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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저새끼가!]
관중석에 앉아 열심히 응원하던(물론 종종 애교스런 욕설도 섞어서) 제임스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는 지금 자신의 두 눈으로 본 것이 현실인지 의심하고 있었다.
[지금 저새끼가 우리 데이빗을 걷어 찬거 맞지?]
살기가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로 옆에 있는 티티에게 묻는 제임스, 티티도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헛 것을 본 것이 아니었다는 확신을 얻은 제임스는 마음껏 분노를 표출했다.
죽여 살려 엄마도 못알볼 자식 가만 안둔다 빌어먹을 놈 이 XX해서 XXX하고 XXX해버릴 자식아-
자신이 얼마나 많은 욕을 알고 있나 뽐내기라도 하듯 다채로운 욕설이 제임스의 입에서 튀어 나왔다. 평상시라면(특히 옆에 에리카도 있는 상황이라) 그런 제임스를 자제시켰을 티티도 성난 표정으로 그라운드를 보며 '저 빌어먹을 놈을 빨리 퇴장시켜라' 고 소리 치고 있었다.
에리카도 화가 나기는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눈뜨고도 믿을 수 없었다. 그 다음에는 데이빗이 다치지 않았나 걱정이 들었다. 다행히 멀쩡이 앉아 있는 모습을 보니 다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안도가 몰려온 뒤에는 분노가 찾아왔다. 꼭 쥔 작은 손이 부르르 떨렸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 저 매너 없는 선수의 따귀라도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
제라드는 분노했다. 가뜩이나 한 점 뒤지고 있는 상태라 신경이 곤두서 있는데 같은 팀 선수가 쓰러졌다. 그것도 일반적으로는 절대 일어나기 힘든, 일어나서도 안될 미친 짓으로 인해서 말이다. 팀을 이끄는 캡틴, 아니 같은 동료로서 분노하지 않는 것이 이상한 상황이었다. 인상을 구긴채 뛰어온 제라드는 보싱와를 밀치며 그와 대치했다. 한 성질 하는 걸로는 밀리지 않는 보싱와도 제라드를 밀치며 신경전을 벌였다.
삑삐삑-
심판이 다가와 양 선수를 갈라 놓았다. 카윗이 넘어진 데이빗에게 다가와 손을 잡아 일으켜 주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에요?]
[저 미친 자식이 널 발로 걷어 찼다! 제 정신이 아니야 빌어먹을 자식 같으니.]
'아, 뭔가 딱딱한 느낌이다 싶었더니 저새끼가 발로 차서 그랬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한 데이빗이다. 화가 안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좀 황당한 마음이 더 컸다.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어어 하다가 넘어졌기에 그런 것인지도 몰랐다.
[아무튼 괜찮냐?]
[네, 별로 아프거나 그런 건 없네요.]
[다행이네. 아무튼 저자식은 퇴장이다. 심판이 제 정신이라...]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인상을 구긴 채 심판에게 달려가는 카윗, 데이빗은 왜그런가 하고 고개를 돌려보니 제라드와 보싱와에게 각각 옐로카드를 주는 심판의 모습이 보였다.
[이게 말이 되는 거야? 왜 저 미친 놈이 퇴장이 아닌 건데?!]
불같이 화를 내며 제라드가 심판에게 따졌다. 가만히 있는 선수를 발로 걷어 찬 선수가 퇴장당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레드카드의 용도는 무엇인가 싶었다. 보싱와는 심판의 옐로카드에 어깨를 으쓱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런 보싱와에게 에시앙이 다가갔다.
[이봐 조세,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거야? 우린 지금 이기고 있다고. 괜히 카드를 받아서 좋을 게 뭐가 있어? 다행히 옐로 카드로 끝났지만 레드 카드가 나올 수도 있었어.]
[마이클, 내가 그렇게 어수룩 한줄 알아? 심판이 다른데 보고 있는걸 확인하고 한거라고. 그리고 전반에 분명 저 애송이를 좀 밟아 놓자고 했잖아. 점잔빼는 애슐리가 영 어설프게 하다 말았으니 내가 나선거 아냐.]
