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 Smith (29)
침묵이 앞을 가로지른다. 잔뜩 화가 난 이사벨라며, 레이나며 당장이라도 우리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다. 이사벨라는 어기차게 입을 열었다.
“바드 씨가 먼저 말해 봐요. 거짓말하면 알죠?”
그녀가 뚜둑뚜둑 손목을 풀면서 위협했다. 되먹지 않는 거짓말로 속이려 들면 오히려 악 효과만 일어날 것 같다. 언젠가 알아차릴 거 지금 알아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에······. 그럼 일단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부터 시작해 볼까?”
나는 노엘, 론과 작전을 짠 것부터 시작해서 원정대의 뒤를 따라 전장으로 향했다는 사실, 마지막으로 쿠샨의 정체와 쿠샨에게 얻어낸 정보 등. 하나도 빠짐없이 실토했다.
이야기가 끝나자 이사벨라와 레이나는 푼더분한 얼굴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번에도 이사벨라가 입을 열었다.
“역시나! 당신 미쳤어?! 엠페러 길드의 군단장을 여기까지 끌고 오면 어쩌자는 거야! 마을 사람들이 알기라도 하면 엄청난 공황사태가 벌어질 거라고!”
“일단 진정하고.”
나는 발딱 일어난 이사벨라의 머리를 꾹꾹 누르면서 자리에 앉혔다. 이사벨라는 빠드득 이를 갈며 허리를 굽혔다. 이사벨라는 농밀한 살기를 풍기며 쿠샨을 쏘아보았다.
“그 남자 당장 죽여.”
이사벨라의 적극적인 주장에도 불구하고 쿠샨의 얼굴은 여유로웠다. 바드라는 남자가 순순히 본인을 버릴 거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독종이라면 거지마저 부려먹을 거거든.’
예상대로 바드는 쿠샨을 변호했다.
“경계할 필요는 없어. 레이나 때문에 그런 거라면 더더욱 걱정할 필요 없고. 이 녀석이 얼마나 강한지는 알겠는데, 그래봤자 세발의 피야.”
“당신이 얼마나 강한지 알고 있어. 믿기지 않지만 엠페러 길드의 1전투부대를 홀몸으로 궤멸시켰으니까.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또 다른 경우야. 이 남자를 뭘 믿고 곁에 두고 다닐 거지? 언제 혼자서 탈출할지도 모르잖아? 기회를 틈타서 공격할 수도 있고······. 그만한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을 텐데?”
“개 목줄이라도 달아둘까?”
바드의 농담 섞인 말투에 이사벨라가 핏대를 세웠다.
“농담이지?”
“물론이지.”
아무튼 이사벨라의 말도 일리가 있다. 쿠샨은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무기를 겨누던 적이었고 그가 순순히 따라온다고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 감이 말하길 그가 배신하는 경우는 100에 1도 안 된다. 물증은 없지만 아무튼 그렇다.
“그럼 어떻게 해야 신뢰 할 수 있는데?”
“못해요. 그냥 죽여요.”
이사벨라는 억센 풀줄기마냥 감사납게 답했다. 노발대발 화내는 것 보다 오히려 완곡한 모습이다.
“그보다 엠페러의 일원이라며? 그대로 왕국으로 끌고 가면 못해도 몇 천만 실링은 받을걸? 위험을 자초할 바엔 그 편이 더 좋지 않아?”
바드는 상상을 초월한 액수에 마음이 흔들렸다. “진짜 죽일까?”하고 진심으로 고민하는 그를 보면서 쿠샨이 양손을 휘휘 저었다.
“자, 잠깐만! 정말 죽일 생각은 아니지? 배신 안 해! 안한다고! 몇 천만 실링 그게 문제야? 그보다 훨씬 가치 있는 보물이 다잔에 널리고 널렸다고. 그걸 생각하면 너무 싼 현상금이지!”
“것도 그렇군. 더군다나 당분간 무보수로 부려먹을 생각이었으니까 말이야.”
나는 이쯤에서 대충 결론을 내리자며 선택지를 내세웠다.
