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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봐 티티.]
[어 제임스.]
[우리가 정말 TV에 나오는 거야? 어? 그런거야?]
평소와 달리 말쑥하게 차려입은 제임스가 긴장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 거린다. 평소 무서울것 없어 보였던 이 남자도 TV출연이라는 거대한 이벤트 앞에서는 긴장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일까, 옆에 있는 자신의 친구 티티에게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래. 우리가 무려 BBC라는, 잉글랜드 최대의 방송사에 출연하게 되었다고. 너만 떨리는 거 아니니까 그만 진정 좀 해. 니가 그 질문을 몇번이나 했는지 알아?]
[아 제기랄. 나도 안다고! 근데 진정이 되지 않는 걸 어떡해?]
[정신산만하게 굴지 말고 옆에 찌그러져 있어! 좀 있다가 나가봐야 한다고!]
한소리 쏘아붙이는 티티의 모습에 궁시렁거리며 어깨를 으쓱하는 제임스, 티티는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생각이 났다는 듯 빠르게 덧붙인다.
[노파심에 하는 얘기지만, 오늘 주인공은 우리가 아니야. 우리의 친구 데이빗이라고. 우리가 입을 잘못 놀리면 그 친구에게 피해가 갈 수도 있어. 알고 있겠지?]
[엉? 너 날 바보취급하는거야? 내가 데이빗에게 피해가 갈 만한 멍청한 소리를 할 리 없잖아? 아니 애초에 그녀석에게 나쁜 소리를 할 만한 것도 없고. 안그래?]
[그래, 알고 있어. 혹시 긴장해서 너도 모르게 오해를 살 만한 소리를 할 수도 있으니까 그랬던 것 뿐이야.]
[염려붙들어 매라고. 아무리 나라도 그렇게 생각이 없진 않아. 제기랄, 이렇게 말하고 나니까 내가 평소에 맨날 사고만 치는 것 같잖아!]
가슴을 탕탕 두드리다 뭔가 억울한 표정으로 항변하는 제임스의 모습에 티티는 푸핫 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저런 모습이 제임스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티티였다. 제임스는 그런 티티를 쏘아보더니 이내 시선을 대기실 한켠에 놓인 모니터로 돌렸다. 티티도 자연스럽게 그런 제임스의 시선을 따라갔고 이내 탄성을 흘렸다.
[그나저나 좀 보자고. 데이빗 저녀석, 데뷔했을때는 카메라 앞에서 얼어붙더니만 이제는 여유로워 보이네.]
대기실에 마련된 모니터로 데이빗의 촬영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밝은 미소를 지은 채 진행자와 여유로운 대화를 이어나가는 데이빗의 모습은 티티에게 뿌듯한 감정을 들게 했다.
[자식, 이제 카메라 짬밥좀 먹었다는 거지. 누구 친구인지 잘생기기도 했네.]
제임스 역시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친구였지만 약간 나이 차이가 있는 그들이었기에 그들로서는 성공한 막내 동생, 혹은 조카를 보는 것 같은, 아니 좀 더 오버해서 말하자면 아들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들의 입가에 걸린 아빠 미소라 불리는 그것이 그 사실을 이야기 해주고 있었다.
[제임스 씨, 새뮤얼 씨. 이제 들어갑니다. 준비해주세요.]
스탭의 말에 티티와 제임스는 표정을 고쳤다. 이제 정말 본방이다. 멍청한 실수를 해서 친구에게 피해를 줄 수는 없다고 다짐했다.
[실수하지마 제임스.]
[너나 잘해 티티.]
[그렇군요! 사실 많은 사람들이 데이빗 장 선수의 귀공자와 같은 외모를 보았을때 데이빗 선수가 그런 행복하지 못한 과거를 보냈으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을 텐데요.]
자신을 두고 귀공자와 같다는 말에 데이빗은 멋적게 뺨을 긁었다. 축구로 밥 벌어 먹기 전에는 자신은 언제나 옐로우 몽키 소리를 듣고 살았다. 그런데 리버풀에 입단하고 실적을 남기기 시작하자 노란 원숭이라는 말 대신 귀공자 소리를 듣고 있자니 참 간지러웠다.
