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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혼자였다. 아주 어릴적에는 같이 놀던 친구들도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한살 두살 나이를 먹어가면서, 머리가 굵어지면서 주변 친구들은 그를 따돌렸다.
왜?
단지 머리카락과 피부 색이 다를 뿐이었다. 소년은 자신이 따돌림 받는 이유가 불합리하다고 느끼지 못했다. 다만 자신은 왜 남들과 다른 색을 타고 난 것인지 원망스러웠다. 염색을 하면 머리색을 바꿀 수 있다고 들었다. 어떻게 하는 것인지 몰라 물감을 뒤집어 썼다. 애들이 그림 그릴 물감을 다 썼다고 혼났다. 목욕을 하면 피부가 깨끗해진다고 들었다. 피부가 빨갛게 부어오를정도로 문질러봤다. 소용없었다.
시간이 지나서 알게 되었다. 저들과 나는 애초에 달랐다는 사실을. 그때 또 알게 되었다. 저들이 나에게 하는 행동은 잘못되었다는 것을. 가끔 보는 TV에서나 책에서 피부색이 다르다고 차별하는 것은 아주 나쁜 행동이라고 했다. 하지만 현실을 그렇지 않았다.
소년은 웃음을 잃었다. 자신의 친구는 낡은 공 밖에 없었다. 자신을 노란 원숭이라고 놀리는 멍청하게 생긴 돼지새끼가 이죽거리며 '네놈의 공은 지금쯤 쓰레기장에서 잘 타고 있을거야.' 라고 말했을때 눈이 뒤집혔다. 기름기 좔좔흐르는 돼지의 면상을 짓밟고 쓰레기장으로 달려갔다. 다행히 아직 태우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물론 다음날 돼지새끼와 돼지의 패거리들에게 실컷 얻어터졌다.
소년에게는 진정 공 밖에 없었다. 잡초가 무성한 볼품없는 좁은 공간이었지만 자기만 아는 아지트도 찾았다. 하루 종일 그곳에서 공을 차며 지냈다. 처음에는 무작정 강하게 찼다. 쌓인 울분을 풀고 싶었는 지도 몰랐다. 그러자 어설픈 그의 발놀림에 반발하듯 공은 제멋대로 튀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공을 섬세하고 부드럽게 다루는 법을 알게 되었다. 강하게 차면 이미 너덜너덜해진 공이 버티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없지 않았던 것 같다.
시간이 흘렀다. 소년은 좋지 않은 기억으로 가득했던 첫번째 보금자리에서 뛰쳐 나왔다. 이제 정식으로 일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소년은 기대에 부풀었다. 열심히 돈을 번다면 자신도 행복해 질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현실은 다시 한번 소년을 힘들게 했다. 이런 저런 이유가 있었지만 결국 자신의 피부색이 또 발목을 잡았다. 어찌어찌 항구쪽에서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항구에서의 삶은 돈을 버는 것 이외에는 이전과 다를바가 없었다. 굳이 달라진 점을 찾으라면 자신을 부르는 호칭 앞에 새로운 단어가 추가되었다는 것 정도랄까. 아직 젊다고 하기에도 어린 나이의 소년에게 항구 노동은 버거웠다. 비틀거리며 선적작업을 하던 소년을 보고 주변의 누군가가 '약해빠진 노란 원숭이 녀석' 이라고 부른게 시작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평소에 자신을 그나마 잘 대해주던(욕하고 괴롭히지 않았다는 말이다) 붉은 머리의 남자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친절히 대해주었던 금발의 남자가 같이 축구를 하러 가자고 했다. 소년은 기뻤다. 누군가 자신에게 같이 무엇을 하자고 한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겁도 났다. 다른 사람과 같이 공을 차 본적이 없었기에 자신이 시합을 망친다면 그나마 친절했던 이 둘 마저 자신을 괴롭히지 않을까.
