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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에서는 클러치 히터라는 말이 있다. 물론 통계를 냈을 때 과연 이런 말이 성립하는 지에 대한 논란은 분분한 상태였지만 말이다. 중요한 순간에 유독 강해지는 선수, 극적인 타점이나 홈런을 때려내는 선수를 두고 클러치 히터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보통이다.
축구에서는 딱히 그런 용어가 존재하진 않았다. 다만 확실한 것은, 스타 플레이어들, 그중에서도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치는 공격수들의 경우에는 보통 극적인 순간에 골을 기록하며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케이스들이 종종 있었다. 데이빗도 그런 케이스 중 하나였다.
그가 기록하는 말도 안되는 득점 페이스에 가려져서 그렇지, 그가 기록하는 골들의 대부분은 동점골, 혹은 선제골 내지 역전골이 많았다. 크게 이기는 경기에서 확인 사살하는 골은 거의 없었다. 다만 워낙 미친 듯이 골을 넣다보니 그런 이미지가 오히려 퇴색되었을 뿐. 실제로 그의 프리미어 리그 데뷔골 또한 패배 직전의 팀을 간신히 구해내는 극적인 동점골이었다.
'3 대 0으로 이기는 경기에서 세 골을 더 넣어 6 대 0을 만드는 공격수보다, 가장 필요할 때 한 골을 넣어 주는 공격수가 더 소중한 법이지.'
제라드는 애슐리 영으로부터 패스를 이어받으며 전방을 주시했다. 우크라이나의 수비진이 생각 이상으로 견고했다. 아니, 견고하다기 보다는 어찌어찌 꾸역꾸역 막아내고 있는데 그것을 뚫어 내기가 난감했다.
'뭐, 매일 같이 골을 넣어 주니 이제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말이야.'
중요한 순간에 강하다는 말은 결국 매번 그런 활약을 보이지는 못한다는 것이 기본 전제로 깔려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매일 같이, 언제나 필요한 순간에 결과를 내주다 보니 헷갈릴 법도 했다.
이럴 때 결국 공을 건네게 되는 건 한 사람밖에 없었다. 언제부턴가 자신은 공을 잡으면 가장 먼저 그 선수를 확인하게 되는 버릇이 생겼다. 그리고 그와 눈이 마주쳤다고 느꼈고 지체 없이 공을 그에게 보냈다. 그라면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을 만족시켜 줄 거라 믿으면서.
'부탁한다. 이 질척거리는 경기를 좀 깔끔하게 만들어 줘.'
제라드로부터 패스를 이어받기 전, 데이빗은 이미 드리블 돌파를 시도하기로 마음 먹은 상태였다. 굳이 영웅이 되고 싶어서, 혼자 모든 걸 할 수 있다는 오만의 발로는 아니었다. 오히려 30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나는 동안, 최대한 개인 플레이를 자제하고 주변으로 찬스를 이어나가는 데 집중했다. 하지만 그다지 재미를 보지 못했다. 그렇다면 계속 이대로 연계에만 집중하고 있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발을 걸고 싶으면 걸어.'
공을 받자마자 자신의 발을 슬쩍 걷어 차는 것이 느껴진다. 하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오히려 어설프다고 느꼈다. 거칠게 할 거라면 정말 죽일 듯이 걸어야 했다. 그런 플레이가 일상처럼 펼쳐지는 리그에서 뛰었던 데이빗이다.
'옷을 잡고 싶으면 얼마든지 잡아.'
그리고 반전하는 자신의 움직임을 봉쇄하기 위해 유니폼을 잡아 당기는 손길, 그것을 단호히 팔로 쳐내고 달렸다. 다시 한 번 뻗어 오는 발을 옆으로 슬쩍 피하자 조금 넓어진 공간이 보였다.
'충분해.'
가속하기에 이 정도의 공간이라면 충분했다. 아니, 충분하지 않다고 해도 비집고 열어 젖힐 작정이었다. 데이빗은 허벅지에 힘을 더하며 한층 더 빠르게 치고 달렸다.
주위의 시야가 핑핑 돌아간다. 시끄럽게 경기장을 울리던 함성 소리가 이명처럼 느껴졌다. 아니, 이젠 들리지도 않았다. 뻗어 오는 발을 피하고 부딪혀 오는 몸을 버텨 낸다. 단순했다. 그저 한 발이라도 더 골대에 가까이. 그 하나만을 바라고 달렸다. 그리고 마지막 한 명을 제쳐내고 시야가 환하게 트였다. 텅 비어 있는 골대가 눈에 들어 왔고 그제야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공을 가볍게 굴려 넣었다.
[결국 또 이 선수가 해냅니다! 전반 33분! 잉글랜드가 한 골 앞서 나가기 시작합니다!]
[전반 30분 내내, 단 한 번의 드리블 돌파를 시도하지 않았던 것은 지금을 위해 아껴뒀던 것일까요? 갑자기 돌변하여 달려드는 데이빗 장을 감당해내지 못하는 우크라이나입니다. 이건 정말 뼈아픈 실점이네요!]
