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he Answer-252화 (252/346)

00252      =========================================================================

2012년 5월 5일, 하루에도 몇 차례 씩 날씨가 바뀌곤 하는 잉글랜드의 변덕스러운 날씨가 오늘은 해당 사항이 없어 보였다. 아침부터 화창한 날씨가 계속되었고 간간히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 적당한 습도, 소위 말하는 외출하기 딱 좋은 날씨였다.

그래서 일까, 오늘따라 리버풀 시내에 유독 사람들이 북적북적하다. 1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축복받은 날씨를 즐기고자 하는 것인지, 평소의 몇 배가 되는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있었다. 조금 특이한 점이라면, 그들 모두 붉은색의 저지를 입고 있다는 것, 그리고 약속이나 한 것처럼 같은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젠장, 결국 표를 못 구했잖아."

"말도 마. 다들 구하지 못해서 안달인데 파는 사람은 턱없이 부족하다고. 거의 대부분 표를 팔아서 한 몫 챙기려는 것 보다 경기를 보는 쪽을 택한 것 같아."

"나 같아도 그러겠네. 이번에 우승하고 나서 또 20년을 기다려야 할 지 누가 알아?"

"야, 저 새끼 입 좀 막아. 재수 없게. 지랄할거면 집으로 가버려 자식아."

그리고는 인근 펍으로 향하는 무리, 그러면서도 꼭 경기장에 갔어야 하는데 라며 아쉬움을 표한다.

오늘은 이곳, 리버풀에 사는 사람들에게 아주 특별한 날이었다. 정확히는 리버풀 내에서 리버풀 FC라는 구단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날이겠지만 말이다. 리버풀이 1989-1990 시즌에 우승한 이후, 처음으로 우승을 눈 앞에 두었기 때문이다. 20년도 넘는 세월, 프리미어 리그 출범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1960년 대 중반부터 80년 대 후반까지, 리그 굴지의 강호로 이름을 날렸던 리버풀, 명실 상부한 잉글랜드 최강의 클럽이었고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강 팀이었다. 하지만 프리미어 리그로 리그가 개편된 이후, 상황은 달라졌다.

경제적인 이유로 지역 감정이 원수 지간의 그것에 가까웠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불세출의 명장 알렉스 퍼거슨의 지도 아래 승승장구를 거듭하는 동안, 리버풀은 현상유지조차 하지 못했다. 오히려 90년 대 후반부터 숙적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우승 경쟁팀 대열에서 한 걸음 멀어진 상태가 되었다. 리버풀이 주춤하는 사이 아스날이 치고 올라왔고 2000년 대 초 중반부터는 막강한 자금력으로 무장한 첼시가 최강의 자리에 올랐다. 설상가상으로 2000년 대 후반에는 첼시보다 더 말도 안되는 자금을 동원한 맨체스터 시티까지 치고 올라오며 빅 4의 자리마저 위협당했다.

리그에서 죽을 쑤고 있었던 것과는 별개로 유럽 대항전, 그리고 기타 컵 대회에서의 성적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나라, 어느 팀의 팬이라고 해도 자국 리그 우승을 최고 가치로 치고 있는 상황에서 여타 컵 대회의 우승은 그들의 갈증을 해소시키는 데 부족함이 많았다.

그랬던 그들에게 이번 시즌은 믿을 수 없을 만큼 행복한 시즌이었다. 꿈에도 그리던 우승이 눈 앞의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오늘 경기에서 이긴다면 그들은 20년 간의 기다림을 보상받게 되는 것이니 그들이 가만히 집에서 기다리고 있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원래 매진 사례가 흔했던 안필드의 입장권은 구하려는 사람들이 넘쳐났고 암표 가격은 상상을 초월할 지경으로 올라갔다. 1000파운드를 넘어 2000파운드, 3000파운드를 지나 지금 5000파운드(약 900만원)에 육박할 지경이 되었으니 얼마나 많은 이들이 표를 구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리버풀 시내에도 사람이 많았지만 이곳 안필드 경기장 주변에 비할 바는 되지 못했다. 그야말로 발 디딜 틈도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그리고 이번 시즌 최고의 호황을 맞은 암표상들은 신이 나서 호객 행위를 하고 있었다. 리버풀 구단에서는 경기장에 입장하지 못하는 많은 팬들을 위해 경기장 바깥의 광장에 대형 스크린을 설치하여 그들의 관람을 도왔다. 이곳 또한 자리를 선점하기 위한 팬들이 몰리며 경기 전날부터 자리를 잡은 팬들로 가득차 버렸지만 말이다.

