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13 =========================================================================
"지난 번에 꽤나 시달렸지?"
2011-12 챔피언스리그 플레이오프 2차전이 열리는 날, 1차전에서 0 : 0 무승부를 거두었기에 올라가기 위해서는 깔끔하게 이겨야 하는 상황이었다. 실점을 하며 비기게 되면 원정 다득점 원칙에 따라 떨어지게 되니 말이다.
'여기서 0 : 0으로 비기고 승부차기까지 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 혹시 있나? 혹시나 그런 생각을 1초라도 했다면 바로 지워 버리도록. 오늘 지난 1차전에서 넣지 못했던 골까지 몰아서 넣는다는 각오로 뛰고 와. 올해 우리는 알리안츠 아레나로 간다. 알겠나?'
달글리시 감독은 결승전이 열리는 장소를 언급하며 선수들의 투지를 자극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여기는 홈, 리버풀이 더욱 강해지는 장소였다. 여기에서 패배를 생각하는 선수는 단 한명도 없었다.
"아, 디르크."
경기장 입장을 기다리며 숨을 고르고 있는 데이빗에게 말을 걸어오는 동료, 디르크 카윗이었다. 무엇을 시달렸냐는지 순간 이해가 안되어 고개를 갸웃하자 카윗의 말이 이어졌다.
"전에 원정에서 너 컨디션이 좀 안좋았잖아. 그래서 그때 언론에서도 꽤 시끄럽게 떠들어 댔었지. 뭐라더라. 국내용이네, 해외에서 안통하네, 홈에서만 강하네 뭐 이런 소리들 말이야."
"아, 그거요. 그랬죠 분명. 생각보다 엄청 기사가 쏟아져서 깜짝 놀랬던 기억이 있네요."
사실 데이빗은 언론으로부터 소위 말하는 '까임'을 당해본 적이 없다. 데뷔한 지가 그리 길지도 않았고 대부분의 경기에서 좋은 활약을 펼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 비야레알 원정 경기에서 처음으로 부진한 모습을 보였고 이후 언론의 반응은 데이빗의 상상 그 이상이었다.
"며칠전에 해트트릭했어도 그런 얘기가 또 나왔잖아. 자국 리그에서만 잘한다고. 아니 애초에 지난 시즌에는 유럽 대항전에 나갈 기회도 없었는데 한 경기 못했다고 까는 기자들도 참 대단해.
본인도 익히 겪어본 일인지라 남의 일 같지 않다는 듯 카윗이 한숨을 내쉬었다. 데이빗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신경 안써요. 오늘 잘하면 그런 얘기도 좀 시들해지지 않겠어요?"
"뭐 그렇겠지. 그래도 악질적인 놈들은 뭐 어떻게 해서든 꼬투리를 잡아서 까내리겠지만 말야. '역시 홈에서만 강한 데이빗!' 뭐 이런 식으로 말야."
익살스러운 카윗의 모습에 데이빗이 폭소를 터뜨렸다. 데이빗은 이 유쾌한 네덜란드 남자가 정말 마음에 들었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래도 '홈에서도 약한 데이빗!'으로 기사가 뜨는 것보단 나을테니 잘 해야겠어요."
"확실히 그렇네. 그럼 오늘도 잘 하라고. 힘들면 언제든 교체해 줄테니 말야."
선발 출장하지 못해 아쉽다며 입맛을 다시는 카윗이다. 데이빗은 씩 웃으며 대답했다.
"일단 지난 번에 넣지 못했던 것까지 정산한 뒤에 바꿔 드릴게요."
비야레알은 작정하고 무승부를 노리고 나온 것처럼 보였다. 애초에 팀 전력은 리버풀이 한 수 앞선다고 평가를 받았고 홈에서 0 : 0으로 무승부를 거두었기에 무리해서 공격에 나설 이유가 없었다. 지지만 않으면 위로 올라가는 상황, 비야레알은 빠르고 개인 능력이 우수한 공격수 쥐세페 로시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선수를 하프 라인 아래로 내리며 대놓고 걸어 잠그기에 나섰다.