“이 자리에서 죽인다, 또는 끌고 다닌다. 이것부터 정하도록 하지. 나는 후자 쪽이다. 놈이 허튼수작 못하도록 막을 자신 있어. 내가 책임지지.”
“나는 당연히 반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끌고 다닐 수는 없어. 레이나는 어쩔 거야?”
이사벨라는 당연히 자기편을 들어줄 것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레이나는 백치미가 묻어나는 어조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바드가 괜찮다면 나는 상관없는데?”
“레, 레이나?”
세상에 마상에 이게 무슨 소리야?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는 있는 거야? 상대는 살인자야! 그것도 사상 최악의 길드에서 한 자리 잡고 있는 악질 중에 악질!
이사벨라가 경악을 했고, 동시에 쿠샨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목숨건진 것을 축하한다. 너는 평생 동안 나의 노예야. ‘짐꾼’으로서 말이지!”
“짐꾼으로 삼아줘서 고맙다!!”
“뭐랄까······. 지금 되게 훈훈한 느낌인 것은 기분 탓? 왠지 나 혼자 소외감 들어서 다른 의미로 기분 나쁘거든?”
심기가 꼬일 대로 꼬여서 꽈배기가 된 이사벨라는 잔뜩 토라진 본새였다. 하지만 그런 그녀를 가만 놔둘 바드도 아니다.
세상은 ‘윈윈’법칙이라는 게 있지. 나와 상대방중에 한명이라도 패자가 생기면 언젠가 복수를 낳는 다는 것. 때문에 만사형통 서로가 이기는 것이 최상의 선택이라는 것.
“미안해 이사벨라 씨. 화 풀어. 내가 책임지고 잘 길들이겠다니까? 정 화가 안 풀린다면 풀릴 때까지 때려도······."
그녀의 머리위로 분노의 이모티콘이 떠올랐다. 그 분노는 전심전력 스트레이트로 변화되었고, 그것은 나의 어금니를 파고들어 깊고 강렬한 고통을 남겨주었다.
“커헉!”
“죽어죽어죽어죽어죽어죽어죽어! 죽어버려 망할 대장장이!!!!!!”
이사벨라의 떽떽거리는 외침과 바드의 외마디 비명이 장렬하게 퍼져나갔다.
***
현재시각 오후7시. 해가 산등성이를 넘어가서 황혼 빛조차 감돌지 않는 거무죽죽한 하늘이 너울너울 흐른다. 이사벨라와 레이나는 여자끼리 할 말이 있다면서 나와 쿠샨을 방 밖으로 내쫒았고 갈 곳을 잃은 나와 쿠샨은 길거리로 나왔다.
“나참, 폭력적인 여자라니까.”
나는 얻어터진 얼굴을 매만졌다. 세상에, 잔뜩 부풀어 오른 얼굴이 풍선마냥······. 한숨만 나온다.
“저 여자들은 기가 세더군. 특히 수인족은 말이야. 한동안 까불지 말고 조용히 일해야 될 것 같다.”
“한동안? 그 말은 즉, 나중에는 기어오르겠다는 뜻으로 풀이가 가능한 것 같은데?”
“아, 아니. 그건 아니고······. 아무튼 열심히 하겠다는 소리다.”
“후우······. 그나저나 의외군. 엠페러 길드 어쩌구 하면서 낯간지러운 소리만 주절거릴 줄 알았는데 순순히 모험에 따라오겠다고 결정을 내리다니 말이야.”
솔직히 잘 모르겠다고. 녀석과 나는 아직 스스러운 사이잖아? 목숨과도 같은 짐 가방을 맡길 정도로 친밀한 수준이 아니란 말이지. 나는 뭘 믿고 녀석을 신뢰하려는 걸까? 더군다나 상대는 엠페러 길드에 몸을 담았던 인간이다. 신뢰성이라곤 전혀 없어야 하는데······.
“역시 이해가 안 간다고. 너 나한테 약점 같은 거 잡혔던가?”
“야, 약점은 무슨······!!”
