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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빗은 오랜만에 에리카와 점심을 함께하고 있었다. 학교를 다니는 에리카와 경기가 없는 날이라도 오전 중에 훈련을 소화하는 데이빗의 스케줄 상 점심때는 보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오늘 구단에서 하루 휴식을 주었고 타이밍 좋게 에리카의 수업이 일찍 끝나게 되었던 것이다. 에리카는 자신이 연습한 요리를 해주겠다고 데이빗에게 말했고 데이빗은 반색하며 열렬히 환영했다. 혼자서 먹어 봤자 늘 먹는 햄과 샌드위치, 조금 신경을 쓴다고 해봐야 냉동된 티본 스테이크를 꺼내 구워먹는 수준이었으니 말이다.
디르크와 전화를 마치고 곧 에리카가 찾아 왔다. 뭔가 본격적으로 해볼 요량인지 그녀는 양 손 가득 무언가를 사들고 찾아 왔고 데이빗과 인사를 나누기 무섭게 주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도와줄 것이 없는지 기웃거리는 데이빗을 향해 편하게 TV나 보면서 기다리라는 말을 남겼다.
요리에는 큰 조예가 없는 데이빗이었기에 얌전히 말을 따랐다. 물을 한 잔들고 거실로 나가 소파에 몸을 실었다. 채널을 이리 저리 돌리며 볼 거리를 찾았다. 자주 보는 스포츠 채널에서는 어제 자신들의 경기가 재방송 되고 있었다. 다시 채널을 돌리자 여러 패널들이 나와 챔피언스 리그 경기에 대한 리뷰를 남기고 있었다. 혀를 차며 빠르게 채널을 넘겼다. 언론에서 떠드는 내용은 보통 그에게 부담감, 혹은 짜증을 불러 일으키는 경우가 많았다. 어느 쪽도 달갑지 않았기에 굳이 즐거운 식사를 앞두고 보고 싶지 않았다. 몇 개의 채널을 더 돌리자 코메디 프로그램이 방영되는 곳을 찾을 수 있었다. 적당히 웃고 즐기기에 괜찮다 싶어 보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재미는 없었다. 오히려 주방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더 신경쓰였다. 어떤 요리를 먹게 될까, 아니 그것보다 에리카가 직접 해주는 요리라는 사실에 기대가 더욱 컸다. 그동안 간단한 샌드위치 수준의 요리라면 몰라도 둘이서 직접 해먹은 적은 없었기에 오늘 그녀가 직접 준비한 것이 있다는 말에 기분이 좋았다.
"조금 걸릴 것 같아. 배 많이 고파?"
준비가 생각보다 오래걸릴 것 같은지 주방에서 에리카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데이빗은 크게 대답했다.
"괜찮아! 천천히 준비해 줘."
빨리 먹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배가 많이 고픈 것은 아니었다. 기다리는 기분도 나쁘진 않았다. 코미디 프로그램은 생각보다 재미가 없었다. 딱히 TV가 눈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슬쩍 한켠에 놓인 게임기가 눈에 들어 왔다. 마찬가지로 별로 내키진 않았다.
'도와주고 싶은데...'
힐끗 시선을 주방으로 던진다. 바쁘게 이것 저것 준비하는 에리카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 온다. 사실 도와줄만한 능력도 없었으나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 마음을 알기라도 한 것처럼 에리카의 목소리가 들려 온다.
"얌전히 기다려 줘. 아직 익숙하지가 않아서 누가 보면 긴장된단 말야."
'...등 뒤에도 눈이 달렸나.'
슬며시 일어나던 데이빗이 입맛을 다시며 다시 주저 앉았다. 저렇게 말하는데 억지로 가서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마침 타이밍 좋게 전화벨이 울렸다.
"누구지...? 모르는 번호인데..."
자신에게 연락할 사람이라고 해봐야 뻔했다. 에리카와 제임스, 티티, 그리고 팀 동료들과 달글리시 감독을 제외하면 딱히 연락하는 사람이 없었고 모르는 전화번호로 걸려오는 경우는 드물었다.
"여보세요? 데이빗 장입니다."
-안녕하세요. 저희는 무이자, 무담보로...
뚝-
"...지랄하고 있네."
하필 걸려와도 스팸이냐고 데이빗이 투덜거렸다. 전화기를 소파 한 켠에 집어 던지고 재미 없는 코메디 프로그램 시청을 계속했다. 빨리 에리카의 준비가 끝나길 바라면서 말이다.
"우와..."
데이빗은 테이블에 차려진 것들을 보고 탄성을 흘렸다. 생각보다 오랜 시간을 기다렸기에 조금 조바심까지 들 지경이었지만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에리카가 기다리라고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알맞게 구워진 스테이크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보기 좋게 담겨진 샐러드와 파스타, 그리고 후식으로 준비한 치즈와 요거트도 있었다.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진 빵도 있었는데 옆에 처음 보는 소스가 함께 있었다.
"이거 정말 에리카 네가 지금 다 만든거야?"