[어렸을 때는 몰랐어요. 왜 내가 다른 친구들과 피부색이 다르고 머리카락 색이 다른지 말이에요. 샤워를 하며 살가죽이 빨갛게 부어오를 만큼 밀어보기도 하고 물감을 머리에 발라보기도 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멍청한 짓이었지만 그 당시에는 조금 마음이 아팠던 것 같네요.]
담담히 이야기하는 데이빗의 모습에 진행자가 오히려 무슨말을 해야할 지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조금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진행자의 모습에 데이빗은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가장 화가 났을 때는 제 유일한 놀이 상대이자 친구였던 축구공을 한 패거리들이 쓰레기 소각장에 버렸을 때 였어요. 그때는 정말 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요. 그 친구들을 어떻게 때려눕혔는지, 어떻게 공을 되찾았는지 말이에요. 물론 다음날 저는 주먹을 쓴 대가를 치러야 했어요.]
[정말 믿을 수가 없군요. 저는 우리 자랑스러운 잉글랜드에서 그런 몰상식하고 야만적인 일이 벌어질 거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고아원에서 데이빗 씨를 보호해주는 어떠한 행동도 해주지 않았나요?]
'고아원이라...'
쓴웃음이 나왔다. 만약 그곳이 정말 따뜻하고 인간적인 곳이었다면 자신이 16세가 되는 해에 도망치듯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잉글랜드는 인종차별이 꽤 있는 축에 속한다. 유럽 대부분의 국가들이 아직 인종 차별이 있다고는 하지만 잉글랜드는 섬나라 특유의 폐쇄성이 더해져 유럽의 몇몇 국가와 더불어 인종차별이 심한 편에 속했다. 데이빗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그랬기에 진행자의 말에 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글쎄요. 확실한 건 그들로부터 큰 도움을 받은 기억이 없다는 겁니다. 그들은 무관심했고 냉정했어요. 저는 어떤 보호도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아마 이 방송이 나가게 된다면 자신이 있던 고아원의 원장은 가루가 되도록 까일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동정심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들이 자신이 어려웠을때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해주었다면, 한번이라도 보듬어 주었다면 지금 이런 감정은 들지 않았을 것이다. 힘들었던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해서인지 촬영장에는 조금 무거운 공기가 내려앉았다.
[말하기 어려운 이야기였을텐데 흔쾌히 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데이빗 선수. 어쨌든 16세에 고아원을 나와 생활하게 되었는데요. 그 이후로는 어떻게 지냈습니까?]
[16세가 되고 나서 나온 이유는 다 아시겠지만 그 나이가 되어서야 일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세상은 쉽지 않았어요. 어느 곳에서도 이제 막 16세가 된 비쩍마른 동양인 꼬맹이에게 일거리를 주지 않으려고 했거든요. 간신히 리버풀의 항구 쪽에서 일자리를 잡을 수 있었어요. 이제와서 하는 말이지만 정말 힘든 일이었어요.]
데이빗의 말에 진행자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동의를 표한다. 건장한 성인 남성이라도 꺼릴만한 일이 부두 노동이 아니었던가. 16세의 청소년이 해내기에는 만만찮은 일이었으리라.
[처음에 일을 정말 못했어요. 짐을 들다 넘어질 뻔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거든요. 실제로 물론 넘어진 적도 있구요. 하지만 정말 괴로웠던 것은 일이 힘든 것이 아니었어요. 그곳에서도 저의 피부색에 대한 편견은 사라지지 않았거든요. 아마 형제같은 두 친구가 없었더라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겁니다.]
[그곳에서 좋은 친구를 만날 수 있었군요. 그 친구들에 대해 소개시켜주시지 않겠습니까?]