고민하며 대답을 못하던 소년을 잡아 끈 것은 의외로 금발의 남자였다. 부담 갖지 말고 즐기자며 손을 잡아 끌었다. 그 온기가 따뜻해서, 미소가 고마워서 눈물이 날 뻔했던 것은 이후로도 비밀이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옆에서 '잘 있었나! 우리들의 리틀 안필드!' 라고 외치는 것이 들려왔다. 리틀 안필드라고 하기에는 허름한 공터가 아닌가 싶었다. 아니 어린 시절 자신만의 아지트에 비한다면 지나칠정도로 훌륭했다. 일단 잡초는 없었고 겉으로 보기에는 평평했다. 그리고 무려 골대까지 있었다! 골대 그물의 재질이 항구에서 많이 보던 것과 닮았다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옆에서 붉은 머리의 험상궂게 생긴 남자가 뭐라 뭐라 이야기 하고 있었는데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다리가 제멋대로 날뛰려 하는 느낌이랄까, 마치 레이스 전의 경주마처럼 흥분을 가라 앉히기 힘들었다.
시합이 시작되고 소년의 눈에는 공, 그리고 골대밖에 보이지 않았다. 달렸다. 누군가가 뒤쳐지는 걸 느꼈다. 하나, 둘, 셋, 그리고 넷을 지나쳤을때 소년의 앞에는 골대가 있었다. 가볍게 공을 찼다. 데굴데굴 공이 굴렀다. 그리고 그물에 살짝 공이 감기며 멈췄을때 소년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짜릿한 느낌을 받았다. 그제서야 주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놀란 표정으로 소년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도 있었고 크게 웃으며 자신에게 달려오는 사람도 있었다.
후에 붉은 머리의 남자는 초짜인줄 알고 수비나 하라고 시켰더니 갑자기 미친놈 처럼 치고 올라가서 패스하라고 욕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설마 거기서 혼자 다 뚫고 들어가서 골을 넣을 줄은 누가 알았겠냐고 크게 웃었다.
소년의 삶이 변한 날이었다. 더할나위없이 소중한 친구 둘을 얻게 되었고 자신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는 새로운 세계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소년이 알게 된 새로운 세계는 진정 소년의 삶을 변화시키려 하고 있었다.
[...으음.]
[어디 안좋아?]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몸을 이리저리 뒤틀어보는 데이빗의 모습에 티티가 약간은 걱정스레 물어온다.
[아니, 몸이 살짝 무거운 것 같아서 말야. 뭔가 간밤에 뒤숭숭한 꿈을 꾼 것 같기도 하고 말이지.]
[아마 어제 테스트를 본다고 생각보다 스트레스를 좀 받아서 그런가봐. 곧 괜찮아 지겠지.]
[그런가. 어쨌든 신경써줘서 고마워 티티.]
[뭘, 그나저나 이거 하루만에 소문이 쫙 났나 본데?]
그의 말 마따나 오늘 데이빗을 본 사람들은 저마다 수근거리기 바빴다. 대충 들리는 소리가 리버풀이 어쩌고, 테스트가 어쩌고 등등 이었다. 그러면서 설마하는 눈빛으로 사람을 이리저리 쳐다보는데 은근히 부담스러웠다.
[그런 것 같지?]
[응, 분명히. 범인은 보나마나...]
[어이! 니들 나만 빼놓고 쉬기냐?!]
호랑이도 제말하면 온다는 말은 괜히 나온 말이 아닌 것 같다.
[리버풀에서 가장 입 싼 남자 제임스씨겠지.]
[애초에 우리 셋 말고는 아무도 모르고 있어야 정상이니까 말이지.]
자신을 빼 놓고 둘이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영 기껍지 않은지 툴툴거리며 다가오는 제임스의 모습에 피식 웃는 데이빗과 티티였다.
[넌 그 새를 못참아서 소문을 쫙 내놓냐?]
[앙? 무슨 소릴 하는거냐? 이몸이 무슨 소문을 냈다고.]
[테스트 말야. 테스트.]
[아? 그거? 별로 소문내고 다닌건 아닌데?]
[아니긴, 오늘 하루 종일 데이빗만 보면 사람들이 수군거리는데. 리버풀이 어쩌고 저쩌고 말이야.]
[새끼들 입도 싸지. 그 새를 못참고 다 떠벌렸구만.]
[...그게 니가 할 소리냐.]
핀잔을 주는 티티였지만 제임스는 껄껄 웃으며 가볍게 넘기는 태도였다. 애초에 자신이 떠벌리고 다녔다는 인식도 하고 있지 않았던 것이 분명했으니 말해봐야 입만 아프다.