"온다!"

누군가 손가락을 들어 한 쪽을 가리키며 외치자 하나 둘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함성이 울려 퍼졌다. 리버풀 선수단을 태운 버스가 경기장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으아아아!!"

"오늘 반드시 이겨줘! 너희는 할 수 있어!"

"씨발! 사랑한다 너희들!"

광기어린 환대를 받으며 선수들이 하나 둘 버스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이어폰을 귀에 끼고 정신을 집중하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지나가는 선수,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팬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는 선수도 있었다. 데이빗은 후자였다. 절제되지 않는 괴성을 지르던 팬들은 곧 목소리를 모아 그들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경기장 바깥에서 시작된 노래 소리는 이미 경기장을 가득 채운 팬들에게도 전해졌고 곧 경기장 안팍에서 웅장한 노래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휘유. 진짜 끝내 주네."

통로를 지나 라커룸에 들어선 데이빗이 자신의 라커를 열며 휘파람을 불었다. 평소에도 응원 열기라면 전 세계의 어느 팬들에게도 뒤처지지 않는 이곳 안필드의 팬들이다. 하지만 오늘은 평소와도 달랐다. 이런 말도 안되는 수준의 응원은 처음 겪어 보는 데이빗이었기에 놀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나도 이런 건 처음 봐. 진짜 환상적이네. 이곳 팬들은 정말 미쳤어. 아, 물론 좋은 뜻이야."

수아레즈도 여간 놀란 것이 아닌듯 했다. 아직 우승을 확정 지은 것도 아닌데, 만약 오늘 우승을 확정 짓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다들 경험이 없어서 그래. 태어나서 우승을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팬들도 많을 걸? 지금 90년 대에 태어난 친구들이 스무 살이 넘었잖아? 그래서 자기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거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면서도 일면 씁쓸함을 내비치는 제라드, 그는 이 클럽에서 가장 긴 시간을 뛴 프랜차이즈로서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우리가 죽일 놈들이지. 아 새로 온 친구들은 제외."

캐러거도 말을 받았다. 물론 장난스럽게 마르코 로이스, 무사 시소코 등의 선수를 가리키며 농담을 던졌다. 조금 무거운 이야기라고 해도 분위기가 너무 처지지 않게 만드는 것은 그의 재능이었다. 선수단이 그를 신뢰하고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부드러운 리더십에 있었다.

"헤이 캐라, 그렇게 말하니까 우리가 꼭 죄인 같잖아?"

카윗이 입고 있던 트레이닝 복을 벗으며 발로 캐러거를 슬쩍 건드리며 장난스레 불만을 표한다.

"그러게 잘 좀 하지 그랬어요."

데이빗이 혀를 차며 끼어들자 카윗이 으르렁 거리며 달려 들었다. 우락부락한 상체를 드러낸 상태로 달려드는 카윗의 모습에 데이빗이 기겁했다. 도망치고 싶었지만 바지를 갈아 입기 위해 트레이닝 복 바지를 반쯤 벗고 있던 상태라 도망가기가 어려웠다. 상체를 벗고 있는 카윗, 바지를 반쯤 내리고 있는 데이빗이 서로 헤드락을 걸고 투닥거리는 모양새는 과히 보기 좋지 못했다.

"아 씨, 눈이 썩을 것 같아. 야 니네 둘 다 꺼져."

글렌 존슨이 못 볼 꼴을 봤다며 타박했고 다른 이들도 동참했다.

"게이같은 자식들, 아 옷이나 입고 하던가! 아니면 아예 벗고..."

"무슨 미친 소리를 하는 거야?"