자신의 형제, 가족이나 다름없는 두 친구를 떠올려서 일까, 데이빗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밝은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새뮤얼과 제임스라는 친구에요. 둘다 저보다 나이가 많지만 우리는 친구에요. 티티, 아 그러니까 새뮤얼은 정말 사려깊고 배려심 넘치는 친구에요. 저는 그가 마치 형이 있었다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어요. 제임스는 가끔 거칠고 성격이 급한 면이 있지만 누구보다 정이 깊은 친구입니다. 저의 피부색을 두고 놀리는 다른 이들에게 저보다 먼저 주먹을 내지르기도 하죠. 제가 리버풀에 입단할 수 있었던 이유도 두 친구 덕분입니다.]
데이빗의 말에 호오-하는 탄성을 지르며 고개를 끄덕이던 진행자가 고개를 갸웃한다. 그리고 이어 자신의 의문을 밖으로 드러냈다.
[리버풀에 입단하게 된 것이 두 친구 덕분이라구요?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을까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 데이빗, 친구에 대한 자랑은 하루 종일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괜한 드라마를 쓰려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진심이자 진실이었기에 말하는데 주저함은 전혀 없었다.
[언제나처럼, 평소와 같은 날이었을 거에요. 우리는 항구 내에 마련된 우리들의 성지 리틀 안필드, 아 우리들이 축구를 즐겼던 장소를 그렇게 불렀어요. 물론 시설은 안필드와 비교도 할 수 없었지만 우리에게는 정말 소중한 장소였습니다. 아무튼 그곳에서 다른 팀들과 내기 축구 시합을 이기고 나서였을 겁니다. 기분 좋게 인근 Pub에서 술을 한잔 하고 있었는데 티티, 아 새뮤얼이에요. 이 친구의 별칭이라 저는 티티라고 부르는게 습관이 되었거든요. 새뮤얼이 저에게 리버풀의 입단 테스트를 받아보지 않겠냐고 물어보는 거에요. 저는 새뮤얼이 취한 건가 생각했어요. 평소 새뮤얼이 현명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면 무슨 헛소리를 하는거야? 라고 일축해버렸을지도 몰라요.]
만화와도 같은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진행자도 추임새를 넣으며 계속 이야기 할 것을 종용했다. 데이빗은 웃으며 목을 가다듬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는 제가 프로에서 뛸 만한 재능이 있다고 저를 확신시켜주었어요. 그리고 저에게 리버풀의 스카우트 한 분을 소개시켜주었죠. 제임스는 처음에는 미심쩍어 했지만 제가 확신을 가질 수 있게 용기를 심어주었어요. 저의 일에 저 자신보다 열성적으로 관심을 보여주었고 제 성공을 빌어주었죠. 그 친구들이 아니었다면 저는 지금도 부두에서 짐을 나르며 생활하고 있었을 겁니다.]
[지금도 저는 꿈을 꾸는 것 같아요. 내가 리버풀의 선수라니? 매 주말마다 안필드에서 수만 콥들의 함성을 들으며 경기에 뛴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요. 분명한 것은 두 명의 소중한 친구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다는 것이에요. 그들은 누구보다도, 저 자신보다도 제가 가진 재능을 알아봐 주었고 저에게 용기를 주었어요.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친구들이죠.]
훈훈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진행자, 곧 씩 미소를 지으며 큰 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리버풀의 희망이자 차기 잉글랜드를 대표할 공격수, 데이빗 장의 은인과도 같은 친구 두 분을 만나보지 않을 수 없겠죠? 새뮤얼 씨, 제임스 씨! 나와주세요!]
갑작스런 분위기 반전에 데이빗은 어리둥절한 모양새였다. 이윽고 홀의 반대쪽에서 자신의 두 친구가 걸어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입을 벌리며 놀라워했다. 티티와 제임스가 자신의 곁에 다가와 웃으며 포옹할때가 되어서야 정신을 차리며 마주 안아줄 정도로 말이다.
[티티! 제임스! 어떻게 된거야? 너희들 이런 얘기는 한 적 없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