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8 - =========================================================================
[데이빗, 잠깐 시간 좀 있어?]
경기를 마친 후, 간단히 샤워를 마친 선수들이 하나 둘 경기장 밖으로 나서고 있었다. 데이빗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파체코가 조금은 굳은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무슨 일인데? 딱히 바쁜 일은 없어.]
[그럼 잠깐 시간 좀 내줘.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을거야.]
뜬금없지만 어쨌거나 같은 팀 동료의 제의였기에 별 생각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바쁜 일도 없었고 오늘은 딱히 에리카와 만나기로 한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좋아. 여기서? 아니면 자리를 옮길까?]
[긴 이야기는 아니지만 여기는 너무 어수선한 것 같아. 저쪽 벤치로 가자.]
파체코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확실히 한적한 분위기의 벤치가 보였다. 주변에 사람도 없었고 대화를 나누기에는 충분히 좋은 공간으로 보였기에 데이빗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 받아.]
[어, 잘마실게.]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자 파체코가 미리 준비한 것인지 음료수를 하나 건네왔다. 데이빗은 파체코에게 감사를 표하며 받았고 뚜껑을 열어 한모금 들이켰다.
[시원하네. 고마워 파체코. 안그래도 목이 좀 마르던 참이었어.]
[사실 시간이 너무 이르지만 않았어도 맥주라도 한잔 하러가자고 말하고 싶었어. 나는 운동하고 나서 가볍게 맥주한잔 마시는게 참 좋더라고. 너는 어때?]
[땀흘리고 난 뒤에 맥주 한잔은 정말 신의 축복이야.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 중 하나지. 요즘에는 조금 자제하고 있지만 말이야.]
[몸 관리 때문에? 뭐 너무 흥청망청 마시면 곤란하지만 가끔 한잔 정도는 괜찮아. 다음에 시간 된다면 같이 한잔 하러 가자.]
파체코의 제의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데이빗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가벼운 이야기를 주고받던 파체코와 데이빗,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려는지 파체코의 표정이 조금은 진지해졌다.
[오늘 이렇게 너를 따로 부른 이유는 말이야, 너하고 대화가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이야.]
자신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짓는 데이빗을 보고 가볍게 숨을 내쉬는 파체코였다.
[사실 지금 너하고 경기를 뛴 게 두 경기밖에 안되서 뭐라 말하기도 좀 그렇긴 한데, 더 늦기전에 이야기하는게 맞다고 생각했어.]
[무슨 이야기인데 그래?]
[데이빗, 너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어?]
뜬금없는 파체코의 말에 고개를 갸웃하는 데이빗이다. 질문이 너무 포괄적이었다고 생각했다. 파체코도 자신의 실수를 알아챘는지 곧바로 말을 덧붙였다.
[말이 부족했네. 너는 경기 중에 선수로서의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어?]
[어떻게 생각하냐니...]
뭐라 말을 해야할까, 데이빗은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당황했고 대답을 찾기가 곤란하다고 생각했다. 파체코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첫 경기 이후로, 아니 첫 경기때 초반 이후로 나는 너에게서 패스를 받아보지 못했어. 아무리 노마크 상황을 만들어도, 빈공간으로 달려가도, 원 투 리턴을 시도해도 너는 한번도 내게 패스를 해주지 않았어. 대부분 네가 해결한 상황이 결과가 좋아서 뭐라 말하기는 힘들었지만 나로서는 납득하기가 좀 힘들었어. 데이빗, 너는 내 실력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는거야?]
단도직입적인 파체코의 말에 데이빗의 표정이 흔들렸다. 딱히 파체코를 무시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 데이빗이 낌새를 아는지 모르는지 파체코는 계속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사실 퍼스트 팀과의 경기에서 너한테 처음 패스를 받았을때, 내가 너무 안일한 슈팅을 시도했기에 나도 아쉬움이 컸어. 그리고 지난 경기에서 생각지도 못한 타이밍에 너에게서 패스가 날아와서 반응이 늦었고. 그래서 네가 나에대해 실망을 하고 스스로 해결을 하는가 싶기도 했어. 하지만 그런 부분은 충분히 서로 대화를 통해서 맞춰갈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해.]
목이 타는 지 음료를 들어 목을 축이는 파체코였고 데이빗은 묵묵히 그런 파체코를 바라보았다.
[지난 경기에서 네 패스를 받지 못했을 때 나는 굉장히 아쉽기도 했지만 기뻤어. 내가 조금만 빨리 움직였다면 분명 엄청난 찬스였으니까. 이런 패스를 해줄 수 있는 파트너라면 나도 훨씬 더 좋은 경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그 이후로 나는 네게서 공을 받지 못했지. 데이빗, 그런 표정 짓지마. 나는 지금 너에게 화를 내고 있는게 아니야. 너와 대화를 하고 싶다고 했잖아. 나는 우리가 좀 더 좋은 관계가 될 수 있다고 믿어. 경기장에서든 밖에서든 말이야.]
긴 이야기를 마친 파체코의 표정은 후련해보였다. 데이빗은 밝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파체코를 보기가 부끄러웠다.
분명 자신은 파체코를 무시한 것은 아니었다.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고 마음먹은대로 상대 수비를 제칠 수 있었기에 자신감이 충만했었다. 하지만 그 생각의 이면에는 좋은 찬스를 날렸던 파체코에게 주는 것보다 자신이 해결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정말 없었을까. 데이빗은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은 먼저 다가와 준 파체코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데이빗은 고개를 들고 파체코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미안 파체코. 네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줄은 몰랐어. 아마 경기가 잘풀리니까 내가 너무 흥분해서 혼자 날뛰었나봐. 널 무시하려는 의도는 없었어. 미안해.]
