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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와 캐라.]
제라드는 자신의 집에 방문한 제이미 캐러거를 반갑게 맞이 해 주었다. 함께 리버풀이란 클럽에서 커리어를 이어온 지도 긴 시간이 흘렀고 이제는 팀의 베테랑으로서 주장과 부주장을 맡고 있는 두 사람이었기에 평소의 관계도 돈독했고 잦은 교류를 하고 있었다.
[헬로 스티브, 오 릴리, 렉시 많이 컸구나.]
평소 몇번을 본 사이라 제라드의 딸들도 캐러거에게 인사를 했고 캐러거는 함박 웃음을 지어주며 아이들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 주었다.
[릴리, 렉시, 아빠는 잠깐 캐라 아저씨하고 이야기를 좀 해야할 것 같아.]
딸들의 뺨에 키스를 해주며 한번씩 안아주는 제라드, 제라드의 부인 알렉스 커란이 나와 캐러거와 인사를 나누고 딸들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딸들이 많이 컸네.]
캐러거의 말에 씩 웃는 제라드, 알고 지낸지 10년이 넘어가지만 이 무뚝뚝한 남자가 환하게 웃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뭐 스티븐의 딸 사랑이야 각별하기로 유명하니까. 그건 그런데.]
잠시 말을 끊고 제라드를 응시하는 캐러거, 제라드가 무슨 문제 있느냐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 토끼 머리띠는 언제까지 하고 있을 셈이야?]
웃음을 참으며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캐러거, 제라드는 고개를 갸웃하며 머리에 손을 올리더니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멋적은 표정으로 토끼 머리띠를 벗은 제라드, 캐러거는 한동안 그런 제라드를 보며 낄낄거리며 놀렸고 제라드는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그런 캐러거를 자제시키려 했으나 이미 보여줄 거 다 보여준 뒤라 무게를 잡아봤자 소용이 없었다.
[아마 데이빗이 너의 이런 모습을 본다면 쇼크를 먹겠지. 카리스마 넘치는 캡틴이 이럴리 없어! 하면서 말이야.]
[......]
[그녀석 말야, 많이 괜찮아 졌지만 아직도 가끔은 널 동경의 눈빛으로 바라 본다고. 그런 녀석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주면 무슨 표정을 지을지 정말 궁금하지 않아?]
[딱히 관심없어. 젠장. 어쨌든 그 얘기는 이제 그만 하자고.]
[그런 무서운 표정 지어봤자 쪼는 건 데이빗 밖에 없다고. 알았어. 그만 할게. 하여간......]
차를 한모금 마시며 헛기침을 한 캐러거, 제라드는 '진작 그럴 것이지' 라고 중얼거리며 한숨을 쉬었다.
[허벅지는 어때?]
캐러거의 질문, 제라드는 별 문제 없다는 듯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했다.
[괜찮아. 별 문제 없어.]
[다행이네. 이럴때는 리그에만 집중할 수 있는 상황이 고맙다고 해야하나.]
쓴 웃음을 지으며 이야기하는 캐러거의 모습에 제라드도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유로파 리그는 조별 탈락의 수모를 겪었고 FA컵과 리그컵도 상황은 비슷했다. 이번 시즌 리버풀에 남은 것은 리그 밖에 없었고 남은 시즌은 2개월 동안 9경기만 치르면 되는 체력에 큰 부담이 없는 일정이었다. 하지만 캐러거나 제라드 모두 이런 상황이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고 그 하나 남은 리그도 우승을 노리기에는 부족했기에 아쉬움이 컸다.
[진짜 엿같은 일이지만...뭐 어쩌겠어. 현실을 받아 들여야지.]
[그래도 이번 시즌은 정말 희망이 있어서 다행이야.]
캐러거의 말에 제라드도 고개를 끄덕였다. 08-09시즌 2위 이후 09-10시즌을 6위로 마쳤다. 이번 시즌에는 반드시 챔피언스 리그, 아니 꿈에도 그리던 우승컵을 들고 싶었다. 하지만 새로운 감독 로이 호지슨은 리버풀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고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설상가상으로 팀의 핵심 공격수 페르난도 토레스마저 이적해버렸다. 크게 티는 내지 않았지만 그때 제라드는 엄청난 상실감을 느껴야했다.
[그거 알아 스티븐?]
[뭘?]
[너는 티 안낸다고 생각했겠지만 말야, 너 페르난도가 떠나고 나서 정말 의기소침해 있었어. 어린 녀석들이야 맨날 니가 인상쓰고 다니니 그런가 보다 했을지도 모르지만 내 눈을 속일 수는 없지.]
[...그랬지.]
