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12 =========================================================================
"오랜만이야?"
"두 달만이네. 휴가는 어땠어?"
"휴가랄 것도 별로 없었어. 집에서 쉬다가 가족들하고 잠깐 여행 다녀 온게 다야. 그리고 곧바로 올림픽 대표로 합류했지. 넌 유로까지 뛰느라 진짜 휴가가 없었겠네."
"그래도 중간 중간에 꽤 쉬어서 나쁘진 않아."
영국과 우루과이의 A조 3차전이 열리는 밀레니엄 스타디움, 데이빗과 수아레즈는 입장 통로에서 오랜만의 해후를 나누고 있었다.
"첫 경기때는 컨디션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던데 지금은 많이 괜찮아졌나봐?"
팀에서 언제나 호흡을 맞춰 온 것이 폼이 아닌듯 넌지시, 하지만 정확하게 데이빗의 상태를 짚어 내는 수아레즈, 데이빗은 씩 웃으며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지금은 완벽해. 뭐 이번 경기에서 충분히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으니까 기대해도 좋아."
"살살하라고 친구. 안 그래도 여기 세바스티안이 너 어떻게 막냐고 징징댔는데 말이야. 같은 팀 동료에 대한 배려 좀 해주라고."
"내가 언제!"
자신을 끼워 넣는 수아레즈의 모습에 발끈하는 코아테스, 그리고는 헛기침을 하며 데이빗에게 시선을 돌린다.
"음...뭐, 오늘 잘해 보자. 루이스가 한 말은 사실...에이, 그래 솔직히 좀 살살해 주면 고맙겠다."
자존심때문인지 얼굴을 살짝 붉히며 이야기하는 코아테스, 데이빗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수아레즈가 빙글거리며 대화를 마무리한다.
"슬슬 입장할 시간이네. 남은 이야기는 경기가 끝난 뒤에 하자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
경기 시작이 임박한 시간, 경기장 이곳 저곳을 두리번 거리는 데이빗을 보고 긱스가 다가와 툭 건드린다.
"아, 그냥 경기장을 좀 보고 있었어요."
"누구 아는 사람이라도 찾고 있었던 거야?"
"아뇨, 그냥 이 경기장은 처음이라서요."
"응? 유로 2012 예선에서 웨일즈하고 경기를 치르지 않았어? 웨일즈 국가 대표팀이 주로 사용하는 경기장이 바로 여긴데?"
"제가 대표팀에 합류한 건 예선 막바지 즈음이라 말이죠. 웨일즈하고는 웸블리에서 경기를 치렀던 것 같네요."
데이빗의 대답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럴 수도 있겠다고 중얼거리는 긱스.
"그래서 감상은 어때?"
"생각보다 크네요. 그냥 그 정도? 아, 이왕이면 안필드도 이번 올림픽에서 사용되었으면 좋았겠다 정도가 있네요."
"안필드? 하하, 너는 확실히 그렇겠네. 난 그 동네가 영 부담스럽지만 말이지. 아무튼 슬슬 시작할 시간이야. 오랜만의 선발 출장...이랄 것도 없네. 이제 겨우 세 번째 경기니까."
그리고는 데이빗의 어깨를 팡팡 두드려 준다.
"소속 팀은 다르지만, 어쨌거나 지금은 같은 편이니까. 기대하고 있겠어. 마음 껏 날뛰라고. 뒤에서 확실히 백업해 줄테니까."
"잘 부탁드립니다."
가볍게 주먹을 맞대고 자리를 찾아 간다. 몇 m 앞, 센터 서클에서 절친한 동료 수아레즈가 킥오프 휘슬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 왔다. 경기만 시작했다 하면 사람이 달라질 만큼의 강한 승부욕을 자랑하는 수아레즈였기에, 좀 전의 통로에서 만났을 때와 같은 장난스러운 표정은 찾아 볼 수 없었다. 온전히 경기에 집중하고 있는 모습, 데이빗도 슬슬 집중력을 끌어 올리기 시작했다.
사실 데이빗의 머리 속에 코아테스라는 선수는 크게 자리 잡지 못했다. 아니, 사실 기억에서 가물가물한 선수 정도였다. 그가 리저브에 있던 시절은 코아테스가 리버풀에 합류하기 이전이었고 그가 합류한 뒤에는 이미 퍼스트 팀 내에서 핵심 선수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괜찮은 피지컬을 가진 선수, 그리고 나이가 같다는 부분, 수아레즈와 같은 나라 출신이라는 것들이 그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것이었다. 딱히 만날 일이 자주 있는 것도 아니었고 가끔 진행되는 리저브 팀과의 합동 훈련에서 그리 인상적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툭-툭-
슬슬 공을 몰고 전진하기 시작하는 데이빗, 그리고 그의 앞을 가로막는 코아테스. 우루과이의 감독은 수아레즈와 코아테스의 주장을 받아 들였다. 코아테스 뿐만 아니라 다른 한 명을 더 투입하며 데이빗에 대한 봉쇄를 계획한 것이다. 하지만 두 명의 수비를 앞에 두고도 데이빗의 표정은 별 반 차이가 없었다. 익숙한 일이라는 듯 평온했고 덤덤했다.