이에 맞선 리버풀의 전략은 간단했다. 열릴때까지 두드린다. 가드가 부서질 만큼 퍼붓는다. 아무리 단단한 방패라고 해도 뚫리지 않는 것은 없었다. 그리고 리버풀은 이런 상황이 나름 익숙했다. 프리미어 리그에서 소수의 강팀을 제외하면 안필드에서 리버풀을 상대로 간 크게 적극적인 공세에 나서는 팀은 거의 없었다.
상대가 단단히 걸어잠그고 있을 때의 공략법이라면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다. 일단 밀집된 중앙 보다는 사이드에서부터 공격을 전개하며 부분적인 수적 우위를 만들어 내는 방법이 있었다. 무조건 사이드 돌파에 이은 단조로운 크로스 시도는 오히려 상대에게 편하게 대처할 수 있게 해줄 여지가 있었으나 리버풀의 사이드를 맡고 있는 공격수들은 그렇게 무능하지 않았다.
데이빗 장, 마르코 로이스. 리버풀이 이번 시즌 야심차게 구축한 공격의 양 날개였다. 두 선수 모두 빠르고 기술이 뛰어 났으며 높은 수준의 연계 능력과 함께 순도 높은 골 결정력도 갖추고 있었다. 클래식한 윙어 스타일이 아닌, 최근 각광받고 있는 중앙 지향형, 윙포워드 스타일이었기에 단조로운 크로스를 올리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데이빗!"
상대가 완전히 자신들의 진영에 틀어박혀 있었기 때문에 리버풀의 왼쪽 풀백 호세 엔리케 역시 마음 껏 공격에 가담하고 있었다. 다만 상대가 이미 공간을 주지 않고 자리를 잡고 있었기에 평소처럼 폭발적인 주력을 이용한 오버래핑을 시도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스페인 출신 답게 그럭저럭 기술도 쓸만 했고 짧은 패스에도 조예가 있었다.
"오케이!"
데이빗은 호세 엔리케에게 공을 내주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엔리케의 공격 가담으로 수적 열세가 어느 정도 해소가 되었기에 약간의 공간이 생겼다. 물론 중앙 쪽의 길은 단단히 틀어 막혀 있었으나 지금은 일단 뚫고 들어가야 했다. 그리고 엔리케로부터 리턴을 이어 받았고 사이드 라인을 따라 돌파를 시도했다.
'큭 이 자식 뭐가 이렇게 빨라?'
비야레알의 풀백 마리오 가스파르는 내심 데이빗이 과장된 선수라고 생각했다. 지난 홈에서 가졌던 플레이오프 1차전을 앞 두었을 때, 감독은 리버풀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선수는 데이빗 장이며 자신이 그를 막아 주어야 경기에 이길 수 있다고 말했다. 하도 많이 듣다보니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었고 실제로 영상 분석을 했을 때 정말 위협적인 공격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실제로 만난 데이빗 장이란 공격수는 생각보다 크게 위협적이지 않았다. 그냥 어느 리그에서나, 어느 팀에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평범한 공격수 그 이상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컨디션이 좋지 않다고는 했지만 그걸 감안해서 생각해도 기대 이하였다. 그래서 흔히 볼 수 있는, 잉글랜드의 자국 신인 공격수 띄워주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오늘, 가스파르는 왜 감독이 이 데이빗 장이란 선수를 가장 주의해서 막아야 한다고 이야기했는지, 언론에서 그렇게 크게 다루고 있어는 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제로백이 뛰어난 스포츠카처럼, 몇 발자국도 안되는 공간에서 순식간에 스피드를 끌어 올리는 모습은 정말 놀라웠다. 반응이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분명 속절없이 뚫려버렸을 것이다. 가스파르는 그를 무시했던 마음을 지워버리고 집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세상에는 집중한다고 할 수 없는 일이 있었고 지금 가스파르에게 데이빗을 막는 일이 그러했다.
사실 완벽히 수비수에게 유리한 상황이었다. 중앙쪽으로 접고 들어오는 경로는 이미 다른 수비가 자리를 잡고 견제하고 있었다. 가스파르는 그저 데이빗을 사이드 쪽으로만 몰아내면 되었다. 중앙쪽으로 허를 찔려 돌파를 허용한다면 길목을 지키고 있는 동료가 바로 커버를 할테니 말이다. 그리고 뒤따라 가서 그를 둘러 싸 버리면 된다. 분명히 그랬고 데이빗은 의도대로 사이드 라인을 따라 돌파했다. 이대로 그를 견제하기만 하면 충분했다. 뚫리지만 않고 어렵게 크로스를 올리게 만들면 자신의 승리였다.
