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Master Smith-28화 (28/202)

Master Smith (28)

“어서 출발해! 지체할 시간 없어!”

“거기 너! 짐을 왜 그렇게 많이 싣는 거야? 뒤에 밀린 사람들 안 보여?!”

마을은 한 바탕 소란으로 뒤엎어졌다. 어제까지만 해도 호기롭게 출발한 원정대들이 엠페러 길드에게 처참히 패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손 놓고 가만히 앉아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엠페러 길드가 곧 들이닥친데.”

“원정대가 완전히 박살나고 돌아왔으니까.”

방안을 이리저리 싸돌아다니던 토끼는 예민해진 신경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여차하면 레이나가 위험해질 수도 있는 상황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집안에 조용히 기다리고 말하던 바드는 돌아올 생각을 안 하니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감도 못 잡고 있다.

레이나는 걱정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바드는 아직도 안 보여?”

“쳇. 그 인간 어떻게 되든 내 알 바 아니야. 어디 가서 노가다나 하고 있겠지 뭐.”

“왜 그렇게 기분이 안 좋아? 무슨 일 있어?”

이사벨라는 애써 부정했다.

“딱히. 그나저나 우리도 슬슬 출발해야겠는데? 언제까지고 바드를 기다릴 수 없어.”

무슨 귀찮은 일에 휘말렸는지 모르겠지만 레벨888인 괴물이야. 어떻게든 살아 돌아오겠지! 그보다 엠페러 길드가 쳐들어오는 날에는 정말 답도 없는 상황인데······. 레이나를 데리고 도망칠 수 있을까?

“너 먼저 가.”

레이나의 발언에 나는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너는?”

“기다려야지. 그 사람.”

레이나의 표정이 어둡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걱정하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레이나의 그런 표정을 몇 번이고 봐왔다. 보이는 그대로 해석하면 된다. 그녀는 지금,

‘걱정 끼쳐서 화났군.’

잠시 후 마을 입구에서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공포, 절망, 절규 같은 마이너틱한 느낌이 아니라 환호와 환희, 희망적인 소란이었다. 이사벨라와 레이나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창가 쪽으로 향해갔다.

숲 안쪽에서 드러나는 그림자. 한쪽은 커다란 몸체에 무언가 한가득 짊어지고 있고, 다른 한쪽은 비교적 가벼운 차림으로 여유롭게 달려오고 있었다.

“저, 저 남자는 아까 협곡에서 나타난······.”

“엠페러 길드하고 싸웠던 남자잖아! 어, 어떻게 살아남은 거지?”

찰랑거리는 적색 봉두난발. 순박한 시골청년의 이목구비. 방긋방긋 쾌활한 눈웃음은 레이나와 이사벨라가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분명했다. 그 옆에 우람한 근육돼지는 당최 낯선 남자였지만 말이다.

“뭐야, 멀쩡하게 돌아왔잖아? 괜한 걱정만 잔뜩 했네.”

이사벨라는 김빠지는 목소리로 코웃음 쳤고,

“그런데 바드 옆에 저 사람은 누구?”

레이나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몸을 뒤로 뺐다.

크고 작은 흉터로 가득한 얼굴. 험악하고 매서운 인상을 가진 산적 같은 외모. 너나 할 것 없이 무서워할 분위기다.

마을 주민들의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이보게. 엠페러 길드는 어떻게 되었는가?”

“원정대는 궤명했다고 들었는데 이제 이 마을은 어떻게 되는 거지?”

그들의 질문쇄도에 바드가 덤덤히 대꾸했다.

“엠페러 길드가 쳐들어온다는 소리에 도망칠 생각부터 하고 있다니, 다들 너무한 거 아니야?”

마을 주민들은 면목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쿠샨은 이런 그들의 반응이 매우 만족스러웠다.

‘클클클······. 우리길드의 무서움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구나!’

“너 뭔 생각 하냐?”

바드의 바늘 같은 눈총을 받은 쿠샨이 포커페이스로 돌아가며 냉큼 대답했다.

“아, 아무것도.”

자식이 말이야. 노려보기만 하면 아무것도 못하는 녀석이 뭘 그렇게 실실대고 앉아있어? 이상하게 이놈이 좋아하는 꼴을 못 봐주겠단 말이야······.

싫어하는데 큰 이유는 없다. 놈이 적군이었다는 이유 말고는 네버!

‘그나저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도망칠 생각이었단 말이지? 다된 밥상을 도둑에게 냅다 바치는 꼴이로군.’

이렇게 풍족한 마을을 그냥 포기하는 건 너무 아까운 일이 아닌가?

“저, 저기! 용사님!”

멀리서 한 무리가 내 품으로 와락 안겨들었다. 용사? 지금 나보고 하는 소리?

“덕분에 살았습니다! 그때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았다고요!”

“저, 저도요! 솔직히 체념하고 있었는데······.”

남검사와 여마법사가 눈물콧물을 쏟아내며 내 몸을 부둥켰다. 죽음에서 벗어난 안도감과 고마움을 온몸으로 보여주려나 싶었다. 그런데 이 사람들아. 조금만 떨어지면 안 될까? 조금 민망하거든.

바드는 갑작스런 대우에 당황을 금치 못했을 뿐 아니라 눈앞에 거슬리는 알림창에 넋을 잃었다. 명성이 올랐다는 둥, 마을에 미치는 영향도가 상승했다는 둥. 아무튼 긍정적인 이변이 머릿속을 어질러 놨다.

《마을 영향도가 2순위로 올랐습니다》

《영향도가 오르면 마을 주민들에게 많은 신뢰를 얻습니다》

현재 랭킹

[1위: 이사벨라- 27%]

[2위: 바드- 24%]

[3위: 그란다- 19%]

.

.

.

.