[사실 파울이 불려도 이상하지 않은 장면이었습니다. 하지만 휘청거리면서도 플레이에 집중했고 결국 어드밴티지 판정을 이끌어 냈죠. 우크라이나로서는 차라리 그가 넘어지길 바랐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몸 싸움이 약하다는 이미지가 있지만 아예 경쟁력이 없는 선수는 아니거든요. 파울로 끊고 싶다면 좀 더 단호하게 대처했어야 합니다. 어설프게 잡아 끌어 봐야 넘어지지 않아요. 그렇게 몸 싸움에 치명적으로 약점이 있는 선수라면 세계에서 가장 거친 리그 중 하나인 프리미어 리그에서 최고로 꼽힐 수 없었을 테니까요.]
[두 명의 수비수와 함께 골키퍼까지 제치고 득점에 성공합니다. 도대체 이 선수를 어떻게 막아야 할 까요?]
[확실한 것은, 우크라이나는 어떻게 해서든 이 선수를 제어해야 한다는 겁니다. 한 골은 따라 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의 실점은 그대로 패배로 직결될테니 말이죠. 어려운 일이지만 반드시 해내야 합니다.]
후반들어서도 경기 양상은 비슷하게 흘렀다. 다만 전반전에 데이빗에게 호되게 당한 우크라이나가 그에게 마크를 더 붙인 것이 달라졌을 뿐. 잉글랜드는 데이빗을 이용한 기습적인 돌파를 이용하기 어렵게 된 대신 보다 넓은 공간을 사용할 수 있었고 이를 십분 활용하여 공격에 나섰다. 데이빗은 이 한 골로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다 했으니 이제 다른 선수들이 제 역할을 해줘야 할 때였다.
하지만 우크라이나는 끈질겼다. 운동량에 있어서 만큼은 잉글랜드 선수들을 압도했다. 데이빗에게 세 명의 수비가 붙으며 오히려 수적 열세를 자초한 꼴이 되었으나 나머지 선수들이 정말 헌신적으로 경기장을 누비며 공백을 최소화 했다.
이는 잉글랜드 선수들이 어느 정도 경기 운영을 보수적으로 진행한 탓도 있었다. 리드하고 있는 것은 잉글랜드였고 무리할 상황이 아니었다. 설령 한 골을 실점한다고 해도 조 1위를 차지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로서는 괜히 무리한 공격을 감행하다 역습을 얻어 맞는 일은 사양하고 싶었다.
우크라이나느 이런 상황을 뒤집을 만한 힘이 부족했다. 추가 실점은 막았으나 공격으로 나설 여력이 부족했다. 셰브첸코가 전성기였다면 모르되, 그는 이미 은퇴를 눈앞에 둔 노장이었다. 과거, 무결점의 스트라이커로 불렸던 시절처럼 홀로 수비진을 찢어 발기는 플레이는 이제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경기 종료가 가까워졌다. 그리고 동시에 시작했지만 조금 먼저 끝난 스웨덴과 프랑스의 경기 결과를 확인한 홈 팬들이 탄식을 흘리기 시작했다.
"하하..."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전광판을 바라보는 한 선수, 짧은 금발에 날렵한 인상의 남자의 어깨는 축 내려가 있었다.
"...여기까진 가."
조국을 대표하여 국제 대회에 나선 지도 오래 되었다. 이번 경기가 그의 111번 째 A 매치였다. 하지만 우크라이나는 세계적인 레벨에 부족함이 있는 나라였다. 염원하던 월드컵 무대는 한 번 밟아 본 것이 전부였고 자국에서 열리는 이번 유로 2012에서도 첫 승을 따낸 것이 고작이었다. 반드시 8강, 그 이상에 오르리라 다짐했건만 결국 힘든 상황에 처했다.
삑 삑 삐익-
그리고 경기 종료를 알리는 휘슬 소리. 자신도 모르게 무릎에 힘이 풀렸다. 그라운드 위로 무릎을 꿇고 주저 앉는 셰브첸코,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아직 막연했다. 자신의 마지막 현역 경기가 이렇게 끝났다는 사실이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는 잉글랜드 선수들의 모습이 보였다. 자신도 저러고 싶었다. 경기가 끝난 뒤 동료들과 서로 얼싸 안으며 승리의 기쁨을 나누고 더 높은 곳을 향해 달리자는 다짐을 하고 싶었다.
"...정말 마지막까지 미련이 남지만..."
이런 것도 축구가 아니겠냐며 몸을 일으킨다. 패자가 경기장에 더 남아 있어 봐야 구차해질 뿐이다. 하지만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셰브첸코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 걸음의 끝에는 자신과 같은 등번호를 달고 있는, 상대 팀의 7번 선수가 있었다.
"아...당신은..."
자신의 접근을 확인했는지 의외라는 표정이 떠오르는 상대였다. 가까이에서 보니 생각보다 더 어리게 느껴졌다. 잉글랜드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전형적인 동양인의 외모 덕분인지 나이를 가늠하기가 더 어려웠다.
