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화]
현재 이 전장에 참여해 있는 종말기장들 20기, 그리고 종말기병은 500기, 그 아래로 수많은 골렘들이 지평선 너머까지 깔린 상황. 이 모든 것들을 쓰러뜨리면 승리한다곤 하지만 그건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레일 라이플, 장전 완료. 발사.]
콰아아아앙!
여럿이서 발사하는 종말기장의 사격 무장. 웬만하면 기사들은 피하지만 밀집되어 있는 진형에서는 결국 누군가는 그 사격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고, 강력한 레일 라이플의 공격을 막으려고 한 지군대장군의 몸통 전체가 일격에 날아가 버렸다.
“와…….”
“앞을 봐라! 계약자!”
“어! 알았어!”
그래, 그 어떤 미사여구와 대의명분이 있어도 전쟁은 전쟁이다.
그리고 아무리 손해점이니 손익 계산을 한다고 할지라도 눈앞의 저 종말기장들은 강하다.
그 사실을 깨달은 유성원은 티탄의 말뚝을 굳게 잡고, 일단 하나라도 확실히 쓰러뜨리기 위해 엘드라엔의 기수를 몰아 공격하는 종말기장 중 하나에게 다가가서 무기를 휘둘렀다.
“잡았… 다!”
[종말기장 β(Beta). 적 대장과 교전을 시작하겠음.]
하나 역시 만만한 적이 하나도 없는 건지, 상대하는 종말기장 베타는 검날 부분이 빛나는 검을 들더니 유성원에게 휘둘러 왔다.
그리고 티탄의 말뚝과 부딪치는데, 놀랍게도 티탄의 말뚝에 흠집이 생긴 걸 보고 유성원은 깜짝 놀랐다.
“설마 신조 병기인가?”
[부정. 초진동검(Hyper Vibration Blade)일 뿐. 오히려 질문. 해당 둔기는 무슨 금속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까?]
“아! 글쎄? 분석해 보시든가!”
콰아아앙!
티탄의 말뚝이 단단한 건지, 아니면 종말기장 베타가 휘두르는 초진동검이 대단한 건지 몰라도 둘은 계속해서 무기를 부딪치며 격전을 펼치고 있었다.
하나, 용에 의존해서 하늘을 나는 유성원과 달리 스스로 하늘을 날면서 인간의 가동 영역을 초월한 움직임을 할 수 있는 종말기장 베타는 상당히 까다로운 적이었다.
‘젠장! 나뿐만 아니라 다들 힘들어 보이는데? 어라?’
일단 사격을 하는 종말기장들을 막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유성원뿐만 아니라 다른 기사들도 마찬가지였고, 여러 기사들이 팀을 이루어 달라붙어서 쓰러뜨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이거 역시… 힘든 싸움이겠는데?’
[전투 프로그램 순조로움. 현 상황이 지속될 시 승률 약 78퍼센트, 전장의 승률 66퍼센트 추정함.]
“헛소리하지 말라고!”
[객관화된 자료와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통계임.]
콰아앙!
담담히 확률 놀음까지 내뱉는 종말기장 베타의 말에 짜증 나서 티탄의 말뚝을 휘둘렀지만, 상대는 쉽게 막아 내고 있었다.
전투 센스나 솜씨가 보통이 아닌 게 그야말로 기계 같은 공격과 방어를 선보이니 유성원은 이거대로 쉽지 않은 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길… 쉬운 게 없군. 게다가…….’
그 현상은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기사들에게도 통용되는 건지 다들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지상의 골렘 군단이나 종말기병들은 어떻게 잘 상대하고 있었지만, 빠른 속도로 날아다니면서 강력한 사격 무장을 쏴 대는 저 종말기장들은 기사들에게 있어 최악의 적이나 다름없는 상황. 게다가 저 종말기장들이 사용하는 병기 또한 만만치 않은 물건이라서 맞거나 스치면 못해도 부상이고, 제대로 맞으면 목숨도 보전하지 못했다.
‘그래도… 멸망급 성좌의 부하들인데! 이 정도는 해야지!’
하지만 아직 투지는 꺼지지 않은 덕인지 유성원은 이를 악물고 티탄의 말뚝을 휘두르며 저항했고, 기사들과 천검군 병사들 모두 필사적으로 싸우며 전쟁을 지속해 나갔다.
***
인도-파키스탄 국경.
코어 던전 내부에서 유성원이 싸우는 동안에도 지상은 여전히 북쪽으로 몰려드는 난민들로 인해서 혼란한 상태였다.
그래도 식량과 식수를 공급하는 덕분에 일단은 평화로운 듯했지만, 사람들의 분위기는 최악이었다.