'꿀꺽.'
입술이 바짝 마르는 것을 느끼는 코아테스, 자신보다 10cm 이상 작은 선수였고 체구는 더더욱 차이가 나는 선수였다. 하지만 지금 바로 눈 앞에 대면한 지금, 그 누구보다도 커 보이는 선수였다. 그만큼 강렬한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다.
'절대 눈을 떼서는 안 돼...절대.'
침을 삼키며 집중력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애쓰는 코아테스, 그는 데이빗을 처음 만났을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사실 기억이랄 것도 없었다. 그가 본 것은 극히 적었으니까. 그저 눈 앞에서 무언가 좌우로 흔들리는 것 같더니 어느새 사라져 버렸고 1초 뒤, 자신의 팀 골망이 흔들렸다는 것 뿐이다.
처음에는 정말 귀신에 홀린 느낌이었다. 비록 리저브에 머무르고 있긴 했지만 이는 나이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우루과이에서 각 연령대 별 대표팀을 두루 지내며 비슷한 연령대의 선수들 중에서 실력으로 크게 밀린다고 생각해 본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는 오산이었고 오만이었다. 그날 자신은 데이빗 앞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그의 퍼포먼스를 돋보이게 하는 조연 역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아무도 자신이 처참하게 털리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저 자식은 괴물이야! 너무 자괴감에 빠지지 말라고. 쟤는 지금 퍼스트 팀에 있는 선수들도 못 막아. 니가 한 번이라도 제대로 저지하는 모습을 보였으면 넌 내일이라도 바로 콜업을 받게 되었을 거야.'
위로인지 한탄인지 모를 동료들의 말을 듣고 나서 비로소 실감이 났다. 저게 바로 세계 최고 레벨의 실력이라고 말이다. 흔들릴 뻔한 멘탈을 잡았다. 한 번 털렸다고 무너져 버리기엔 그의 자존심이 그리 낮지 않았다.
'뺐는다는 생각은 버린다. 그저 시간만 끈다고 생각하자.'
이왕이면 공격수로부터 멋지게, 깔끔하게 공을 빼내고 싶은 것이 모든 수비수의 로망이었다. 하지만 코아테스는 현실을 인정했다. 무모하게 달려 들어 봤자 볼품없이 나가 떨어질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나마 현실적인 목표를 잡고 작은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하지만 상대와의 격차는 그런 작은 목표의 난이도마저 극악하게 높여 버렸다.
'온다!'
공을 툭툭 건드리던 데이빗의 템포가 바뀌었다고 느꼈다. 그리고 순식간에 공이 좌우로 흔들리며 자신을 정신없이 흔들어댔다. 제대로 반응하지 못한 것이 차라리 다행이었다. 만약 어중간하게 반응했다면, 그 잠깐의 무게 중심 이동을 노리고 데이빗은 자신을 돌파해 버렸을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상황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코아테스의 반응 여부와 관계없이 데이빗이 왼쪽으로 공을 이동시키고 본인 또한 움직였다. 반응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 눈 뜨고 통과시켜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하지만 코아테스는 상대적으로 느렸다. 기본적인 민첩성의 차이에 더해 체격 차이, 체중 차이가 크게 작용했다. 코아테스가 반응한 순간 그대로 공을 접고 꺾어 들어오는 데이빗, 그리고 코아테스와 다른 한 명의 수비수 사이를 비집고 파고 들었다. 당황한 백업 수비수가 발을 뻗어 오는 것을 그대로 가볍게 점프하며 피해내고는 뻥 뚫린 공간을 향해 공을 치고 달렸다.
'패스...보다는...!'
컨디션이 확실히 정상으로 돌아온 것을 느꼈다. 슬럼프랄 것도 없었지만 며칠 동안 마음먹은 대로 플레이가 완벽히 되지 않아 내심 조금은 걱정이 된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별 다른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리버풀에서의 모습, 그리고 유로에서의 상태와 동일했다. 기분 좋은 웃음을 지으며 데이빗이 주변 상황을 빠르게 확인했다. 한 명의 수비수를 달고 파고드는 다니엘 스터리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패스를 요구하며 손을 흔드는 모습, 하지만 지금은 자신이 더 슈팅을 때리기 좋았다. 두 명이 한 번에 나가 떨어질 거라 예상하지 못했는지 아직 커버가 제대로 들어 오지 못했다. 굳이 더 드리블로 파고들 필요도 없었다. 이미 사정권 내였으니까. 데이빗의 왼발이 강하게 지면을 디뎓고 이어 오른발이 강하게 휘둘러졌다.
"컨디션은 이제 완벽히 돌아온 것 같군요."
"그래. 사실 완벽하지 않을 때도 충분히 잘했지만 말이야."
만족스럽게 웃으며 선제골의 기쁨을 누리는 영국 코칭 스탭들이다. 전반 10분만에 터진 선제골이었다. 그들이 데이빗의 합류를 간절히 바란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그가 있는 팀은 시작부터 1~2골을 넣고 시작하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이는 기록이 증명하고 있었다. 리그에서 뿐만 아니라 국가 대항전에서도 위축됨이 없었다.