동료들의 타박에 자신들의 꼴이 꼴불견이었다는 사실을 인지한 데이빗과 카윗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서로를 놓아 준다. 데이빗은 재빨리 유니폼으로 갈아 입으며 불의의 사태(?)에 대비했다. 그리고 달글리시 감독이 코치진을 대동하고 라커룸으로 들어 왔다.

"다들 컨디션은 어떤가?"

"최고에요."

"지금부터 두 게임이라도 뛸 수 있을 것 같아요."

가벼운 질문에 선수들은 강한 자신감을 보이며 대답했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 달글리시 감독, 그가 보아도 선수들의 상태는 확실히 괜찮아 보였다. 지난 노리치 시티 전에서 몇 몇 선수가 얼어 있던 것과 달리 모든 선수들이 의욕에 불타고 있었고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아주 좋아. 사실 말이야, 나는 어젯밤에 잠을 좀 설쳤다네.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는거야. 여기 눈 밑에 다크서클 내려온 게 보이나? 무슨 너구리도 아니고 말이야."

"감독님 원래 그랬는데요?"

카윗이 슬쩍 끼어들자 달글리시 감독은 자상한 미소로 화답했다.

"닥치게 디르크. 뭐 어차피 경기를 뛰는 건 내가 아니라 자네들이니 상관 없겠지?"

말은 저렇게 해도 선수들은 알고 있었다. 감독은 아마 오늘 상대할 첼시의 분석을 위해 밤잠도 아껴가며 매달렸음을, 구태여 저렇게 엄살 아닌 엄살을 피우는 것은 자신들을 편하게 해주기 위한 배려라는 것을 말이다.

"어제도 이야기했지만 말이야, 오늘 다시 한 번 라인업을 불러 주도록 하겠네."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고 한 명씩 호명하기 시작한다.

"골키퍼는 페페, 자네일세. 이번 시즌의 시작과 끝을 자네가 맡게 되는 군. 시작처럼 멋진 마무리, 기대하겠네."

"탁월한 선택이군요 감독님."

자신의 이마를 탁 치며 너스레를 떠는 레이나, 달글리시 감독은 '오늘 실수하면 자네가 가져 온 술 전부 갖다 버릴거야'라며 장난스러운 엄포를 놓았다.

"포 백은 호세, 제이미, 마틴, 글렌 자네들이 나서 주게. 상대는 아마 디디에 드록바가 원 톱으로 나설 거야. 제이미가 일단 전담 마크를 진행하고 마틴은 라인 통솔 및 커버에 힘쓰도록. 글렌과 호세는 첼시의 2선 공격수들, 마타, 하미레스와 같은 선수들의 기습적인 침투에 주의하도록. 알겠나?"

"어휴, 오늘 힘 좀 써야겠구만."

프리미어 리그 최강의 피지컬을 자랑하는 디디에 드록바의 마크맨으로 낙점된 제이미 캐러거가 장난스러운 한숨과 함께 엄살을 늘어 놓는다. 달글리시 감독은 계속해서 라인업을 불러 나갔다.

"왼쪽 미드필더에 마르코 로이스, 그리고 중앙에는 스티븐과 루카스가 서고 오른쪽에 디르크, 자네가 서도록. 루카스는 알고 있겠지만 프랭크 램파드의 자유를 뺐는 역할이야. 그가 활개치게 두어서는 경기가 곤란해져. 스티비는 스스로 판단해서 적절히 밸런스를 맞추어 주도록."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미드필드 라인의 선수들, 마지막으로 공격수, 투 톱의 자리만 남았다. 이 자리는 정해진 거나 다름 없는 부분. 역시 달글리시 감독의 입에서 예정된 이름들이 흘러 나왔다.

"데이빗, 그리고 루이스. 오늘 최전방이야. 자네들의 역할은 언제나 그렇듯 하나 뿐이지. 골을 넣을 것. 푸스카스 상을 받을 만한 멋진 골이건, 골대 앞에서 우연찮게 얻어 걸리는 줏어 먹는 골이건 중요하지 않아. 최대한 많은 골을 넣도록. 찬스를 절대 놓치지 말란 말이야. 내 말 알아 듣겠나?"

"저는 오늘 이 친구에게 양보하겠습니다."

