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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가끔인 이게 현실이 아닌 것 같기도 해.]
뿌듯한 얼굴로 옆에 앉은 에리카에게 말하는 데이빗, 숨길 수 없는 자부심과 감동의 기색이 역력했다. 에리카는 그렇겠다며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나야 잘 모르겠지만...너하고 처음 거리를 돌아다닐 때랑 비교하면 정말 너무나도 많은 것들이 바뀌었지.]
두 연인이 함께 있는 곳은 안필드, 리버풀의 성지였다. 경미한 부상으로 벤치 명단에서도 이름이 빠진 데이빗이었고 별로 아프지도 않은데 집 구석에 가만히 있자니 좀이 쑤셨다. 넌지시 가벼운 훈련을 해도 괜찮겠느냐고 물었을때 돌아온 팀 닥터의 짜게 식은 시선이란!
'데이빗 씨, 당신의 열정은 정말 프로로서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나는 의사로서, 내 자신의 책무를 저버릴 수 없어요. 그러니까 좋은 말로 할때 가만히 쉬길 바랍니다. 설마 제가 감독님과 면담을 갖길 원하는 것은 아니겠죠.'
다 큰 어른이 치사하게 일러바친다고 겁주다니-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눈에 띄게 축 쳐진 자신에게 선심이라도 쓰듯 가벼운 산책정도는 괜찮다고 이야기 해주는 팀 닥터였고 이번 기회에 에리카와 함께 갈 기회가 없던 안필드에 함께 가기로 했다. 에리카는 처음에는 집에서 쉬라고 권했지만 의사가 괜찮다고 이야기했다는 말을 하며 설득하자 기뻐하며 데이빗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였다.
'티켓이요? 물론 구해줄 수 있죠. 몇 장이나요? 두 장? 즉시 가져다 드리죠.'
원래 티켓 구하기가 힘든 안필드의 홈 경기 티켓이었지만 요즘 리버풀의 기세가 하늘을 찌름에 따라 덩달아 티켓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 수준으로 올라가 버렸다. 애초에 경기를 앞두고 다친 거나 다름없었으니 말이다. 이에 난감함을 느낀 데이빗이 구단 직원에게 사정을 설명했고 말을 꺼낸 지 10분도 지나지 않아 리버풀의 벤치 뒤 편에 위치한 좌석 2개 분을 확보할 수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티켓 값은 공짜였다. 이래도 되느냐는 데이빗의 말에 구단 직원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구단 소속 선수의 가족들에 대해서는 우리의 홈 경기를 언제나 볼 수 있도록 하고 있죠. 우리는 선수들의 가족들이 자신들의 남편과 아버지가 얼마나 멋진 남자인지 직접 보길 원해요. 데이빗도 나중에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안필드를 누비길 바랍니다.'
직원의 말은 데이빗의 가슴에 가벼운 파문을 남겼다. 자신의 아들, 혹은 딸들이 보는 앞에서 경기를 뛴다?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자신이었지만, 그래서 자녀가 있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는 모르지만 생각만 해도 짜릿한 기분이 들었었다.
그래서 부담 없이 티켓을 받아 들고는 에리카와 함께 안필드로 향했다. 내심 친구들도 함께 보면 어떨까 하고 티티에게 연락해 보았지만 티티는 웃으며 거절했다.
'우리는 그냥 집에서 볼게. 공부할 것도 많고 이래저래 움직이기가 좀 그렇네. 에리카 씨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라고. 그나저나 몸은 괜찮아? 언론에서 큰 부상은 아니라고 하던데. 괜찮다고? 다행이네. 그래도 조심해. 잠깐만, 제임스가 바꿔달래.'
이어진 제임스와의 통화는 언제나 그렇듯 유쾌했다. 자신과 부딪힌 조 콜에 대한 욕설로 시작한 제임스는 안필드에 꼭 가고 싶지만 티티가 말렸다며 불퉁한 어조로 투덜댔고 그러다가 너 없는 경기라 굳이 안가도 될 것 같다고 말하기도 하며 종잡을 수가 없었다.
'아무튼 조 콜 그 새끼는 자빠지려면 혼자 쳐 자빠질 일이지 왜 너까지 다치게 하고 지랄이냐. 주급만 돼지처럼 많이 받아 처먹으면서 하는 일도 없는 주제에!'
마무리는 역시 조 콜에 대한 욕이었다. 데이빗은 큰 부상도 아닌데다 조 콜도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기에(심지어 조 콜 본인도 다쳤는데 말이다) 제임스에게 그러지 말라고 이야기 했지만 먹혀 들었는 지는 의심스러웠다.
티티의 거절로 에리카와 둘이 안필드에 오게 된 데이빗은 자신을 알아보는 어마어마한 팬들로 인해 몸살을 앓았다. 일부러 선수들과 조금이라도 가까운 곳에서 보려고 VIP 석을 거절한 것이 조금은 후회가 될 정도로 말이다.
'데이빗! 몸은 괜찮나요? 큰 부상이 아니라니 정말 다행이에요!'
자신의 몸을 걱정해주는 팬들과
'우린 네가 필요하다고 데이빗! 네가 선발 출장하지 않았을 때 우리는 대부분 비겼다고!'