“이상하지 않을 수가 없지. 이렇게 까지 풀어주는데 인간적으로 딴 마음 안 생기겠어? 혹여나 그 가방 때문이라면 포기해. 나 아니면 열어보지도 못하는 가방이니까.”
“그딴 허접한 이유가 아니다.”
쿠샨이 얼굴을 굳히며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자 내 머릿속이 더욱 복잡해졌다. 그럼 도대체 이유가 뭐야! 진짜로 착한 놈인 거야? 아니면 단순한 변심이야?
쿠샨은 뭔가 할 말이 있는지 몇 번이나 입술을 움찔거렸다.
“우리 이제부터 동료인가?”
“······일종의 동료는 맞지.”
“앞으로 동행할 동료로서 미리 말해두겠다. 같은 남자니까 하는 말인데······ 그래도 비밀을 지켜줬으면 한다.”
“알았으니까 닥치고 빨리 말해. 화딱지 내려앉으니까.”
침묵의 시간은 대략 3초정도. 쿠샨의 어께주위로 뜨거운 아지랑이가 보이는 것은 아마도 착각······이겠지?
쿠샨은 어둑해진 하늘을 올려다보며 파이팅 넘치게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이사벨라에게 반한 것 같다!”
“············뭐라굽쇼?”
내 표정이 어떤 식으로 구겨졌을지 상상이 안 가는군. 눈썹은 기괴한 곡선을 그리며 잔뜩 찌그러졌을 것이다. 한쪽 눈은 길게 호선을 그렸을 것이고, 입은 어이없다는 듯이 하아? 벌리고 있겠지.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런 표정이겠다.
《지나가던 똥개가 제 발로 가마솥에 들어가는 소리하고 앉았네》
잘못 들었다면 그게 현실성 있으리라.
“어처구니없다고 생각하나?”
“그, 그러니까 네 말은 이사벨라가 좋아졌고. 때문에 나랑 같이 행동하는 것에 큰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는 소리?”
“그렇다.”
나이 중년에 보여주는 수접은 행동거지는 실로 구역질이 난다. 10대 여학생의 청춘이 가슴속에 자리 잡기라도 한 걸까······.
‘여자 때문에 오랫동안 믿고 따르던 길드를 포기했다니. 너란 녀석은 정말······.’
“남자로군.”
“훗! 너라면 이해할 줄 알았다.”
남자사이에서 통하는 무언가가 있기라도 한 걸까? 중간과정이 생략되었지만 둘은 흐뭇한 눈길을 주고받으며 우직하게 악수를 나누었다.
비로소 나는 모종의 위화감을 지울 수 있었다. 어째서 쿠샨을 이유 없이 신뢰했을까? 그건 아마도 나와 비슷한 부분이 없잖아 있기 때문이다.
나는 죄 없는 사람을 죽이거나 이유 없이 약탈하지는 않지만 엠페러 길드가 저지른 만행과는 한끝차이다. 나도 필요하면 물불 가리지 않고 움직이며, 한없이 악독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나름 인연이군. 어때? 술 한 잔 할까? 내가 아는 술집이 있는데 그곳 술이 기가 막힌다고.”
“내, 내가? 괜찮은 건가?”
“사줄 때 사양 말고 받아 마셔. 앞으로 부릴 수 있을 만큼 실컷 부릴 테니까. 이번에 사주는 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거야.”
쿠샨과 아무리 친해졌어도 두 번이나 술값을 내줄 의리는 아니다. 무엇보다 그란다의 술집은 가격 변동이 심하거든. 비쌀 땐 엄청 비싸서······.
주점에 도착한 바드와 쿠샨은 대화의 장을 열었다. 사내만의 걸쭉하고 두터운 정이 넘치는 웃음소리. 정신을 차려보니까 바드와 쿠샨은 단 둘이서 버터맥주가 담긴 술통을 13통을 비워냈고 그란다의 버터맥주는 재고를 완전히 바닥내었다. 배에 그만한 술이 들어가느냐고 물어본다면 바드와 쿠샨은 이렇게 답할 것이다.
《술이 들어가는 배는 따로 있으며 그 배는 우주보다도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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