왠일로 수아레즈가 씩 웃으며 옆에 있던 데이빗을 가리켰다. 데이빗은 웃으며 손으로 숫자 40을 표현하고 있었다. 유쾌한 웃음을 터뜨린 달글리시 감독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흡족함을 표했다.

"그래, 그것도 중요하지. 루이스는 그럼 데이빗에게 최대한 맞춰 주게나. 그래도 완벽한 찬스를 양보해서는 안된다는 것 알고 있겠지?"

"물론이죠. 제가 가장 좋은 상황이라면 망설이지 않고 슛을 노릴 겁니다."

"그래, 그거면 됐어. 데이빗은 알아서 잘 할거라 믿네. 자네라면 이기심으로 경기를 망치지 않을거라 믿고 있어."

그리고 호명받지 못한 선수들을 둘러보며 한 명씩 눈을 맞추었다.

"감독으로서 정말 아쉬운 순간이지. 한 시즌을 함께 고생했고, 누구하나 소중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네."

담담히 고백하듯 이야기한다.

"같은 리그 경기라고, 한 경기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우승을 결정 짓는 자리가 선수에게 얼마나 영광된 자리인지 알고 있네. 그런 자리에 스타팅으로 서지 못한다는 게 얼마나 슬픈 일인지도 잘 알고 있어."

그 또한 선수 출신인 만큼, 선수들이 이 한 경기에 거는 기대가 크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마음같아서는 모두 뛰게 해주고 싶네. 분명 이 경기에서 벤치에 있는 친구들의 힘이 필요한 순간도 찾아 올거야. 하지만 모두가 경기장을 밟을 수는 없겠지."

교체 인원은 최대 3명까지 가능한 것이 규정이다.

"하지만 자네들이 이번 시즌 팀을 위해 헌신했다는 사실은 절대 변하지 않네. 고맙네. 그리고 미안하네. 마지막까지 같은 팀원으로서 함께 해주게. 그리고 오늘, 모두 같은 기쁨을 누리고 성공을 맛보는 거야."

노 감독의 진심이 담긴 간곡한 말이 끝나자 선수들은 가볍게 박수를 쳤다. 경기에 나서지 못하는 선수들은 아쉬움이 있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달글리시 감독은 시즌 내내 그들의 출전 시간을 최대한 균등히 배분해 주려 노력했고 경기에 나서지 못하는 선수들을 배려해 주었다. 불만이 없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이자리에서 터뜨릴만큼 경우가 없지도 않았다.

"이해해줘서 고맙네. 경기에 나서는 선수들은, 벤치에 최고의 선수들이 대기하고 있는 만큼, 그들을 대표해서 경기를 나선다는 자긍심을 가지고 플레이하고 오도록. 얼빠진 플레이를 했다가는 바로 교체해 버릴테니 말이야."

그리고 슬슬 경기장으로 나설 시간이 가까워져 왔다. 달글리시 감독은 라커룸 내에서도 생생히 들을 수 있는 팬들의 노래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했다.

"이들이 무얼 원하는 지 자네들은 잘 알고 있을 거야. 긴 말은 필요 없겠지. 오늘 우리는 최고가 된다. 길었던 무관의 시절을 여러분들의 손으로 끝내는 거다. 여러분이 바로 이 클럽의 역사가 되는 거야. 할 수 있겠나?"

"오오오!!!"

끓어 오르는 마음을 담아 포효하는 선수들, 달글리시 감독은 강한 목소리로 말을 마쳤다.

"가자. 오늘 드디어 20년 만에, 잃어버린 왕좌를 찾는 거다."

============================ 작품 후기 ============================

-귀여운 중년...

-귀여운 아저씨...

-제라드가 귀엽다는 거죠?

-전 아직 창창한 청년이...

-그리고 저보고 마법사라고 하시는 분들ㅜ

-마법사 아닙니다!

-다만 오래(?) 되었을 뿐

-잠깐 눈에서 뭐가...

-겨울에 땀이 나네요

-내일 조아라 방문해서 업무를 보고

-조아라 직원분들하고 조경래 작가님(같은 꿈을 꾸다 시리즈 작가님!)과 한 잔 하기로 했어요

-그냥 미친듯이 먹고

-26일에 일어날거임

-흥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