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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빗은 관중석에서 보는 리버풀의 경기는 또 다른 느낌이라는 것을 체감하고 있었다. 어색했다. 눈 앞에 벤치에 앉아 있는 동료들과 감독, 코치들이 보였다. 몇 걸음 안되는 거리, 하지만 그 짧은 거리가 지금 데이빗에게는 어마어마한 거리처럼 느껴졌다.
[저번에도 느꼈지만...정말 다쳐서 경기에 나서지 못하는 건 최악이야.]
온 몸이 외치는 느낌이다. 다리가 지 멋대로 날뛰려는 것 같다. 지금이라도 눈 앞에 보이는 높지 않은 블럭을 넘어 경기장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에리카는 그런 데이빗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처럼 조용히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만약 집에서 TV로 지켜보았다면 달랐으리라. 하지만 경기장에서 뛰지 못하고 가만 지켜보고 있자니 미칠 노릇이었다. 벤치에 앉아 있을때와도 느낌이 달랐다. 지금은 완전한 열외, 경기에 뛸 가능성은 0였으니 말이다.
[아 뭐하는 거야...!]
오늘 리버풀의 경기력은 초반이긴 했지만 답답했다. 평소보다 전체적으로 무거운 느낌이랄까, 미묘하게 어긋나는 느낌이랄까, 지켜보는 데이빗의 입에서 안타까운 탄식이 흘러 나왔다.
[제기랄!]
수아레즈는 답답했다. 평소와 다를 것 없다고 생각했다. 똑같은 리그의 한 경기였을 뿐이고 경기장도 안필드였다. 상대는 뉴캐슬 유나이티드, 무시할 만한 팀은 아니었지만 리그 중위권에 머무르는, 리버풀이 이길 확률이 더 높은 팀이었다.
하지만 평소보다 공간이 부족했다. 자유롭게 움직이기 힘들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수아레즈의 시선이 자연스레 평소 '그'가 있는 자리로 향했다. 힘이 잔뜩 들어간 표정의 은고그가 딱딱한 움직임을 보이는 것을 확인하고 혀를 차며 공을 받아주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쪽으로 돌려!]
크게 콜을 하며 백업에 나서는 수아레즈, 뒤늦게 자신을 파악한 것인지 은고그가 패스를 하는 모습, 하지만 이미 수비에게 읽혀버렸고 중간 차단당하고 말았다.
[뭐하는 거야? 좀 더 빠르게 줘야지!]
답답했다. 평소였다면 굳이 이렇게 윙포워드의 커버를 위해 자리를 비우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녀석'이 있었다면 진작 자신의 앞을 얼쩡거리던 수비를 해치우고 자신의 발 아래에 멋들어진 패스를 전달해 주었을 것이다. 자신은 아무것도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그냥 빈 공간, 수비의 허점만 노리고 움직이면 되었으니 말이다.
다행히 뉴캐슬의 역습은 특유의 기동력을 살린 제라드의 헌신적인 수비가담으로 저지되었고 상대에게 위협적인 찬스를 주지 않고 막아낼 수 있었다. 그것은 다행이었으나 리버풀의 공격은 이후로도 지지부진했다.
[이런말 하긴 그렇지만, 역시 다비드에게 그를 대체하는 것을 기대하기란 무리였나 보군요.]
선수들에게 들리지 않게 달글리시 감독 곁에서 조그맣게 중얼거리는 새미 리 수석코치, 함성으로 가득찬 이곳에서도 달글리시는 용케 들었는지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딱히 다비드가 그를 대체해줄거라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말이야. 능력의 고하를 떠나 애초에 스타일도 다르지. 나는 그가 섬세함은 부족하지만 좀 더 활발히 움직여 줄 것을 원했는데 말이야.]
경기 시작을 앞두고 작전을 지시하면서도 그런 언급을 했다. 내심 달글리시는 그가 디르크 카윗을 보며 느끼는 바가 있길 원했다.
[디르크는 에레디비지에에서 엄청난 공격수였어. 처음 안필드에 입성했을 때도 모두 그에게 원한 것은 폭발적인 득점력이었지. 하지만 그는 기대한 만큼의 공격적인 재능은 보여주지 못했지. 리그 수준차도 있었을 것이고 클럽이 바뀐 만큼 그에게 맞지 않는 부분도 있었을 거야.]
