 아닌가? 인격적으로 대할 이유가 없다.
“아무래도 꼬리를 붙잡으니까 아무것도 못하나본데. 재미 좀 볼까? 귀여운 여우 꼬맹아.”
“시, 싫어! 이거 놓지 못해? 내가 마력을 해방하면 너 같은 녀석은 한주먹거리도 안 되거든?!”
“아무래도 상황파악이 안 되나 본데? 지금 네 처지가 그렇게 당당히 말할 처지가 아니거든. 이렇게 꼬리를 살짝 힘주어 당기면······.”
“뀨, 뀨아아앗······!”
순백색의 풍만한 꼬리가 팽팽하게 올라가니까 구미호의 입안에서 달달한 교성이 흘러나왔다. 방금 전까지의 장엄함은 어디로 팔아먹었는지, 우스울 뿐이다. 그나저나 푹신거리는 게 기분 좋은데 잘라서 베개로 쓸까?
구미호 꼬리로 만든 베개라니, 엄청 신선하다. 상품화 된다면 엄청난 인기와 함께 벼락부자가 될 수······
“우으읏! 그, 그만! 이제 됐어. 내가 잘못했으니까 꼬리 좀 그만······.”
“무슨 소리야? 꺼내놓은 물건 하나도 안 썼거든? 게다가 꼬리를 놔주면 또 어떤 건방진 소리를 하려고?”
가뜩이나 요괴면서 아무런 물증 없이 신뢰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특히나 꾀가 많다는 여우요괴라면 더더욱 그렇다. 잔머리를 잘 굴리고 사람을 잘 속이며 최후엔 사람을 해하기까지 하는 구미호가 내 손안에 있는데 굳이 풀어줘야 할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갖다 팔았으면 팔았지.
팽팽하게 늘어난 꼬리. 어찌할 바를 몰라 제자리에서 발만 동동 구르는 구미호의 표정이 꽤나 볼만했다.
“그 물건을 전부 사용하겠다고? 아, 안 돼! 그러면 정말 망가져!”
“망가지긴 뭐가? 조금 아플 뿐이지. 제대로 된 정신교육을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어. 매가 약이야.”
나는 그녀의 눈앞에 비단밧줄을 들어 보이면서 음흉한 미소를 그려주었다. 최대한 악독하게, 그리고 지독하게! 결과는 당연히 이득 되는 쪽으로 나와야한다. 그것이 나의 철칙.
구미호를 교육시켜서 무슨 이득이 있냐고? 일단 펫으로 데리고 다니는 것부터가 충분한 이윤이 되지 않을까? 절세가인 구미호를 애완동물로 데리고 다니다니. 이거야말로 동물 애호가의 러블리 파라다이스다!
“생각보다 괜찮은데?”
“무슨 이상한 상상을 하는 거야!”
그녀가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바드를 곁눈질하더니 격렬하게 동공을 떨기 시작했다. 바드는 특유의 능청스러운 말투로 답했다.
“아무상상도 안했거든. 널 애완용으로 삼아서 사람들 앞에 내세우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어. 한번 만지는데 10만 실링이라던가. 그런 야바위 식 장사는 생각은 안 해 봤다고.”
“너 설마 그렇게 까지이······.”
이젠 본인도 깨달았을 것이다. 바드는 자신이 상상한 것 이상으로 독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만한 짓을 벌이고도 개미똥구멍만한 죄책감조차 느끼지 않을 인간이라는 사실을······.
‘미쳤어. 이 녀석 완전 상또라이야!’
어떻게 해야 이 위기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까? 꼬리를 붙잡힌 상황에 무력은 불가능하다. 인간주제에 엄청난 악력을 발휘해서 내 꼬리를 공략하고 있잖아! 그렇다면 변신을? 하지만 꼬리는 여전히 붙잡혀 있을 텐데······.
‘으아앙~ 완전 진퇴양난이잖아!’
“체크메이트. 순순히 상황을 받아들이면 유혈사태는······ ‘조금만’ 일어날 거다! 하하하하!”
이제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 나를 때릴 것이고 버릇을 들이려고 할 것이다. 현 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오직 하나뿐.
“자, 잘못했어요오······.”
빌자. 손이 발이 되도록, 발이 손이 되도록 빌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남자에게 쓸개마저 빼앗겨서 현금으로 바뀌고 말 것이리라.
“다신 안 그럴게요. 살려만 주시면 맹세하고 조용히 찌그러져 살게요오······.”