순위를 일일이 확인할 필요는 없다. 그보다 의외인 것은 이사벨라의 영향도가 가장 높다는 사실이다. 기껏해야 조금 싼 여관을 운영하고, 당근농사나 할 뿐인데 무슨 27%나 된단 말인가? 사람들이 이사벨라의 당근만 고집해먹지 않는 이상엔 불가능한 수치다.

그보다 이제부터 입을 맛깔나게 털어볼 차례다. 쿠샨은 엠페러 길드의 높은 지휘관으로 세간에 알려진 얼굴이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주민들이 그의 얼굴을 알아본다면 일이 귀찮게 굴러갈 것이다.

나는 쿠샨의 옆구리를 찌르며 조용히 눈치를 보냈다.

“대가리 있으면 호응 잘 해라?”

꿀꺽. 엠페러 길드의 호걸이라 불리는 남자가 잔뜩 긴장하며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엠페러 길드는 어떻게 된 겁니까? 가만히 당할 놈들이 아닌데?”

“철수했다. 아무래도 코지부락은 안중에도 없던 모양이야. 아마도 다른 목적으로 왔던 거겠지.”

“그, 그런가요? 아무튼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그런데 옆에 계신 분은?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하고······.”

올 것이 왔다!

“짐꾼······ 이랄까? 오래전부터 알고지낸 사람인데 오는 길에 우연히 만났거든.”

짐꾼이란 말에 쿠샨이 바락! 성을 냈다.

“누, 누가!”

모든 이들이 의심쩍은 눈초리를 보냈다. 나는 쿠샨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입 닥치라는 무언의 의미였다.

‘크, 크윽! 젠장할······.’

노려보는 것만으로 내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다니. 그런 사람이 존재할 줄은 몰랐다. 있어도 이런 비리비리한 놈일 줄은 상상도 못했지! 신세 한번 처량하도다······!

마을 주민은 의심을 거두고 쿠샨의 등에 업혀있는 소녀에게 관심을 옳겼다.

“그 소녀는 누구입니까?”

“알고 있잖아? 지난번 스켈레톤을 소환한 꼬마 녀석. 한동안 내가 보살필 테니까 신경 꺼.”

“위, 위험하지 않을까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은 하덜덜 말라고.”

그 뒤로 이어지는 질문은 모조리 기각! 뒤늦게 찾아온 안토니오와 카스티바는 자세한 경황은 내일 들을 테니까 오늘은 쉬라며 협박조에 가까운 어조로 물러섰다.

겨우겨우 메리데이로 복귀했더니 이번에 우리 둘을 기다리고 있던 또 다른 콤비가 있었으니······.

“어서 와요~ 바드 씨.”

100% 분노 가득한 웃음을 짓는 이사벨라와,

“실컷 걱정하게 만들어 놓고선 뻔뻔하게도 웃고 있네?”

손가락을 뚜두둑 거리며 전투적으로 대기하고 있는 레이나였다.

“일단 진정들 하시고······.”

“뭘 그렇게 떨고 있어? 죄지었니?”

레이나가 피식 웃어보였다.

그건 아니지만 무섭잖아. 웃고 있으면서 온몸으로 살기를 풍기고 있는 게······. 잘 하면 죽도록 얻어맞을지도 몰라!

상황의 심각성을 알아차렸는지 쿠샨이 입을 뻐끔거리며 바드의 귓가에 속삭였다.

“나는 잠깐 빠져있도록 하겠다.”

스리슬쩍 사라지려는 발걸음. 그러나 이사벨라의 눈은 피할 수 없었다.

“야, 거기 너.”

이사벨라의 눈은 필요 이상으로 사나웠다. 정말로 죽여 버리겠다는 기세다.

붉은색 사자갈기. 엠페러 길드의 문양. 범상치 않은 투기까지. 내가 아는 얼굴이랑 꽤 닮았는걸?

‘엠페러 길드의 1전투 부대 군단장. 쿠샨공작.’

틀림없다. 바드는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위험한 녀석을 데리고 온 거야?!

숨 막히는 공기 속에서 레이나가 입을 열었다.

“됐고, 두 사람 다 생각의자 가져와서 벽보고 반성해!”

‘계집애가 지금 누구에게 명령질이냐!’

쿠샨이 억눌러왔던 근력을 쥐어짜내며 주먹을 움켜쥐었으나 이사벨라와 눈이 마주친 순간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대뇌를 뚫어버리는 짜릿한 충격! 심장은 타는 듯한 격통으로 벌렁거린다.

‘뭐, 뭐지? HP는 멀쩡한데······?! 세뇌 마법인가?’

두근거리는 심장. 느껴본 적 없는 강렬한 아픔. 이것은 설마······!

아담한 그녀의 얼굴에 은은한 빛이 감돌고 있다. 새벽이슬을 머금은 맑은 눈동자와 투명한 듯 반사되는 여린 입술은 그야말로 순수함의 결정체! 아기 같은 피부와 생기 있는 표정이 당돌하니 귀엽다. 거기다 뽀송뽀송해 보이는 토끼 귀와 꼬리는 그야말로 퍼펙트!

‘처, 천사?!’

그녀의 주위로 영롱한 휘광이 터져 나온다. 착각이 아니라 진짜 그렇다니까?!

이사벨라는 자신을 바라보는 쿠샨의 시선이 영 못마땅했는지 눈썹을 들어 올리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뭘 봐! 눈 안 깔아?”

으르렁 거리며 송곳니를 드러내는 이사벨라. 그녀의 적대도가 하늘을 찔렀으나 오히려 그녀의 앙칼질 목소리는 쿠샨의 가슴을 말캉하게 파고들었다.

도주에 실패한 쿠샨이었지만 어째선지 행복한 아빠미소를 잔뜩 머금고 있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