"반가워. 안드레이 셰브첸코야."
패배의 씁쓸함을 감추며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하는 모습, 데이빗은 아 하는 탄성과 함께 마주 손을 잡아왔다.
"데이빗 장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영광이에요."
"영광은 무슨."
그 말에 오히려 쓴 미소가 지어진다. 그리고 입술을 달싹이며 상대에 대한 칭찬부터 건넸다.
"잘하더라. 정말 인상적이었어."
담백한 칭찬에 데이빗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눈 앞의 이 선수의 전성기를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회자되는 것을 보았을 때, 아직 자신은 부족함이 많다고 여겼다.
"아직 부족합니다. 당신의 전성기 때는 더 대단했다고 들었는데요."
"빈 말이라도 고맙네."
적당히 자신을 추켜세워 주는 모습이 영 싫지는 않았다.
"뭐...만나고 싶었던 것도 맞는데 지금 막상 만나니까 무슨 말을 해야할까 싶기도 하고..."
그러면서 유니폼을 벗어서 건넨다. 데이빗도 바보가 아니었기에 재빨리 자신의 옷을 벗어 그와 교환을 마쳤다. 서로의 땀으로 흥건한 유니폼을 그 자리에서 입는다. 셰브첸코는 자신의 제안에 흔쾌히 응해준 데이빗에게 감사를 표하며 가볍게 포옹을 나누었다.
"그래, 이거면 충분할 거 같네. 내 마지막 경기에서 너 정도 되는 선수를 볼 수 있어서 행운이라고 생각해."
"......"
무슨 말을 해야할 지 몰랐다. 데이빗은 자신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의 경험을 가진, 은퇴를 앞둔 선수의 심정을 제대로 알 기 힘들었다. 아마 자신이 나이를 더 먹어, 은퇴를 하게 되는 시점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런 표정 짓지 마. 진심이니까. 너희도 목적은 우승이겠지. 열심히 해봐. 충분히 우승을 노려볼 수 있을 것 같아."
그러면서 아직 떨쳐내지 못한 아쉬움이 남았는지 조그만 한숨과 함께 중얼거린다.
"한 경기, 딱 한 경기만 더 치르고 싶었는데..."
이미 벤치 선수들의 분위기와 관중들의 울음 소리에 스웨덴과 프랑스의 경기 결과를 짐작할 수 있었던 셰브첸코였다.
"셰브첸코 씨..."
조국의 국기를 달고 단 한 경기만이라도 더 뛰고 싶었다는 독백은 가슴을 크게 울렸다. 셰브첸코는 분위기가 너무 무거워졌다 싶었는지 애써 미소 지으며 데이빗의 어깨를 두드렸다.
"넌 신경쓰지 않아도 돼. 어느 팀이나 목표가 다른 법이니까. 그래도 난 후회하지 않아. 우리 나라를 대표해서 뛸 수 있었던 건 분명 행복한 일이었으니까."
"당신은 정말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기회가 되면..."
"그래 기회가 되면 어디 좋은 곳에서 술이나 한 잔 하자."
"꼭 그럴 기회가 있을 거에요."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악수를 한 번 더 나누고 헤어졌다. 아쉬워 하는 홈 팬들에게 다가가 인사를 하는 셰브첸코의 마지막 뒷 모습을 바라보던 데이빗은 가벼운 한숨과 함께 발걸음을 돌렸다.
-경기 종료
England Ukraine
스코어 1 0
점유율 58% 42%
슈팅 16 7
유효슈팅 7 4
코너킥 10 6
오프사이드 3 2
옐로우카드 2 2
레드카드 0 0
파울 13 12
D조 결과
잉글랜드 3승 0무 0패 7득점 3실점 +4 9점
프랑스 1승 1무 1패 4득점 4실점 +0 4점
우크라이나 1승 0무 2패 2득점 4실점 -2 3점
스웨덴 0승 1무 2패 4득점 6실점 -2 1점
8강 대진
체코 VS 포르투갈 (6/21 바르샤바)
스페인 VS 프랑스 (6/23 도네츠크)
독일 VS 그리스 (6/22 그단스크)
잉글랜드 VS 이탈리아 (6/24 키예프)
============================ 작품 후기 ============================
-리버풀: 클러치 히터가 왜 필요함?
-첼시, 아스날, 맨유, 맨시티: ???
-리버풀: 공격수들은 원래 골 넣는게 일이잖슴?
-첼시, 아스날, 맨유, 맨시티: ㅇㅇ?
-리버풀: 우리 애는 한 경기에 한 골씩은 꼬박 꼬박...
-첼시, 아스날, 맨유, 맨시티: 야이
-왜그래요
-누구나 다 한 경기에 한 골씩은 넣는 거 아닌가요?
-꼭 그런 선수 하나 없는 것처럼
-다들 그런 선수 한 명씩은 가지고 있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