달글리시 감독의 말에 리 코치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연스레 그의 시선이 오른쪽 사이드에서 여전히 헌신적으로 뛰어 주는 카윗에게 향했다. 화려함은 없는 선수, 공격력이 부족한 포워드, 하지만 그는 지금까지 이곳 리버풀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선수였다.
[그는 자신이 하지 못하는 일, 안되는 일에 얽매이지 않았어. 유연하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았지. 그게 지금까지 그가 콥들에게 사랑 받는 이유이며 이곳 안필드에서 뛸 수 있는 원동력이 된거야.]
공격수의 첫째 덕목은 누가 뭐라고 해도 골, 득점력이다. 골을 잘 넣는 공격수는 다른 부분이 부족하다고 해도 용서받는다. 좋은 움직임, 멋진 어시스트만으로 만족하는 공격수는 사실상 거의 없다고 봐도 좋았다. 주변에서 아무리 격려하고 칭찬해도 공격수 스스로 만족하지 못한다. 그런면에서 카윗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골이 부족하지만 자신의 다른 장점을 살리는, 다른 동료를 도우며 헌신적으로 움직인다. 데이빗이 주로 왼쪽과 중앙에서 마음껏 활개칠 수 있는 것도 카윗의 헌신적인 움직임이 알게 모르게 영향을 주고 있었다.
[...초조한 것이겠죠. 지금은 떠난 페르난도의 존재감이 그를 오랜 시간 짓눌렀습니다. 그가 떠나자 어느새 혜성처럼 등장한 데이빗이 그보다 더한 재능을 뽐내기 시작했죠. 그래서 지금 반드시 무언가 보여주어야 한다고 스스로를 압박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안타까운 어조로 리 코치가 중얼거렸다. 코치로서 가장 안타까운 선수가 은고그 같은 이들이었다. 재능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랬다면 진작 리버풀에서 짤리고 다른 하위 팀 혹은 하부 리그를 전전하는 선수가 되었을 것이다. 은고그와 같은 위치에 있는, 퍼스트 팀과 리저브의 경계에 있는 선수들에게 부족한 것은 큰 부분이 아니었다. 자신감일 수도 있고 경험일수도 있다. 선수마다 조금씩은 달랐지만 부족한 그 무언가를 채우느냐 채우지 못하느냐에 따라 그저그런 선수로 끝날수도, 팬들을 열광시키며 리그를 뒤흔드는 선수가 되기도 한다.
[데이빗은 어느새 다른 이들에게 중압감을 줄 정도의 위치가 되어버렸구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달글리시 감독이다. 그리고 덧붙이든 짧게 중얼거렸다.
[한 팀에 크랙의 존재는 하나면 충분해. 모두가 그런 역할을 맡을 필요도 없고 맡아서도 안된다고 생각하지. 나는 다비드가 그 사실을 빨리 인정하고 다음을 볼 여유를 찾았으면 바라지만...]
크랙, 마약이라는 뜻도 있고 빼어난 준마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네덜란드의 축구 영웅 요한 크루이프는 크랙을 '혼자서 경기를 결정지을 수 있는 선수'라고 정의하기도 했다. 판타지스타, 에이스 등과 비슷한 뜻으로 쓰이기도 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저래서야 오늘 그에게 많은 걸 기대하긴 어려울 것 같네요.]
데이빗은 초조한 감정으로 경기를 보고 있었으나 슬슬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자신의 주변에서 답답함을 토로하며 '데이빗이 있었다면-'하는 소리를 듣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좀 전에 안타까움에 머리를 감싸쥐며 고개를 흔들다 옆에 앉아 있던 점잖아 보이는 신사분으로부터 100배는 안타까운 시선을 받고 나서는 고개를 돌리지도 못하고 전방으로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별 말은 안했지만 그 신사의 눈빛은 '네가 있었다면 달랏을 거야!' 라고 말하고 있었다. 에리카는 그런 자신의 남자 친구의 마음을 이해하고 픽 웃고 말았다.
'정말 어느새 이렇게 듬직해진 걸까.'
아직도 자신과 함께 있을때 보면 자신의 위치에 대한 자각이 부족한 것을 느끼곤 했다. 에리카 본인도 늘 함께 있다보니 데이빗이 많이 변하지 않은 것을 알고 있다. 축구 실력에 있어서야 발전이 있었겠지만 말이다. 부담스럽거나 민망할 때 뺨을 긁는 버릇도 그대로였고 말이다.