"뭐...뭐야?!"
분명히 전력 질주를 하고 있었을 터였다. 자신은 그의 옆을 따라 붙고 있었고. 그때 갑자기 데이빗의 스텝이 변칙적으로 밟아지는 것을 확인했다. 오른발 뒤꿈치가 공의 앞에 놓이는 것을 확인했다. 스피드를 죽이고 방향 전환할 속셈이라고 판단했다. 그에 맞춰서 자신의 몸을 정지시킨다. 이런 사이드에서 속도를 잃은 공격수를 막아 내는 것은 생각보다 그리 어렵지 않다. 그렇게 생각했다. 오른발 뒤꿈치에 튕긴 공을 왼발이 다시 앞으로 보내기 전까지는 말이다.
우와아아!!!!
안필드가 달아 오르기 시작했다. 환상적인 발 놀림으로 상대 수비를 멋지게 따돌리고 이제 엔드라인을 타듯 돌파하기 시작한 데이빗을 연호하기 시작했다. 뭔가 멋진 작품이 나올 것 같았다. 그들의 어린 공격수는 자신들의 기대를 대체적으로 저버리는 법이 없었다.
"빨리 막아!"
디에고 로페즈는 크게 소리 질렀다. 슈팅을 때릴만한 각도는 아니었으나 저대로 돌파를 허용해서는 곤란했다. 다행히 수비 라인이 완전히 무너진 것은 아니었고 이를 백업할 만한 선수가 있었다. 미드필더 루벤 카니가 그의 앞을 막아 섰다.
팡-
혼자서 수비를 찢어버릴 기세로 돌진하던 데이빗이 거짓말처럼 공을 가볍게 옆으로 차내는 모습이 들어왔다. 자연스럽게 디에고 로페즈 골키퍼의 시선이 공을 따라 돌아갔고 이내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밀집 수비를 끌어 내는 두 번째 방법. 강력한 중거리 슈팅 시도.
아직까지 리버풀의 최전방을 책임지는 세명의 공격수 모두 중거리 슈팅이 아주 뛰어나다는 평가는 받지 못하고 있었다. 꽤 괜찮은 수준의 슈팅력은 겸비하고 있었으나 상대적으로 보았을 때 말이다. 하지만 리버풀에는 중거리 슛의 스페셜리스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선수가 있었다. 지금 데이빗이 흘려 준 공에 무표정한 모습으로 달려드는 스티븐 제라드가 그 주인공이었다.
콰앙!!
인간의 발과 가죽으로 된 공이 만나 발생했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의 폭력적인 굉음이 터져나왔다. 몇몇 팬들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야기하는 속칭 '맞고 뒈져라 슈팅'. 하지만 그의 슈팅은 파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전력으로 때리는 슈팅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정교했다. 지금의 슈팅처럼 말이다. 무시무시한 기세로 날아간 제라드의 슈팅은 골대 우측 상단을 정확히 꿰뚫었다.
[리버풀의 선취골이 터집니다! 골의 주인공은 스티-븐-]
제라드!!!!!!!!!
장내 아나운서의 멘트에 경기장을 가득 채운 팬들이 광기어린 목소리로 호응한다. 그동안 그들이 가장 사랑했고 가장 큰 감동을 안겨주었던 선수의 이름을 몇번이고 외친다. 골을 넣은 주인공 스티븐 제라드는 크게 포효하며 특유의 양 팔을 벌리며 뛰는 세레모니를 선 보였다. 그리고 무릎을 꿇으며 팬 들 앞에서 슬라이딩, 함성 소리가 2배는 더 커졌고 일부 팬들은 담장을 넘어오려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나이스 패스였다 데이빗!"