별일 아니라는 듯 픽 웃으며 이야기하는 보싱와의 모습에 에시앙은 한숨을 쉬었다. 그로서는 제대로 된 행동이라 보기 힘들었으나 경기 중에 같은 동료를 비난하는 것도 무리가 있었기에 앞으로 카드를 조심하라는 말만 남기고 돌아섰다.
-이건 좀 문제가 있는 판정이네요. 심판이 보지 못했을까요? 믿기 힘든 판정이 나왔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보고도 이런 판정을 내렸다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아마 경기가 끝난 뒤에도 상당히 말이 많을 것 같습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완전히 작정하고 상대를 발로 밀었어요. 같은 팀인 에시앙 선수도 황당하다는 듯 보싱와 선수를 바라보는 모습인데요, 이런 플레이는 나와서는 안됩니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경기가 재개되었다. 리버풀 선수들은 독이 오를대로 올라 상대를 거칠게 밀어 붙이기 시작했다. 카윗은 동료의 복수라도 하겠다는 듯 공중볼 경합 상황에서 팔꿈치로 알렉스의 가슴을 가격하며 경고를 받기도 했다. 사실 당연히 카드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으나 리버풀 선수들이 받아들이는 느낌은 달랐다. 왜 우리가 옐로 카드를 받아야 하는가, 저런 미친 짓을 한 놈이 옐로 카드인데 왜 같은 취급을 하나 라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들었던 것이다.
흥분이 지나치다 보니 리버풀의 경기력이 제대로 살아나지 못했다. 공을 소유하는 시간은 길었으나 효과적이지 못했고 상대의 반칙에 신경질 적을 반응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지고 있는 팀에서 상대와의 신경전을 통해 분위기 반전을 꾀하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 종목은 다르지만 야구에서도 지고 있는 쪽에서 벤치 클리어링을 시도하며 분위기를 가져오려고 하기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마치 야구에서 이기고 있는 팀이 지고 있는 팀 타자에게 빈볼을 던진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거기에 심판은 위험하고 비신사적인 플레이를 한 상대에게 솜방망이 처벌로 징계를 끝낸 상황, 리버풀 선수들로서는 미칠 노릇이었다.
'내가 상상한 데뷔전은 이런 것이 아닌데...'
경기 분위기가 저조한 가운데 시간만 계속 흐르고 있자 데이빗은 답답한 심정이었다. 자신이라고 짜증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 경기는 데뷔전이었다. 열받아서 데뷔전을 망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데이빗은 찬스를 놓쳐 분해하고 있는 제라드에게 다가갔다.
[캡틴, 진정해요. 이런 모습 캡틴 답지 않아요.]
좀 전에 날린 제라드의 슈팅은 골대를 벗어났다. 상대의 최종라인 근처에서 깔작거리며 쇄도 타이밍을 잡고 있었던 데이빗은 제라드가 조금 무리한 슈팅을 날리자 가까이 다가와 진정시키고자 했다.
[...후우...]
[저도 화가 나요. 하지만 이대로는 안되요. 난 이 경기를 절대 지고 싶지 않아요. 우리가 할 수 있는 복수는 저놈들에게 똑같이 돌려주는 게 아니라 저 치들이 우리 홈에서 우승컵을 들어올리지 못하게 하는 거에요. 내 말이 틀렸나요?]
데이빗의 말에 제라드는 크게 호흡을 가라 앉히며 데이빗을 응시했다. 사실 알고 있었다. 이렇게 흥분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하지만 머리로 알고 있어도 가슴에서 불이 치밀어 오르니 그 격정에 휩쓸리고 만 것이다. 팀에서 가장 어린, 이제 막 데뷔한 애송이에게 이런 말을 듣다니 하는 생각이 들자 머리에 차 있던 열이 조금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이대로는 안돼지.]
말을 마치고 데이빗의 머리를 헝클어 뜨리는 제라드, 데이빗은 씩 웃으며 '멋진 패스 기다리고 있을게요' 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디르크! 무리하지마! 공을 뒤로 돌려!]