놀라운 표정으로 묻는 데이빗의 모습에 뿌듯함을 느꼈는지, 에리카가 에헴 하며 가슴을 내밀며 말했다.
"소스는 집에서 만들어 온 건데 어쨌든 다 내가 만든 건 맞아."
"진짜 대단하다. 와...정말..."
자리에 앉으며 연신 감탄을 발하는 데이빗의 모습에 에리카가 기분 좋게 웃으며 권했다.
"모양은 그럴 듯하게 나오긴 했는데...맛이 어떨지는 모르겠어. 한번 먹어봐."
"응. 잘 먹을게!"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데이빗이 허겁지겁 식기를 손에 쥔다. 먼저 빵을 한 조각 들어 처음 보는 소스를 듬뿍 발랐다. 향을 맡아 보고 싶었지만 코로 킁킁 거리는 것도 보기가 좋지 않을 것 같아 참기로 했다. 기대감 어린 표정으로 빵을 한 입 크게 베어 문다. 에리카도 기대를 숨기지 않고 우물거리는 데이빗을 향해 소감을 묻는다.
"먹을 만해?"
"어 맛있어!"
꿀꺽 삼키고 엄지를 치켜 세운다. 그리고 허겁지겁 나머지 조각을 입에 가져가며 질문을 던진다.
"이 소스 진짜 맛있는데? 어떻게 만든거야?"
"그냥 여러가지 섞었어. 병아리콩이랑, 마늘이랑 퓨레해 오일이랑...아무튼 맛있다니 다행이네."
내심 자신작이었다며 에리카가 예쁘게 웃는다. 데이빗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을 멈추지 않았다.
"밖에서 파는 것보다 훨씬 맛있어! 이것만 가지고도 식사가 충분할 것 같아."
"아니, 그래도 다른 것도 좀 먹어 봐."
스테이크, 파스타, 샐러드 등 준비한 것이 많았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빵만 가지고 배를 채울 기세인지라 에리카가 다른 것을 들 것을 권했다.
"걱정하지마. 여기 있는거 오늘 싹 다 먹을 거니까."
"놀랐어...정말 운동 선수는 운동 선수구나."
제법 많은 양이었음에도 데이빗은 자신의 말을 지켰다. 그녀가 만들어 놓은 음식을 모조리, 소스까지 남기지 않고 싹싹 긁어 먹은 것이다. 에리카는 꽤 넉넉하게 준비했다고 생각했음에도 남는 것이 없자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응? 새삼스럽게 왜 그래? 우리 만난 것도 벌써 2년이 훨씬 넘었는데."
기분 좋게 배를 문지르며 포만감을 만끽하고 있던 데이빗이 말했다. 에리카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릇을 정리했다.
"그거야 그런데...이렇게 많이 먹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아서. 그동안은 운동 선수가 많이 먹는다고 듣긴 했는데 널 보면 별로 그런 것 같지도 않다고 생각했었거든."
"아, 그랬나? 네가 해준 요리가 맛이 있어서 그랬나봐."
"말은 잘해."
아부라도 기분이 썩 괜찮았는지 에리카가 흥얼거리며 설거지를 시작했다. 데이빗은 그런 그녀를 만류했다.
"기다려봐. 맛있는 요리까지 대접받았는데 설거지까지 시킬 순 없잖아. 내가 할게. 좀 쉬고 있어."
"괜찮아. 너 어제 경기 뛰고 오느라 힘들었을텐데. 쉬고 있어."
"문제 없어. 설거지 정도야 할 수 있어."
잠깐의 실랑이 끝에 데이빗의 고집을 꺾지 못한 에리카가 결국 웃으며 손을 닦았다. 그리고 자신은 차를 준비하겠다고 이야기 한뒤 포트에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얼마 전에 선물 받은 차가 있는데, 아마 그 위에 찬장에 있을 거야."
"어디?"
"아니, 그 옆에. 어 거기."
"아 찾았다. 헤에, 이거 비싼 거 아니야? 어디서 선물 받았어?"
"어디였더라...몰라. 티티가 가져다 줬는데 누가 줬다고 듣긴 들었는데 까 먹었어."
그러면서 무슨 업체라고 들었는데 라고 덧붙였다. 에리카는 고개를 끄덕이며 차를 꺼냈다. 남지 친구의 무신경함이야 하루이틀 일도 아니었으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설거지 거리가 그리 많지는 않았기에 데이빗은 금방 일을 마칠 수 있었다.
"근데 생각보다 많이 피곤해 보이지는 않네? 난 축 늘어져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새벽에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좀 피곤했어. 근데 오전에 잠을 자고 나니까 많이 괜찮아 진거야. 오랜만에 정말 푹 잔 느낌이 들었어."
"다행이네. 다친 데는 없지?"
"그럼. 어제 경기 TV로 봤다면서? 딱히 넘어진 적도 없고 파울 당한 적도 없으니까."
그건 그렇다며 에리카가 헤헤 웃음을 흘린다. 그녀로서는 데이빗이 멋진 활약을 하는 것도 좋았지만 다치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어제는 그런 의미에서는 참 마음 편한 경기였다. 데이빗이 공을 잡을 기회 자체가 적다 보니 파울을 당할 상황도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면 분명 투덜대겠지?'