골 세레모니를 마치고 일어서며 달려온 데이빗과 포옹을 나눈다. 중요한 경기에서, 열광적인 홈 팬들 앞에서 골을 넣어서 인지 평소보다 훨씬 크고 흥분된 목소리로 외치는 제라드였고 데이빗도 큰 목소리로 화답했다. 애초에 소리 지르듯이 말하지 않으면 들리지도 않았고 말이다.
"최고였어요! 역시 캡틴은 최고에요!"
"역시 스티비! 아직 죽지 않았는데!"
그의 절친 제이미 캐러거도 어느새 달려와 축하해 주고 있었다. 제라드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하이 파이브를 나누었다.
"이번 시즌, 정말 재밌어질 것 같은데 뒤에만 있을 수는 없잖아."
"그렇지! 아무튼 정말 멋진 슈팅이었어! 이걸로 저 녀석들도 계속 틀어박혀 있진 못하겠지. 이제야 우리 수비진도 밥값을 하겠는걸?"
리버풀의 진영으로 제대로 날아온 공이 없었기에 심심했다며 너스레를 떠는 모습에 다들 크게 웃었다. 최고의 분위기로 자신들의 진영으로 넘어오는 리버풀 선수들이었다.
"제기랄!"
기뻐하는 쪽이 있으면 당연히 분노하는 쪽도 있기 마련, 비야레알의 후안 카를로스 가리도 감독은 물병을 걷어차며 분노를 표출했다.
"어쩔 수 없습니다. 감독님. 이대로 수비만 해서는 다음 라운드에 진출할 수 없어요. 공격해야 합니다."
자신의 곁에 다가와 전원 수비 태세를 해제하자고 건의하는 코치, 가리도 감독은 고개를 끄덕였다. 화가 났다고 해도 감독의 본분을 잊어버릴 만큼 이성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래, 공격해야지. 제기랄. 1 대 0으로 지나 5 대 0으로 지나 마찬가지 아닌가. 그래도 한 골만 넣는다면 가능성이 있어. 원정 다득점 원칙은 우리에게 웃어주고 있으니 말이야."
1 대 1 무승부로 경기가 끝난다면 올라가는 것은 비야레알이었다. 아직 시간은 많이 남아 있었다. 만회골을 넣을 시간은 충분했다. 물론 더 이상 실점을 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서의 이야기였다.
"사실 우리 선수들이 수비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은 아닙니다. 그냥...저쪽 공격이 예상을 벗어난 것 뿐이죠."
조심스럽게 실점 장면에 대해 이야기하는 코치였다. 감독도 동의하는 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화를 내긴 했지만 선수에게 불만을 표한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개인 기량에서 밀리는 것을 선수에게 탓하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그걸 감안하고 경기에 나선 것이고 수비 전술에 가장 심혈을 기울였다. 하지만 규격을 벗어난 상대 공격수의 창조적인 무브먼트 한번에 자신들의 수비 전술은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감독으로서 무력감을 느끼고 화가 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알고 있어. 애초에 가스파르에게는 버거운 상대였으니까. 지난 경기처럼 컨디션이 안좋길 바랬지만 불행히도 오늘은 컨디션이 좋아 보이는 군."
이는 공격으로 나설 때도 문제였다. 거의 전원 수비 태세로 나섰음에도 뚫렸다. 그런데 공격에 인원을 투자한다면 과연 막아낼 수 있을 것인가. 이는 딜레마를 가져 왔다. 공격은 해야 한다. 하지만 더 이상 실점을 해서는 위험했다. 상대 공격수는 일반적인 수비 진형으로는 제어하기 힘들다. 하지만 공격은 해야 한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딜레마가 끝없이 이어지는 느낌이었다.
"어쩔 수 없지. 선수들에게 전하게. 위험 지역이 아니라면 최대한 거칠게 압박하라고 말이야. 카드를 조심하는 선에서 적극적으로 파울로 흐름을 끊으라고 하게."
지나치게 거친 파울은 위험했다. 여기는 어디까지나 상대의 홈이었으니 말이다. 가리도 감독은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 작품 후기 ============================
-오늘은 한번에 두편을 뙇
-연참했다고 뒷편에만 추댓하시면 슬퍼요
-연참을 한 것은 추천을 받기 위한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었다
-그럼 즐감하세요~ 추천 선작 코멘 쿠폰 정말 감사드립니다 (_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