"애초에 23세 이하 대회에서 뛰는게 반칙 같아 보입니다."
"저 친구가 23살이 넘은 것도 아닌데 무슨 반칙."
픽 웃으며 손을 흔드는 피어스 감독, 하지만 코치가 무슨 뜻으로 이야기하는 지는 잘 알고 있었다. 자신도 일정 부분 동감하고 있었으니까.
"그나저나 저 코아테스라는 친구, 같은 팀이라고 해서 조금 걱정했던 것이 참 부질없게 느껴지는 군. 안 그런가?"
"그렇네요. 사실 당연히 이겨낼 거라 생각했습니다만, 이 정도로 쉽게 뚫어 버릴 줄은 몰랐네요."
우루과이와의 최종전을 앞두고 영국의 코치진들은 데이빗의 상대로 코아테스가 나설 것이라 예상했다. 그럭저럭 평가가 괜찮은 유망주이기도 했고 지난 경기들에서도 크게 나쁜 모습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같은 소속 팀인지라 조금은 데이빗에게 익숙하다는 부분 때문이었는데, 이 부분을 놓고 조금 걱정스러운 고민을 했던 것이 사실이다.
'컨디션이 완전하지 않은 데이빗이지 않습니까. 만약 코아테스라는 친구가 그의 버릇이나 플레이에 조금 파악이 되어 있다면 의외로 고전할 수도 있습니다.'
지나친 비약이라는 말도 있었지만 상당히 많은 이들이 공감했던 부분이었다. 하지만 지금와서 돌이켜 보니 정말 부질없는, 쓸데 없는 고민이었다. 코아테스는 전혀 그를 제어하지 못했다. 경기가 재개된 지금도 말이다.
이번에는 패스였다. 돌파를 의식한 코아테스의 허를 찔러 쇄도해 들어가던 스터리지에게 절묘한 침투 패스를 찔러 주었다. 비록 스터리지의 트래핑 미스로 인해 찬스가 무산되었지만 데이빗이 본격적으로 날뛰기 시작했고, 이를 우루과이의 수비진들이 제대로 막아 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컨디션이 완벽히 올라온 데이빗은 23세 이하의 선수들이 막아내기에는 너무나 버거운 상대였고 전반 내내 이리저리 휘둘리며 진땀을 빼야 했다.
최전방에서 데이빗이 날뛰며 상대의 이목을 집중시키자 영국의 미드필더들도 덩달아 살아나기 시작했다. 데이빗으로 인해 강제적으로 수적 열세에 처할 수 밖에 없는 우루과이였고 그 틈을 놓칠만큼 무능력한 영국 선수들이 아니었다. 특히 체력적인 부분에서는 전성기에 미치지 못하지만 여전히 뛰어난 기술과 경기 운영 능력을 가지고 있는 긱스와 베컴, 두 베테랑이 그 혜택을 톡톡히 보기 시작했다. 위험 지역에서 데이빗이 날뛰고 있는 판국에 상대적으로 위험도가 덜한 노장들까지 신경쓸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저 친구는 이제 완전히 살아 난 것 같고..."
느긋하게 중반 지역에서 공을 몰고 나오는 베컴이다. 왼쪽 윙 포워드의 위치와 최전방을 오가며 깽판(?)을 치고 있는 데이빗으로 인해 오른쪽에 있는 자신에게는 마크가 아예 없다시피 한 상황이었다.
"그럼 어디..."
자신의 크로스가 데이빗의 특성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는 이들의 입을 다물게 해줄 시간이었다. 그가 이번 올림픽 대표 합류를 꿈꾸며 가장 원했던 시간이기도 했다.
"잘 받으라고 어린 친구."
씩 웃으며 페널티 박스를 파고드는 데이빗을 겨냥한다. 거리가 상당했지만 상관없었다. 비정상적으로 강한 발목힘의 소유자인 베컴에게 거리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윽고 날카로운 궤적을 그리며 날아가는 크로스.
196cm의 장신 수비수 코아테스가 마크하고 있는 상황에서 크로스를 올리는 것은 그리 현명해 보이지 않았다. 특히 제공권에 있어 강점을 보이지 못하는 데이빗을 대상으로 한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크로스가 더해 진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었다.
코아테스의 머리를 살짝 피해 넘어가는 공, 그리고 거짓말처럼 휘어지며 떨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지금 머리를 갖다 대라는 것처럼 감속하며 떨어지는 공, 데이빗은 찬탄을 금치 못하며 그대로 점프했다. 이런 수준의 크로스는 프로에 데뷔한 이후 처음이었다. 잉글랜드 대표팀의 다우닝이 정확한 크로스로 이름이 높았으나 이정도 수준은 아니었다.
'한 골, 잘 받아 갈게요.'
내심 베컴에게 감사를 표하며 그대로 머리에 맞췄다. 흔들리는 골망, 데이빗은 멀리서 두 팔을 벌리고 환호하고 있는 미남자를 향해 달려갔다.
============================ 작품 후기 ============================
-베컴: 택배왔습니다 여기 서명 좀 해주세요
-상대팀: 안 시켰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