오늘 경기에 대한 불안감을 표하는 팬들
'다음 경기에는 뛸 수 있지? 오 뛸 수 있다고? 이것들 보라고! 다음 경기에는 데이빗이 뛸 수 있대!'
벌써부터 다음 경기를 생각하는 팬들도 있었고
'사인 해주세요 데이빗!'
사인해달라고 달라붙는 꼬마들(물론 같이 온 부모님에게 한 소리를 듣고는 풀이 죽었다) 까지 있었다.
데이빗은 웃으며 최대한 그들에게 친절히 응대했고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그들의 요구(주로 사인)를 들어 주었다. 순식간에 데이빗의 주변은 마치 사인회장 같은 분위기가 연출되었고 데이빗은 경기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까지 그들과 함께했다.
피곤하긴 했지만 기분은 정말 좋았다. 신문 기타 매체를 통해 자신의 달라진 위상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몸으로 겪는 것은 또 달랐다. 이런 생활에 익숙해져 시간이 흐른다면 이런 시간을 귀찮다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기뻤다. 조금 피곤한 것만 빼고 말이다.
[난 내 유니폼을 입고 온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줄 정말 몰랐어.]
자랑스레 자신에게 등을 보여주며 32번과 자신의 이름에 새겨진 유니폼에 사인을 부탁하는 팬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경기를 뛸 때는 몰랐던 사실이다.
[요즘 네 유니폼은 없어서 못팔아. 못 구한 팬들은 빨리 구매하고 싶다고 성화니까 구단에서는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을걸.]
데이빗과 만나기 이전부터 콥이었던 에리카 답게 구단에 대한 이런저런 정보를 잘 알고 있었다.(가끔 데이빗은 에리카가 자신보다 더 잘 알고 있다고 느끼기도 했다)
[경기를 뛸 때는 모르니까. 그냥 사방이 붉은 색이라는 것만 알 수 있어. 사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만.]
[그렇겠네. 아무튼 요즘 네 연봉에 대한 지출은 이미 유니폼만 팔아서 해결 되고도 남았다고 하더라. 그만큼 인기가 많다고 데이빗 씨. 자각을 좀 하시죠?]
장난스럽게 자신의 이마를 콕 찌르는 에리카, 데이빗은 그런가-하고 중얼거렸고 에리카는 웃으며 고개를 젓고 말았다. 그리고 화제를 돌리려는 듯 전광판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은고그가 다시 올라 왔네. 네 빈자리를 채우려는 거겠지?]
에리카의 말에 데이빗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자신과 자리를 바꾼 것처럼, 달글리시 감독 부임 이후 은고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리저브에서 보내야 했다. 1월 이적 시장에서 영입한 루이스 수아레즈도 꽤나 준수한 활약을 보였고 윙어로 나서는 경우가 많았지만 여차할 경우 최전방 공격수까지 소화 가능한 디르크 카윗도 있었기에 그에게 남는 자리가 없었다.
예전이었다면 아마 은고그는 퍼스트 팀에 머물렀을 것이다. 자신이 없었다면 말이다. 그랬기에 그를 보는 데이빗의 시선은 묘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 미안한 것은 아니었지만 말로 표현하기 힘든 느낌이었다.
[그런 표정 짓지 말아. 그가 자리를 잃은 것은 네 탓이 아니야. 기회가 있을 때 잡지 못한 다비드 씨의 책임이지.]
에리카가 데이빗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데이빗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가 잡아온 손에 힘을 더했다.
[미안해하는 건 아니야. 하지만 이 감정을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나도 잘 모르겠어.]
라파 베니테즈 감독 시절부터 그가 퍼스트 팀에 있을 때 속으로 얼마나 부러워 했던가. 내가 더 잘할 수 있는데, 내가 더 뛰어난 선수인데, 왜 내가 리저브에 처박혀 있어야 하는 건가 라고 생각한 적도 많았다. 질투에 가까운 그런 감정은 시간이 지나 상황이 역전되며 바뀌었다.
자신은 어느새 퍼스트 팀의 붙박이 공격수로 거듭났고 팀의 새로운 간판이 되어가고 있는 반면, 그는 점점 입지를 잃어갔고 자신의 땜빵 공격수, 혹은 그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까지 떨어졌다.
[어떻게 보면 그에게는 마지막 기회일 거야. 그가 리버풀에 남아 있기 위해서는 더 나은 무언가를 보여주어야 하니까.]
아마 죽을 힘을 다할 것이다. 본인도 자신이 그동안 충분히 기회를 받아 왔음은 알고 있을 것이다. 현재 자리를 꿰찬 자신보다 기회를 더 받았으면 더 받았지 덜 받지는 않았다. 지금 그에게 자신은 어떤 존재로 자리잡고 있을까.
에리카는 분위기가 무거워졌다며 입술을 삐죽였다. 조그맣게 이러려고 말을 꺼낸 건 아닌데 라고 중얼거렸고 데이빗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잡은 손을 놓고 그녀의 허리를 끌어 당겨 살짝 안았다. 주변에서 휘파람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알고 있어. 나도 모르게 감상에 젖었네. 이제 그만 할거야.]
갑작스런 스킨십에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짓는 에리카, 하지만 이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데이빗의 품에 머리를 기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