다들 모여 있다 보니 인도 전역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 가게 되었고, 모든 사람들은 ‘신’이 자신들을 버렸다는 걸 알게 되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참 나… 무슨 성좌가 우리를 버리고 가다니…….”
“심지어 그 잘나신 브라만, 크샤트리아는 그거 알고 자기들끼리만 도망갔단다. 신을 따르니 어쩌니 할 땐 언제고… 성좌 종말자가 오니 아주…….”
“하긴 갠지스 강이 똥물일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우린 언제 돌아갈 수 있는 거야?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지?”
웅성웅성…….
각종 불만과 불안으로 가득 찬 사람들. 이대로 대피할 수 있는 것도 언제까지일지 모른다.
또 유성원 측의 성의로 인해서 식량과 식수가 공급되고 있다곤 하지만 하루에 천문학적인 액수가 소비되는 만큼 언제 이것에 끊길지 몰라 불안한 것도 추가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배급받은 것을 아껴 먹거나 몰래 비축하는 이들도 생기는 한편 알게 모르게 남의 것까지 도둑질하는 사람들도 보이고 있었다.
“이거 이대로 두면 안 될 것 같은데 말이죠.”
“근위대장님! 여기 예의 촬영 자료가 왔습니다.”
“음, 좋아. 역시 유청 경이 예상하던 그대로 아닌가? 그럼 슬슬 다음 일을 시작해야겠군.”
식사와 식수를 공급해 주기 위해 이곳에 와 있는 근위대장들과 병사들은 유청이 지시해 놓은 대로 곧바로 다음 계획으로 진행하기 위해 피난민들 사이에 있는 대표자들을 불러내었다.
브라만과 크샤트리아들 대부분이 도망치거나 멘탈이 무너져서 일을 방기하곤 했지만, 그래도 개중에는 책임감과 사명감을 가지고 피난민들과 함께 이곳에 온 브라만과 크샤트리아들이 있었고 그들이 현재 피난민들의 대표자 역할을 하는 중이었다.
“무, 무슨 일이신지요? 제33근위대장님.”
“예, 브라만 수바시시. 그… 나쁜 소식을 전하러 왔습니다.”
“그, 그게 무엇인지요?”
“현재 당신의 국가를 점령하려고 하는 성좌 종말자의 코어 던전으로 저희 폐… 크, 크흠! 아니, 대장님께서 들어가신 건 알고 계실 겁니다. 아시다시피 상대는 멸망급. 인류 최대의 적이나 다름없으며 가장 위험한 곳입니다. 여기까진 알고 계시죠?”
“그, 그렇습죠.”
“그리고 밖에 있는 저희는 늘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야 합니다. 지금 식량과 식수 공급을 해 드리고 있지만 만약 ‘코어 던전’에서 저희 대장님을 비롯한 던전 공략 멤버들이 실패할 경우, 저희는 곧장 여기서 철수해야 합니다.”
“그, 그럴 수가…….”
당연하다는 듯 난색을 표하는 브라만. 유성원 측이 제공해 주는 식량과 식수가 가히 생명줄이나 다름없기에 그들이 없으면 안 되는 입장이었다.
제33근위대장은 난감해하는 그 표정을 보면서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아직 그 일이 발생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만약 그런 일이 발생할 경우를 대비해야겠죠. 현재 드론으로 관찰한 결과, 현재 성좌 종말자의 군대는 더 이상의 진격 없이 인도 중부에서 전진을 멈춘 상태입니다. 성좌 진황 님의 군대와도 대치 중에 있는 상황이니 지금 이 시간을 헛되이 보내서는 안 됩니다.”
“그, 그럼 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하긴요. 당장 사람들과 함께 더 이상 피난민 생활을 하지 말고 내려가서 도시를 재건하고, 삶의 터전과 전선을 꾸려야지요. 그럼 이대로 피난민 생활을 계속할 겁니까? 고향과 조국을 버리고?”
“그건 아닙니다만, 우리로는 이미…….”
“잘 생각하고 대답하십시오. 정말로 당신들이 하지 않겠다고 하면 상관없습니다만, 저희는 그저 위에서 시킨 일을 마치고 결국 돌아가게 될 겁니다. 그럼 기존 ‘신의 섭리’에 질서를 의존하던 사람들이 도망친 당신들 나라와 삶의 터전은 어떻게 될까요? 상상해 보셨습니까?”
상상이 안 될 리가 없다.
국민들을 통제하고 질서를 잡을 제대로 된 정부나 조직도 없고, 그렇다고 시민들을 나 몰라라 하고 국외로 도망친 브라만이나 크샤트리아를 도로 불러와서 다시 통치를 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또다시 다른 성좌를 섬긴다? 어불성설이다.