선수에게 니가 공을 많이 잡지 않아서 좋았다고 말하면 참 제대로 된 소리는 아닐거라며 에리카가 내심 웃음을 흘렸다. 생각을 지운 에리카가 데이빗에게 조심스레 질문했다.
"근데...괜찮겠어?"
"음? 뭐가?"
차를 음미하고 있던 데이빗이 고개를 들며 그녀를 바라 보았다. 에리카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저번에 이야기했잖아. 올림픽 대표도 나갈거라고. 난 사실 네가 좀 쉬었으면 좋겠어. 어제 오늘, 쉴틈도 없이 비행기를 타고 왔고, 또 이제 이틀 뒤에는 리그 경기도 치러야 하잖아. 난 네가 혹시 무리한 일정으로 몸이 상하진 않을까 걱정이야."
"아, 그 얘기였구나."
찻잔을 내려 놓으며 데이빗이 웃음기를 지웠다. 그리고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 보며 입을 열었다.
"괜찮아. 아예 쉴 시간이 없는 것도 아니고. 이번에 참가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기회가 없을 테니까. 다음 올림픽때는 나도 연령 제한에 걸릴테니."
와일드 카드가 있긴 했지만 예외적인 부분이었으니 넘어가는 데이빗이다.
"나중에 말이야, 에리카. 너와 그리고 내 자녀에게, 내가 예전에 올림픽에 나가 금메달을 땄다고 이야기할 수 있으면 자랑스러울 것 같아. 추억도 하나 생기는 거고 말이야. 그리고 생각보다 두 개 대회를 병행한다고 해서 무조건 부상당하는 건 아니라고 하더라."
"그건 그런데...잠깐만, 지...지금 뭐라고...?"
이야기를 듣다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에리카가 말을 더듬는다. 볼도 살짝 발갛게 상기된 것이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응? 뭐가?"
데이빗은 눈치가 없었다. 뭐가 문제냐는 듯 오히려 궁금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 보는 모습, 에리카는 속에서 울컥하는 것을 가라 앉히고 차분히 말을 이었다.
"지...지금 니가 말한 거 있잖아! 자...자녀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대놓고 말하자 비로소 자신이 했던 말을 기억해내는 데이빗, 씩 웃으며 그녀에게 되려 묻는다.
"당연히 우리 사이에 생길 자녀를 말하는 거잖아. 안 그래?"
뻔뻔할 정도로 태연한 데이빗의 말에 에리카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말이야 사실 기분 좋았지만 그래도 이런 자리에서 이렇게 능글 맞게 이야기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새치름하게 고개를 돌리며 쏘아 붙이는 에리카.
"누...누가 너하고 결혼 한대?"
빨갛게 상기된 표정이 감춰지지 않는 것이 스스로 원망스러웠다. 좀 더 의연하게 대처하고 싶었는데 더듬거리는 말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 나하고 결혼 안 할거야?"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얼굴을 가까이 들이미는 데이빗, 에리카는 저리 치우라며 손을 저었지만 데이빗은 집요했다. 포기한 에리카가 결국 소리를 질렀다.
"몰라! 이 바보! 진짜 넌 눈치가 없어도 이렇게 없어?!"
씩씩거리며 자신을 노려보는 에리카의 모습에 데이빗이 움찔한다. 그리고 시무룩한 표정으로 찻잔을 매만지며 눈치를 살피기 시작한다. 그 모습에 에리카가 마음이 약해지는 것을 느낀다.
'아냐, 쟤는 정신을 좀 차려야 해. 도대체 이런 얘기를 이렇게 뜬금없이 지르는 게 어딨어?'
내심 마음을 굳히는 에리카, 하지만 눈을 데룩데룩 굴리며 자신의 눈치를 보는 모습에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한숨을 쉬며 에리카가 입을 열었다.
"...너 하는 거 보고."
'내가 못살아. 그래도 뭐...무드라고는 쥐뿔도 없지만...'
어쨌든 그가 자신과의 관계를 깊이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기에 아예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데이빗은 자신이 여지를 남겨 두자 급 화색을 띄며 자리에서 일어 났다. 마치 강아지가 꼬리를 흔드는 것 같은 모습이라 에리카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가 곧 자신을 번쩍 안아 들자 꺅 하는 비명을 터뜨릴 수 밖에 없었다.
"뭐...뭐하는 거야?"
"뭐냐니?"
다 알면서 뭘 그런 걸 묻느냐는 듯 데이빗이 대꾸했다.
"하는 거 보고 결정한다고 해서. 그럼 일단..."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며 데이빗은 그녀를 안아 들고 방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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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식으로 프로포즈하면 나중에 고생한다던데
-아 물론 전 경험이 없어서 모르겠네요
-알게 뭐야
-젠장
-크리스마스때는 그냥 술이나 먹어야...
-하늘도 울고 작가도 울고 독자는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