구미호로 태어나서 이렇게까지 굴욕적인 경우는 없었다. 차라리 마을사람들에게 죽었으면 죽었지 이런 굴욕을 맛보는 것은 치욕 그 자체였다.
그러나 남자는 표정하나 바뀌지 않고 단답했다.
“싫어.”라고······.
“그냥 때리고 싶은걸 어떡해? 건방진 네 얼굴을 처참하게 망가트리지 않으면 금이 간 나의 자존심을 달랠 수 없을 것 같거든.”
“뭐야! 당신 변태야? 혹시 SM? 진짜 기분 나뻐!”
──쭈우욱!
“끄아아아! 자, 잠깐만! 미안해요. 안 대들게요오!!”
엉덩이에서 골반과 치골을 당기는 짜릿한 감각. 내 꼬리는 그의 손아귀에서 마음껏 농락당하고 말았다.
“아, 아, 알았어요! 말 잘들을 테니까 당기지 말아주세요! 아파아파! 아파아아!”
“좋아. 조금 반성의 기운이 묻어나는 것 같으니까 꼬리는 건들지 않겠어. 하지만 밧줄이나 벨트는······.”
“그, 그것도 부디······. 뭐든 하라는 대로 다 할 테니까요!”
그렇다. 그 말은 일생일대 가장 큰 실언이었다. 아니, 최소한 그 남자 앞에선 해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호오? 뭐든 하겠다고?”
“아니. 이, 이번 건 실수······.”
내가 그 이상 말을 못하고 합죽이가 된 이유는 그가 내 꼬리를 붙잡고 눈앞에서 살랑살랑 흔들었기 때문이다. “말 안 들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의 함축적 의미가 포함된 무언의 시선. 나는 눈물을 머금고 떨리는 목소리로 약조했다.
“꼬리는······ 건들지 말아주세요······. 뭐든 하겠습니다······.”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이 울먹이며 대답하는 구미호. 뿐만 아니라 자신의 처량한 신세에 온몸을 미세하게 떨었다.
바드는 그녀의 조건을 받아들이겠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그렇게까지 애원한다면 어쩔 수 없지. 뭐든 하겠다고 했지? 그렇다면 그에 대한 신뢰를 보증해줄 계약을 맺어야하지 않겠어?”
“계약이라면?”
“별 거 없어. 그저 내 펫으로 따라다니기만 하면 돼. 내가 필요할 때 도와주는 편리한 펫으로서 말이지.”
그건 말이나 그렇지 노예나 다름없잖아? 계약이 터무니없이 불공평하다. 이렇게 일방적인 계약을 받아들일 수 있을 리가······.
그녀가 항의하는 눈으로 바드를 애걸했지만 그 눈은 몇 초도 지속되지 않았다. 바드가 그녀의 꼬리를 붙잡고 협박했기 때문이다.
“꼬리 귀엽다?”
억울하고 원통하도다. 10번째 생명의 보주를 집어삼키고 천년여우가 될 수 있는 조건을 획득한 내가 어째서 이런 상황에 빠지고 만 것인가? 만약 그의 펫이 된다면 영영 천년여우가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된단 말인가?
‘절대 그럴 수는······.’
“3초안에 대답안하면 이 꼬리 잘라버릴 거다.”
천년여우가 되기 위한 조건은 9개의 꼬리를 보존하는 것. 8개는 숨겨둔 상태라지만 1개는 그의 손에 붙들려있다. 만약 한 개라도 잘렸다간 천년여우의 꿈은 다 망치게 되는 것이다.
“아, 알겠습니다. 할게요! 펫 할게요!”
“그러면 이 중에서 물건 한 개 골라. 계약을 위한 물건을 정해야 하니까.”
그가 앞으로 내민 3개의 물건은 목줄, 목줄, 목줄이었다. 이게 뭐야! 색만 다르잖아!
“마법이 부여된 목줄이다. 이걸로 너와 나는 펫과 주인이라는 관계로 새롭게 계약을 맺게 되는 것이지. 색깔을 결정할 선택권은 네게 준 것인데. 이왕이면 빨간색 어때?”
“색깔만이라면 뭐든 상관없거든!”
결국 그가 건넨 목줄을 착용함으로서 새롭게 계약을 맺어졌다. 인간의 펫으로서 노예로 다뤄질 것이다. 인간이란 족속은 추악하고 더러우며, 특히 남자란 것들의 목적은 다 거기서 거기니까.
‘혐오스러운 자식!’
그녀의 나지막한 욕설은 자신의 마음속 어딘가에 강렬하게 박혀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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