결국 남은 건 그나마 책임감 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인도 정부를 대신할 조직을 새롭게 구성해서 조국을 지키는 형태를 만들어야만 했다.
“물론 가능하면 총선거를 해서 직접 국민의 대표를 뽑고 싶지만, 현 상황에서 그게 쉽진 않지요. 그러니 일단 피난민들과 함께 온 브라만인 당신네들과 손을 잡고 인도 북부에 임시 정부를 만들어서 성좌 종말자에게서 도망치는 사람들을 모으고 저항해야만 합니다.”
“하, 하지만 그게 쉽게 될지……. 게다가 당신네 헌터가 실패하면…….”
“그래도 얻는 건 있습니다. 최후까지 성좌 종말자에게 저항한 인도 정부, 국민들을 지킨 자들이라는 타이틀이 있지요. 아무튼 이 제안은 당신뿐만 아니라 현재 피난민 캠프에 참여하고 있는 다른 브라만님이나 크샤트리아님들에게 제안할 생각입니다. 잘 생각해 보시지요.”
하지만 쉽게 승낙 못하는 브라만 수바시시였다.
물론 제안은 좋긴 했지만 문제는 결국 외세라 할 수 있는 자들의 손에 떠밀려서 된 만큼 그들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는 거였다.
한때 영국의 지배를 받던 식민지 국가 출신이기 때문에 심리적인 영향이 없을 수 없었는데, 제33근위대장은 그의 고민을 눈치채고는 말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인도라는 나라의 판은 이미 깨졌습니다. 그곳의 성좌님들은 거대한 재앙 앞에 도망쳐 버렸고, 신의 뜻을 따른다는 이유로 지배하던 브라만과 크샤트리아님들 대부분은 나라를 떠나거나 책임을 방기했죠. 그 절망감은 아마 브라만님이 더 잘 아실 거라 봅니다. 그리고 이건 혼자서 일어날 수 없는 그런 피해이지요.”
“…그럼 납득하란 말입니까? 또다시 외세에 지배당하는 걸?”
“그렇기도 합니다만… 그래도 지금 손잡으면 혼자 일어설 수 있는 기회가 생길지 모릅니다. 최소한 명분과 간판은 챙기니까요. 하지만 만약 우리 대장님이 실패한 다음, 가만히 있다가 타국의 군대나 국가가 국민들을 거두게 되면… 그땐 이제 나라와 민족이 사라질지도 모릅니다. 아마 역사책 한구석에 글자로나 남겠죠.”
“끄으으으응…….”
수바시시는 부정할 답변을 생각해 낼 수 없었다.
그래, 이 세계 속에서 다른 나라들의 탐욕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으리라.
지금 다소 이들의 입김에 시달리더라도 이 제안을 받아서 뭉치지라도 않으면 그의 말대로 이후엔 더 큰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
“특히… 옆에 있는 게 저… 중국 공산당이잖습니까? 걔네들이 어떤 놈들인지는 이미 아시죠?”
“…알다마다! 섭리를 모르고 탐욕에 미친 짐승들 아닌가?”
“우리가 빠지면 그럼 누가 먼저 올까요?”
“…윽!”
국경 분쟁, 해양 영토 분쟁과 자원 분쟁으로 지난 수십 년간 여러모로 충돌이 있었던 만큼 모를 리 없는 브라만 수바시시였다.
공산당 정부라면서 그 누구보다도 자본주의를 사랑하는 나라이자, 성좌 진황의 공격을 받을 만큼 생물 환경이나 순환에 대해선 일절 생각 안 하며, 자국 중심주의 법칙과 탐욕을 앞세우고 문화까지 집어삼키려는 국가.
당장은 유성원에 의해서 명받은 ‘용봉왕의 중국’이라든가, 성좌 진황의 군대가 인도에 와 있어서 얌전히 있지만 그들이 떠나면 일어날 일은 상상도 안 된다.
“걔네한테 티베트랑 위구르족이 어떻게 탄압받았는지도 아시죠?”
“알겠네! 알겠어! 자네들 하라는 대로 하겠네!”
“진작 그러셨어야지요.”
그렇게 더 이상 안 좋은 상황에 대한 생각을 참을 수 없던 수바시시는 항복을 선언하고 제33근위대장이 하자는 대로 하기로 하였다.
제33근위대장은 완벽하게 유청 경의 계획대로 된 것에 대해 속으로 감탄하면서 곧바로 그들이 해야 할 일에 대한 지령을 내려 주었다.