[네 말대로 우리는 대화가 필요한 것 같아. 오늘 이렇게 먼저 이야기를 꺼내줘서 고마워. 네가 아니었으면 나는 아마 내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계속 독단적인 플레이로 일관했을거야.]
데이빗의 말에 기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파체코였고 데이빗 또한 진심어린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
[아, 그러니까 원래 유소년 팀에서 축구를 한 것이 아니었다고?]
[그래, 사실 아직도 가끔은 내가 리버풀이라는 빅 클럽에서 뛰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때가 있어. 운이 좋았지.]
[운은 리버풀이 좋은 거지. 너만한 재능을 가진 플레이어를 그야말로 길가다 줏은거나 다름없으니 말이야.]
데이빗과 파체코는 맥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뭔가 헤어지기가 미진함을 느낀 데이빗이 파체코에게 저녁 스케줄을 물었고 별다른 일정이 없다는 대답에 저녁을 함께 하며 간단히 맥주를 마시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파체코는 두말않고 승낙했고 둘은 귀가하여 약간 휴식을 취한 뒤 저녁시간에 맞추어 만났던 것이다.
[하긴, 그랬으니 내가 네 이름을 처음 들어보는 게 당연한 거였네.]
[응? 무슨 말이야?]
[사실 리버풀 리저브 정도 되는 팀에 들어오는 선수들은 각 나라에서 청소년 대표 경력 정도는 있는게 보통이거든. 청소년 대표 선수들은 자세히는 몰라도 이름정도는 들어본적이 있는 경우가 많아서 말이야. 특히 너 정도 되는 실력이라면 모를리가 없다고 생각했었지. 그래서 나는 아시아쪽에서 리버풀로 뽑혀왔나 생각했었어.]
[안타깝지만 나는 2번부두 대표였다고. 네가 알리가 없었겠지. 혹시 네가 잉글랜드로 넘어 올때 네 짐을 내가 하선했을지도 모르겠는걸.]
[아? 그러고보니 내 침대가 모서리가 상해있던데 그거 네가 그런거 아니야?]
[알게 뭐야. 그런데 넌 침대도 가져왔었어?]
[난 섬세한 남자라고! 내 침대는 정말 안락함 그 자체야. 그걸 두고 온다면 난 아마 제대로 숙면을 취하지 못했을 거야.]
[까다롭기는.]
피식 웃으며 잔을 들어올리는 데이빗, 파체코도 잔을 들어 마주쳐온다. 기분좋게 잔을 부딪히고 한모금을 들이키자 맥주 특유의 쌉싸름한 맛과 톡 쏘는 느낌이 전해져왔다.
[그런데 정말 대단하다 너. 네 말대로라면 축구를 배우지도 않았는데 그런 실력을 갖게 되었다니. 세상은 정말 불공평한 것 같아.]
하아-하고 한숨을 내쉬며 잔을 내려놓는 파체코의 모습에 데이빗은 멋적은 웃음을 흘릴 수 밖에 없었다.
[나도 예전에는 천재소리를 꽤나 들었었어. 나도 내가 엄청난 선수가 되는데 충분한 재능을 가졌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바르셀로나에 있을때 한 선수를 보고 나는 천재가 아니었구나 하고 느꼈지.]
누구를 말하는 건지 알 것 같았다. 세계 최강으로 꼽히는 스페인 청소년 대표를 지낸 이 재능 넘치는 선수를 좌절하게 만들 정도의 압도적인 재능이라면 말이다.
[그래. 메시, 리오넬 메시 말이야. 처음 그 선수를 보았을 때 정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어. 질투? 그런 감정은 느낄 수도 없었지. 레벨이 어느정도는 비슷해야 그런 감정도 느끼지 않겠어?]
자조적인 미소를 짓는 파체코의 모습에 아무 말도 하기 힘든 데이빗이었다. 자신은 메시란 선수를 TV에서 본 것이 다였다. 실제로 겪어본 선수가 느끼는 감정에 대해 뭐라 말하기 힘든 것은 당연했다.
[정말 천재라는 것이 있었구나 하고 생각했어. 그리고 이곳 리버풀에 와서도 그런 재능을 본 것 같아.]
그 말과 함께 데이빗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파체코, 데이빗은 부담을 느꼈다.
[과찬이야. 난 아직 멀었어.]
[물론 당장 비교하면 메시가 훨씬 높은 수준이야. 하지만 나는 네가 그에 못지 않은 플레이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는 말이야.]
[고마워. 하지만 그건 너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 우리는 메시보다 어려. 미래는 어떻게 될 지 아무도 몰라.]
[맞는 말이야. 내가 너무 분위기를 무겁게 만든 것 같네. 취한 것도 아닌데 말야.]
씩 웃음을 지으며 이야기를 정리하는 파체코였고 데이빗은 다시 한번 잔을 들어올리며 입을 열었다.
[일단 우리 목표는 퍼스트 팀에 올라가는 거야. 그리고 우리 둘이 힘을 합쳐서 리버풀에게 프리미어리그 첫 우승컵을 안겨주자.]
[좋아. 앞으로는 날 믿고 패스를 바치도록 해. 그럼 내가 다 알아서 해줄테니까.]
[알았어. 대신 패스했는데 못넣으면 엉덩이를 걷어 차줄테니 그렇게 알라고.]
큰 웃음을 터뜨리며 잔을 힘차게 부딪히는 데이빗과 파체코, 데이빗은 그 어느때보다 맥주가 맛있다고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