캐러거에게는 굳이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인지, 그게 아니라면 사석이었기 때문인지 제라드는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너도 실망했지만 사실 나도 그랬으니까. 그만한 공격수가 떠나는데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 선수가 아닌 친구로서도 좋은 녀석이었으니까.]
슬럼프로 우울한 기색을 보이긴 했지만 근본적으로 굉장히 유쾌하고 즐거운 남자였고 모두 그를 좋아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리버풀이란 클럽에서만 커리어를 이어 나가고 있는 두 사람이었기에 친했던 동료를 떠나 보낸 경험은 남들보다 많았고 그래서 겉으로는 담담한 척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말야, 생각보다 너나 나나 빨리 그에 대한 아쉬움을 떨쳐 낼 수 있었던 것 같아. 그렇지?]
캐러거가 말하는 뜻을 알아차린 제라드는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놀랄 정도로 지금은 금발을 휘날리며 그라운드를 누비던 엘 니뇨의 공백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데이빗 말이로군.]
[그래, 그녀석 말이야. 처음부터 네 관심을 끌었던 친구였잖아. 그리고 이제는 완전한 우리의 동료가 되었지. 나는 그가 이렇게 빨리 성장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
[네 말이 맞아 캐라. 나도 마찬가지였으니까. 1~2년은 더 있어야 할 줄 알았는데 어느새 우리 옆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지.]
[내가 본 녀석들 중에서 성장이 제일 빠른 친구야. 신은 공평하다고 하지만 축구에 신이 있다면 그 양반은 편애를 즐기는 게 분명해.]
프리미어 리그에서 뛰는 선수들 중에 재능이 부족한 선수가 있으랴. 그 말을 하는 제이미 캐러거 조차도 잉글랜드 국가대표까지 지낼만큼 녹록치 않은 재능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천재들을 모아 놓은 집단에서도 다시 우와 열이 가려지는 것 처럼 세계 최고의 선수들이 모였다고 해도 재능의 차이는 존재했다.
[그래, 불공평한 양반이지. 하지만 데이빗은 좀 더 성장해 줘야해. 아직 부족한게 많아.]
엄격한 제라드의 말에 캐러거가 키득키득 웃었다.
[맨체스터 놈들에게 해트트릭까지 선사했는데 아직 우리 캡틴을 만족시키려면 부족한가 보네. 이 리버풀에서 가장 비싼 남자 같으니라고!]
[해트트릭은 물론 멋졌어. 나도 정말 기뻤으니까. 하지만 그날은 데이빗에게 특별한 날이었던 거야. 퍼거슨이 도발한 것이 오히려 그를 아주 좋은 상태로 만들어 준거지.]
차를 한모금 마시며 목을 축이는 제라드, 그의 목소리에 열기가 더해져 간다.
[욕심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야, 그는 좀 더 성장해 줘야해. 우리가 마지막으로 들어 올린 우승컵이 05-05시즌의 FA컵이 마지막이었어. 나는 이 클럽에서 반드시 리그 우승을 거머쥐고 싶어. 그동안 숱한 플레이어들이 이 클럽을 거쳐갔지만 누구도 이루지 못했지.]
[데이빗이 성장한다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캐러거의 질문에 피식 웃음을 흘리는 제라드.
[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면서 뭘 물어봐? 수아레즈 그 친구도 꽤 괜찮아 보여. 루카스도 엄청나게 성장했지. 하지만 데이빗의 존재감은 이미 이 클럽에서 빼놓고 생각할 수 없어. 그리고 나는 그가 분명 메시나 호날두에 버금가는, 아니 그 이상의 플레이어가 될 자질이 있다고 생각해.]
제라드의 말에 하-하고 탄성을 지르는 캐러거였다.
[진짜 어쩌다 이런 녀석이 툭 튀어 나왔는지 모르겠다. 이런 녀석이 그동안 부두에서 짐짝이나 나르고 있었다니 상상도 가질 않아.]
[글쎄, 나름대로 밸런스를 맞추기 위한 신의 배려가 아닐까.]
어울리지 않는 제라드의 농담에 캐러거가 껄껄하고 웃어젖혔다.
[그래, 그거 말 되네. 하지만 그래도...]
살짝 목소리가 잦아 드는 캐러거, 그리고 조금은 힘이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조금만 더 일찍 왔으면 좋았을 걸...]
[제이미...]
제라드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캐러거를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보다 리버풀에서 먼저 경력을 시작했고 강철같은 체력으로 엄청난 경기를 소화해 왔다. 매년 거의 40경기에 육박하는 경기를 치러왔고 어지간한 부상은 늘 달고 사는, 화려하진 않지만 음지에서 리버풀을 뒷받침하는 기둥이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그동안 쌓인 부상과 피로가 발목을 잡기 시작했고 점차 폼이 떨어지는 요즘이었다.