[그나저나 티티, 그 누구라고 했지? 암튼 그 스카우트한테 연락은 왔어?]
[......]
[......]
자신의 물음에 어처구니가 없다는 눈빛을 보내는 둘의 모습에 제임스가 고개를 갸웃한다.
[...니가 지금 그걸 물어보는 거야?]
[? 왜? 내가 물어보면 안되는 거냐?]
[네놈이 어제 술 취해서 내 전화기 작살낸거 기억 안나냐?!]
[티티 포기해, 제임스가 기억하고 있을리 없잖아. 제임스에게 너무 무리한걸 기대하지 말라구.]
[이봐 데이빗,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사실 그랬다. 어제 기분좋게 시작한 술자리는 늘 그렇듯 제임스를 거나하게 취하게 만들었다. 취해서 5분이 멀다하고 '그 스카우트한테 연락 안왔냐' 고 물어보는 제임스의 모습에 온화한 티티마저 짜증을 내며 '그렇게 궁금하면 니놈이 전화해 보던가!' 하면서 전화기를 내민 것이 화근이었다.
-좋아! 이 몸이 직접 전화걸어서 물어보겠어! 데이빗을 뽑았는지 안뽑았는지 말이야. 만약 떨어뜨렸다면 내가 직접 그 친구의 시력이 멀쩡한지 검사해주겠어!
-그러시던...이봐! 진짜 할 생각이야? 지금 시간이 12시가 넘었다고!
-기다려봐! 금방한다니까?
-제기랄! 내가 미쳤다고 이자식한테...어이 데이빗! 졸지 말고 이 미친 녀석 좀 말려봐!
급기야 꾸벅꾸벅 졸던 데이빗까지 깨워서 핸드폰 쟁탈에 나섰다. 하지만 상대는 리버풀 항만에서 힘에 있어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하는 제임스, 거기에 취할대로 취해서 꼬장이 더해지니 성인 남자 둘이 달려들어도 쉽지가 않았다.
-빌어먹을! 이 고릴라 자식 힘센건 여전하네.
-이봐 제임스! 그만 좀 놓으라고!
여기서 문제는 티티의 핸드폰이 접이식 폴더형이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제임스가 전화를 걸기 위해 폴더를 열어놓은 상태에서 실랑이가 붙었다는 점. 그런 상태에서 남자 셋이 달려들어 서로 뺏으려 드니 핸드폰이 버틸리가 없다. 똑 하고 정확히 반토막이 나버린 핸드폰, 티티와 데이빗은 망연자실했고 제임스는 '치사한 녀석' 이라고 중얼거리더니 테이블에 머리를 처박고 잠들어버렸다.
[무슨 소릴 하는거야? 내가 니 핸드폰을 왜 부숴?]
영문모를 소리를 들었다는 표정으로 항변하는 제임스의 모습에 깊은 한숨을 쉬게 되는 둘이었다.
[말을 말자. 아무튼 지금은 연락을 받을 방법도, 할 방법도 없어. 나중에 일 마치고 새로 하나 장만 하고나서 생각해 봐야겠지.]
헛돈 쓰게 생겼네 라고 중얼거리는 티티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뭔가 건드리면 안될 것 같다고 느꼈는지 제임스는 한발 뒤로 물러섰다. 그러면서 티티와 마찬가지로 자신을 한심하게 쳐다보는 데이빗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말을 붙였다.
[이봐, 어제 좋은 꿈이라도...]
[이봐 거기! 언제까지 쉬고 있을 거야?!]
은근히 물어오는 제임스의 말을 끊는 고함소리, 그 소리에 셋의 표정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동시에 구겨졌다.
[빌어먹을 핏불 자식...]
[지금 선적 작업 한창인거 몰라? 팔자좋게 노닥거릴 시간 있으면 가서 일이나 해
, 이 게으름뱅이 자식들아!]
2번 부두에서 가장 악명높은 남자, 본명은 따로 있었으나 통칭 핏불이라 불리는 부두주임은 명성에 걸맞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셋을 다그쳤다. 쓴 웃음을 지으며 발걸음을 옮기는 데이빗의 귀에 옆에서 제임스가 '언젠가 저 새끼 진짜로 죽여버릴거야' 라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끼눈을 치켜뜨고 셋을 잡아먹을듯이 노려보던 통칭, 핏불은 자신의 앞을 스쳐지나가는 데이빗을 보고는 입꼬리를 일그러뜨렸다.