'풋, 그래도 아직은 어린애같지만.'
뺨을 긁다가 리버풀의 멋진 플레이가 나오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아쉽게 무산되자 머리를 감싸쥐며 탄식을 흘리는 모습에 에리카는 웃음이 나왔다.
경기는 하품이 나올 정도로 지지부진하게 흘러갔다. 공을 소유한 시간은 리버풀이 길었다. 데이빗이 빠졌다고는 하지만 전력에서 분명 한수 위였고 더구나 리버풀의 홈 경기였다. 어웨이였다면 모를까 홈에서 선수 한명이 빠졌다고해서(그 선수가 아무리 팀 내의 에이스라고 해도) 이런 경기력을 보이는 것은 문제가 있었다. 제라드는 어느새 자신을 포함해 팀원들 모두가 20살의 어린 선수에게 의존하는 바가 너무 커졌다고 뼈저리게 느꼈다.
[패스를 주고 빠르게 움직여! 멈춰있으면 공간이 생기지 않잖아!]
사실 리버풀의 수비 라인과 미드필드 진의 견고함은 평소와 다른 것이 없었다. 그 부분에서 문제가 생겼다면 아마 진작 주도권을 뉴캐슬에게 넘겨주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상대의 위험지역에서 효과적인 찬스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에 있었다.
원인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제라드는 마치 습관처럼 왼쪽 사이드의 공간을 확인하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쓴 웃음을 지었다. 평소라면 자신이 시선을 줄 때 이미 공간으로 뛰어 들고 있는 그의 모습이 없었고 어정쩡한 위치에 머무르고 있는 은고그가 눈에 들어왔다.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빠르게 털어 냈다. 아쉬운 것은 아쉬운 것이고 일단 경기에서 이기는 것이 먼저였다.
리버풀 원정에 나서는 팀들은 대부분 라인을 내리고 역습을 노리는 자세를 취한다. 최근 1~2년 사이 빅4의 명성은 조금씩 퇴색했지만 리버풀은 여전히 강팀이었고 안필드에서는 말할 것도 없었다. 리버풀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혹은 그 이상의) 팀들도 안필드에서의 경기 운영은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었기에 한 수 아래의 전력이라 평가받는 뉴캐슬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잔뜩 긴장한 채로 수비를 굳히고 나왔는데 상대의 공격이 예상외로 싱겁다면 어떤 느낌이 들겠는가. 강 펀치가 날아올 것을 대비해 가드를 단단히 세워 놨는데 솜주먹이 날아온다면? 허탈할 것이고 굳이 수비에 치중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엘런 파듀 감독은 오늘 리버풀의 경기력이 예상 보다 더 떨어진다고 느꼈고 피치위의 선수들에게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뉴캐슬의 움직임이 변했다.
이전까지는 간헐적인 역습, 대부분 최전방의 앤디 캐롤에게 한번에 보내는 롱볼만 고집했던 뉴캐슬이 상대의 패스를 차단함과 동시에 급격히 라인을 끌어올리며 대대적인 역습에 나선 것이다. 어정쩡한 위치에서 공이 빼앗겼기에 리버풀의 진형이 흐트러진 상태였고 이전까지 단조로운 역습만 반복하던 뉴캐슬의 돌변에 당황한 리버풀이었고 이는 치명적인 실책이 되고 말았다.
191cm의 장신을 살린 제공권 장악 능력과 빼어난 득점력을 자랑하는 엔디 캐롤, 일각에서는 포스트 시어러에 가장 가까운 선수라는 평도 듣고 있을 만큼 뉴캐슬을 넘어 잉글랜드의 차세대 공격수로 각광받기 시작하는 선수였다. 이번 겨울 이적시장에서 리버풀과의 이적 루머가 잠깐 돌기도 했을 만큼 능력을 인정받고 있는 선수였고 말이다. 그런 그에게 정확한 크로스가 연결된 다는 것은 사실상 실점이나 다름 없다고 보아야 했다. 레이나 골키퍼가 혼신의 힘을 다해 몸을 날려 보았지만 미치지 못했다. 0:1, 원정팀 뉴캐슬이 먼저 한발 앞서나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