어느 정도 냉정을 찾은 제라드가 지시를 내리며 팀을 지휘하기 시작했다. 어수선하고 무모한, 그리고 막무가내로 밀어붙이기만 했던 팀이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데이빗!]
중앙에서 알렉스를 등지고 공을 받은 데이빗이 지체없이 왼쪽에 머무르고 있던 바벨에게 이어주었다. 애슐리 콜을 앞에 두고 돌파를 시도하는 라이언 바벨, 하지만 애슐리 콜은 그가 감당하기에 조금은 벅찬 상대였고 돌파를 성공시키지 못한 채 고착되고 말았다. 데이빗은 바벨에게 커버를 들어가며 패스를 외쳤다. 바벨은 고집부리지 않고 그런 데이빗에게 공을 연결해 주었다. 자신이 이동하며 생긴 수비진의 조그만 틈, 알렉스가 자리를 지킬 지 자신을 따라나올지 순간 고민하며 생긴 작은 틈이 보였고 데이빗은 크로스를 시도했다.
-데이빗 장, 크로스 시도합니다. 디르크 카윗 헤더어~골키퍼가 막아냅니다! 리버풀로서는 아쉬운 상황!
-디르크 카윗 선수도 머리를 감싸쥐며 정말 아쉬워하는군요. 체흐 골키퍼의 선방이 빛났습니다.
-그래도 코너킥으로 이어지는 상황입니다. 첼시로서도 집중력을 유지해야겠지요.
제라드는 코너킥을 준비하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어느새 시간이 후반 35분을 지나고 있었다. 반드시 골이 필요한 시점, 제라드는 치열하게 자리 싸움을 벌이고 있는 동료들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손을 크게 들었다. 그리고 강하게 공을 올려 붙였다.
뻐엉-
날카로운 곡선을 그리며 문전으로 올라온 공은 공격에 가담한 제이미 캐러거의 머리에 맞았다.하지만 수비의 방해로 정확히 맞추지 못했고 어정쩡하게 공이 떠버렸다. 이 공을 수비에 가담한 디디에 드록바가 머리로 걷어내고자 했으나 마찬가지로 제대로 클리어하지 못했다. 순식간에 페널티 박스 내부에서 난잡한 진흙탕 싸움이 펼쳐졌다. 어떻게 해서든 걷어 내려는 쪽과 아군이 어디 있는지 전혀 파악이 안되는 상태에서 냅다 골문쪽으로 걷어 차려는 쪽이 맞물려 마치 동네 축구에서나 볼 법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루카스가 킥한 공이 수비수의 발에 걸려 튀어 올랐고 억지로 클리어 한 공이 얼마가지 못하고 다시 바벨의 슈팅으로 이어졌다.
퍽-
바벨이 슈팅한 공은 같은 팀 캐러거의 몸에 맞고 굴절되었고 골라인 쪽을 향해 굴러가기 시작했다. 첼시 선수들은 막아냈다는 안도감에 순간 긴장을 풀었다. 하지만 플레이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데이빗은 선수들이 날뛰는 틈바구니에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공이 어디로 튀었는지 옆에는 누가 있는 지 알 수 없는 혼전 상황, 이곳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한 데이빗은 혼란의 중심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그때 바벨이 슈팅을 때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데이빗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예측이었을까, 아니면 스트라이커로서의 감이었을까, 데이빗은 바벨의 슈팅이 실패한다고 직감했다. 그리고 본능이 이끄는대로 발을 움직였다. 우연찮게도 공이 캐러거의 몸에 맞고 굴절되었고 골라인을 향해 굴러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데이빗은 이를 악 물고 공을 향해 질주했다.
'모양새는 상관없어. 어떻게 해서든 결과를 내야해!'
멋진 골 따위는 필요없었다. 중요한 것은 득점, 결과를 내야한다는 것이었다. 데이빗은 슬라이딩을 시도하여 가까스로 공이 라인을 넘기전에 잡아 내는데 성공했고 곧이어 거대한 그림자가 자신을 덮쳐오는 것을 느꼈다. 넘어진 상태에서 공을 찼다기보다는 발끝으로 건드리는데 성공한 데이빗, 그리고 엄청난 함성이 터져나오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