[오 이게 누구야. 곧 안필드에 입성할 거란 소문이 자자한 데이빗 선수였잖아?]
비아냥거리는 어조, 비웃음이 역력한 표정은 정말이지 한대 쳐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했다. 속으로 울컥한 기분이 든 데이빗이었지만 애써 참으며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하지만 제임스는 그 느물거리는 태도를 참지 못했다.
[흥, 어디서 들은건 있어가지고. 당신이 신경쓰지 않아도 데이빗은 곧 그렇게 될거야.]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자신을 향해 쏘아붙이는 제임스의 모습의 부두주임의 입가에 걸린 비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그와 반비례로 제임스의 얼굴은 더욱더 험상궂게 구져졌고.
[허! 이봐 제임스, 진심으로 그렇게 믿는다면 더 늦기 전에 정신과 상담을 받아보는게 좋을거야? 저 친구가 안필드에? 리버풀이 그렇게 병신같은 팀인줄 알아? 어중이 떠중이 아무나 데려다 선수로 쓰게?]
[이...말이면 다인줄...!]
[아, 혹시 니들이 말하는 그 멋진 공터에 진출한다고 말하는 거였다면 내가 사과하지. 이름도 비슷했지? 리틀 안필드라고 했나? 축하하지. 계약금은 얼마나 받았나?]
흥분한 기색이 역력한 제임스를 붙잡는 티티와 데이빗, 간신히 제임스가 날뛰기 전에 말리는데 성공했다. 훅훅 거리며 자신을 쏘아보는 제임스를 여전히 비웃는 눈볓으로 일별하며 다시금 입을 열때 항만 전체에 통신음이 울려퍼졌다.
-안내 말씀 드립니다. 2번 부두 소속 데이빗 장씨는 지금 즉시 항만공사 사무실로 와주시기 바랍니다. 반복합니다. 2번 부두 소속의...
[?]
안내통신에 의아한 기색으로 서로를 쳐다본다. 그러다 감을 잡았는지 제임스가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소리쳤다.
[온거야! 그들이 온거라고!]
[무슨 소릴 하는거야? 오긴 누가 와?]
인상을 찌푸리며 물어오는 부두주임의 질문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데이빗의 어깨를 덥석 잡으며 외치는 제임스였다.
[리버풀 쪽에서 온게 분명해! 티티녀석과 연락이 안되다 보니 항구에 직접 연락때린게 분명하다고! 아니면 직접 찾아왔거나!]
[헛소리 좀 작작해. 그들이 너처럼 그렇게 할 일이 없는 줄 알아?]
[뭐야. 그럼 나하고 내기라도 할까? 난 지금 방송이 리버풀에서 데이빗을 데려가기 위해서 라는데 1000파운드를 걸겠어! 어때? 무서우면 꽁무니 빼도 좋아.]
[이 자식이 미쳤나. 좋아. 난 네놈 말이 헛소리라는데 1000파운드 걸지.]
질 수 없다는 듯 응수해오는 부두주임의 모습에 제임스는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후회할거야.]
[누가 할소리.]
[좋아. 돈 벌었군.]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걸어가는 제임스를 향해 '이봐 제임스, 너한테 1000파운드가 있을리 없잖아.' 라고 걱정하는 데이빗의 모습이 보였고 이에 제임스는,
[무슨 걱정이야. 내가 이길게 뻔한데 1000파운드가 왜 필요해?]
라며 당당히 응수했다.
[제길.]
뭔가 찝찝했다. 상식적으로는 자신이 이길게 뻔한 내기인데 당당한 제임스의 태도가 영 거슬렸다. 그러고보니 딱히 저 데이빗이란 녀석을 이렇게 안내 방송으로 찾을 일이 없기도 했다. 맘에 드는 녀석은 아니지만(애초에 그의 마음에 드는 녀석이 있는지는 차치하고!) 저 제임스라는 녀석과는 달리 사고를 치는 놈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슬슬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젠장, 이거 좆된거 아냐.]
항만공사로 향하는 부두주임 통칭 핏불의 발걸음은 초라하기 그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