그와 관련된 이야기도 종종 했었고, 아마 캐러거는 몇년 지나지 않아 은퇴를 할 것이다.
[음? 그런 눈으로 보지 말라고 스티븐. 나 아직 안죽었어.]
[누가 뭐래? 곧 은퇴할 늙은이처럼 죽어가는 소릴하니까 뭔소리하나 싶어서 본 것 뿐이야.]
제라드는 위로의 말을 하지 않았고 캐러거는 언제 우울한 기색일 비쳤냐는 듯 쾌활했다.
[은퇴하기 전에 최대한 많은 우승컵을 들어올려야지. 솔직히 우리 집에 트로피를 보관하는 진열장은 너무 썰렁해!]
[그렇게 될거야. 일단 내년에 프리미어 리그 우승컵이 어떻게 생겼나부터 구경을 좀 해야겠지. 빅 이어도 못본지 5년이 넘었다고.]
씩 웃으며 주먹을 부딪히는 캐러거와 제라드, 그리고 기분 좋은 웃음을 흘렸다.
[로이 그 양반이 데이빗을 좀 일찍 올려 썼으면 지금 챔피언스 리그 티켓을 걱정할 때가 아니었을 텐데. 하여간 데이빗 이자식은 뭐가 이렇게 늦어!]
아쉬움을 괜히 데이빗에 대한 불평으로 에둘러 표현하는 캐러거, 제라드는 그런 캐러거를 보며 미소를 흘릴 뿐이었다.
[엣취-]
침대에 누워 TV를 보고 있던 데이빗은 갑작스런 재채기에 들고 있던 물 컵을 쏟을 뻔했다.
[후아, 갑자기 뭐야. 물 쏟을 뻔 했네.]
투덜거리며 안전하게 물 컵을 침대 옆 탁자 위에 올려둔다. 그리고 TV 화면에 다시 집중했다.
-...이번 올림픽을 맞아 잉글랜드, 웨일스, 북 아일랜드, 스코틀랜드를 하나로 묶어 단일팀을 구성하자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으며...
1년 뒤로 다가온 올림픽 축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데이빗은 흥미가 일었는지 TV 볼륨을 키우고 집중했다.
-...그렇게 된다면 와일드 카드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긱스와 웨인 루니, 맨체스터 시티의 크레이그 벨라미, LA 갤럭시의 데이비드 베컴 등이 꼽히고 있으며...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단일 팀에 대한 뉴스였다. 그리고 와일드 카드에 대한 문제와 올림픽 대표로 뽑힐 거라 예상되는 선수들의 명단이 나오고 있었고 데이빗은 곧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어? 저거 나잖아?]
선발 예상 명단에 자신의 이름 DAVID CHANG이 나오고 있었다.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리버풀 소속의 20세, 데이빗 장이 나오고 있었다. 선발된 것도 아니었고 언론에서 '뽑힐 수도 있다고 예상한' 후보군 중의 한명이었으나 데이빗의 놀라움은 컸다.
[에이...이건 언론에서 떠드는 얘기고...]
신뢰도가 나름 높은 방송이었으나 데이빗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말았다. 흥분을 가라 앉히려는 듯 좀전에 올려 놓은 물 컵을 들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기뻐하는 건 진짜로 뽑힌 다음에 해도 늦지 않아.]
기분이 나쁠리는 없었다. 당연히 엄청나게 좋았다. 언론의 설레발일 지언정, 그정도로 자신이 점점 인정받기 시작했다는 이야기였으니 말이다. 데이빗은 새로운 동기 부여가 생기는 것을 느꼈다.
[계속해서 좋은 활약을 이어나간다면 월드컵도 꿈은 아니지. 올림픽, 유로라고 내가 못나갈 이유는 없잖아.]
선수라면 누구나 국가를 대표해서 뛰길 원하는 소망이 있다. 그것은 돈으로 살 수 없는 명예였고 데이빗도 가슴 한편에 세인트 조지를 달고 나라를 대표하고픈 소망이 있었다.
[...잠깐. 근데 내년에는 유로 2012하고 올림픽이 동시에 있잖아?]
작년에 월드컵이 끝나고 국가 대항전은 한참 남았겠거니 생각했는데 잊어버리고 있었다. 데이빗은 심장이 두근두근 거리기 시작했다.
[우와 갑자기 엄청 뛰고 싶어졌어.]
뽑아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혼자 설레발을 떨고 있다며 데이빗은 쓴 웃음을 짓고 말았다. 하지만 오늘 새로운 목표가 데이빗에게 추가되었다. 가슴에 세인트 조지, 혹은 유니언 잭을 달고 그라운드를 누비는 것, 데이빗은 반드시 이루고 말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